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70
70화 이거 내 피 아니야
“자. 봐라.”
서랍에서 꺼낸 유리병을 탐정에게 던졌다. 탐정은 그 정체를 곧바로 파악하고 물었다.
“이거, 어디서 났죠?”
“토너먼트 예선전 통과하니 주더라, 나한테 도움이 될 거라면서.”
“아크투러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탐정은 한쪽 눈을 감고 유리병 속의 내용물을 빛에 비춰 보았다. 병 속의 액체는 선명한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너무 진하지도, 투명하지도 않았다. 그 속에 흩뿌려 놓은 듯한 반짝임을 머금고 있었다.
건물에서 만난 남자가 사용하던 물건과는 사소한 부분이 달랐다. 그건 색이 탁하고 질척한 듯한 질감이 느껴졌다.
탐정이 내게 설명하듯 중얼거렸다.
“품질이 다르네요.”
“품질?”
“네, 이쪽이 훨씬 더 상등품이에요.”
나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쪽을 전문적으로 조사하던 사람의 증언을 들으니 더욱 확실해졌다. 이 안에 담긴 마력이나 파장의 순수함이 한층 뛰어난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럴 것 같았어. 아무래도 그 건물에선…….”
“상등품을 쓸 분위기가 아니었죠.”
그 건물에서 벌어지던 짓을 떠올려 보면, 놈들은 일반인에게 부스터를 주사해 각성자가 될 수 있는 소체를 모으고 있을 뿐이었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그런 곳에 굳이 좋은 물건을 낭비할 이유가 없죠.”
그 대상은 누구여도 좋은 무작위에 가까웠다. 그런 곳에서 품질이 좋은 물건을 마구잡이로 소모할 것 같진 않았다.
반면 이건 내가 토너먼트 예선전을 통과하고 받은 물건이었다. 나름대로 어떠한 기준선을 통과했다는 의미에서 준 거라고 봐도 되려나.
“그런 좋은 물건을 왜 나한테 준 건데?”
“글쎄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한번 맛보기로 써 보라고 준 다음, 이걸 빌미로 투기장 죽돌이로 만들고 싶다든가. 아니면 아예… 조직의 일원으로 써먹는다거나.”
내가 받은 부스터는 뛰어난 정제 과정을 거친 녀석이었다. 효과는 강하고 부작용은 덜한 귀한 물건.
그런 물건에 한 번 손을 대 보면 다음에도 사용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였다. 혹은 부스터 자체에 중독성을 심어 놨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부스터에 목을 매게 만든 다음, 아크투러스의 유명인사로 삼아 흥행을 위한 재료로 사용하거나 조직의 명령을 따르는 개로 만든다는 뜻이었다.
“근데 전 이런 거 못 받았는데요.”
“그래?”
“네, 품질을 보아하니……. 아마도 예선전을 통과했다고 그냥 주는 게 아니라,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 준 주요 인물에게만 몰래 뿌린 것 같아요.”
예선전에서 나는 다른 참가자들을 모두 한 합에 정리했다. 눈앞에 있는 녀석을 빼고.
“압도적이라…….”
물론 그게 내 전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크투러스 운영 측에서 내 실력을 높이 살 정도로는 보였다는 뜻이다.
“어쨌든 더 자세히 파 보려면 운영하는 조직이란 걸 만나 봐야겠군.”
“네, 그리고 가능하면 높이 올라갈수록 높으신 분과 만날 수 있게 되겠죠.”
그런가.
결국 해야 할 일은 처음부터 변한 게 없었다. 영감이 부탁한 대로, 토너먼트의 우승을 차지하고 그 상품을 수령하는 것.
“목표는 우승. 간단해서 좋네.”
그러자 탐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봤다. 토너먼트 우승을 맡겨 놓기라도 했냐는 듯이.
실제로 난 해낼 자신이 있었고, 탐정도 내가 평범한 각성자 수준을 벗어났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부분에 대해 가능성을 논하는 얘기 따윈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탐정이 물은 건 내 의중이었다.
“왜 도와주는 건데요?”
“뭐?”
이 녀석, 내가 자길 도와주기 위해 행동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가.
“내가 너 하나 돕자고 이러는 거겠냐.”
“…아닌가요?”
“당연히 아니지. 나도 할 일이 있는 사람이라고. 이번엔 우연히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치게 된 거고. 그러는 너도 생판 남인 사장님을 도와주려 했잖아.”
“그건……. 으으.”
지금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만. 조직과 부스터 사이의 관계가 밝혀지기 전에는 둘은 무관한 일처럼 보였다. 그래도 탐정은 사장을 생각해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팀플레이 하자는 거지. 힘 쓰는 건 내가 하고. 조사가 필요한 일은 네가 하고.”
