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59
59화 형이야
“클레어 컴벨 씨.”
매니저 도은과 단 둘이 있던 클레어의 앞에 검은 정장을 빼입은 자들이 늘어섰다.
그자들은 모두 가슴에 동일한 모양의 휘장을 차고 있었다. 둥근 타원 위를 가로지르는 십자가 형태의 문양을 새긴 휘장. 협회라 불리는 곳의 소속이라는 상징이었다.
국제 헌터 협회, 한국 지부 산하의 인물들.
‘넷… 인가.’
맨 앞에 있는 남자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의 머릿수가 넷이었다.
그들은 정장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폭력에 익숙하다는 분위기를 지울 수는 없었다. 근래 들어 클레어는 그런 부분을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해졌다.
그렇다 해도 클레어가 힘으로 밀어붙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그건 결국 협회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거니까. 조금 보태어 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4명의 인원이 대동된 건 그녀를 정말로 막아 세우기 위한 비상 수단이 아니었다. 협회에서 제시하는 무언가에 응하지 않을 경우, 그녀가 빠져나가기 위해 힘을 사용했다는 증거로 삼기 위한 초석이었다.
“무슨 일이죠?”
클레어의 질문에 가장 앞에 선 인텔리한 외모의 남자가 말했다.
“조사 차원에서 나왔습니다. 협회 지부까지 동행 부탁드립니다.”
“조사라니, 어떤……?”
남자가 안경 위치를 고치고 대답했다.
“S급 마석 사용처에 대한 건입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듣던 클레어와 도은의 안색이 굳었다. 그러나 당혹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도은이 클레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네, 네. 그런 이야기라면 매니저인 저를 통해서…….”
그런 도은을 막아선 건 다름 아닌 클레어였다.
따지고 보면 마석을 통해 치료를 받은 당사자인 도은 역시 중요 참고인이다. 하지만 클레어는 자신이 먼저 불린 게 행운이라 여기고 있었다. 잘만 하면 제 선에서 끝낼 수도 있다는 뜻이기에.
“도은아.”
“언니……?”
“내가 알아서 할게.”
“아니, 하지만…….”
클레어가 도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말고.”
“…알았어.”
도은이 서운함을 숨기지 못하고 승낙하자 클레어가 부드럽게 웃었다.
도은이 보기에, 클레어는 못 보던 사이 한층 성숙해졌다. 이전이라고 그러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남들에겐 보여 주지 않지만 매니저이기에 발견할 수 있는 빈틈이 있었다.
그런 클레어의 성장이 대견하면서도 자랑스러운 한편,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감정을 느끼고 마는 것도 사실이었다.
“가죠.”
클레어가 건조한 목소리로 알리자 협회원이 그녀를 태우고 차를 몰았다. 다른 차량에 네 명의 전투원이 타서 그 뒤를 따라붙었다.
운전을 하는 동안 그 어떤 대화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지부로 모실 뿐인 운행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헌터 협회 한국 지부의 사무실. 지부라고 불리긴 하나, 한 국가의 헌터를 관리 감독하는 조직다운 규모였다.
남자가 정문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누군가 대신 주차를 하러 갔다. 남자는 지체 없이 곧장 클레어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남자가 안내한 곳은 지부장 집무실이었다. 두 번의 노크 후 남자가 말했다.
“클레어 씨를 모셔왔습니다.”
“들어와.”
집무실에 있는 건 장정으로 보이는 중장년의 남성이었다. 희끗한 흰머리가 보이지만 풍채가 좋아 노쇠한 기운은 엿볼 수 없었다.
그가 바로 한국 지부 지부장, 지성철이었다.
이곳까지 안내한 안경 남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집무실을 떠났다.
집무실에 남은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지부장과 S급 헌터. 둘은 처음 보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막역한 사이 또한 아니었다.
지부장이 응접용 테이블 앞에 앉으며 권했다.
“앉지.”
클레어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지부장이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였다.
“입에 침 바르는 재주 없으니 바로 묻지. S급 마석, 누군가를 치료하는 데 썼더군. 맞나?”
“맞습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자네의 시누이고. 법률상으로는 4촌 이내의 관계로군. 문제없다 생각했나?”
툭.
지부장이 그녀 앞에 서류 뭉치를 늘어놓았다. 클레어의 헌터 활동 기록과 가족 관계 증명서. 협회가 아니라면 함부로 열람할 수 없는 자료였다.
“그 시누이는 자네가 헌터로 활동하던 초창기부터 손발을 맞춰 온 매니저였군. 오랜 세월 함께해 온 매니저이자 시누이. 그런 사람에게 S급 마석 정도는 아깝지 않았겠지.”
