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60
60화 어차피 이건 연기니까
“잠시 둘이서 통화해도 괜찮겠나.”
지사장 지성철이 도율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클레어와 함께 방을 나섰다.
두 사람이 방을 나서자 지성철이 도율의 전화기에 대고 다시 한번 물었다.
“강현 선배입니까?”
[그래.]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각성자 지원 센터 센터장, 최강현의 것이었다.
국제 헌터 협회의 한국 지부 지부장 자리에서 국내 헌터들의 대통령에 가까운 존재, 지성철. 단순한 지위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세워 온 업적과 공 또한 대단했다. 대부분의 헌터들이 그런 그를 우러러보거나 두려워했다.
그러나 지성철에게도 그러한 대상이 있다. 하늘 같은 선배이자 살아 있는 전설, 최강현이었다.
“아직 정정하시군요.”
[누구 놀리냐? 한창이야, 이 녀석아.]지성철 역시 각성자라 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보다 선배인 최강현은 이미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었다. 은퇴하고 한가로운 여생을 보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강현은 각성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센터를 설립했다. 그리고 본인이 가장 앞장서서 활동하고 있었다.
지성철은 최강현의 그런 점을 존경했다.
“설명해 주시죠, 이도율과는 어떤 관계인지.”
[내 직속 조직의 일원.]“이렇게 젊은 친구가요?”
[예끼. 젊어야 나 대신 뼈 빠지게 뛰어다닐 거 아니냐. 나도 이젠 삭신이 쑤셔.]“엄살은……. 방금 전에 한창이라 말해 놓고.”
최강현이 너스레를 떨자 지성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선배가 이 친구 과거를 지운 겁니까?”
[…그런 셈이지. 아무래도 작전 내용은 모두 극비이다 보니까.]그 부분은 이미 도율과 최강현이 말을 맞춰 놓은 부분이었다. 실종이라는 알리바이를 지우기 위해 보다 오래전부터 센터장 직속 비밀 부대 ‘현학’의 일원으로 활동해 왔다고 치기로.
“그렇다면…….”
10년간 실종 된 게 아니라, 비밀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했다는 뜻이 된다.
지성철이 물었다.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오로지 작전 수행을 위해 10년이나 자취를 감췄단 말입니까? 범상치 않은 결단력이군요.”
[음…….]“제아무리 대의와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비정하리만치 철저한 친구군요.”
지성철은 자신 역시 남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보상이나 보답을 마다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이도율이라는 남자는 가족조차 알지 못하게 10년이나 국가를, 인류를 위해 싸워 온 것이다. 그것도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는 베일을 뒤집어쓴 채로. 명예가 아니라 긍지를 위해서.
“그럼 왜 은퇴한 것도 아닌데 지금은……?”
[어, 그건…….]도율은 아직 현학 소속이었다. 앞으로도 활동할 예정이었다. 지난 10년 익명으로 활동하던 그가 실종 신고를 무르고 다시 나타난 이유가 뭘까.
물론 이유라면 이것이 모두 다 짜 맞춘 이야기에 불과하고, 도율이 실제로 그날 다른 차원에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철은 그 이유를 짚어 냈다.
“설마, 여동생 때문……?”
[…뭐라고?]지성철이 어깨와 턱으로 전화기를 누르며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런가……. 여동생이 병에 걸리자 치료하기 위해 다시 나타났지만, 기밀 조직 소속이기 때문에 힘을 발휘할 순 없었고. 클레어와의 혼인을 통해 법적 제한을 우회하는 방법밖에 없었나.”
가족의 목숨과 주어진 사명. 두 가지 사이에서 고뇌하는 도율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 그거닷!]“역시 그랬군요.”
지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금니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지성철은 공정하고 올곧은 사내였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다. 애국심, 가족애, 전우애와 같은 것들을.
그리고 지금도, 그 모든 이야기가 그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자각 없이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 건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 그래. 잘 부탁하고.]달칵.
통화가 종료되었다.
지성철이 지부장 집무실을 나가자 문밖 복도에 도율과 클레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율이 지성철이 건네는 전화기를 받으며 물었다.
“이젠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그래, 믿지. 믿고말고.”
지성철이 도율의 어깨를 두드렸다.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지만, 어쩐지 눈빛이 뜨거웠다.
