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71
71화 기대해
“어처구니없는 놈.”
경기장 위에 벌어진 참상에 대한 감상이었다.
주혁이라는 놈의 경기는 순식간에, 그리고 일방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녀석은 상대를 향해 접근하고 그 몸을 찢어 버렸다. 말 그대로 팔과 다리를 잡고 몸통으로부터 분리시켜 버린 것이다.
그걸 가능케 한 건 어마어마한 악력이었다. 물론 상대의 저항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 맷집 역시 한몫 거들었다.
만약 운영 측에서 중재하지 않았다면 놈은 상대의 몸을 더 갈기갈기 찢어 버릴 기세였다. 그건 이미 승패를 가리기 위한 게 아니라 취미의 영역이었다. 저열한 쾌감을 만족시키기 위한 폭력성이었다.
“악취미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히 마음에 들 리가 없는 놈이었다.
관중들의 반응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고개를 돌리거나 자리를 피하는 자들도 있었고, 오히려 환호하고 반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누구 하나 문제 삼지는 않았다. 여긴 그런 곳이니까.
이로써 오늘의 모든 경기는 종료되었다. 그에 따라 다들 돌아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더뎠다. 그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주혁이라는 남자가 보여 준 경기 내용 때문이었다.
“옷 사 왔어요!”
탐정이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와 옷이 담긴 종이봉투를 흔들었다.
“근데 분위기가 왜 이래요? 남은 경기가 되게 재미없었나 보죠?”
“…몰라도 돼.”
탐정은 피범벅이 된 경기장을 보고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건 이미 내가 경기를 치를 때부터 그랬으니까, 누가 가짜 피를 뿌린 덕분에.
“갈아입을 거니까 나가 있어.”
“네입.”
탐정이 자리를 비워 주자 나는 웃옷을 벗었다.
“…….”
흉터투성이에 붉은 피에 젖은 몸을 내려다보는 게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그게 비록 익숙한 광경이라 할지라도.
그때 등 뒤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나 아직 안 갈아입었는데.”
“그럼 더 좋지♥”
콧소리를 잔뜩 넣어 간드러지는 목소리.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였다.
어깨 너머로 돌아보자 처음 보는 여자가 내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자기.”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리고 구릿빛 피부. 이곳 출신이 아닌 듯한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여자였다.
“누구지?”
“샤디아라고 불러.”
“샤디아?”
샤디아의 입가가 고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아니면……. 이곳에서 쓰는 이름으로 소개하는 편이 나을까? ‘흑희’라고.”
흑희.
그건 분명히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사장이 소개했던 아크투러스의 랭커들. 우승 후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유명한 강자들. 분명 그중 하나에 흑희라는 이름이 끼어 있었다.
“네가 그…….”
자세히 보니 확실히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다. 가냘파 보이는 몸에 춤추는 자들과도 같은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머나. 여자 몸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다니, 실례야. 응큼하긴.”
“…….”
샤디아가 양쪽 뺨에 손을 올리고 즐거운 듯이 재잘거렸다. 말하는 내용과 달리 조금도 쑥쓰러워하지 않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달리 신경 쓰이는 점은 따로 있었다.
“왜 그래? 좀 더 안쪽까지 보고 싶어서 그래?”
“너, 여기 들어오기 전에 안경 쓴 여자를 못 봤나?”
탐정은 내가 옷 갈아입는 걸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 분명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다. 대기실에 들어오려 하는 샤디아와 마주쳤을 가능성이 높다.
“아, 그 애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샤디아는 탐정과 마주쳤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탐정이 이렇게 쉽게 샤디아를 들여보내 줬을까? 내가 안에서 옷 갈아입고 있다는 걸 빤히 알고 있는데?
“글쎄에……. 본 것 같기도 하구, 아닌 것 같기도 하구. 잘 모르겠네에……?”
샤디아가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늘어뜨렸다.
“너, 뭘 했지?”
내가 압박을 가하자 샤디아는 겁에 질리거나 그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쁘다는 듯이 뺨을 상기시키며 몸을 떨었다.
“아하…♥ 오싹거려.”
“…….”
샤디아가 한껏 만족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농담이야, 농담. 잠깐 재웠을 뿐이야. 장난 좀 쳐 본 거라구. 표정 좀 풀어.”
“…….”
“아, 물론 난 화난 표정도 좋아.”
“…하.”
이거 미친년이다.
어울려 주는 것도 내키지 않아 나는 가능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래서 용건은?”
빨리 이야기를 끝마치고 쫓아낼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샤디아는 의외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없는데?”
“…뭐?”
용건도 없으면서 여기까지 대체 왜 온 거야.
