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5
5화 그냥 칼 대니까 잘만 썰리던데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실제로 이혼 서류 낸 건 아닌 우리 아빠가 언니랑 재혼할 수도 없고, 나랑 언니는 같은 여자니까 동성 결혼은 불가능하고.”
“…그래.”
일단 나는 받아들였다. 동생을 살리기 위한 거라면 S급 헌터와 결혼 정도는 할 수도 있다. 내 동의가 없었다는 점이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런데 난 무려 10년이나 실종 상태였잖아. 그 정도면 진작에 죽은 사람 취급당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사람이랑 혼인 신고서 써도 되는 거야?”
“그 부분은 S급 헌터의 힘으로 알아서 잘.”
하긴. A급도 아니고 S급 헌터면 인류 차원에서의 중요한 자원이다. 이거 통과 안 시켜 주면 다른 나라 망명하겠다고 협박해서 특별법이 뚝딱 만들어져도 이상할 거 없다.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는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그렇게 되었다는 건 결국 가능했다는 뜻이니까.
한 가지 더 의문인 건 왜 S급 헌터인 클레어 씨는 이 일을 받아들였냐는 거다. 나야 동생이 죽게 생겼으니 그렇다 치지만, 클레어 씨는 혈연상으로 남남이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하는 건 나보다 더 어려웠을 텐데.
“…솔직히 말하면 도율 씨가 나타날 줄은 몰랐어요.”
그렇다. 난 10년 동안 실종된 상태였다. 던전과 게이트가 터져서 몬스터와 헌터가 있는 사회에서 10년의 실종은 사망이란 단어와 동의어였다.
물론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은 내가 살아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족의 희망. 제3자의 눈으로 보기엔 누가 봐도 사망이었다.
그러니 호적상으로, 행정상으로 혼인신고서를 제출해도 실제로 결혼 생활을 하는 건 아니다. 요즘 시대에 이혼은 흠도 아니라는 말도 있고. 아니면 S급 헌터는 혹시 이혼 기록도 지울 수 있나?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내가 돌아와 버린 거다.
…내가 나빴나?
“아. 무, 물론 그렇다고 도율 씨가 무사히 돌아온 게 나빴다는 뜻은 아니고요.”
클레어 씨가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물었다.
“어쩔 수 없죠. 그럼 이혼할까요?”
“네?”
“그건 안 되지!”
도은이가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거의 클레어 씨에게 달라붙어 있는 상태였다.
“하긴. 아직 치료가 남았으니…….”
적어도 클레어 씨가 S급 마석을 구해 올 때까진 이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건 둘째 치고. 난 언니가 진짜 내 새언니 된 게 너무 좋단 말이야. 이걸 무르자니, 난 반대야.”
“너 때문에 하루 아침 사이에 처음 보는 남자랑 부부 사이가 된 네 새언니 생각 좀 해라.”
“그것도 그렇네.”
동생이 나를 노려봤다.
“오빠. 언니한테 손대면 죽는다?”
아내한테 손대면 죽는다는 소리나 들었다.
“알았다, 알았어. 일단 정리하자고. 필요한 일이었고, 당사자들은 모두 동의한 걸로. 그리고 적어도 도은이가 완치될 때까진 유지한다. 클레어 씨도 괜찮으신 거 맞죠?”
“네.”
이걸로 이야기는 마무리됐다.
내가 유부남이라니. 이세계에 가기 전에도 변변한 연애 한 번 해 본 적 없었고, 거기에서도 연애를 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전혀 실감 나지 않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앞으로도 실감할 일은 없겠지. 이건 어디까지나 동생을 위해 마석을 수급하기 위한 계약 결혼이니까. 목적을 달성하면 파기하면 그만이다.
클레어 씨는 미인이었다. 보기 드문 외국인이지만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희고 투명한 피부에 옅은 백금발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이런 사람의 남편이 되는 건 남자라면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을 거다.
그래도…….
‘좋아하면 못 쓰지.’
클레어 씨는 내 동생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 그걸로 내가 덕을 보려고 하는 건 오빠 자격이 없는 거다. 가능한 폐 끼치지 않고 지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근데 오빠 이제 뭐 할 거야?”
“나? 글쎄.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그럼 내가 직업 소개해 줄게.”
“…직업?”
난 복학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래 난 대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금세 깨달았다. 10년이나 실종된 녀석이 대학을 계속 다닐 수 있을 리가 없다. 진작에 제적당했겠지. 그럼 수능부터 다시 봐야 하나?
“수능은 뭔 개소리야. 정신 차려. 오빠 30대야. 일해야 하는 나이라고.”
“아…….”
제 20대가 어디 간 거죠?
젠장. 이왕 돌려보내 줄 거면 10년 후가 아니라 하루 뒤로 보내 주지.