그런 지성철의 반응에 도율과 클레어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자기만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지 확신을 갖고 싶다는 게 느껴졌다.
이어서 지성철이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이만 가 봐도 되네. 이 일은 내 선에서 확인한 걸로 처리하지.”
“…아, 예. 감사합니다.”
도율이 떨떠름하게 인사했다.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잘 풀렸으니 됐다. 그렇게 위안하며 클레어와 함께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또 보길 기대하지.”
“…….”
아니, 전 다신 보고 싶지 않은데요.
턱밑까지 그 말이 차올랐다.
* * *
“잘 해결됐다고? 진짜?!”
“그래.”
“다행이다~”
도은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무릎을 굽혔다.
협회 지부장과의 대담이 끝난 후, 클레어를 데리고 도은이와 합류했다.
클레어와 도은이가 이번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통보했다.
“그럼 난 간다.”
“잠깐!”
이 이후의 일은 매니저인 도은이가 알아서 할 거라고 생각해 자리를 뜨려는 순간, 도은이가 나를 불러세웠다.
“가지 마 봐.”
“왜?”
“지금부터 작전 회의 할 거니까.”
“작전 회의……?”
의문을 담아 되풀이하자 도은이가 손가락을 위로 뻗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잘 넘어갈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그런 일이 없으리란 법이 없잖아.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대책을 세워야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정도로 당연한 말이었다. 다만 궁금한 것 한 가지.
“나도?”
“너도.”
도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이번 일의 당사자였다. 의견을 정하는 자리에 같이 있는 게 여러모로 낫겠지.
“알겠어.”
우리가 향한 곳은 카페였다. 커다란 곳이어서 야트막한 파티션으로 분리된 좌석도 있는 곳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에서 중요한 얘기를 해도 되나 싶었지만.
클레어가 목에 찬 펜던트를 가리켰다. 예의 그 목걸이였다. 거기에 정체를 숨기는 것 외에도 작은 방음벽을 세우는 기능도 있다는 설명과 함께.
…그거 진짜 쓸모 많네.
주문한 음료와 함께 우리가 머리를 맞댔다. 물론 회의를 주도하는 건 도은이였다.
도은이가 진지한 얼굴로 운을 띄웠다.
“우선 두 사람 다 미안.”
“…갑자기 뭔데?”
“둘이 결혼하게 된 건 나 때문이잖아. 내가 병 같은 거에 걸렸기 때문이고. 특히 오빠한테는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으니까…….”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니 기분이 불편했다.
“됐어. 그땐 내가 없었잖아. 따지고 보면 연락 한 번 없었던 내가 미안하지.”
“그럼 안 미안하고.”
“이년이.”
이번엔 클레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내가 실종된 건 또 그녀에게 지분이 있기 때문이다.
“…나 때문이야. 도은이 네가 병에 걸렸던 것도. 도율 씨가…….”
사라졌던 것도. 클레어가 나를 보며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내 선택이었다. 옛날, 클레어 대신 균열 속에 몸을 집어 던진 건. 본래는 두 사람 다 무사하길 바라고 한 행동이었고, 실패한 건 내 책임이다.
세 명 모두 침묵하자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러자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역시 도은이였다.
“자, 그럼 반성들은 다들 충분히 했지?”
도은이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지금부터는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 봅시다. 후회하긴 싫으니까. 그치?”
클레어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대책이라 해도, 내가 쓴 방법은 오늘처럼 개인적인 자리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밝히기엔 부담스러운 수단이었다. 영감에게도 폐가 될 거고.
도은이가 무슨 생각이 있는지 얘기를 꺼냈다.
“내가 보기에 이 일은 두 사람이 진짜 부부처럼 보이는 행동을 보여 주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봐.”
“진짜 부부… 라고?”
도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문을 느낀 내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데? 우리가 뭐,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서류상으로 정식으로 혼인 신고서를 올린 정식 부분데.”
“안 하잖아.”
“뭐?”
“전혀 안 하잖아, 연기……!”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클레어와 부부라는 이야기를 말로는 잘도 떠들고 다녔지만, 거기까지였다. 결혼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건 거짓말도 아니었다. 정식으로는 부부 관계일 테니까.