하지만 이번에도 나를 놀리기 위해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샤디아는 정말이라는 듯이 아쉬운 표정으로 토로했다.
“모처럼 눈여겨봐 둔 남자가 싸우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겠다 싶어서 시간 내서 찾아와 봤더니, 너무 시시하게 끝나 버렸잖아. 덕분에 이쪽은 욕구불만이라구. 이거 어떻게 할 거야?”
“기대할 만한 남자가 아니라 실망했나? 그거 미안하군. 그럼 관심 끄고 딴 사람 찾아봐라.”
“실망이라니?”
샤디아가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혔다. 그렇게 살짝 뜬 눈으로 웃으며 물었다.
“내가 바본 줄 알아?”
그리고 날름, 하고 내 몸을 핥았다.
“무슨……!”
“이거, 전혀 피 맛이 아니잖아.”
샤디아가 베에, 하고 혀를 내밀었다.
그야 당연히, 이건 진짜 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몸을 적시고 있는 건 그럴싸하게 만든 빨간 물감에 불과했다. 애초에 내 몸엔 금방 생긴 듯한 상처 따위도 없었다.
“그런 삼류 연극에 속는 건 바보들뿐이지.”
…역시 그런가?
관중들이라면 몰라도, 랭커와 같이 보는 눈이 있는 자들이라면 그게 연극이었다는 걸 충분히 눈치채고도 남았다.
문제는 과연 운영 측도 눈치챘을 것인가다. 가능하면 부스터를 빌미로 좀 더 접근하고 싶은데.
샤디아가 히죽 미소 지었다.
“난 말이야, 자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 어때? 나랑 같이 놀지 않을래?”
“…….”
검은 눈동자 속에 열망이 깃들었다. 이런 족속이 원하는 거라면 뻔했다.
나는 한숨을 내뱉고 물었다.
“어차피 너도 토너먼트에 참가했겠지.”
“응? 그야 그렇지만.”
“그럼 조급해할 거 없잖아.”
어차피 토너먼트를 진행하다 보면 만날 상대다. 내 목표는 우승이니까, 샤디아가 도중에 떨어지는 게 아닌 이상 만날 수 있다.
물론 샤디아 쪽에서 패배해 탈락하는 것까지 내가 배려할 필요는 없었고.
그러나 내 대답에 샤디아가 의아한 투로 되물었다.
“토너먼트라니, 무슨 소리야?”
“준비된 무대가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
그러자 샤디아가 의외라는 듯 웃었다.
“자기, 그런 취향이야? 보기와 달리 대담하네.”
“뭐?”
“사람들 보는 앞에서? 싫진 않지만, 분명 쫓겨날걸. 난 산통 깨는 건 별로야.”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이 여자.
샤디아는 그런 나를 보며 못 말린다는 듯이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머릿속에 뭐가 들은 거야? 싸움 생각밖에 없나 봐?”
“…아니라면 뭔데.”
“남녀가 재밌게 노는 법, 하나 있는데. 몰라?”
샤디아가 손을 뻗어 왔다. 나는 그 손길을 손등으로 가볍게 쳐 냈다.
“우리 오늘 처음 본 사이 아닌가?”
“귀여운 소릴 다 하네.”
샤디아가 입술을 핥았다.
“왜 그래? 그냥 노는 건데. 거리낄 건 아무것도 없잖아?”
“거리낄 거라면…….”
이럴 때, 이런 순간에 그녀를 떠올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부정할 수 없는 건, 지금 내겐 클레어의 얼굴이 떠오르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밖에선 남들 눈을 속이기 위해 연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얼굴 밝히고 바람피우는 거라면 클레어에게도 폐가 되지만, 이곳 불야성에서 가면 쓰고 불장난을 즐기는 것까지 문제로 번질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그런 타산적인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클레어가 그걸 싫어할 거라고 짐작하는 건. 어쩌면 조금 자의식 과잉이라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내가 있다.”
그런 내 거절에도 불과하고 샤디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뭐가 문젠데?”
“…….”
이 여자한테 상식이 통할 거라고 생각한 내가 멍청했던 걸까?
하지만 샤디아는 의외로 마음을 접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여기서 이만.”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라니, 그런 거 없어. 그냥…….”
그냥?
“토너먼트 때 만나서 반항할 힘도 남지 않을 때까지 탈탈 털어 주고, 그 뒤에 가지고 놀아 줄게. 그때까지 지면 안 된다?”
“…뭐?”
어처구니없는 소릴 다 들어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떠나가는 샤디아가 손으로 키스를 날렸다.
“기대해♥”
* * *
“…이제 됐습니다, 대장. 그만두십쇼.”
