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53
53화 다른 뜻은 없어요
“이도은 선수…….”
도은이는 숨을 들이쉬고 병원 정문으로 양발을 차례대로 내디뎠다. 병원 부지에서 걸어 나간 후 검지손가락을 쭉 펴고 하늘을 찌르며 외쳤다.
“부활!”
누가 보면 골이라도 넣은 줄 알겠네.
하지만 이곳엔 지켜보는 관중은 물론 취재하러 온 기자 하나 없었다. 근처에 있는 건 관계자인 나와 클레어가 전부였다.
“와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클레어가 텅 빈 목소리로 환호하며 박수를 치자, 도은이가 허리를 숙이며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재밌게도 노네.
어울려 주진 못할망정 초를 칠 생각은 없었다. 길었던 입원 세월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은 거였다. 지금은 잔뜩 홀가분한 기분을 만끽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다.
도은이가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물었다.
“아~! 퇴원하고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병원 밥은 고문이라니까, 진짜.”
“너 짱깨 시켜 먹었잖아.”
“어라? 누구세요? 나 수술 들어갈 때 코빼기도 안 보이던 사람 아닌가?”
“…….”
그건 할 말이 없었다.
나를 코앞에 두고도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하려는 듯, 도은이는 눈썹에 손날을 붙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클레어가 곤란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도은이는 그런 클레어의 팔짱을 끼고 여봐란 듯이 애교를 부렸다.
“자. 저런 인간은 내버려 두고 둘이서 놀자, 언니. 오랜만에 드라이브나 갈까? 바닷가 어때, 바닷가?”
“난 뭐든 좋아.”
도은이가 퇴원해서 기뻐 보이는 건 클레어도 마찬가지였다. 도은이가 병원 신세를 지는 동안 시름시름 앓았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됐으니까.
클레어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퇴원한 도은이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는 다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런 클레어가 꺼낸 말은, 도은이를 충격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기에 충분한 폭탄 발언이었다.
“운전은 내가 할게.”
“어……?”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했던 도은이의 미소가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아, 아니. 무슨 소리야, 언니. 운전은 항상 내 몫이었잖아.”
“항상 네 몫이었으니까 그렇지. 오늘 하루만큼은 내게 전부 맡기고 마음 편히 즐기기만 했으면 좋겠어.”
눈물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마음씨였지만, 클레어가 운전대를 잡겠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마음 편한 일과 거리가 멀었다.
양발 운전에 터널 시야. 면허를 어떻게 딴 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런 클레어에게 대고 팩트로 때릴 자신도, 운전대를 맡길 자신도 없었는지. 결국 도은이는 나를 향해 울먹이는 눈길을 보냈다.
“도와줘, 오빠…….”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차키에 달린 도어 열림 버튼을 눌렀다. 주차된 차량이 삐빅 소리를 내며 잠금을 풀었다.
급할 때만 오빠지, 아주.
* * *
“건배!”
짠, 하고 커다란 맥주잔이 부딪쳤다.
성인 셋이 놀다 보면 그 종착지는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지는 법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운전 기사 노릇에 쇼핑 시종 노릇을 하며 두 여자 사이를 끌려 다닌 덕분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이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원래 잘 마시는 건지, 아니면 객기 부리는 건지. 도은이는 커다란 맥주잔을 반이나 입도 떼지 않고 비워 낸 참이었다.
“캬!”
도은이가 내 시선을 보고 핀잔을 줬다.
“뭐, 나 술 마시는 거 처음 봐?”
“처음 보는데.”
“…그렇겠구나, 쏘리.”
10년 전엔 도은이가 학생이었다. 술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도은이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도은이가 다시 한번 잔을 들어 올렸다.
“짠 하자, 짠!”
“아까 했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나도 잔을 들어 올렸다.
빠른 시간에 맥주 한 잔을 비워 냈지만 도은이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은 취기가 오른 건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도은이는 안주로 나온 감자 튀김을 담배처럼 꼬나물고 질문을 던졌다.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얼굴을 그늘지게 만들어 사뭇 조직폭력배 같은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직에서 나가시겠다?”
“그런 셈이지.”
“새끼 손가락 하나 놓고 가야 하는 거 알지?”
