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57
57화 샤워부터 하는 건 어때요?
“반갑다. 내가 바로 백귀百鬼들의 주인.”
남자가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손으로 가져오며 웃었다.
“망량이다.”
망량. 그것이 남자의 이름이었다.
겉보기엔 보통 인간과 다를 게 없었다. 길게 기른 머리나 새빨간 눈동자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적어도 외관상으로 보이는 모습은 모두 인간의 범주 내에 들어가는 자였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망량이라는 자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강자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지 말고, 들어와.”
망량이 툇마루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시에 까마귀에게 지시했다.
“서오, 차를 좀 부탁해도 될까?”
“준비하겠습니다.”
“고마워.”
잠시 후 까마귀가 찻상을 내왔다. 네 귀퉁이에 매달린 끈을 입에 문 채로 날아오다가 망량과 나의 사이에 내려놓았다.
…어떻게 준비한 거지.
망량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전자에서 차를 따랐다. 찻잔을 가볍게 내밀며 권하기에 응했다.
“음…….”
“맛 좋지?”
“몰라. 난 풍류를 몰라서 좋은지 어떤지 구분할 줄 모르니까.”
무림의 세상에 다녀왔지만, 손님 대접 받은 기억은 많지 않았다. 차 맛을 알려면 좋은 차를 폭넓게 마셔 봐야 할 테니,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내가 마신 차의 대부분은 스승님이 타 주셨던 평범한 차였다.
가시 돋친 대답에도 망량은 부드럽게 웃었다.
“마시는 사람이 마음에 들어 하면 그게 좋은 차지. 내 지론이야.”
그렇게 말한 후 망량은 자신 역시 차를 맛보았다.
“음. 역시 좋아. 안 그래?”
망량이 곁눈질로 내게 물었다.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은 친절한 태도와 호감을 사는 반듯한 외모. 대단하다는 감상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카리스마의 일종이라 일컬어도 좋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어쩐지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닿지는 않았다. 나는 냉정하게 말을 돌렸다.
“차 맛이나 논하려고 불렀나?”
그런 내 쌀쌀맞은 태도에 망량이 한쪽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역시 너한텐 안 통하는구나.”
“…안 통해?”
“아, 오해하지 마. 이건 내 체질 같은 거라서.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야.”
망량은 손을 저어 부인하더니 눈매를 가라앉혔다.
“그래, 성격 급한 손님.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거지.”
“먼저 질문. 어떻게 날 알고 있는 거지?”
까마귀는 내게 처음 접근할 때부터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딘가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즉,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는 뜻.
그런 내 경계심 어린 질문에 망량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거 진심으로 묻는 거야?”
“농담 아니니까 대답해.”
“알았어, 알았어.”
망량이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그날이지.”
“그날?”
“네가 힘을 해방한 날.”
힘의 해방. 짚이는 바가 있었다.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비밀 실험실과 본사에서 있었던 일. 특히 마지막에 이르러선 건물을 두 동강 내 버리기까지 했으니.
클레어와 함께 왔던 송민아조차 놀랐던 걸 보면, S급 헌터라도 쉽사리 할 수 없는 일임은 분명했다.
“그날 네가 퍼뜨린 힘의 파장. 그건 아주 화려한 데뷔였다고. 덕분에 이면 세계의 강자들은 모두 널 주목하고 있을걸.”
“…이면 세계?”
“아, 그렇지. 너희한텐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익숙하겠구나.”
망량이 말을 고쳤다.
“균열이라고.”
“…….”
그건 확실히 익숙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진의는 더더욱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균열의 강자라는 건 대체 무슨 말이지?
균열은 단순히 던전이나 게이트로 넘어가기 위한 통로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던전이나 게이트는 공략을 마친 후에 사라지는 임시 세계. 그런 곳에 강자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망량은 내 혼란을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자세히.”
내 요구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네가 알아 둬서 나쁠 것 없는 이야기일 테니까.”
망량이 입을 열었다.
* * *
마魔에서 태어나 마에서 살아가는 존재.