두 남자가 앉아있는 한 남자의 등에 대고 말을 걸고 있었다.
“행님! 이러다 죽심더!”
고철민과 정하준이었다.
두 사람은 현재 눈에 띄게 수척해진 청진명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에도 청진명은 꼼짝하지 않았다.
“남아일언중천금.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대장……!”
“행님요……!”
움찔.
세 사람이 동시에 반응했다.
코를 찌르는 냄새.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 세 사람 모두 눈치챌 수 있었다. 기억을 넘어 그들의 몸 깊이 아로새겨진 공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왔나.”
청진명이 창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그들을 찾아온 건 양손에 오븐용 장갑을 끼고 냄비를 든 클레어였다.
“왜 여기서들 이러고 있어요?”
“…아, 아무것도.”
“버, 벌써 시간이 이래 됐나.”
클레어가 환한 얼굴로 웃었다.
“마침 잘됐네요. 조금 많이 만들었는데, 두 분도 같이 들지 않겠어요?”
“괘, 괘안타.”
“…배가 불러서.”
“그런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클레어를 뒤로 하고 두 사람이 눈물을 삼키며 멀어졌다. 청진명은 그걸로 됐다는 듯 쓸쓸하게 웃었다.
클레어가 식사 당번을 자처한 이후, 청진명의 팀은 어느새 각자 먹을 걸 구해 오기 시작했다. 클레어를 유독 예뻐하는 송민아조차 그에 관해선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하면 클레어가 요리를 할 이유가 없다. 식사 당번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상황.
결국 클레어가 한 요리를 먹는 건 청진명 한 사람밖에 안 남았다. 그는 ‘팀원들이 막내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각자 식사를 준비하는 상황에서도 당번을 강요하는 꼰대’의 역할을 자처했다.
“오늘 메뉴는 뭐지?”
“부대찌개예요.”
“부대… 찌개.”
대체 왜 부대찌개에서 쉰 냄새가 난단 말인가.
게다가 부대찌개로 말할 것 같으면, 정형화된 레시피랄 게 없는 근본 없는 음식. 클레어의 손을 타면 뭐든지 마구잡이로 변화를 겪지만, 그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메뉴였다.
‘…이도율, 댁과는 꼭 한번 싸워 보고 싶었는데.’
청진명은 숨어서 지켜보는 팀원들이 보다 못해 튀어나오려는 걸 손을 들어 말렸다.
청진명이 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와 봐 랏!’
비주얼을 확인하면 마음이 꺾이고 만다. 청진명이 초점을 푼 채 숟가락을 찌개 속에 담갔다. 그리고 재빨리 입에 넣었다.
…그 후로 움직임이 없었다.
“…대장!”
“행님요!”
팀원들이 튀어나왔다.
“어라? 두 분, 배 안 고프시다면서요?”
“그기…….”
차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지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고 말았다. 청진명의 희생을 헛되이 하는 일. 후회막심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러나 그 순간, 청진명이 입을 열었다.
“…맛있다.”
“예?”
“뭐라꼬예?”
고철민과 정하준이 마주 봤다.
“행님, 진짜 맛탱이가 가 버린 깁니까?”
“…아니, 진짜로.”
“…….”
그 말을 듣고 행동에 옮긴 건 정하준이었다. 그 역시 찌개를 맛보았다. 그 망설임 없는 결단에 고철민이 눈을 찡그리고 말았다.
하지만 정하준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말… 이다.”
“…참말이가?”
정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숟가락을 고철민에게 쥐여 주었다.
고철민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숟가락을 꽉 쥐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이 했던 것처럼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국물만 뜨려고 했는데 손이 마구 떨려 건더기까지 딸려 오고 말았다. 소시지였다.
“크윽……!”
고철민이 두 눈을 질끈 감고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느껴진 건…….
정말로 평범한 부대찌개의 맛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사실 부대찌개란 건 대충 끓여도 맛있는 거였나? 아니면 자유분방한 실력을 가진 클레어와 정답이 없는 메뉴가 만나 기적적인 조화를 이룬 건가?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 맛있다!”
“내가 뭐랬냐! 맛있다 했잖아!”
“…아아.”
“진짜 맛있네! 진짜로!”
세 사람이 얼싸안았다. 음식을 앞에 두고 제사를 지내는 부족민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그 기쁨은 막내에게도 전해졌다.
“막내야! 이건 진짜다!”
“와! 나! 참말로! 와! 허! 참! 참말로!”
“…음.”
세 사람이 감히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기쁨에 복받쳐 들떠 있는 사이, 클레어가 물었다.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그럼 지금까진 사실 별로였다는 건가요?”
“…어?”
세 사람이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