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47
47화 책임지게 해 줘요
‘…쉽잖아.’
보스 몬스터와 전투를 치르던 클레어가 문득 생각했다.
던전의 보스 몬스터는 거대한 거미였다. 녀석은 산성을 띈 점액을 쏘거나 끈적한 거미줄을 설치해 그 위를 이동하거나 먹잇감을 붙잡으려 했다.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새끼 거미들 역시 제때 처리하지 않으면 곤란해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재빠른 공략대 멤버들은 점액이나 거미줄에 당할 만큼 느리지 않았고, 각자 주변에 있는 새끼 거미들을 여유롭게 해치우고 올 정도로 개인 기량이 뛰어났다. 클레어 역시 그중 하나였다.
각자가 맡은 바를 해내며 순조롭게 진행되는 던전 공략. 앞서 청진명이 겁을 줬던 것치고는 지나치게 긴장감이 없었다.
S급 내에서도 수준 차이가 나는 거라면, 이 던전은 A급에 가까운 던전인 걸까. 아니, A급 던전에서도 이토록 무난하게 공략을 진행하기란 쉽지 않았다. 팀의 기량 차이를 생각하더라도.
“방심하지 마!”
청진명의 외침이 꽂혔다. 평소의 모습과 동떨어진,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그 말에 클레어가 검을 쥔 손아귀에 단단히 힘을 넣었다. 괜히 S급 던전일 리가 없다. 언제 어디에서 숨겨진 요소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던전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사소한 방심과 실수는 죽음으로 직결되는 치명적인 잘못이었다.
그때 거미의 머리에 있는 뚜껑 같은 외골격이 갈라지며 무언가가 드러났다. 사방의 풍경을 볼록하게 반사하는 거울 같은 무언가였다.
“…눈?”
그것이 거미의 눈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화악, 하고 수면 위에 반사된 풍경이 파문을 일으키는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던전 공략대는 모두 그 반향에 노출되어 움직임을 멈췄다. 무기를 손에서 놓치고 쓰러지는 이도 있었다.
클레어는 역시 머릿속을 깊게 짓누르는 수마睡魔에 시달렸다. 마지막 저항으로 칼을 땅에 꽂고 몸을 기대어 버텨 보았다.
그러나 이윽고 쏟아지는 잠을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 * *
“여기는…….”
클레어는 어느새 새까만 공간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곳에 오게 된 건지 기억이 분명하지 않았다. 단지 평범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는 우선 걸었다.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알 수 없는 이곳을.
나아갈수록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향을 돌려도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를 향하는가와 무관하게, 걷는다는 행위만이 의미를 가지는 공간인 것처럼.
‘언제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클레어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녀를 뒤로 내동댕이쳤다.
갑작스러운 힘에 그녀는 저항하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평소에 육신을 단련해 온, 그리고 마력으로 강화하고 있는 그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몸이 팽개쳐진 것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
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눈앞에 누군가 균열 너머로 잡아먹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누군가의 모습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챈 클레어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그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도율이었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 이미 한 번 벌어졌던 일이 왜 재현되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클레어는 곧바로 털고 일어나 도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이 닿기 직전, 균열이 그를 완전히 삼켜 버렸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
이곳은 고요했다. 그렇기에 클레어는 자신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전신에서 맥박이 느껴졌다.
클레어가 뻗은 손을 움켜쥐었다. 그 손 안에 쥘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너 때문에.”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클레어가 뒤를 돌았다.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는 건 균열 너머로 사라진 줄 알았던 도율이었다.
“하루아침 사이에 모르는 세상에 떨어져서, 사람 죽이는 법을 배웠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어. 손에 피를 묻히고 아무렇지도 않은 인간 따위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
“…….”
“내 인생은 너 때문에 망가졌어.”
그 말은 클레어가 항상 상상해 왔던 말이었다. 도율은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었지만, 그녀가 두려워했던 말.
그것이 선명한 도율의 목소리로 전해지고 있었다.
“널 구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10년이나 사라질 일은 없었을 거고.”
“……”
“도은이가 매니저 일을 하다가 병에 걸려 앓아 눕는 일도 없었을 거야.”
“…….”
“모두 너 때문이야.”
클레어를 탓하는 도율의 말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너만 없었으면…….”
