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43
43화 그때까지만
“들어오게.”
센터장실에 들어가니 비서 최지연이 차를 내줬다. 옛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처음 이 세계에 와서 센터에 도착했을 때도 그녀가 커피를 대접했으니.
“오랜만입니다.”
“……?”
그녀는 처음 보는 인간이 다시 보는 것처럼 말을 걸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의문은 내가 가면을 벗어 탁자 위에 벗어 둠으로서 풀렸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옷도 멀쩡한 걸로 잘 입고 있고, 머리도 자른 상태였지만.
최지연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눈이 커졌다.
“그쪽이 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최지연은 신기하다 여길 뿐 깊게 캐묻지 않았다. 애초에 내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냉랭한 인상에 걸맞은 태도였다.
영감은 의자에 한쪽 다리를 올린 채 앉았다. 차를 한 잔 홀짝거린 후 영감이 물었다.
“그래서, 왜 이제 와서 각성자 테스트 같은 걸 받고 그러나? 까딱하다간 측정실이 반파될 뻔했다고. 자네 그 장비들이 다 합쳐서 얼만지 알기나 하나? ”
“과장이 심하시네요. 손대중했는데.”
“손대중을 너무 대충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노려보니 크게 할 말은 없었다.
내 예상보다 위력이 강했던 건 청진명의 기술을 보고 얻은 영감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파도를 타고 잽싸게 움직이며, 고속으로 흐르는 격류를 칼날처럼 깎아 싸우는 그의 모습을 보니. 나도 비슷한 걸 한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힘을 쓸 기회가 없다가 드디어 사용해 봤지만, 청진명이 가진 마력보다 내가 가진 내공이 더 위력적이었다. 결국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부풀려진 결과가 나올 뻔했다.
샌드백이 좀 박살 나긴 했는데, 그 정도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피해로 끝난 셈이었다.
“테스트는 당연히 라이센스 갱신을 위해 받았습니다.”
“갱신? 자네 애초에 라이센스가 없잖나.”
내가 주하린에게 받은 X급 라이센스 카드를 보여 주자, 카드를 살펴보던 노인이 입을 떡 벌렸다.
“보증인은 그렇다 치고, 발급 기관은 왜 대현으로 돼 있나? 어디서 이런 거물을 끌어들인 거야?”
“조금 연이 닿아서.”
“거참.”
영감이 손짓하자 비서인 최지연이 어떤 장치를 하나 가져왔다. 카드가 들어가는 장치였다.
“이건 내가 처리해 놓지. 몇 등급이 좋나? S급?”
“던전도 못 가는 인간이 S급 달아서 뭐 합니까? 그냥 적당히 해 주시죠.”
“음……. 알겠네.”
영감이 기계를 조작하다가 물었다.
“그런데 그 던전도 못 가는 인간이 라이센스라니. 자네 설마 가디언을 염두에 두고 있나?”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러자 영감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자, 자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가디언은 자네 생각처럼 막 나가는 집단이 아니야. 빌런이라고 해서 막 죽여도 되는 애들이 아니라고. 생포, 제압이 제일 우선이란 말일세.”
“…영감이야말로 날 어떻게 생각하는 겁니까?”
“피에 굶주린 짐승?”
그건 크나큰 오해였다.
내가 몇몇 트러블에 휘말리긴 했어도 단 한 번도 내 스스로 힘을 사용하겠다고 나선 적은 없었다. 누군가와 마찰이 있을 때도 상대가 먼저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 이상 손을 대지 않았다.
하긴. 센터장 최강현은 내가 이 세계로 돌아온 직후에 처음 만난 인간이었다. 그때의 날선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면 선입견이 생길 만도 했다.
“싸우지 않고 끝나면 그게 제일이지요.”
그런 내 대답에 의외라는 듯 영감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가디언이라…….”
영감이 수염을 매만지다가 물었다.
“그럼 자네, 차라리 날 좀 도와줄 텐가?”
“영감님을요?”
영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가디언에 소속되어서 조직 생활 하는 게 자네 성미에 어울릴 것 같진 않지?”
“그건… 뭐.”