마족이라 불리는 생명체 사이에도 위계질서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최정점에 군림하는 자들을 부르는 말이 바로.
“사도使徒…….”
“그래.”
눈앞의 망량이라는 자가 강자라고 순순히 인정할 정도라면, 그 강함은 단순한 던전 속 몬스터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런 강대한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다면, 인류에게 있어 엄청난 위협이었다.
하지만…….
“들어 본 적 없는데.”
짧은 매니저 생활이었지만, 그동안 조금이나마 헌터 업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혹시 정보를 통제 중인 건가?
망량이 흘깃 웃음을 흘리고 찻잔을 입에 댔다.
“당연하지. 너희 인간들은 아직 그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
“굳이 따지자면, 예외는 일부 있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어마어마한 파장이 일어날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제대로 실감이나 할 수 있을까.
지난 세월, 인류는 던전 공략을 통해 차츰 강해졌다. 최초의 침공이라 불리는 아웃브레이크 시절에는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를 막는 것만으로도 급급한데, 이젠 각성자들의 수준도 마력에 대한 이해도 자라고 있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저 사도라는 자들을 제대로 상대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 사도라는 자들은 왜 직접 나서지 않는 거지? 그들 중 하나만 나서도 지구상의 인간을 모조리 쓸어 버릴 수 있을 텐데.”
“그거야 당연히 나 때문이지.”
망량이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우린 서로 견제하느라 바빠서 인간 따윈 신경 쓸 틈도 없다고.”
그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게 이 사실을 알려 주는 이유가 뭐지?”
“우린 동류니까.”
“동류?”
망량이 기운을 끌어 올렸다. 내겐 아주 익숙한 종류의 힘을.
“너도 알고 있겠지만, 사도의 힘과 우리의 힘은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을 갖고 있지. 만약 둘 중 한편에 붙어야 한다면……. 당연히 나와 손을 잡아야 하지 않겠어?”
그럴싸한 의견이었다.
사도들이 망량이라는 존재를 거슬려 한다면, 같은 종류의 힘을 가진 나 역시 눈엣가시로 여길 게 뻔했다. 공통의 적을 위해 임시로 동맹을 맺는다.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볼 수 있지만.
나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나로선 인간이 아닌 것들과 손을 잡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야. 내가 왜 널 도와야 하지? 차라리 너희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빈틈을 노리는 게 합리적인데.”
그런 내 대답에 망량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지한 기색을 띠고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린 질 거다. 세력이 많이 줄었거든. 처음부터 장기전으론 승산이 없었어.”
“동정심에 호소할 셈인가?”
“설마. 다만 그렇게 되면 너도 혼의 조각을 되찾을 길이 요원해질 거야.”
“혼의 조각… 이라고?”
“그래.”
혼의 조각.
그것이야말로 지금까지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맥락을 알 수 없는 소재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었을 때, 단순히 헛소리로 치부할 수 없었다. 기분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고 직감할 수 있었다.
감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지 못했던 것을 문득 깨닫게 될 때 찾아오는 법이었다.
“혼의 조각이라니, 누구의…….”
“당연히 너지.”
망량이 나를 가리켰다. 한치의 틀림도 없는 진실을 고하듯이, 망량이 단언했다.
“네 영혼은 지금 온전한 하나가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지?”
“너도 짚이는 구석이 있지 않아?”
“…….”
내가 침묵하자 망량이 예시를 들었다.
“가령,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다든가.”
“이게 내 원래 성격이라면?”
“그게 아니라면, 글쎄…….”
망량이 히죽 웃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든가.”
“…….”
갈라진 영혼과 죽지 않는 몸.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리치의 성물함이 그것과 비슷한 원리니까. 그보다 상위의 존재, 사도라 불리는 자라면 보다 복잡한 응용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 영혼의 일부를 가져가 죽지 않는 몸으로 만든 자가… 사도 중에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망량이 조용히 읊조렸다.
“진짜로 복수해야 하는 대상, 가르쳐 주겠다고.”
…복수.
