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45
45화 버릇 하고는
센터장, 최강현.
그가 늙은 몸을 이끌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노쇠한 도시를 방문한 이유. 그것은 오랫동안 뒤쫓아 온 어느 ‘실험실’의 실마리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현재 헌터 업계의 규제는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세계와 경쟁하기 위해, 그리고 인류를 지키기 위해. 명분을 갖춘 채 각 길드와 기업은 각자 연구와 실험에 박차를 더해 갔고.
마침내 인륜을 저버리는 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최강현이 쫓는 이들도 그런 자들이었다. 인류 수호와 업계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기술을 악용하는 자들. 한정적인 자원을 소모적인 일에 낭비하는 불순물들이었다.
‘현학’의 멤버들을 다른 주요 지점으로 배치해 놓은 채, 최강현은 이 실험실을 습격했다. 불순한 자들의 은신처를 들쑤시며 그는 흰머리로 가득한 노인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기량을 보여 주었지만, 예상치 못한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랏빛을 띠는 무거운 안개. 그것에 닿은 몸이 급속도로 굳어 가기 시작했다. 피부를 타고 흘러 들어온 외부의 마력이 주도권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이 마력은……!’
석화石化의 저주.
마력에 이러한 저주를 담을 수 있는 개체라면 몇 개 정도 후보가 있다. 그러나 최강현의 마력을 억누르고 신체의 주도권을 빼앗을 정도로 농도가 짙은 마력을 가진 존재라면 하나뿐이었다.
‘메두사……!’
최강현이 마력을 끌어 올려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전성기가 지난 몸으로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고작해야 상태가 악화되지 않게 막는 게 고작이었다. 그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밀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최강현의 뒤로 한 남자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어왔다.
“그러게 왜 이렇게 못 살게 굴고 그래.”
최강현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백건영이, 이놈……!”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길드장, 백건영.
초대 길드장인 백건우의 동생이었다.
최강현은 백건영, 백건우 모두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단지 센터장과 길드장의 관계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오던 인연이었다. 셋이 모두 함께 목숨을 걸고 던전을 공략하던 시기도 있었다. 이제는 너무 오래 지나 버린 과거의 이야기였지만.
당시의 백건우는 별의 전사라 불리는 유명한 헌터였다. 동생 백건영은 그런 형을 동경하는 순수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백건우가 불의의 사고로 타계하고 백건영이 그의 뒤를 이어받아 길드장의 자리에 오른 뒤, 그는 변하고 말았다. 몸을 움직이지 않았는지 군살이 자리 잡았고, 눈매는 거뭇해졌다.
“아쉽게 됐수. 선배님이랑은 좋은 추억이 참 많았는데.”
“너……!”
“아차, 말을 길게 할 여유도 없으신가?”
분하지만 정확했다. 최강현은 이미 전력으로 마력을 활성화하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웠다.
“한번 둘러보니까 어때? 감개가 무량하지 않아? 엄청 많이 발전했잖아, 마석을 응용하는 방법 말이야. 이게 다 우리 자체 기술력이라고, 기술력.”
이곳은 거대한 실험장이었다.
몬스터의 사체에서 추출해 낸 특수한 기관들. 그 기관을 작동하게 만드는 마석. 그 조합에서 마석은 기존의 아티팩트에 사용되던 것과 달리 단순히 마력을 보존할 뿐인 저장장치가 아니었다. 마석이 담고 있는 특수한 마력 파장이 알맞은 기관과 만나 살아 있는 몬스터와 같은 기능을 재현했다.
거기까지 가능해지면 응용의 여지가 생겼다. 위력이나 범위, 혹은 장치의 무게와 크기를 다양하게 조절하며 상업성을 띄도록 개발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공교롭게도 ‘마도魔道학 무기’라 불렀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몬스터의 특성을 재현하는 무기가 국제 규약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너무나도 손쉽게 민간인을 학살할 수 있다는 점, 각성자의 마력을 오염시키는 점, 그리고 잘못된 실험으로 변이 몬스터를 탄생시켜 큰 재앙이 일어났던 사례가 이유였다.
“이런 짓… 협회에서 좌시할 것 같나……! 들키면 너 하나로 끝나지……!”
국제 헌터 협회.
이런 일선을 넘은 짓거리를 들킨다면 그곳에서 움직일 것이었다. 실험을 자행한 플레이아데스 길드를 해체시키는 건 물론이고, 다른 힘 있는 길드들도 감사 명목으로 압박을 가해 올 것이었다.
하지만 백건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변명거리나 들킬 리 없다는 자신이 아니었다.