“네,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클레어의 대답에 지부장이 미간에 패인 주름을 한층 더 깊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매니저가 시누이가 되다니. 이건 우연인가? 아니면 지금 남편과도 함께 어울리다 보니 그런 관계로 발전한 건가?”
“예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자연스러운 만남이었다 이건가?”
지부장 지성철이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한 서류 위였다.
“10년간 실종 상태였던 사람과 언제 어느 틈에 만나서 사랑을 키웠다는 거지?”
“…….”
합당한 지적이었다.
서류에는 지부장 권한으로 열람할 수 있는 도율의 모든 국가적, 비공식적 기록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평범하게 살아오다가 20살 초반, 돌연히 실종. 그리고 10년간 아무 기록도 없었다.
그 기간은 클레어가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받던 시절과 졸업 이후 헌터로 활동하던 시절. 심지어 매니저인 도은이 입원을 하던 시기와도 겹쳐 있었다.
“…죈가요?”
“뭐?”
너무 작은 목소리라 듣지 못했다. 지부장이 닦달하자 클레어가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첫눈에 반한 게……. 죄가 되나요?”
클레어는 자기가 말해 놓고도 부끄러운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부장 지성철은 그 광경을 보고 답지 않게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가 아는 클레어라는 헌터는 본래 이런 인물이 아니었다. 냉철하고 기계적인 사고방식은 곤충의 것과 닮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그녀의 그런 점을 높게 샀었다. 언젠가 ‘결사대’에 들어갈 가능성도 점치고 있었다.
이 자리에 부른 것도 문제 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것이었다면 독대가 아니라 공식적인 청문회를 통해 압박했을 테니까.
그렇다고 덮어 주려는 의도도 아니었다. 그 올곧은 마음이 모종의 이유로 딴 길로 샜다면 일종의 교정을 거쳐 다시 바로잡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눈앞에서 겪으니 당황하고 말았다.
“…그게 말이 된다고…….”
그때 집무실의 내선 전화가 울렸다.
중요한 이야기 중이었기에 무시할 법도 했지만, 클레어는 그 말을 한 직후 잠시 혼이 빠져나가 있었다. 지금 상태에선 더 떠들어 봐야 소용이 없었다.
결국 잠시 시간을 가질 겸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지?”
[지부장님! 그게, 어떤 남자가 지부장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쫓아내지 않고 뭐 하나?”
[그게……. 이도율입니다.]“이도율?”
그 이름은 지부장에게도 익숙한 석 자였다.
[클레어 컴벨의 남편, 이도율입니다.]지부장이 눈을 지그시 감고 고민에 빠졌다.
굳이 그 남자까지 불러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방금 클레어의 언행이 그의 확고한 판단을 흔들어 놓았다. 둘을 한자리에 앉혀 놓고 얘기를 들어보는 방향으로.
“…올려보내.”
[예!]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묘하게 우렁차게 들렸다.
* * *
“제 아내가 거기 있다니까요.”
“다른 분은 일절 들이지 말라는 지부장님의 지시가 있으셨습니다.”
나는 말이 안 통하는 직원과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도은이의 전화를 받고 헌터 협회 한국 지부까지 찾아온 건 좋았지만, 입구에서 대기 중인 직원들의 손에 막혀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물론 힘으로 뚫고 지나가는 건 간단하지만, 후폭풍을 어찌 감당할지 고민이었다.
‘가면 마렵네.’
결국 다른 방법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지부장 집무실에 둘만 있다고 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제 아내가 외간 남자와 단둘이 한 방 안에 있다 이거죠?”
“…예?”
내 해석에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쩜 그렇게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냐고 감탄하는 중이었다.
“비키쇼.”
“아, 아니. 잠시만요. 이도율 님, 진정해 보세요. 지부장님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나이도 있는 편이시고요…….”
“나이고 나발이고! 내가 불안해서 미칠 것 같다고!”
연기에 재능이 있었던 건지 즉석에서 생각한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직원을 슬쩍 떼어 놓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가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과연, 협회 지부의 입구를 지키고 있을 정도면 일반인 정도는 제압할 수단을 갖추고 있다는 뜻인가.
하지만 결국 제대로 훈련도 되어 있지 않은 자였다. 헌터나 가디언이 되어 각성자로서의 역량을 갈고 닦는 게 아닌,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한 부류. 마력을 오랜만에 사용하는 게 티가 났다.
“거친 방법을 쓰는 점, 양해 바라겠습니다!”
쿵!
직원이 내게 태클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봤다. 마치 바위를 목전에 둔 모습.
“먼저 쳤습니까?”