대학도 안 나온 내가 지금 일을 구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지? 지난 세월 내가 한 거라면 사람을 팬 거밖에 없었다. 그건 그쪽 세상에서나 밥 벌어 먹을 수단이었지, 여기선 그냥 콩밥 먹을 범죄 행위다.
게다가 싸움이라면 지긋지긋하다. 그놈의 끝이 없는 은원의 연쇄. 애초에 시작을 하지 않는 게 옳은 선택이다.
“상하차라도 해야 하나?”
“매니저 해.”
“매니저?”
의외의 말이었다.
“우리 언니 말이야. 내가 병원에서 신세 지느라 아직도 매니저를 새로 못 구했어. 서류로 가능한 건 내가 대신 처리한다 쳐도 현장 뛰는 건 절대 못 하게 하더라고. 근데 매니저가 책상 앞에만 붙어 있는다고 굴러가는 직업이 아니야. 그래서 나 대신 언니 옆에 붙어서 수발들어 줄 사람이 하나 필요하거든?”
“내가 할 수 있을까?”
“쉬워. 모르는 건 나한테 물어보면 되고. 되도록 간단한, 몸 쓰는 일 위주로 시킬 테니까.”
“쉬운 거면 왜 사람을 못 구했는데?”
“그야 당연히 우리 언니한테 개수작 안 부릴 놈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렇지.”
그런가? 클레어 씨의 외모를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하지만 연예계에서도 여배우 매니저로 남자들이 문제없이 잘하지 않나?
“자세한 건 설명하기 좀 귀찮고. 아무튼 은혜 갚는다 생각해. 여동생의 은인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는데 힘 좀 써야지?”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은원이니 뭐니 하는 건 넌더리가 나지만, 받은 은혜는 잊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기도 했으니.
“알겠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좋아.”
도은이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시간이 지나자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병실로 찾아오셨다. 원체 점잖으신 분인데, 병원에서 뛰지 말라는 주의를 가볍게 무시한 듯 턱 끝까지 숨이 찬 모습이었다.
10년 만에 뵙는 아버지의 얼굴은 조금 주름이 늘어 있었다. 아버지도 10년만에 보는 내 모습을 살피시는 듯했다.
“도율아.”
“예.”
아버지가 날 꽉 끌어안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양팔로 내가 실존하는 걸 확인하는 것처럼.
숨이 졸릴 것 같은 압박에 내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힘은 여전하시네요.”
“요리사는 팔 힘이 생명이다.”
“그렇긴 하죠.”
아버지는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지냈냐는 말은 묻지 않았다. 질문은 단 한 가지.
“밥은 먹고 다녔냐?”
“당연하죠.”
“그래야지.”
그제서야 아버지가 나를 놓아 주었다.
“저녁 아직이랬지? 밥 한 끼 할까.”
“좋죠.”
“클레어 씨도 어떠십니까.”
“…저요? 저는…….”
클레어 씨는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좋겠다! 나도!”
“도은이 넌 병원 밥 먹어야지.”
“치사하게 나만 빼놓고…….”
도은이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환자는 얌전히 병원에서 주는 밥을 먹는 게 맞긴 하지만, 아까 얘 짜장면도 먹고 있었는데 상관 없는 거 아닌가?
그렇게 우리 세 명은 차를 타고 집으로 이동했다.
“아버지 차 바꿨네요?”
“네 동생이 사 줬다.”
“도은이가요?”
“걔 돈 잘 번다.”
“진짜요?”
“괜히 S급 헌터 매니저겠냐.”
그 S급 헌터가 뒷자리에 타고 있다.
동생이 돈 잘 번다는 얘길 들으니 좋으면서도 조바심이 났다. 왠지 장남으로서의 역할을 빼앗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10년의 공백이 느껴졌다.
“밥은 제가 만들게요.”
“네가?”
아버지가 곁눈질로 물었다.
“저 요리 잘하잖아요. 잊으셨어요?”
“잘하긴.”
아들에게 하는 말 치곤 매몰차지만, 그럴 만도 했다. 아버지는 요리사였다. 내가 요리를 시작한 것도 그게 계기였고. 그리고 아버지 눈엔 내가 애송이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싫으세요?”
“아니. 한번 해 봐라.”
아버지가 차를 세운 곳은 내가 모르는 동네였다. 당연하지만 이사도 한 것이었다.
“실례합니다.”
손님으로 방문한 클레어 씨가 집에 들어가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진짜 인사를 하고 싶은 건 나였다. 굉장히 생소했다.
부엌 위치부터 냉장고 구성물까지 낯설기 짝이 없다. 가만히 서서 얼타는 나를 보며 아버지가 실실 웃으며 물었다.
“도와주랴?”
“……됐습니다. 거실에 가서 티비나 보고 계세요.”
