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6
6화 내가 그럴 일 없게 해 줄 테니까
어떻게 하지? 아버지한텐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아버지가 어디 가서 아무 말이나 하고 다닐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말하기 꺼려지는 부분은 얼마든지 있었다. 내가 그쪽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짓들을 들으시면, 당연히 이해는 하시겠지만 한편으론 안타까워 하실 테니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제가 도와줬어요.”
그때 클레어 씨가 말을 맞춰 줬다.
“그랬군요.”
“괜한 참견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덕분에 악성 재고를 버리는 일 없이 처리했으니까요. 공부도 되었고요.”
후우. 아버지와 클레어 씨가 대화하는 사이에 나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식사 후 설거지도 내 몫이었다. 아버지는 고된 식당 일을 하고 오셨으니 피곤하시고, 클레어 씨는 손님인 데다가 동생의 은인이니 손에 물을 묻힐 순 없는 법이었다.
이럴 때 도은이가 있었으면 시켜 먹는 건데.
수세미에 퐁퐁을 뿌리고 그릇을 닦는데 클레어 씨가 내 곁에 다가왔다.
“도율 씨.”
“예.”
“나중에 저랑 얘기 좀 해요.”
“…예?”
내가 뭐 잘못했나?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에서 티비를 보며 적당히 시간을 때웠다. 전자 기기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 보니 광고만 봐도 재밌었다.
“예? 무한도적 폐지했어요?”
“그래.”
“그럼 지금 저 우재석이랑 PD랑 하는 건 뭐예요?”
“그건 놀면 뭐 하냐.”
“…그냥 멤버 없는 무한도적 아닌가?”
그러다가 병실에서 봤던 광경이 떠올랐다. 도은이는 분명 태블릿으로 무한도적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께 그걸 설명드리니, 그건 또 브이튜브라는… 인터넷으로 보는 티브이라고 했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네.
클레어 씨는 티브이를 보면서도 말을 하거나 웃지를 않았다. 이 사람은 지금 뭐 참선 수행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보다 못한 아버지가 선언했다.
“이제 너흰 슬슬 들어가 봐라. 난 슬슬 자야겠다.”
“전 어디서 자면 돼요?”
“무슨 소리냐. 우리 집에 너 잘 데 없어.”
“예?”
그러고 보니 방이 두 개뿐이었다. 하나는 아버지 방일 거고, 나머지 하나는 도은이 방이겠지.
“어… 도은이 방에서 자면 안 돼요?”
“걔가 허락하겠냐?”
“…아뇨.”
방에 금괴라도 숨겨 둔 건지, 걔는 중학생 때부터 자기 방에 들어가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한창 때 여중생이 그렇지, 뭐. 걔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애 같으니 그 시절 그대로일 거다.
“그럼 저는요? 길바닥에서 자다가 입 돌아가면 어떡해요?”
“클레어 씨네 댁에서 신세 지면 되잖냐.”
“클레어 씨……?”
내가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은이가 그렇게 말하던데. 얘기가 되어 있는 거 아니었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뭐, 어떠냐. 어차피 두 사람은 서류상으론 부부인데.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거다.”
그게 그렇게 되나? 하지만 부부라는 건 겉보기의 관계일 뿐이고, 실제로 우린 오늘 처음 본 남남이나 다름없다. 10년 전에 머물러 있는 내 사고방식은, 도포 걸치고 다니던 시대를 겪고 와서 더더욱 굳어졌다.
그때 아버지가 통화가 걸려 있는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받아 봐라.”
화면엔 딸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여보세요.”
[엉, 오빠.]“나 네 방에서 자도 되냐?”
[죽을래?]단칼에 거절당했다.
“그럼 어쩌라고. 진짜 클레어 씨네 집에서 신세 지라고? 그게 말이 돼?”
[왜 안 돼? 오빠 매니저 하기로 했잖아.]“그 매니저라는 게 집까지 같이 사는 직업이었냐?”
[음, 그냥 숙노라고 생각해. 숙식 노가다. 어차피 잘 데 없는 오빠한텐 딱이잖아.]“…….”
나는 주변을 살피고 듣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다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보고 손대면 죽는다며.”
[죽지.]“근데 이래도 돼?”
[응? 아~ 오빠가 말뜻을 좀 잘못 이해했나 본데. 그거 경고한 게 아니야. 주의 준 거지.]“뭐가 다른데?”
[잘 생각해 봐 봐. 우리 언니는 S급 헌터란 말이야. 오빠 같은 일반인이 트럭으로 덤벼도 손가락 하나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그렇구나.
헌터도 각성한 능력과 훈련 방향에 따라 포지션이 나뉘어서 근접 전투에 자신이 있는 전열과 원거리 포격에 치중된 후열이 있다. 그리고 전투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지원가 계열이 있고.