“그럼 차라리 일 있을 때마다 나 좀 도와주는 프리랜서 활동을 하는 건 어떤가? 내 직속의 비밀 임무 집단인데, 검은 학이라는 뜻으로… ‘현학’이라고 부르지.”
“비밀치곤 너무 쉽게 말한 거 아닙니까?”
“자네 정도 되니까 말해 준 거지. 아무튼 여기 속한 멤버들은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몰라. 전원을 아는 건 나뿐이지. 어때. 자네도 구미가 당기지 않나?”
그건 확실히 마음에 드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탁자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물었다.
“근데 프리랜서는 수입이 불안정하지 않습니까? 가디언은 정규직이라고 들었는데요.”
“…참 나, 지금 돈이 문젠가?”
“문제죠.”
“알겠네. 이거 보게.”
영감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이게 자네가 가디언 신입으로 들어갈 때 받을 수 있는 초봉일세.”
“…신입이요?”
“왜? 그럼 경력도 없고 정체도 숨긴 인간이 신입이 아니면 뭘로 들어가나? 그리고 승진도 계속 막힐걸. 조직에 속한 이상 상사 눈치도 봐야 하고 정치도 해야 하지. 자네가 아무리 빌런을 한 손가락으로 쓸어버릴 힘이 있다 해도 그 공은 팀장의 몫이 될 거고. 자네는 그냥 일 잘하는 부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걸?”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그냥 겁주는 거 아닙니까?”
“자네 아직 헬조센 맛을 못 봤군.”
“헬조센?”
“아… 10년 전엔 이 말이 없었나? 하긴, 요즘엔 또 잘 안 쓰긴 하지.”
그때 영감이 다시 계산기를 두드렸다.
“자. 그리고 이건 ‘현학’에 들어와 자네가 임무 한 건 할 때마다 받을 수 있는 기본 착수금일세. 물론 일의 중요도나 공의 비중에 따라서 인센티브가 더 붙을 수도 있고.”
영감이 계산기 위에 써 놓은 숫자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왜 이렇게 큽니까?”
“그만큼 위험하고 중요한 일을 하니까, 확실한 보상을 주는 거지. 돈만큼 확실한 보상이 어딨나?”
하긴, 센터장 직속의 비밀 임무 집단이 하는 일과 가디언 말단 신입이 하는 일. 둘 사이엔 비교도 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결정하게. 가디언에 들어가서 지루한 일이나 하며 쥐꼬리만 한 돈 받을지. 아니면 내 밑에서 큰 일 하면서 화끈한 보상을 타 갈지.”
내가 가디언이 되려고 한 건 던전에 들어가 보상을 얻어 오는 헌터로 활동하기엔 하자가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 혼자만 마석을 못 구한다면 모를까, 그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마석이 망가지고 말기 때문에. 그럼 평생 혼자서 던전 돌 게 아닌 이상 언젠가 남들에게 들키고 만다.
그렇다고 혼자서만 돌 수도 없다. 협회에서 던전도 다 관리를 해서 일정 등급 이상은 권장 인원과 기준을 지키도록 제약을 거니까.
여러모로 정상적인 헌터로 활동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선택한 게 가디언인데, 센터장이 제시한 현학이라는 집단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영감도 내 체질에 대해 알고 있으니, 마석을 구해 오라든가 하는 임무를 시키진 않을 테니. 이왕이면 내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게 좋긴 하겠지.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센터장 최강현이 빙긋 웃었다.
“천천히 생각하고, 결정되면 말해 달라고.”
이미 어장 안에 들어온 물고기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 * *
길가에 서서 기다리던 클레어의 앞에 차를 세웠다. 조수석에 그녀가 올라타자 물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클레어가 고개를 저었다.
센터에서 각성자 라이센스 갱신을 마치고 곧장 클레어가 있는 곳으로 차를 몰고 왔다. 일정이 끝나 기다리고 있던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
집에 돌아갈 때까지 한마디도 없던 클레어가 마침내 입을 열고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아, 그거요?”
