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56
56화 꽁꽁 숨어 있었구만
쿠웅!
장승이 거대한 막대기를 땅 위로 찍었다. 봉으로도, 몽둥이로도 보이는 두께였다. 물론 평범한 인간과 비교하자면 기둥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무기를 꺼내라, 인간.”
“안 써.”
“그런가.”
장승은 곧바로 납득했다. 맨몸의 인간을 상대하며 자신만 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거리낌은 없는 모습이었다. 소임에 충실한 녀석이었다.
「얌마! 비겁하잖냐! 덩치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혼자 무기까지 쓰고!」
「내가 질 것 같아?」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백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장승에 비하면 대형견 수준이지만, 백호 역시 한 덩치 하는 놈이었다. 그런 녀석도 내게 꼬리를 말고 바짝 엎드렸던 전례가 있다. 내게 있어 상대의 크기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본인도 잘 알 거다.
장승이 우리 둘을 내려다 보며 설명했다.
“찾아온 손님을 전력으로 맞이하는 것이 예. 맨몸인 네가 전력이라면 그걸로 됐다. 봉을 사용하는 것은 그게 내 전력이기 때문이고. 그게 비겁한가?”
「크흠…….」
백호는 대꾸할 말이 없다는 듯 떨떠름하게 헛기침을 했다.
「아니, 그보다 저놈, 우리 대화를 엿들은 것 같은데요.」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백호의 전음만이었다.
내 전음은 상대에게만 전해지도록 은밀히 파고들지만, 백호는 상대를 고를 줄 모르는 것처럼 사방으로 퍼뜨리고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그걸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었기에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엿들은 게 아니라 백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셈이었다. 잘못을 따져 물을 처지는 아니었다.
“시작하지.”
내가 내공을 끌어 올렸다. 단전의 기운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음.”
그러자 장승 역시 봉을 쥐고 자세를 취하며 나와 같은 행동을 취했다. 녀석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내공을 운용하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는 자연지기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나무나 바위 따위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닮아 있었다. 보통 인간이 깨우침을 통해 도달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확실한 건 마력과는 다른, 나와 같은 종류의 힘이라는 것이었다.
“하…….”
짧게 웃음이 나왔다.
이쪽 세상에서 백호 녀석을 발견했을 때 어렴풋이 생각하긴 했다. 어쩌면 이 세상에도 마력이 아닌 내공을 사용하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세상에 알려진 지식도, 그리고 지금까지 겪어 온 경험 속에서도 그런 존재는 없었다.
결국 백호나 나나, 이 세상에 잘못 섞여 든 이레귤러에 가까운 존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계속해서 주어졌다.
A급 게이트에 돌입했을 때 천수각의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구미호. 그리고 마력을 재밍하는 장치라며 인공적으로 내공에 가까운 파장을 재현했던 플레이아데스 길드.
마력이라는 새로운 힘을 받아들인 세상에, 내공을 사용하는 존재들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증거.
그리고 눈앞의 장승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공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이 공간은 던전이나 게이트와 달리, 마나 대신 ‘기’가 가득 차 있었다.
“꽁꽁 숨어 있었구만.”
반가워해도 좋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같은 내공을 사용하는 자들이라 해서 반드시 친구가 되리란 법은 없으니까.
애초에 내가 가장 많이 죽인 건, 같은 내공을 사용하는 인간. 무림인들이었으니까.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이 녀석들은 내공 좀 새어 들어갔다고 부서지지 않으리란 점이다.
다시 말해, 오랜만에 만난 마음 편한 상대란 거였다.
* * *
장승이 자신과 마주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해 고개를 한껏 숙여야 할 정도로 작은 상대. 그러나 그의 몸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진한 내력을 품고 있었다. 겉모습을 보고 방심해도 좋은 상대가 아니었다.
장승이 두 눈을 감고 명령을 떠올렸다.
‘간 보지 않아도 되니까, 바로 전력으로 싸워 줘.’
두령의 말에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명을 받들며 고개를 숙였었다.
그러나 그땐 의아함을 갖고 있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간 상대의 가능성을 점치기도 전에 싸움이 끝나고 마는 게 아닌가, 하는.
장승은 그 정도 자신감을 가져도 될 정도의 강자였다. 적어도 이곳 안에서는.