“선배님, 이거 우리나라가 제일 느려.”
“뭐……?”
“이미 다른 나라는 다 해 먹고 있는 거라고.”
백건영이 드물게도 울분에 찬 목소리를 냈다.
“형님이 왜 죽었는지 알아?”
“건우는…….”
최강현이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믿음직한 후배였던 백건우가 고작 평범한 던전을 공략하다가 세상을 뜬 건 그에게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벌어진 일이라면 믿기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백건영은 그 사건을 계속해서 조사해 왔다는 것인가.
백건영에게는 긴 얘기를 할 시간이 없었다. 최강현이 뿌려 놓은 인간들이 길드를 사방에서 들쑤시고 있었다. 수습하러 가지 않으면 곤란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만 가 봐야겠네.”
백건영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그 후 백건영은 몇몇 부하에게 최강현의 감시를 맡기고 실험실을 빠져나갔다.
제아무리 현역에 가까운 관리를 해 온 노인이라 해도 메두사의 마력은 쉽사리 이겨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곧 죽을 노친네를 감시하는 것 정도는 손쉬운 일.
그런 그를 돕기 위해 누군가 침입한 것도 예상 내의 일이었다. 실험실에 남겨진 백건영의 부하들은 최강현을 미끼로 삼아 침입자를 유인하고,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철창을 떨어뜨렸다.
쿵!
철창이 떨어지자 남자가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반쯤 돌린 고개로 여우 가면이 엿보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미 철창 너머로 다량의 메두사의 독안개가 분사되고 있었다. 현역 시절 전설이라 불리던 최강현조차 몸에 닿자마자 간신히 저항했을 뿐인 극독.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남자가 저항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벌써 효과가 듣기 시작한 건지 남자의 호흡은 고르지 않았다. 손을 덜덜 떨며 저주에 저항하고 있었지만, 결국 시간 문제였다.
그 생각이 뒤집힌 건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
* * *
최강현은 자신을 찾아온 도율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해 줬다. 그러나 도율의 머릿속엔 대부분의 정보가 희미하게 흐려져 있었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진실은, 이 실험실이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비밀 실험실이란 사실뿐이었다.
이제야 많은 이야기가 맞물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어딘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하더라도, 도율의 머릿속에선 이미 모두 하나의 결론을 향한 부품이 되어 있었다.
도율이 이 세상에 돌아왔을 때, 동생은 죽을병에 걸려 있었다. 무림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손에 넣었지만, 동생의 병 앞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공을 집어넣어 동생의 몸을 좀먹는 마력을 지우려고 하면, 연약한 동생의 몸은 자그마한 내력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망가지고 말 것이다. 사신수 중 하나인 백호의 힘을 빌려 치유하려고 해도, 녀석은 메두사의 마력을 완전히 이겨 낼 수 없었다. 직접 마석을 구해 오고 싶어도 마력을 가진 몬스터들은 도율의 공격에 당하는 순간 그릇이 깨져 마석을 남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힘은 대체 무얼 위해 있지?
이곳에 온 이후로 계속해서 도율을 괴롭혀 온 질문이었다. 그래서 도율은, 차라리 이들의 정체를 알게 되어 기뻤다. 복수할 대상이 있는 거였다면, 응징해야 하는 존재를 찾아냈다면.
거리낌 없이 지금까지 무의미했던 힘을 해방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부터 해야 할 행동을 정하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봐, 결국 넌.
─제 버릇 남 못 준다니까.
소리 높여 깔깔 웃는 여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 도율은 모든 생각을 멈춰 버렸다.
기이잉─.
금속 막대가 떨리는 듯한 공명음이 들려왔다. 그 사이로 아주 낡은 톱니바퀴가 간신히 돌아가며 비명을 지르는 듯한 끼릭 소리가 끼워져 있었다. 도율이 끌어 올린 내공이 몸 바깥으로 빠져나갈 정도로 넘쳐 나며 내는 소리였다.
그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여우 가면이 완전히 갈라지며 땅 위로 떨어졌다.
“자, 자네! 가면이!”
최강현이 외쳤다. 도율의 정체를 숨겨 주던 가면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플레이아데스 길드 정도 되는 대형 집단과 적대하면서 얼굴을 보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율은 개의치 않고 싸늘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상관없어.”
“하지만……!”
그건 이 세계에서 도율을 처음 마주한 최강현조차도 본 적이 없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건 오랜 세월 피에 절여져 지내 왔지만,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기쁨에 마음이 풀어져 있는 도율이었다. 아직 현대의 행실이 어색할지언정, 적응해 새 삶을 살아갈 마음이 가득했던 시절의.