검은 공간은 어느새 따뜻한 가정의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그곳엔 흉터 하나 없는 도율이 구김살 없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도은 역시 함께였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매니저 업계에 뛰어든 지금의 도은이 아니라, 대학에 다니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그 둘을 따뜻하게 지켜보는 그들의 아버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들 가족에 있어 외부인이었으니까. 이 모든 사건이 없었다면 엮일 이유조차 없는, 완전한 외부인.
“…알아요.”
클레어가 씁쓸하게 인정하자, 도율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사라져 버려, 내 인생에서.”
그 말에 클레어가 벌어진 입을 닫았다.
눈앞의 도율은 그래 봤자 환상에 불과하다. 아무리 그와 닮은 얼굴, 그와 닮은 목소리를 흉내 낸다 하더라도 결국은 가짜다.
하지만 진짜 도율이라고 해서 저 환상과 다른 말을 할까. 환상이 내뱉은 말엔 조금의 거짓이나 과장도 없었다. 저 말이, 도율이 클레어의 마음을 신경 쓰기 때문에 말하지 않고 있는 그의 진짜 속마음은 아닐까.
아니, 사실은 자신도 이미 눈치챈 주제에 모른 척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도율은 이미 말했다. 마석을 구하고 나면 정해진 이별을 미루지 말고 받아들이자고.
그런 생각에 잠기자, 그녀의 몸 표면이 어둡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의 클레어였다면, 그녀는 자신이 필요하지 않은 자리라면 조용히 비켜섰을 것이다. 흘러가는 대로. 눈에 띄지 않도록. 미움받지 않게 처신하는 것이 몸에 밴 그녀였다면.
하지만 지금 그녀는 고집을 부릴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는 게 더는 어색하지 않았다. 그건 모두, 곧잘 농담을 던지곤 했던 누군가에게 거리낌 없이 열을 올려 봤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건 아니죠.”
“뭐…….”
도율의 환상이 단호한 그녀의 말에 어물거렸다. 그에 개의치 않고 클레어가 질문했다.
“나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사라지라고요?”
“…그래.”
“반대죠.”
클레어가 한 걸음 내디뎠다.
“내가 책임을 지는 게 맞는 거잖아요.”
“…….”
도율의 모습을 한 환상이 당황한 얼굴을 보이며 물러섰다.
클레어가 굳은 얼굴로 다짐을 내뱉었다.
“내가 당신이 잃은 모든 걸 되찾을 수 있도록…….”
아니. 이 말을 하면서, 그런 굳은 얼굴은 어울리지 않았다. 클레어는 표정을 풀어 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에 들어 있는 정답은 조금 낯부끄러워서, 하지만 눈앞의 상대가 진짜가 아니라면 연습 삼아 꺼내기 딱 좋아서…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클레어는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끌어 올렸다. 처음 지어 보는 자신만만한 표정이어서 영 어색했다. 그래도 이제부턴 익숙해질 생각이었다.
“책임지게 해 줘요.”
그 말은 들은 도율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클레어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몸에 물든 어둠이 어느새 번진 빛에 지워져 자취를 감췄다. 그녀의 주위로 작은 빛이 짧게 퍼지고 있었다. 그 빛의 근원을 찾아 그녀가 시선을 내렸다. 손이 묵직했다.
그녀의 손에 익숙한, 제법 오래 함께해 온 검이 쥐어져 있었다.
검의 이름은 성검 듀란달.
이명은 꺾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불굴.
마음속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지금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전 도율이 가르친 그대로 코어에서 뻗어 나간 마력이 정수리를 지나 몸을 한 바퀴 돌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은 마력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마력이 검신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그리고 그 또한 다시 클레어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흡사 검조차 몸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감각.
이전처럼 폭발적인 빛의 뻗어 나감은 없었지만, 검 주위에 휘감긴 금빛 아지랑이는 무엇이든 베어 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우웅─.
그 떨림이 전해졌다.
그녀가 검을 쥐고, 들어 올려,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거대한 유리가 깨지는 소리. 환상을 깨뜨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현실로 돌아왔다. 그런 그녀가 베어 낸 건, 거대한 거미의 눈 중 하나였다.
키에에엑─!
듣기 싫은 비명 소리가 그녀의 귀를 괴롭혔다.