누군가 내 영혼의 일부를 가져갔다면, 적어도 그걸 돌려받기 위한 일이 잘못은 아니다. 돌려받는 과정에서 다소 이자를 책정하긴 해야겠지만.
“나도 성급하게 굴 생각은 없어. 오늘은 이야기만 나눠 본 거고, 결정은 나중에 해도 돼.”
망량이 느긋하게 몸을 기울였다.
* * *
“미안. 본의는 아니지만, 멀리 못 나가.”
“상관없어.”
망량은 그 사당으로부터 나오지 못하는 듯 담벼락에 서서 배웅했다. 그 너머로 가는 길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까마귀의 안내를 받았다.
“그럼 도율 님, 다시 뵙는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까마귀의 인사말을 뒤로하고 균열을 넘어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
나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 망량이라는 자와 나눈 대화를 통해 마계에 있는 사도라는 자들이 내 적이라는 건 충분히 이해했지만…….
‘너무 딱 맞아떨어져.’
내 개인적 사정과 인류 전체의 존속. 이 두 가지 목적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고 있었다. 마치 누가 판을 짜놓은 것처럼.
게다가 미심쩍은 부분은 하나 더 있다.
그 사도라는 자들을 모두 처치하고 난다면, 대적할 자가 없는 망량은 뭘 할 생각인 거지?
단순히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조용히 살아갈 생각인 걸 수도 있지만, 아직은 경계를 누그러뜨릴 때가 아니었다.
가능한 신중을 기하기로 다짐하는 것으로 생각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해가 져 어두컴컴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산이어서 더 빠른 걸지도 모른다. 해가 짧은 시기였으니, 집에 돌아가 식사 준비를 하면 딱 좋은 시간일 것 같았다.
삐리릭.
문을 열고 들어가니 쿠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그 직후 클레어가 현관까지 후다닥 달려와 마중을 나왔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온 건지 머리가 헝클어진 것도 가다듬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까지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제가 좀 늦었죠?”
“아, 아뇨. 전혀요.”
클레어가 고개를 붕붕 저으며 부인했다.
묘하게 가까이 달라붙어 있는 게 앞길을 막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저기, 좀 들어갈게요.”
그러자 클레어가 시선을 피하더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권했다.
“샤, 샤워부터 하는 건 어때요?”
「…헐.」
그에 반응한 건 백호였다.
「대협, 저 산책이나 좀 할까요?」
「헛소리하지 말아 봐.」
이상한 뜻으로 말한 걸 리가 없다. 애초에 올바른 순서를 거치지도 않았고…….
「오늘 산을 다녀와서 냄새라도 밴 모양이지.」
「산에서 냄새가 나면 무슨 냄새가 난다고…….」
물론 땀 같은 건 일절 흘리지 않았지만, 원래 자기 냄새는 스스로 맡기 어려우니까.
내 몸에서 냄새라도 나나 확인하려 했는데, 있을 리가 없는 이상한 냄새가 풍겼다. 내 몸에서 난다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냄새. 게다가 그 근원지는 내 몸도 아니었다.
“진짜 어디서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요?”
“…뭐가요? 난 모르겠는데요?”
클레어가 시치미를 뗐지만 나는 그녀를 지나쳐 냄새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샤워부터 하라니까요, 좀!”
답지 않게 클레어가 생떼를 쓰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부엌에 도착한 나는 마침내 모든 진상을 밝혀 내고야 말았다.
프라이팬 위에 검붉은 무언가가 타닥, 타닥 하고 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냄새는 물론 고기가 타는 냄새였다.
내가 외출하기 전에 불 올려 놓고 깜빡한 게 아니라면, 이런 짓을 할 범인은 한 사람뿐이었다.
“…뭐예요, 이거?”
“…나, 나도 몰라요.”
“그럼 이건 강도가 들어와서 해 놓고 간 거예요?”
“…….”
클레어가 고개를 돌렸다.
품에 안긴 흰돌이가 프라이팬 위의 물체를 내려다 보더니 내게 말했다.
「대협, 전 요즘 따라 사료가 입맛에 잘 맞더라고요.」
녀석이 해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