“야쿠자냐?”
내가 피식 웃으니 도은이도 킥킥 웃었다.
“근데 그만두면 뭐 하게? 진짜 기둥서방 생활에 맛 들인 거야?”
“그럴 리가 있나. 다른 데서 일하기로 했어.”
“어디서?”
“그… 센터장 최강현 씨 밑에서 일하기로 했어.”
그때까지 별다른 반응 없이 듣던 도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센터장 최강현?”
“어. 왜?”
“길드 하나 작살 낸 사람 아니야?”
“…….”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문 내 앞에서 도은이의 불평이 이어졌다.
“나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닌데, 그 길드에서 뭐 테러 혐의… 이런 거 들켰다고 하더라고. 국제법 위반한 것도 걸렸고.”
“테러…….”
“어. 그래서 원래는 길드 즉시 해체하고 자격 정지 때려야 하는 건데……. 저항하는 놈들 싹 다 힘으로 쓸어버렸다는데?”
도은이가 자신의 목 옆을 손날로 스윽 그었다.
“무섭다, 무서워. 대체 누가 테러리스트냐고. 저항하는 4대 길드 하나를 하루아침 사이에 싹쓸이할 정도면, 그 인간이야말로 어디 조사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그 할배 협회 소환당할 때 휠체어 타고 있더라. 개웃겨. 어떻게 이런 건 레퍼토리가 변하질 않냐.”
식은땀이 나는지 이마가 따끔거렸다.
그러고 보니 일반인에 비해 회복이 빠른 각성자인 영감이 계속해서 병원에 붙어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일하기 싫어서 농땡이 피우는 줄 알았는데, 그게 업무의 연장선이었던 건가.
또, 따로 기별을 주기 전엔 병원에도 찾아오지 말아 달라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 조사받느라 바쁠 테니 진범인 내가 있으면 곤란할 거란 뜻이었군.
조금… 오해가 있긴 하지만, 도은이가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다면 그걸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날에 안 좋은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사람 구실 하겠다는데 말리긴 뭐하지만……. 조심해. 혹시 이상한 일 시키면 바로 손절하고.”
“…그래.”
미안합니다, 영감.
대화가 일단락되자 도은이는 새 맥주를 주문하려다 말고 고개를 빼들고 주위를 살폈다.
“이 언니는 화장실 간다더니 화장실을 만들어서 다녀오나?”
클레어는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돌아올 시간이 지나긴 지났다.
기감을 펼쳐 확인해 보니, 클레어는 화장실 앞에 있었다. 왜 곧바로 돌아오지 않나 했더니 바로 앞에 남자 둘이 가로막고 서있었다.
아예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클레어를 찾던 도은이도 그 장면을 발견한 듯 쯧하고 혀를 찼다.
“화장실 앞에서 작업 거는 건 뭐 하는 개매너야?”
그리고 내게 손짓했다.
“출동.”
“…내가?”
클레어는 헌터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S급 헌터. 마음만 먹으면 저런 놈들 따윈 손짓 한 번으로 염라대왕과 면담 시켜 줄 수도 있다.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저번에 ‘불야성’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그땐 손님들이 줄을 서 있는 상황이었다. 그 자리를 힘으로 차지하면 몰상식한 인간이 되는 거였다.
반면에 지금 작업 거는 놈들을 뿌리치는 데에는 아무런 거리낌을 느낄 필요도 없다.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하지만 도은이는 인상을 쓰며 재촉했다.
“토 달래?”
“…알았다, 알았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클레어 근처로 다가가자 더 자세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제법 말끔하게 차려 입은 두 남자가 클레어의 길목을 막고 서 있었다. 다만 깔끔한 건 외모 뿐인 건지, 그들은 질척하게 클레어의 앞길을 막았다.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진짜? 같이 온 애도 여자야?”
“우리도 둘인데, 같이 놀면 더 재밌을 거라니까.”
이런 걸 보면 팬던트가 일을 너무 잘하는 게 아닌가 싶다. 팬던트는 단순히 기척을 지우는 게 아니라 클레어 컴벨이라는 사람의 인식을 흐릿하게 만드는 아이템이었다.