하지만 사내를 눈앞에 둔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강하군.’
사내는 비스듬하게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방을 펼칠 의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자세로 보였으나, 어디 하나 가볍게 무너뜨릴 수 없는 유연함이 엿보였다.
보다 근본적으로, 어딘가 헐거운 듯이 보이는 남자의 태도와 달리 그의 몸속에서 휘몰아치는 내공은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별로 힘을 들인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사내가 운용하고 있는 내공의 양과 밀도에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 엄청난 내공에 휘둘리는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그걸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세밀하고 가볍게 다루고 있었다.
이 남자를 상대로 시답잖은 선문답 같은 공방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본실력을 가늠하기 위한 절차가 필요하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 반대.
‘이자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서, 내가 전력을 내야 한다.’
장승은 지니고 있는 모든 내공을 단숨에 끌어 올렸다. 몸을 휘감는 내공이 피부를 타고 흘러나와 주위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주변을 한 차례 휘감은 후 다시 몸속으로 들어갔다.
임독맥을 따라 내공을 운용하는 것이 소주천. 임독맥 외의 전신에도 내공을 운용하는 것을 전신주천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 기의 흐름을 신체가 아닌 외부의 공간에도 운용하는 것이 대주천이었다.
누군가가 지닌 기의 흐름이 외부의 기에 흩어지지 않고 공간을 장악하게 되면,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 법칙을 고쳐 쓰는 것이 가능해졌다.
파경대계破境代界.
경계를 허물어 세계를 덧칠한다. 소우주를 대우주의 일부로 만드는 경지를 일컬었다.
“…….”
사내는 그 광경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것이 여유인지 감탄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장승의 기가 퍼진 공간. 그 내부에 내공의 흐름이 더해질수록 풍경이 변해 갔다. 장승이 가진 소우주의 심상이 이 세계의 모습을 덧칠하고 있었다. 바닥에 자란 잔디가 사라지고 커다란 소나무가 자라났다.
“이건?”
처음 보는 듯한 사내의 물음에 장승이 침음을 삼켰다.
그 정도 되는 힘을 가지고 이 기술을 처음 본다니. 어쩌면 이걸 보여 준 게 남자의 무위에 날개를 달아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 아군이 되리라 정해지지도 않은 자에게 베푸는 것치고는 과한 구경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름을 모르더라도 흉내 낼 수 있을 테니까. 그에 장승이 대답했다.
“파경대계.”
그 대답에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대주천을 달리 부르는 말일 거고. 이게 네 소우주를 구현하는 일이란 건 이해했다. 그보다는… 이곳에 붙인 이름을 물어보는 건데, 나는.”
“…그런 건 왜 묻지?”
“그냥. 이곳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
사내의 대답에 장승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어처구니없는 남자였다.
감상이나 듣자고 행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싫지만은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이 펼친 소우주에 대한 칭찬이니, 기분이 좋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그것이 장승이 펼친 우주의 이름이었다.
“어울리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감상을 마쳤다.
그 이상의 대화는 필요없었다. 침묵과 함께 이어진 대치 후에 먼저 움직인 건 장승이었다.
쿵!
커다란 몸집과 함께 겸비한 무게에서 나오는 발걸음이 지축을 울리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가 온 힘을 다해 휘두르는 봉은 태풍을 몰고 다니는 듯한 바람을 일으켰다.
사내의 입장에선 하늘에서 커다란 기둥이 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하지만 그는 몸을 움직여 피하지도 않고, 맨몸으로 막아 냈다. 거대한 기둥을 팔을 들어 올려 받치고 있었다.
놀라운 방어력이었지만 장승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 공격이 그의 전력은 아니었다.
“흡!”
장승이 봉을 되돌려 반대쪽 땅을 찍었다. 그러자 사내의 발밑에서 거대한 기둥이 솟아올라 그를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그리고 장승이 양손으로 봉을 쥐고 다시 한번 바닥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하늘에서 마찬가지로 거대한 기둥이 떨어졌다.
공중에 뜬 사내의 몸을 덮치기 위해 위아래로 기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쾅!