하지만 S급 정도 되면 이미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기만 해도 포지션을 불문하고 일반인을 아득하게 상회하는 전투력을 가진다.
클레어 씨가 어떤 헌터인지는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S급이라고 하는 걸 보면 적어도 그 정도 수준은 갖췄다는 뜻이다.
[오빠, 잘못 건드리면 진짜 죽어. 나는 그런 부분에 관해선 절대 커버 안 쳐 줄 거니까 알아서 처신 잘하라고. 알간?]“…확인.”
[좋아요. 어차피 오빠가 하는 일은 연예계로 치면 로드 매니저에 가까울 거야. 그러니까 언니네 집에서 먹고 자는 게 좀 더 효율적이지. 다 오빠 편의를 봐줘서 이러는 거여.]“알았어.”
[그럼 내가 연락할 때 언니 태우고 내가 찍은 장소로 쏴 주면 돼. 그럼 끊어.]또로롱 하고 스마트폰 화면이 통화 목록으로 빠져나왔다. 통화를 마친 폰은 아버지께 돌려드렸다.
아버지는 현관 앞에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아들 내외를 배웅하는 기분이구나.”
“나오지 마세요.”
“그래. 멀리 안 나간다.”
나가기 직전 아버지가 클레어 씨를 불렀다.
“클레어 씨.”
“네.”
“못난 아들놈이지만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신세 지겠습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클레어 씨가 말수가 적어서 그렇지, 의외로 어려운 말도 다 한다. 일상 회화부터 시작해서 이런 예의 차려야 하는 말까지 다.
현관문을 나서고 또 예의 그 어플로 택시를 예약하는 클레어 씨에게 물었다.
“한국말 되게 잘하시네. 온 지 얼마나 됐어요?”
“한 10년 됐나…….”
“근데 김치는 물에 씻어 먹어요?”
“뭐라고요?”
“…아니, 아닙니다.”
이분은 이제 동생의 사장님을 넘어서 내 사장님이기도 했다. 심기 거슬러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택시가 도착하자 나는 문을 열고 허리를 굽혔다.
“타시죠.”
“…왜 이래요?”
“사장님한텐 원래 이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평범하게 해요, 평범하게.”
평범한 거 좋지. 괜히 눈에 띄거나 미운털 박히면 고생한다는 건 이미 겪어 봐서 잘 알고 있으니, 이제 내 인생의 목표는 평범하게 살다가 침대에 누워서 죽는 거다.
사장님 마인드가 나랑 잘 맞네.
* * *
돈 좀 번다는 동생이 아버지 차도 바꿔 주고, 집도 제법 괜찮은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런 동생이 사장님으로 둔 여자는 얼마나 대단한 집에 살고 있을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이는 오피스텔이었다. 현관문이 아니라 오피스텔 들어가는데 카드를 찍고 들어가야 했다.
고급스러운 복도를 자연스럽게 뻗어 나가는 그녀를 보면 드라마가 따로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구경하는 맛이 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집은 들어간 직후엔 복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복도를 따라 걸어 한 차례 꺾으면 한쪽 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 거실이 나타났다.
…압박 장난 아니네.
바닥은 무려 대리석이었다. 그런데도 차갑지 않고 적당히 따뜻했다. 아마 열선이 깔려 있는 듯했다.
“받아요.”
클레어 씨는 내게 검은 카드를 건넸다. 그녀가 오피스텔 정문이나 현관문, 심지어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사용하던 카드였다.
“이건?”
“스페어 키예요.”
내가 알던 사이에 열쇠라는 뜻이 많이 변했나 보다. 내가 보기엔 아무리 봐도 그냥 카드로만 보이는데.
“방은 저쪽 방을 쓰시면 되고……. 안에 침대나 이불도 다 있으니까요.”
“혼자 사는 거 아니었나요?”
“가끔 도은이가 와서 자고 갔거든요. 사 둬도 한 침대에서 자느라 몇 번 안 썼지만.”
이쯤 되면 누가 누구랑 혈연인지도 헷갈린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런 건 됐다니까…….”
사장님은 질색을 했지만 그러니까 오히려 더 하고 싶어졌다. 놀리는 맛이 있다.
그러던 클레어 씨는 별안간 안색을 바꾸고 물었다.
“그런데 내가 아까 둘이서 얘기 좀 하자고 했죠.”
“어… 뭐죠? 연봉 협상?”
“기오르그.”
생각났다. 오늘 내가 요리했던 고기의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설명하시길, 맛은 좋지만 칼이 안 들어서 냉장고에서 자리만 차지하던 놈.
“지능이 낮고 행동 패턴이 단순하지만, 가죽과 육질이 단단해서 B급에 등재된 몬스터예요. 난이도 때문에 하향 조정 당한 거니까, 실제로 내구도만 따지면 B급 헌터라 해도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 어려울 거고요.”
“아하… 그렇군요.”