이게 바로 적재적소가 아닐까?
손을 내밀었다. 탐정은 내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인 후 맞잡았다.
“좋아요. 그럼 잘 부탁해요, 조수.”
“…왜 내가 조수냐?”
내 질문에 탐정이 방긋 웃음 지었다.
* * *
“긴장하지 말고, 화이팅하세요!”
아크투러스 토너먼트의 본선전이 펼쳐지는 날. 선수 대기실에 찾아온 탐정이 내게 응원의 말을 건넸다.
“지는 광탈해 놓고…….”
“헤헤.”
탐정이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본선전은 4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A, B, C, D 그룹이라 불렸다. 그리고 나보다 앞선 그룹에 속한 탐정은 첫 대진이 시작되자마자 항복했다.
힘 쓰는 건 내가 하기로 했지만, 그렇게 냉큼 내동댕이칠 줄은 몰랐다.
내가 아니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탐정이 급하게 항변했다.
“아, 아니! 분명 저도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고요! 근데 상대로 그 덩치가 나오는 건 반칙이죠! 체급부터가 아예 안 맞잖아요!”
“그렇긴 하지.”
“거보라니까요!”
나는 탐정이 속했던 A 그룹 대진이 있던 날을 떠올렸다.
탐정의 첫 상대는 제법 유명한 사람이었다. 소위 말하는 ‘랭커’라고 불리는 자들. 아크투러스 투기장에서 이미 이름을 날린 이들 중 하나였다.
탐정이 조금 작달막한 편이지만, 상대는 그 2배를 가볍게 웃도는 키를 갖고 있었다. 자세가 구부정했는데도 그랬다. 키만 큰 게 아니라 커다란 근육이 덩어리처럼 붙어 있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손가락 하나가 탐정의 팔뚝 정도의 크기로 보일 정도였다.
얼굴에는 눈구멍만 뚫린 칠흑의 철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데드 페이스’라 불리는 자였다.
그를 앞에 둔 탐정은 안색이 새파래진 채 딸꾹질을 하더니 경기 시작을 알리자마자 재빠르게 항복을 외쳤다. 현명하다면 현명한 판단이었다.
“의외긴 했어.”
“제가 항복한 게요?”
“그게 아니라. 그 데드 페이스라는 녀석.”
데드 페이스는 탐정이 항복을 외치자마자 움직임을 멈추고 경기장을 내려갔다.
“랭커라면 흥행을 유도하기 위해 연약한 여자를 갖고 노는 장면이라도 연출할 줄 알았더니.”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린 말아 주세요.”
탐정이 그때 생각이 나는지 몸서리를 쳤다.
당사자는 몰라도 적어도 관객들은 그걸 원하는 듯했다. 괜히 이런 곳까지 와서 싸움 구경을 하는 게 아니었다. 양지에선 볼 수 없는 피에 젖은 광경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리라.
그러나 데드 페이스는 그런 관객들의 기대를 단숨에 저버렸다.
랭커라는 자가 항복 신호에 곧바로 수긍할 줄은 몰랐다. 생긴 것만 보면 머릿속에 싸움밖에 안 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신사적인 대응이었다.
그때 대기실 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여우 선수, 입장해 주세요.”
“예.”
문을 열고 직원이 안내했다. 내게 부스터를 전해 준 직원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입장 통로를 지나 경기장에 다다르자 관중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스피커를 통해 해설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등장했습니다! 이번 토너먼트에 혜성처럼 등장한 기대주, 여우입니다!]“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다!”
“너한테 전 재산 다 걸었다고!”
사각 경기장 위에 오르자 상대 선수의 모습이 보였다. 나보다 먼저 입장한 건지, 미리 도착해 있었다.
상대는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었다. 조금 휘어 있는 칼집과 예스러운 옷차림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상당히 독특한 남자였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삿갓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느껴지는군.”
“……?”
“상대로 손색이 없는 실력자라는 사실이.”
상대가 손가락으로 삿갓을 들어 올렸다. 그는 입에 갈대를 물고 있었다.
“방랑검객이라 하외다.”
“…….”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런 차림에 저런 말투를 하는 놈은 저쪽 세상에서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다른 건 몰라도, 대체 왜 갈대를 입에 문 거지?
“방심하지 마세요! 저래 봬도 예선전을 통과한 사람이라고요!”
탐정이 외쳤다.
맞는 말이었다. 겉모습이 우스꽝스러워도 예선전을 통과해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실력이 없는 건 아니라는 소리.