그러나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정말 둘이 부부냐고 의심하는 말에 “네 그렇습니다.” 하고 정면 돌파한 적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 아직 신혼이야, 신혼. 깨가 떨어져도 한창 떨어질 때라고. 근데 남들이 보면 어떤 줄 알아? 어색하고 데면데면하지. 잘 봐줘도 편한 직장 동료 사이가 다야. 이런데 남들이 의심을 안 하고 배기겠냐고!”
도은이가 손바닥으로 테이블 위를 탁탁 두드렸다.
“그러니까 뒤를 파 보는 거 아니야. 애초에 둘이 알콩달콩 눈꼴사나운 닭살 커플처럼 굴었으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걸?”
…과연 그럴까?
협회 지부장 앞에서 클레어와 애정 행각을 벌였다고 가정해 보면, 지부장은 과연 어떻게 반응했을까. 왠지 정색하다가 그대로 쫓겨났을 것 같군.
그 전에, 애초에 전제부터 틀려먹었다.
“가능한 걸 바라야지.”
“왜 불가능한데?”
당사자가 아니라고 막말하기는.
“저기, 그런 건 좀…….”
클레어도 난색을 표했다.
“이거 봐. 2대 1이잖아. 기각.”
배우 둘이 모두 못 하겠다고 하면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도은이가 클레어를 가까이 끌어당겨 귀에 무슨 말을 속닥거렸다. 궁금했지만 훔쳐 듣진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내용이었던 건지, 클레어는 입장을 바꿨다.
“…필요하다면.”
적극적이진 않아도 찬성하는 쪽으로 돌아선 거다.
도은이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자, 어때. 이젠 그쪽이 1이지?”
“…….”
당신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야.
클레어를 바라보자 그녀가 내 시선을 피했다. 뭔가 약점이라도 잡힌 건지…….
도은이는 마지막으로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나도 남들 앞에서 깨 방정 떨라는 소리는 안 해. 내 말은 증거 자료를 좀 철저하게 준비하자, 이거지.”
“증거 자료?”
“예를 들면……. 오빠 카톡 프사 봐 봐.”
도은이의 말에 메신저 앱을 켜 프로필을 확인했다. 프로필 사진이란 건 등록하기 전까진 동물 이모티콘이 기본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 상태가 그러했다.
“글렀구만……. 언니 것도 봐 봐.”
클레어의 프로필은 평범했다. 어디 인터뷰할 때 찍은 사진인지 제법 괜찮은 걸 골라 놨다. 이런 걸 설정해 두는 타입일 줄은 몰랐는데.
“…내가 해준 거 그대로네.”
그런 거였나.
문득 저번에 했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강혜원 기자였나. 친구인 진호 대신에 인터뷰를 하러 왔던 사람.
“증거라면 그 인터뷰도 있잖아.”
“그거 완전 사무적이야. 안 봤어?”
도은이가 기사를 검색해 보여 줬다. 정식 인터뷰 기사는 단 하나뿐이었다. 기자 이름도 내가 아는 그 이름이 맞았고.
기사 내용은 제법 담담했다. 쓸데없는 내용은 확실히 넣지 않았고.
이 기자, 프라이버시를 굉장히 잘 지키는군.
“아무튼, 결정이다.”
도은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단은 프로필 사진을 찍으러 가자.”
* * *
“자, 들어가.”
도은이가 클레어를 천막 너머의 공간으로 밀어넣었다.
도은이가 데려온 곳은 즉석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관이었다. 겉보기엔 화장품 가게처럼 생겼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예전에 유행했던 스티커 사진기가 요즘 다시 유행하는 듯한 느낌이다.
“뭘 멍하니 보고 있어? 너도 들어갓!”
도은이가 등 뒤를 퍽하고 밀쳤다.
막상 안에 들어와 보니 내부 공간이 생각보다 좁았다. 벽에 붙은 클레어와 어깨가 닿을 듯했다.
나는 천막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도은이에게 물었다.
“여기 너무 좁은데, 다른 곳…….”
“없어, 없어. 다 꽉 찼어. 내가 봤어.”
“…….”
그때, 안쪽에서 누군가 팔을 잡아당겼다. 누군가라고 해도 클레어밖에 없겠지만.
“괜찮아요.”
안으로 다시 끌려 들어온 내게 그녀가 말했다.
“어차피 이건 연기니까.”
연기.
그렇게 말한 클레어는 점점 거리를 좁혀 왔다.
“그렇죠?”
그러면 뭐든지 가능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