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72
72화 넌 충분히 강해졌다
“다행이라 생각하시나요?”
“…….”
날 안내하던 직원이 물었다.
아크투러스 토너먼트는 4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각 그룹에서 2명을 제외하고 모두 탈락한 상태.
그렇게 남은 8명으로 새로운 대진을 구성하기 위해 추첨을 진행하러 가는 길이었다.
원래대로였으면 내 다음 상대는 같은 그룹 내에서 이기고 올라온 녀석, 그러니까 그 주혁이란 놈을 상대할 차례였다.
하지만 놈은 지금 토너먼트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망나니였다.
주혁.
놈이 상대한 자들은 모두 죽음에 이르거나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상해를 입었다. 무대 매너가 과격하다 못해 선을 넘었다.
그다음 피해자가 나로 정해진 상황에서, 대진 순서를 새로 정하기 위해 추첨하러 가는 게 다행이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어.”
그건 진심이었다.
그런 녀석과 맞붙는 건 기분 더러운 일이니까. 가능하면 만나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승을 목표로 하다 보면 결국 언젠가 꺾어야 할 상대로 나타난다. 그럴 녀석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도 가능한 늦춰지면 좋겠지.
‘…너무 화제가 되는 것도 안 좋으니까.’
영감은 가능한 조용히 우승하길 부탁했다.
강력한 우승 후보. 멈출 리 없으리라 여겨지던 폭주 기관차를 너무 일찍 꺾어 버린 주인공이 되는 건 피하고 싶었다. 변수와 관심은 적을수록 좋다.
그보다는.
나는 앞서 걷고 있는 직원의 뒷모습을 살폈다. 직원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지만, 나는 이 사람에게 용건이 있었다.
“이봐.”
“네?”
“저번에 받은 물건 말인데.”
걸음을 멈춘 직원이 고개를 조금 기울이고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잡아떼는 건가.
아크투러스 직원들 역시 똑같은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어서 겉모습만으로 구별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기감을 통해 내게 ‘선물’을 건네준 사람과 동일한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선물은 부스터.
사용자의 마력을 증폭시켜 주는 약이었다.
“당신 맞잖아.”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하자, 직원은 의외라는 듯 입술을 모으고 감탄했다.
“알고 계셨네요? 그렇담 어쩔 수 없죠.”
직원이 실실 웃었다. 이제야 질문을 들어 주겠다는 태도였다.
“저번에 받은 거, 더 받을 수 있나?”
“그건 좀 어렵겠네요.”
“왜지? 돈이라도 내야 하나?”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돈 받고 파는 물건이 아니라서요.”
“저번엔 선물이라며 그냥 주지 않았나?”
“물론 그랬지만…….”
직원이 비틀린 웃음을 지어냈다.
“사실 수량이 모자라서요. 아무에게나 주긴 어려운 상황이에요. 귀한 선물이라면 줄 상대를 잘 골라야 하는 법이잖아요? 안 그래도 이번 토너먼트엔 쟁쟁한 손님들이 줄을 섰는데.”
그녀의 눈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에 반해 여우 님은……. 예선 때 보여 주신 모습은 확실히 인상적이었지만, 그룹 스테이지에서는 활약이 저조하셨잖아요?”
그룹 스테이지 내에서의 대진을 말하는 거라면, 분명히 힘을 조절하긴 했다.
활약이 저조하든 말든 이겨서 올라가긴 했으니 난 목적을 이뤘다. 하지만 다른 평범한 참가자가 그런 말을 들었으면 성질 좀 냈을 텐데, 간덩이가 보통 부은 게 아닌 모양이다.
게다가 이게 내 전략이었다. 약자로 위장해 더 큰 힘을 추구하는 것.
“그래서 더 원하는 거라고 한다면?”
“…냉정하시네요?”
그런 내 반응에 직원이 묘하게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그건 역시 도발이었다고 시인하는 셈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크게 동요하지 않는 내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그게 퍽 마음에 들었는지, 직원은 한층 진솔하게 대답했다.
“아쉽지만 제가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에요. 선물을 더 받고 싶으시다면……. 남은 경기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시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영감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플레이아데스 길드가 하루아침 사이에 작살 난 후 그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이런저런 조율을 도맡아 하느라 없던 머리마저 다 빠지게 생겼다고 칭얼거리던데.