[경기 시작합니다!]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미안하지만.”
검객이 다리를 크게 벌려 자세를 낮추고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오른손으로는 손잡이를, 왼손으로는 칼집을.
“처음부터 전력으로 가겠소.”
마력이 휘몰아쳤다. 그 가속도 하나만큼은 범상치 않았다. 마력은 순식간에 절정으로 치달았다.
“파천살룡검 제1식-.”
검객이 칼을 살짝 뽑았다.
“-시공절단섬!”
파앗!
검객이 내 등 뒤로 발소리를 내며 착지했다.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뒷모습만 보여 줄 뿐이었다.
찰칵. 검객이 허리를 펴며 살짝 뽑혀 있던 검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눈앞에서 피 보라가 뿜어졌다.
-푸화아악!
내 상반신을 크게 가로지르는 대각선 형태의 핏자국. 그 사이로 분수와 같은 피가 튀었다. 한 차례 피를 쏟아 낸 후 남은 피가 방울져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그 피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여전히 뒷모습을 고수하던 검객이 목소리를 냈다.
“어리석군. 어째서 아직도 서 있는 거지?”
“……?”
“그런가. 그것이 너의 긍지……!”
“……?”
“파천살룡검은 모든 초식이 살초. 이 이상 계속해 봐야 불필요한 피를 부를 뿐…….”
검객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항복하겠소.”
“…뭐?”
“무의미한 살생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까, 내 영혼에게.”
그렇게 말하며 검객이 경기장을 내려갔다. 장외로 나가는 것은 탈락이었다.
[스, 승자! 여우 선수!]해설자가 뒤늦게 결과를 발표했다.
당연히 관중들 반응은 개판이 났다. 재경기를 요구하는 등 난리였다.
하지만 곤란한 건 토너먼트를 운영하는 측의 입장이었다. 나는 규정상으로 아무런 문제 없이 이겨서 올라가게 됐으니 손해는 아니었다.
대기실로 돌아오자 탐정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었다.
“조수! 괘, 괜찮아요!?”
“호들갑 떨지 마.”
“하, 하지만 피가……!”
나는 수건을 찾아 손과 옷을 닦으며 대답했다.
“이거 내 피 아니야.”
“…네?”
수건으로 닦아 내도 붉은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옷에는 어떠한 손상도 없었다. 여전히 매끈한 옷가지를 보며 탐정이 의문에 빠졌다.
“이게 어떻게 된……?”
“쇼야.”
어처구니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그 자식, 아무것도 안 베고 지나갔어.”
당사자인 내가 진실을 가르쳐 주자 탐정의 표정이 경악에 물들었다.
“네에?!”
“나도 뭐 하는 놈인가 싶더라. 폼은 있는 대로 잡더니 그냥 슥 지나치길래. 그 와중에 이런 장난질을 치고 가더라고.”
관중과 운영 측을 모두 속인 대사기극이었다. 결과를 바꾼 건 아니었지만.
사정을 파악한 탐정도 어이가 없는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다음 경기 나갔다가 돌이라도 맞는 거 아니죠?”
“신경 안 써. 마침 잘되기도 했고.”
“잘되다니, 뭐가요?”
한 가지 좋은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뼈아픈 패배, 약에 의존하기 딱 좋은 사건이잖아.”
“아……!”
승승장구로 이기기만 하는 것보다, 치욕을 겪고 자존심이 상했다는 설정이 좀 더 잘 먹힐 것 같았다.
탐정 역시 동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콘셉 좋은데요?”
검객, 이상한 놈이긴 했지만 쓸 만한 수단을 전해 주고 퇴장했다.
다만 아쉬운 점 한 가지는.
“이거 좀 잘 지워지는 걸로 할 것이지.”
핏자국이 잘 지워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탐정은 가짜 피에 젖은 나 대신 새 옷을 구하러 대회장 바깥으로 향했다.
난 대기실에 앉아 탐정이 돌아오는 걸 기다렸다. 그동안 할 게 없어 모니터 화면으로 보이는 다른 경기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분위기가 경직되었다.
그 이유는 한 남자의 등장 때문이었다. 거적때기를 입은 듯한 옷차림에 산발을 한 머리. 여유가 넘치는 표정으로 올라선 한 참가자.
그가 나타나자 해설자는 물론 관중까지 긴장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나 일부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열광하고 있었다.
누구길래?
[…네, 맞습니다. 이 남자가 돌아왔습니다. 한때 아크투러스를 피로 물들였던 주인공.]남자가 목을 스트레칭했다.
[주혁……!]이름을 불리자 그가 깊게 팬 미소를 만들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