거대한 두 기둥은 마침내 한 지점에서 만나 사내의 몸을 완전히 짓눌러 버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하대장군과 땅에서 솟아오르는 지하여장군의 합작품. 장승에게 가능한 최고 위력의 공격이었다.
구구구궁…….
두 기둥은 계속해서 갈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사이에 있는 존재를 완전히 뭉개 버리고 밀착하기 위해. 아직 사내가 무사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 압력은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승은 이대로 사내가 저항할 힘을 모두 소진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 순간. 하늘에서 섬전 같은 빛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여뢰.”
사내의 목소리와 함께 번개가 번쩍이는 듯이 사방이 점멸했다. 순식간에 지나간 몇 번의 깜빡임과 함께 뒤늦게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장승이 소환한 두 장군 기둥이 나무토막처럼 썰려 조각나고 말았다.
발판을 잃은 사내가 공중에서 낙하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장승은 자신에게 더 이상 승산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자신은 지금 이기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령의 명령으로 남자의 실력을 파악하기 위해.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이 땅을 지키는 문지기로서, 이 뒤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
장승이 기합을 터뜨리며 봉을 찔렀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사내를 정확히 관통하는 궤도였다.
사내 역시 공중에서 자세를 다잡았다, 떨어지는 바람과 커다란 봉이 짓쳐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발디딤이 없어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지는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충분했다.
콰아앙!
공중에서 장승의 봉과 사내의 주먹이 맞부딪쳤다.
사내의 몸을 모두 덮을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운 봉에 그의 주먹으로 인한 갈라짐이 생겨났다. 그 틈은 쪼개지는 소리를 멈추지 않으며 달려가는 것처럼 봉 위를 가로질렀다.
마침내 봉이 부서지고 그 충격이 장승을 덮쳤다. 장승의 거대한 몸이 저항하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몸이 날아가며 장승은 정신을 잃었다.
그 증거라는 듯 주변을 물들이던 풍경이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 * *
‘이럴 수가…….’
문지기 장승. 그가 파경대계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도율은 손쉽게 승리를 점했다.
그곳에선 소우주의 주인이 곧 진리였다. 그의 마음가짐이 곧 법칙이 되는 세상이었으니까. 그 파경대계를 상대하려면 그와 동일하게 소우주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 정론이었다.
물론 도율은 그 방법을 모르기에 난전을 금치 못하리라 예상했지만, 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따끔한 가르침을 동반한 승리가 되리라 예상됐다.
그러한 까마귀의 예상을 거스르고, 도율이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장승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여 줬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장면이었다.
“무사하지, 저 녀석?”
“…아, 예. 그렇습니다.”
장승은 기절했을 뿐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그 사실에 도율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띄웠다. 마력을 가진 존재라면 도율의 내공을 담은 공격을 받아 낸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을 테니까.
그 직후 도율은 미소를 지우고 냉정한 목소리로 고했다.
“그럼 안내해. 너희 대장인지 뭔지가 바라는 대로 실력은 충분히 보여 줬으니까.”
“…….”
까마귀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까마귀의 안내에 따라 도율을 등에 업은 백호가 올라간 건 높다란 돌계단이었다. 평범하게 걸어 올라갔다면 한세월이 걸릴 것만 같은 길이였다.
그 끝에 다다른 건 작은 사당이었다.
「아이고, 죽겠다…….」
돌계단이 끝나자 백호가 퍼질러졌다.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던 몸에서 작은 몸집으로 줄어들었다.
커다란 쪽은 연비 소모가 크기도 하고, 작은 몸으로 지낸 지도 오래되어 그쪽이 더 편한 탓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도율이 살짝 웃음 지었다.
「수고했다, 쉬고 있어.」
「예에…….」
백호를 내버려 두고 사당 안으로 진입하자 툇마루가 달린 집이 한 채 보였다. 그다지 크지 않은 가옥이었다.
하얀 장삼을 걸친 누군가 그 툇마루에 걸터앉아 먼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길게 기른 장발에 곰방대까지 입에 물고 있는 채였다. 한가롭기 짝이 없는 모습.
그러나 도율은 의심하지 않았다, 남자에게선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깊이의 내력이 느껴졌기에. 이자가 이곳의 우두머리란 것을 깨달았다.
까마귀가 그의 앞에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두령님, 말씀하신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까마귀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