그래도 벌써 토너먼트는 8강에 접어들었다. 슬슬 요행으로, 대진운이 좋았다는 이유로 올라가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결국 언젠가는 내가 가진 힘을 써야 했다.
시기의 문제였을 뿐.
“…힘내 보지.”
경기장으로 마저 이동했다.
추첨을 진행하기 위해.
* * *
“제때 오는 놈이 없구만.”
금발의 남자가 턱을 괴고 불만을 토로했다.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그 금발의 남자는 이미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짧게 자른 금발 머리에 전형적인 서양 영화 배우와 같은 외모였다.
그렇게 둘이 추첨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해진 시간이 되어도 도착한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거 통성명이나 할까?”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난 토마스, ‘묠니르’ 토마스다.”
“나는…….”
“가명을 쓰고 있다면 그걸로도 좋아.”
“그럼 여우.”
“그래. 반갑다, 여우.”
손을 맞잡자 토마스가 씨익 웃었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말이지. 봤거든, 예선전. 대단하던데? 개인적으론 아주 흥미로웠어. 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그건…….”
“아, 대답은 해 주지 마. 미리 들으면 재미없으니까. 난 딸기는 마지막에 먹는 파거든.”
어떻게 한 건지 알려 주려 한 거 아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토마스는 혼자서도 신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사실 혼잣말을 하는 걸 들어줄 상대가 필요한 것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번에 돌아온 주혁이라는 사내, 너도 봐서 알겠지만 진짜 상대하기 꺼림칙한…….”
“내가 얼마 전에 닭꼬치 진짜 기가 막히는 집을 찾았거든. 이 동네 가게 같지 않게 맥주도 완전 얼음장처럼 차갑더라고.”
“데드 페이스 그 자식은 정말 가면을 한 번도 안 벗는 거 알아? 뭐, 애초에 여기선 얼굴 까고 다니는 내가 더 특이한 거지만.”
“그러고 보니 흑희가 네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고. 분위기가 미남이라나 뭐라나. 얼굴도 아니고 분위기에 그런 게 있는 건가? 걔도 참 특이해……. 나도 무게 좀 잡을 줄 아는데.”
흘려듣던 와중 그냥 넘길 수 없는 내용을 포착했다.
“잠깐. 그 여자한테 내 사진을 보여 줬다고?”
“그래. 그만큼 눈에 띄었거든.”
“…….”
토마스는 실력적인 부분에 대해 말하는 거겠지만, 흑희… 샤디아가 관심이 있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대기실에서 쳐들어왔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골치 아픈 일이 모두 이 남자 때문이라면 원망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어차피 토너먼트에서 이기다 보면 똑같이 벌어질 일이었겠지. 토마스를 원망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뭐야, 내 얘기야?”
어느새 경기장에 도착한 샤디아가 나와 토마스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물었다.
“…….”
“흐, 흑희.”
토마스의 목소리가 깊게 잠겼다. 짐짓 목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투덜거렸다.
“그 정신 사나운 복장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토마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손가락질했다. 샤디아는 반쯤 헐벗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요즘 이런 걸 시스루 패션이라 부른다고 도은이에게 배운 적 있었다.
10년 정도 뒤처진 사고방식을 가진 내겐 조금 진취적으로 여겨졌다. 클레어는 항상 꽁꽁 싸매고 다녔으니까 그런 점에선 편했는데.
문제는 아무리 싸매도…….
…아니, 내가 미쳤나.
“가릴 데는 다 가렸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잖나.”
“아, 시끄러.”
어느새 다른 참가자들도 대부분 도착해 있었다.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데드 페이스를 비롯한 다른 8강 진출자들 모두. 모두 면면은 익혀 뒀다.
와 있는 사람은 모두 7명.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은…….
터벅, 터벅 하고 발소리가 들렸다. 딱딱한 구둣발이 아니라 맨발로 땅을 밟는 듯한 소리였다. 그도 그럴 게, 녀석은 항상 맨손과 맨발이었다.
그림자 진 복도를 빠져나와 더벅머리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여어, 다들 모여 있었군.”
주혁이었다.
그는 씩 입가를 끌어당겼다.
“모처럼 모인 김에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는 거 어때? 어차피 우승은 한 사람뿐이잖아? 이 자리에서 전원 죽고 죽이는 게 빠르고 간편하지 않겠어?”