뭔가 대단한 걸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냉장고 재료를 보고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버지는 요리사답게 냉장고에 처음 보는 식재도 구비해 놓으셨지만, 아마추어인 내가 그걸 소화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무난한 찌개 종류나 해야 하나? 김치찌개에 필요한 재료는 모두 있었다. 고기도 있고, 한국인 냉장고에 김치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이건… 돼지고긴가?”
돼지고기 뒷다리살로 보이는 고기였다.
쌀도 앉히고 고기도 썰고 물도 끓이자 부엌은 그럴싸한 냄새와 소리로 가득해졌다. 요리는 오랜만이었지만 습관은 남아 있었다.
“어떤 요린가요?”
부엌에 다가온 클레어 씨가 물었다.
그제야 떠올렸다. 김치찌개는 전형적인 한식인데, 이 외국인 아가씨 입맛에도 맞을까?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김치찌갠데, 혹시 괜찮아요?”
“괜찮아요. 대신 부탁이 있어요.”
“부탁이라고요?”
놀랐다. 클레어 씨가 내게 부탁할 게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뭔데요?”
“그…….”
뜸 들이던 클레어 씨가 도마 위의 김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치는 씻어서 주세요.”
“네?”
부탁하는 클레어 씨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피부가 희어서 그런지 작은 변화도 크게 두드러졌다.
“아, 예. 그래 드리죠.”
“아, 하지만 티 나지 않게 부탁드려요. 겉보기엔 다른 게 없도록…….”
“김치를 물에 씻고 어떻게 티 안 나게 합니까?”
“…케첩이라도 뿌려서?”
그게 티가 안 날 거라고 생각하나. 게다가 김치에 케첩이라니, 이건 또 뭐 하는 조합이야?
“무리해서 먹을 필요 없어요. 그냥 남겨요.”
“…하지만 아버님 앞에서 김치도 못 먹는 외국인처럼 굴 순 없잖아요.”
“아, 아버님?”
의외의 단어에 내가 되묻자 그녀가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제가 뭐 틀린 말 했어요?”
“…아뇨, 틀리진 않았지만…….”
클레어 씨와 나는 행정상으로 부부. 혼인 신고가 되어 있는 관계다. 그러니 내 아버지를 아버님이라 불러도 이상할 건 하나 없다.
아니, 애초에 남의 아버지를 아저씨라고 부를 수도 없으니 아무 의미 없이 아버님이라고 부른 걸 수도 있다. 그냥 내가 괜히 과민 반응하는 거다. 워낙 성실해 보이는 여자니까.
“일단 노력해 볼게요.”
장담할 순 없었다. 레시피대로만 따라 해도 제 몫을 못 하는데, 변조를 요구하다니.
시간이 지나고 준비가 다 되어 기다리는 손님들을 불러 모았다.
“다 됐어요.”
내가 맛을 봤을 땐 의외로 성공적이었다. 맵지 않게 해 달라는 클레어 씨의 요구를 만족하면서도 맹탕은 아니었다. 어떻게 맵지 않은 김치찌개가 맛있을 수 있는 건지, 나조차도 모를 마법이지만.
어쩌면 저쪽 세계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는 바람에 입맛이 변해 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 없는 거다. 내 혀가 객관적인 기능을 상실했다는 가능성이 더 크니까.
클레어 씨와 아버지가 식탁에 앉았다.
“어디 한번 맛 좀 봐 볼까.”
“잘 먹겠습니다.”
두 사람이 음식을 맛봤다. 나는 먹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서 두 사람의 반응을 기다렸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일단 클레어 씨는 통과였다. 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입맛 까다로운 우리 아버지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입 발린 말은 하지 못하는 성격이셨다. 게다가 입맛도 까다로웠다. 그러니 사실 이쪽이 본선이었다.
“맛있구나.”
그래서 아버지가 그 한마디 감상을 남겼을 땐 무척 놀랐다.
“어… 정말요?”
“그래. 내가 언제 요리로 거짓말한 적 있냐?”
“없었죠, 한 번도. 지나칠 정도로…….”
“그럼 믿어라.”
내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맛이 좀 이색적이긴 하구나. 도율이 너, 냉장고 안쪽에 있는 고기 썼냐?”
“네.”
“정말이냐?”
아버지가 놀라서 되물었다.
“어… 비싼 거였나요? 쓰면 안 돼요?”
“아니, 그런 건 아니다. 다만 그게 좀 특이한 거라서.”
“특이하다뇨?”
내 요리가 다 고기빨이었다 이 말인가?
“그건 던전에서 서식하는 기오르그라는 몬스터의 고기다.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났지만, 헌터가 아니면 다룰 수 없는 식재라고 하더구나. 겉면이 마력으로 보호되고 있어서 실제로 칼이 들어가지 않던데…….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쓴 거냐?”
몬스터의 고기?
그냥 칼 대니까 잘만 썰리던데요.
나오지 못할 대답이 입가에서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