“제가 이걸 왜 설명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신입 사원을 위한 사장님의 맞춤 강의? 토막 상식?”
“자꾸 개소리하면 자릅니다.”
허억. 나는 숨을 들이켰다.
지금까지 과묵한 모습만 보여 주던 클레어 씨가 처음으로 과격한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하긴, 단순히 조용하고 얌전한 여자였다면 도은이랑 어울려 다닐 리가 없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뭐죠? B급 헌터도 상처 내기 힘든 육질을, 단순한 식칼 하나 들고 자연스레 썰던 건. 10년 동안 모습을 감추고… 뭘 했죠?”
“그건…….”
망설였다.
클레어 씨에게 만이라면, 내가 겪은 일을 말해 봐도 되지 않을까? 그녀는 헌터다. 내 말을 믿을 가능성도 높았지만, 내가 한 일을 무던하게 받아들일 가능성도 높았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내 상상에 불과하니, 도율 씨는 맞다 아니다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무슨……?”
클레어 씨는 눈을 내리깔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까지, 각 길드에서는 암암리에 [촌철]이라 불리는 집단을 양성하곤 했습니다. 이 집단이 뭐 하는 집단인지 들어 보셨나요?”
“아뇨.”
“그러시겠죠.”
촌철.
한마디 칼이라는 뜻.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말에 대한 사자성어다. 한마디 칼로 사람을 죽인다는 뜻은, 짧은 말로도 사람을 상처 줄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헌터 길드에서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보기엔 그들은 말보다 주먹이 가까운 집단이다.
“적대 세력에 대한 첩보, 공작, 숙청을 담당하는 블랙 옵스 집단이죠.”
역시나.
클레어 씨는 내가 단숨에 이해할 줄 알았다는 듯 바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헌터는 인류 최고의 병기입니다. 몬스터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데에도 최적이죠. 하지만 양지에서 활동하는 헌터는 강하면 강할수록 더더욱, 카메라와 시선이 따라다니기 때문에 암살을 사주하기엔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럼 길드들이 선택한 방법은 뭘까요?”
“…육성하는 거겠죠, 사람 잡는 헌터를.”
“맞습니다. 원래 기습과 다굴에는 장사 없는 법이니까요.”
그 무서움이라면 나도 알고 있다.
살수 집단은 단순히 개개인이 강한 게 무서운 게 아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작전 수행 능력과 집단 활동에서 오는 빈틈없는 포위. 그리고 언제 습격당할지 모른다는 데에서 오는 피로함이 무서운 거다.
의외였던 건 헌터를 인공적으로 육성하는 방법이 있다는 거였다.
“위험한 약을 쓰면 일반인도 마력을 폭주시켜 헌터로 만들 수 있다고 하더군요. 살아남을 확률은 1할 미만. 그마저도 폐인이 될 수도 있고요.”
처음 들어 보는 얘기였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사회에 혼란이 오기 때문에 통제 중인 정보겠지. 1할 미만의 확률을 뚫고서라도 헌터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거나, 이런 저런 불안이 피어오를 게 뻔해 보였다.
“부작용으로는… 글쎄요, 기억이 오락가락한다든가.”
그 말을 하며 클레어 씨는 나를 바라봤다.
“아직도 남아 있는 건가요? 그런 자들이.”
“협회에서 대대적으로 소탕 작전을 벌여서 발견하는 족족 쓸어버렸죠. 그러자 길드들도 각자 알아서 이미 있는 집단을 ‘폐기’하기도 했고요. 물론 살아남은 이들이 몇 있을 지도 모르지만.”
클레어 씨는 다 안다는 듯이 입가를 끌어 올렸다.
“어쩌면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르고요.”
이쯤 되면 나도 그녀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건지 이해했다.
“흥미로운 얘기 잘 들었습니다. 근데 전 클레어 씨가 말한 그런 집단과는 연이 없어요.”
“그렇겠죠. 연은 모두 잘라 내고 나왔을 테니까요. 과거가 밝혀지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위험하니 어디 가서 함부로 발설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고요.”
“…….”
깨달았다.
이건 아니라고 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이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저도 도은이가 위험해지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아, 예…….”
“하지만 경고하는데, 당신이 남들 앞에서 힘을 드러내면…….”
그건 내 가족을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다. 실제로 내게 그런 과거는 없지만. 클레어 씨처럼 생각하는 인간이 또 나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내가 먼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지도 몰라요.”
“…예?”
“농담이에요.”
농담이라고 말하는 클레어 씨에게 나는 긴장된 태도로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그래도 S급 헌터와 대적하고 싶진 않았다.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긴장한 내게 클레어 씨가 입가를 비스듬하게 끌어 올리며 위로했다.
“내가 그럴 일 없게 해 줄 테니까.”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그 티브이에서 나오던 걸크러신가 뭔가 하는 그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