그 말에 대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샤디아는 재수 없는 새끼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재미없구만.”
주혁이 실망한 투로 경기장에 올랐다.
이로써 비로소 8명의 진출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드디어 추첨을 진행할 차례가 다가왔다.
추첨 방식은 간단했다. 1부터 8이 적인 공을 무작위로 섞어, 각자 뽑으면 된다. 그리고 그 순서대로 대진을 정하는 거였다.
1번과 2번. 3번과 4번. 5번과 6번. 7번과 8번이 각자 8강전을 치른 후 승자들끼리 다시 준결승. 그리고 거기서 이긴 자들이 다시 한번 결승전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내가 제일 먼저 뽑아야지.”
샤디아가 커다란 상자 속에 팔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먹만 한 공을 하나 꺼내 반으로 갈랐다. 그 안엔 3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 후 각자 원하는 순서대로 진행해 모두 공을 뽑았다.
“난 5번이다.”
토마스가 내게 번호를 보여 줬다.
그 외에 데드 페이스란 녀석은 2번. 다른 참가자들도 숫자를 뽑아 2번부터 7번까지, 모든 자리가 채워졌다.
남은 건 단 두 자리. 1번과 8번.
그리고 뽑지 않은 사람은 나와 주혁이었다.
주혁이 선뜻 내게 양보했다. 어차피 누가 뽑든 남은 자리에 들어가게 될 테니 큰 차이는 없었다. 내가 상자 앞에 섰다.
다른 참가자들 역시 긴장했다. 1번과 8번. 완전히 반대되는 위치였으니까. 주혁을 피하기 위해 기도하는 놈도 있을 정도였다.
공을 뽑고 돌리자 반으로 갈라지며 안에 쓰인 숫자가 나타났다.
“8번입니다.”
희비가 엇갈렸다.
“준결승에서 만나겠군.”
토마스의 말이었다. 그가 5번이고 내가 8번이니까, 각자 이기면 서로가 그다음 상대가 된다.
“우린 결승에서 만나야 하고.”
어느새 다가온 샤디아의 말이었다.
그녀가 왜 반대쪽 번호를 뽑은 거냐고 투덜거렸다. 3번을 뽑은 그녀와 8번을 뽑은 내가 만나려면 결승전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쪽엔 자동으로 1번이 된 주혁이 있었다. 그를 첫 번째로 상대하는 건 2번인 데드 페이스. 철 가면을 쓴 덩치 큰 남자였다.
참가자들은 차라리 다행이라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저 둘 중 하나가 떨어진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처럼.
“자기, 약속 잊지 않았지?”
“…….”
그게 무슨 약속이냐. 너 혼자 멋대로 지껄여 놓고.
“그때까지 지면 안 돼?”
나름의 응원인가.
샤디아는 그 말을 남기고 멀어졌다.
그리고 샤디아와 나의 대화를 들은 토마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한 목소리였다.
“자기… 라고?”
토마스가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뭔가 오해를 하는 눈치이기에 내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이 말을 하는 것도 익숙했다.
“나 유부남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전혀 기분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선언했다.
“결승전으로 가는 길, 감히 오를 수 없게 해 주지.”
* * *
“휴가?”
청진명이 되묻자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사람 좀 찾아가 보려고요.”
클레어가 말하는 바깥사람이란 이도율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어디론가 출장을 가 있다는 사실 또한 들었다. 그 이상은 비밀이라나.
클레어가 그동안 부쩍 요리 연습에 박차를 가한 것도 그게 이유라고 들었으니.
“때가 된 건가…….”
“네?”
“아니, 아무것도.”
분명 며칠 전이었다면 도율의 처지를 걱정했겠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클레어의 요리 실력은 평범하다고 말할 수준까지 올라왔다. 괴멸적이라 칭할 정도였던 때와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제 보니 정말 빠른 성장이었다. 결국 문제는 재능의 유무가 아니라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으려 했던 뒤늦은 출발이었다. 거기에 본인은 인류와는 조금 궤가 다른 혓바닥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
아무쪼록, 그때의 일은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청진명은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그로써 나빴던 추억을 떨쳐 버렸다.
청진명이 클레어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클레어, 넌 충분히 강해졌다.”
“네……?”
“다녀와.”
청진명의 허락이 떨어지자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