덕분에 지금 그녀는 유명하고 강력한 헌터가 아니라 반반한 외국인 여성에 불과했다. 적어도 이들의 눈에는 말이다.
이런 놈들을 쫓아내는 건 간단하다. 저번에도 한번 해 본 일이니까.
나는 놈들 사이로 팔을 뻗어 클레어의 손목을 잡고 내쪽으로 잡아당겼다.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언젠가 했던 말의 재현.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내…….”
그런데 턱하고 말문이 막혔다.
왠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왜?
“뭐야, 이 찐따는.”
“너 뭔데 끼어드냐?”
두 남자가 내 어깨나 이마를 툭툭 밀치며 시비를 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생각할 게 있었다. 왜 갑자기 말을 못 하겠지.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뻔뻔해야 할 때 뻔뻔할 수 있는 게 내 특기였는데.
클레어도 그런 내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느껴지니 더 할 말이 없어졌다.
“넌 뭐냐니까!”
남자들 중 하나가 내 멱살을 거칠게 잡아챘다. 머리에 피가 덜 마른 수컷들 특유의 치기 어린 행동이었다, 그렇게 행동하면 여자의 시선을 끌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투두둑.
내 멱살을 잡은 녀석은 수준 낮은 각성자였다. 미약하지만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로 인해 셔츠 단추가 몇 개 뜯어지고 말았다.
“…….”
벌어진 셔츠 사이로 가슴의 상처가 드러났다. 클레어가 며칠 전 칼빵을 놓은 자리였다. 그 상처가 아직 채 낫지 않은 채였다.
그 주위로도 크고 작은 흉터들이 즐비했다. 무림의 세계에서 얻은 흔적들이었다. 썩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니었다. 보고 있노라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생각났으니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손 좀 놓지.”
“…아, 옙.”
“단추가 어디갔지?”
“제, 제가 주웠습니다.”
순식간에 예절이 주입된 남자들이 고개를 연신 꾸벅이며 가게를 나갔다.
단추가 떨어진 셔츠는 더 이상 앞섶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다. 자신감 넘치는 남자나 할 만한 차림인 건 둘째 치고, 그 사이로 보이는 흉터들이 문제였다.
“도은이한테 들키기 싫은데, 어쩌죠?”
“음…….”
클레어는 잠시 고민하더니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따라와요.”
그녀가 들어간 곳은 화장실이었다. 남녀공용 화장실이라 이상한 오해를 살 일은… 없을 거라고 바랄 뿐이었다. 두 사람이서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늦은 것 같았지만.
게다가 일인용이라 그런지 칸막이로 나뉘어 있는 공간에 들어가지 않으면 상당히 좁았다. 클레어는 안쪽까지 들어가지 않고 세면대가 있는 좁은 공간에서 나를 벽에 몰아붙이고 셔츠를 열었다.
“…….”
무수한 흉터를 보고 클레어가 입술을 깨물었다.
연민은 잠시였다. 클레어는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더니 내 가슴 위로 덕지덕지 발라 댔다. 거의 한 통을 다 쓰는 것처럼.
“그거 그렇게 막 써도 돼요?”
“어차피 난 잘 안 써서 괜찮아요.“
그러자 흉터 자국이 많이 덮였다. 자세히 보면 알아볼 순 있겠지만, 얼핏 보면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다.
문제는 가장 최근에 생긴 상처였다. 그건 아직 흉터가 아니라 화장품만으로 완전히 덮어 버리기엔 무리가 있었는지 조금 티가 났다.
자신이 만든 상처 앞에서 클레어가 고심하는 눈길을 보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이건 비상사태니까.”
달칵.
클레어가 입술에 붉은 틴트를 발랐다. 평소와 달리 그녀의 입술이 선명한 적색으로 물들었다.
“잠…….”
등 뒤는 벽이어서 더 물러설 공간이 없었다.
“다른 뜻은 없어요.”
클레어가 가슴의 상처 위로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부드러운 입술이 피부 위에 닿았다. 그 자국을 남기려는 듯 충분히 시간을 들여 진하게 달라붙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쪽, 하는 소리가 났다.
클레어는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뒤돌았다.
“…나가요.”
얼굴이 뜨거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