대답을 하려던 나는 영감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모쪼록 확실히 정해지기 전엔 남들에게 말하지 말게. 자네에겐 쉽게 말해 줬지만, 비밀 집단이라는 건 허세가 아니라서 말이야.’
결국 현학에 들어갈지 말지는 아직 고민 중이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디언에 들어갈 계획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클레어는 내가 가디언이 되기 위해 센터에 간 걸로 알고 있으니, 그런 방면에선 부정적인 대답을 해야 했다.
그녀는 자기가 물어봐 놓고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잘 안 됐어요.”
내 대답에 클레어가 잽싸게 고개를 휙 돌렸다.
“그, 그래요? 어쩌다 그렇게 됐대?”
“…왜 이렇게 목소리가 들떴죠?”
“아, 아닌데. 안 들떴는데.”
눈매를 좁히고 들여다보자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말을 돌리기 위해서인지 그녀가 다른 주제를 꺼냈다.
“일정 잡혔어요.”
“일정?”
“S급 던전.”
“아.”
S급 마석을 구하기 위한 여정. 그 막바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S급 던전을 공략했다고 해서 무조건 마석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는 법도, 그 획득한 마석이 팀의 막내일 클레어에게 돌아가리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이번이 아니라도 다음이 있다. 정말 손을 뻗으면 닿을 위치까지 와 있는 것이었다.
“축하해요.”
축하의 말을 건네도 클레어는 조금도 기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괴로운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불안한 건가? 처음으로 가게 될 S급 던전이 두려워서?
하지만 S급 마석을 구하기 위해 꼭 넘어야 할 관문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두렵고 불안한 마음과, 미뤄선 안 된다는 책임감이 충돌하고 있겠지.
마침내 클레어가 입을 뗐다.
“난……. 어떻게 해야 할지 자꾸 헷갈려요.”
“이해합니다.”
“당신 생각은 어떤데요?”
클레어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북돋기 위해 대답했다.
“언젠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잖아요.”
“언젠가, 반드시…….”
내 말을 되풀이한 클레어가 가슴 앞섶을 손으로 구기며 물었다. 나오지 않는 말을 간신이 쥐어짜 낸 듯한 목소리였다.
“내가… 잘해 나갈 자신이 없다고 하면요?”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아는 당신은 잘할 거예요.”
클레어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헌터였다.
기량이 뛰어난 청진명과의 대결에서 무승부를 가져온 것만 해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길드가 없어 정해진 팀도 인맥도 없었던 그녀가 그동안 무소속으로 헌터로 활동하며 S급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이 그 증거였다.
게다가 이미 숱한 S급 던전을 공략해 온 청진명의 팀이다. 거기에 그녀가 껴서 발목을 잡을 일은 없을 거다. 오히려 전력이 보강됐다면 보강됐지. 청진명도 충분히 그렇게 판단했으니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불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게 당신의 대답인 거군요.”
클레어가 고개를 숙였다.
그 태도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섣부르게 다가가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는 건 자신의 몫이다.
“알았어요. 그럼 나, 당신이 말한 대로 힘낼 테니까…….”
고개를 들어 올린 클레어는 왠지, 엉망진창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내 남편으로 있어 줘요.”
…그래.
그것도 정말, 그때까지만이다.
클레어는 아직 어리다. 나보다도 더. 도은이보다 언니라 해도, 결국 아직은 20대인 것이다.
게다가 인기도 많았다. 당장 훤칠하게 생긴 A급 헌터 정민성이 들러붙는 것만 봐도 그랬고, 친구 진호와의 술자리에서 녀석이 꺼냈던 말만 들어 봐도 그랬다. 얼마든지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의 곁에 있는 게 올바른 순서를 거치지도 않은 나 같은 인간이라는 건 안 될 일이다.
이미 많은 폐를 끼쳤다. 서류상으로 이혼 기록이 남아 있기는커녕, 전 국민이 우리가 부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니까.
거기에 내 탓이 없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어쩌면 내가 집에만 처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하다못해 이별만이라도 깔끔하게 해 줘야만 한다. 거기에 내 감상이나 미련이 끼어들 여지 같은 건, 정말 추호도 없어야 했다.
미루는 건 그때까지만.
그렇게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