지금 그는 완전히 옛날과 같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찌릿해지는 살기를 거침없이 내뿜으며,
수라修羅. 그 별명을 얻게 된 계기.
스승의 죽음을 변명 삼아 폭력을 휘두르던 시절의 도율이었다.
“오늘 내 얼굴을 본 놈들은 모두 죽을 테니까.”
“……!”
도율이 안개 속을 걸어 나갔다.
안개에 담긴 메두사의 마력, 석화의 저주가 도율의 몸을 침투해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런 건 도율에게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었다. 체내에 파고든 마력은 고속으로 회전하는 내공에 짓눌려 사라지고 말았다.
우지끈.
도율은 너무나도 손쉽게 철창을 뜯어 버리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이곳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대로 선 채로 굳어 서서히 죽어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율은 아무런 영향도 없어 보였다.
“젠장… 다른 것도 다 꺼내 버려!”
누군가 외치자 건물 내에 붉은 사이렌이 울리며 커다란 진동이 느껴졌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무언가가 육중한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였다. 도율은 그 무언가를 천천히 기다렸다.
마침내 나타난 건 우스꽝스러운 생김새를 한 한 마리의 몬스터였다. 사족 보행을 하지만 두 다리로 설 수도 있었고, 팔다리를 제하고도 꼬리나 촉수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날개가 되다 만 무언가에 가시인지 털인지 모를 등껍질까지.
최강현이 그 생물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합성수까지……!”
그것의 목 위에는 사자와 같이 갈기가 달린 머리가 얹혀 있었다. 놈은 지나오는 길에 연구원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를 손으로 낚아채 허리 위쪽을 와그작 씹어 버렸다.
놈의 염소 같은 눈동자가 붉게 번득였다.
딱히 이들도 저 괴물을 온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합성수는 다른 모든 이들을 제치고 도율의 앞에 섰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생명체를 찾아내는 몬스터의 본능. 인간들이 의지할 우두머리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꼴을 지켜보는 것은 놈의 육신에 새겨진 즐거움 중 하나였다.
최강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각각 단일한 개체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까 없을까 한 몬스터들을, 괴상할 정도로 하나의 몸뚱이에 이어 붙인 형태. 그런 것이 숨을 쉬고 살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생명체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 어떤 헌터가, 공략대가 오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병기가 된다. 협회에서 몬스터와 관련된 실험을 금지한 이유 중 하나.
최강현이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자네는 일단 도망치게!”
이곳의 진실을 바깥으로 전할 사람이 필요했다. 석화의 저주에 당한 자신을 챙기며 저 괴물로부터 쫓기는 건 둘 다 죽자는 소리였다.
하지만 도율은 혼자 도망치지도, 최강현을 챙기려 하지도 않았다.
투학!
그때 합성수가 질겅질겅 씹던 고깃덩이를 도율의 발치에 뱉었다. 마치 포탄처럼 날아온 살점이 바닥에 부딪쳐 피를 흩뿌렸다. 도율의 얼굴에도 핏방울이 번졌다.
“버릇하고는.”
도율이 인상을 쓰고 주먹을 내질렀다.
그 주먹에 닿은 건 합성수의 뱃가죽이었다. 고무보다 질긴 가죽과 강철보다 단단한 근육이 그 한 방에 모두 조각이 되어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냈다. 그 위와 아래를 이어 주는 건 옆구리에 남은 몇 안 되는 근육뿐이었다.
합성수가 그대로 몸을 기울여 쓰러졌다. 쿠웅 하는 커다란 소리.
이곳을 지키고 있던 백건영의 부하들이 그 광경을 보고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들의 상식선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율은 그런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도율의 등 뒤에선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합성수가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초재생이다!”
최강현의 외침 소리. 합성수는 언제 쓰러졌냐는 듯 건재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전 그가 발견한 미노타우르스는 머리가 날아가면 활동을 멈췄다.
그러나 연구에 진척이 있었는지, 이 합성수는 몸뚱이가 대부분 흩어지고도 복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쩌면 머리를 날리더라도 재생하는 것 역시 가능할지도 몰랐다.
도율은 별로 시간을 끌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가 내공을 가다듬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곁들이는 무공과 달리, 기공은 내공을 한 번 정제할 필요가 있었다. 기의 흐름에 의지를 담아 행하고자 하는 일에 닿을 수 있도록.
그의 무공에는 이름이 없었다.
스승은 자신의 이름이라도 붙여 보면 어떻겠냐 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내뱉는 말은 언제나 짧았다.
“흑응공黑凝工.”
손바닥 위로 검은 점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