‘…상황은?’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멤버들은 모두 정신을 잃은 채였다. 새끼 거미들이 그런 그들을 거미줄로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새끼 거미라고 해도 실제로는 대형견만 한 크기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모두 끝장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보스, 여왕 거미는 그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것은 눈동자로 다른 멤버들을 눈에 담느라 다른 행동을 일절 취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반대로, 다른 눈들을 베어 내면 동료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여왕 거미 역시 그 사실을 아는지 새끼 거미들을 불러 모았다. 거미줄 작업을 하던 새끼 거미들은 물론 둥지의 주위에 있던 수많은 새끼 거미들까지 총동원되어 클레어를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보스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수족으로 부리는 몬스터가 많다고 해도, 이런 물량전이라면 그녀에게 가장 자신 있는 상황이었다.
클레어가 검을 휘둘렀다.
* * *
“…이걸로 잘 알았지? S급 던전에선 무슨 상식을 벗어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제일 늦게 일어난 놈이 뭔데 잘난 척이야!”
“아악!”
송민아가 청진명에게 관절기를 걸었다.
클레어가 동료들을 모두 깨우고 난 후에는 이전과 같이 손쉽게 보스를 처치할 수 있었다.
이번 던전 공략에서 가장 특이했던 점은 역시 전원을 한 번에 잠재운 즉발 현혹 마법이었다.
원래 이런 마법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가 조그만 충격에도 깨어나기 쉬워 위협으로 여기기 어려웠다. 숙련된 헌터라면 원래 체내에 보유한 마력만으로도 방어가 가능해야 했다.
이번 경우는 이례 중에서도 이례였다.
“우리 막내, 고생 많았어!”
송민아가 클레어를 격려했다.
그녀가 없더라도 청진명의 팀이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클레어가 있기에 별다른 피해 없이 깨어난 건 사실이었다. 말 그대로 최고의 활약이었다.
공략이 완료된 후 멤버들끼리 의견을 모아 본 결과, 환상 속에서 다들 각자 가장 망설이는 것에 대한 딜레마를 겪고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서로 공유하진 않았지만, 그 꺼려지는 느낌만은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다.
‘의외인 건…….’
클레어는 청진명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다. 그는 송민아의 관절기에 당한 부분을 문지르고 있었다.
공략 당시, 클레어가 눈을 베어 내자 다른 멤버들은 잠시 정신을 못 차리다가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전투에 합류했다. 그러나 단 한 명, 청진명만은 오랫동안 평정을 잃고 열외되어 있었다.
평소의 행실로 보면 그녀보다도 먼저 환상 따윌 깨부수고 나올 것 같았는데. 그 의외의 모습을, 팀원들은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모두가 모른 척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청진명이 공략을 완료하고 얻은 보상을 나열했다. S급 던전답게 호화로운 전리품투성이였지만, 클레어를 포함해 다른 이들도 크게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마석이 나왔을 땐 클레어의 태도가 완전히 뒤바뀌는 걸 볼 수 있었다.
“S급 마석도 하나 나왔네.”
“…….”
클레어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녀는 오늘 막 첫 던전 공략에 참가한 막내 중의 막내였다. 그런 그녀가 선배들을 제치고 하나뿐인 마석을 달라고 선뜻 말을 꺼내는 건 눈치 보이는 일이었다.
그런 클레어의 모습을 곁눈질하던 송민아가 운을 띄웠다.
“오늘 제일 활약한 게 막내지?”
그러자 다른 팀원들도 호응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제일 먼저 깨어나서 다른 사람들 다 깨웠으니까.”
대답이 없는 자도 있었지만, 원래 말수가 적은 건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뿐이었다. 불만은 없다는 태도.
팀의 분위기를 살핀 청진명이 결정을 내렸다.
“그렇댄다.”
“…그 말씀은.”
“너 해라.”
청진명이 클레어에게 마석을 건넸다. 클레어는 그것을 양손으로 받아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길었다.
도은이 병에 걸려, A급 헌터였던 그녀가 S급으로 승급하고 팀을 구해 마침내 마석을 구하기까지. 다른 이들에 비해 비교도 되지 않는 빠른 성장이었지만,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면 늘 답답할 뿐이었다.
그 여정의 종지부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감사합니다.”
클레어가 고개를 숙여 모두에게 감사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