“아니, 그게…….”
남자가 울상을 지었다.
“각성자… 셨습니까?”
“비슷합니다.”
힘은 딱 필요한 만큼만 조절했다. 쓸데없는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도록. 그다지 대단한 각성자로 보이는 일은 없었다. 그 시선으로는 자기보다 강한 자들이 어느 수준인지 구분할 방도가 없을 테니까.
결국 직원이 지부장 집무실에 전화를 걸어 올라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집무실에 들어가자 클레어가 끼이익 하고 의자 다리를 끌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율 씨……?!”
“네.”
내가 근처에 다가가자 그녀가 물었다.
“여긴 어떻게……?”
당연히 도은이한테 들어서 안 거다.
하지만 눈앞엔 지부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떡하니 서 있었다. 왠지 여기서 도은이의 이름을 거론하는 건 불안했다.
결국 얼버무렸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나는 지부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이도율입니다.”
“지부장 지성철. 말은 편히 하지.”
지부장이 악수를 청했다. 맞잡으니 상당한 악력이 느껴졌다. 좀 센 거 아닌가 하고 쳐다보니 표정이 험악했다. 압박을 줄 심산인가.
하지만 나에겐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내가 태연히 악수를 마치자 지부장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두 사람이 한 자리에 함께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둘 사이의 결혼, 이건 마석을 사적으로 거래하기 위한 계약이 아닌가?”
날카로운 질문. 사실을 추궁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부장은 확신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나는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지금 제 아내가 조건 때문에 정절을 바치는 여자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지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화제를 우회했다.
“꼭 그러리란 법은 없지. 호적만 올린 서류 상의 부부일 수도 있고.”
“기사 좀 찾아보셨으면 아실 텐데요. 저흰 지금 한 지붕 아래에 살고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온갖 자료가 늘어져 있었다. 그중 하나로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도 있었다. 나와 클레어가 같은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
내가 확신을 주기 위해 씩 웃으며 물었다.
“혼기 찬 남녀가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없었다.
클레어가 옆에서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정도 반응은 괜찮다. 남들 앞에서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는 남편을 타박하는 아내의 반응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말문이 막힌 지부장은 다시 원론적인 부분으로 돌아왔다.
“지금 둘이 어떤 관계인지보다, 그 당시에 어땠는지가 중요한 거 아닌가? 둘이 알고 지냈다고 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지부장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했다.
추문이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아 노여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이 질문을 던진 것도, 이 모순을 증명할 수단이 있냐고 묻는 사무적인 판단에 불과했다. 그게 진짜이든 아니든, 증거만 있다면 덮어 줄 수 있다는 듯이.
여기서 요즘 애들은 빠르다니까요 같은 소릴 했다간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거다.
“10년……. 실종되어 있느라 만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지만, 사실 아닙니다.”
“그건……!”
클레어가 목소리를 냈다. 설마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 남에게 얘기할 생각이냐는 듯이.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건 증거 하나 없는 일이었다. 굳이 증거를 대자면 내 힘을 보여 줘야 했다. 그것도 힘의 근원 자체가 다르다는 상식을 깨는 설명과 함께. 지부장 정도 되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안심하라는 듯 클레어에게 한번 웃어 보이고 다시 지부장을 향해 말했다.
내가 준비한 수단은 따로 있었다.
“전 10년 동안 실종됐던 게 아닙니다. 기록을 지운 것뿐이죠.”
실제론 클레어와 만날 수 있는 기간이 좀 더 길었다는 설정이다.
그러자 지부장이 코웃음을 쳤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네 이력은 협회 지부장 권한으로 모두 뒤져 본 거다. 지부라 불리지만 한 나라의 정점에 가깝지. 이 이상의 권한이라고?”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
지부장은 내가 확언할 줄 몰랐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 눈빛이 더없이 날카로워졌다. 어디 말할 수 있으면 말해보라는 듯이. 그러나 그 말에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하는 자리라고.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좀 그렇고. 전화 한 통 시켜 드리죠.”
“누구…….”
폰에 저장된 연락처로 전화를 걸자 금세 연결되었다. 사전에 미리 입을 맞춰 둔 덕분이었다.
“지부장님 앞입니다.”
간략히 상황을 전하고 스피커 모드로 변경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지부장은 화면 위에 떠오른 문구를 보고 의아한 기색을 표했다. 이름도, 직책도 쓰여 있지 않았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
스피커로 변경된 폰에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철아.]그 목소리에 지부장이 눈을 크게 떴다.
[형이야.]지부장이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강현… 선배입니까?”
[그래.]센터장 영감.
내가 가진 인맥 중 가장 끝발 죽여 주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