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75
75화 안 벗으면 제가 벗깁니다
“…연기할 필요 없는데, 여기선.”
이곳은 불야성이었다. 몇몇 특이한 인간들을 제외하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생활하는 곳.
나와 클레어도 그에 맞춰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평범한 가면이 아니라, 나름대로 스킬 따위가 달려 있는 장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정체를 들킬 일은 웬만하면 없었다.
그러니 남들 앞에서 사이 좋은 부부를 연기해야 하는 사정 같은 건 고려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곳에서는 자유였다. 세간의 시선 따위는 나 몰라라 하고 원하는 대로 행동해도 됐다. 다들 그러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도 왜…….
“그야…….”
클레어가 대답했다.
“연기가 아니니까.”
“연기가 아니라면…….”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말, 나는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내게 클레어가 한마디 내뱉었다.
“연습.”
“…연습?”
그런 거였다. 필요할 때 제대로 된 연기를 해내기 위해선 평소에도 연습할 필요가 있다는.
“마침 좋잖아요. 둘 다 가면을 쓰고 있으니, 여기선 연습하다가 실패하더라도 아무런 부담이 없으니까요. 좋은 기회 아닌가요?”
클레어의 말은, 밖에서와 달리 부부 연기를 하다가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의심받을 일 없이 마음껏 연기할 수 있는 기회라는 뜻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연기라는 걸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클레어는 언제나 모든 일에 열심이었다.
가면 너머로도 들뜬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클레어는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성실하긴.”
그러자 클레어는 갑자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불평했다.
“성실한 건 당신이겠죠.”
“…내가요?”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기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클레어는 시치미를 떼듯 태도를 바꾸고는 몸을 돌렸다.
“아뇨, 그냥 혼잣말이에요.”
“……?”
* * *
“형씨, 능력 좋은데?”
“…무슨 말입니까?”
여관 주인이 내 어깨에 팔뚝을 올려놨다.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여자를 다 갈아 치우고 말이야. 게다가 이번엔 외국인이야? 비결이 다 궁금해지는구만.”
“…개소리 집어치우시죠.”
인상을 찌푸리며 여관 주인의 팔을 치웠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었다. 저번에 탐정을 데려왔던 걸 말하는 거겠지만,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목적이 일치하는 비즈니스 협조 관계였지.
나는 조금 떨어져 있는 클레어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켕길 건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아무런 일도 없었던 데다가, 클레어와는 실제로 지켜야 할 부부의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오해가 그녀의 귀에 들어가는 건 달갑지 않았다.
여관 주인이 다 알았다는 듯 시원하게 웃는 얼굴로 좋은 시간 보내라는 입 모양을 보냈다. 나는 다시 한번 노려보는 것으로 여관 주인을 쫓아내고 클레어에게 돌아갔다.
“갑시다.”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낡아 빠진 여관이라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위층으로 가려면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갈 듯한 좁은 계단을 올라야 했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겹쳐 들렸다. 나의 발소리와 조금 다른 타이밍으로 클레어의 발소리가 겹쳤다. 그 소리가 귀를 타고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미치겠네.’
나란히 걷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평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조금만 방심하면, 금세 그 장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클레어의 모습이.
애달픈 목소리로 속삭이던 목소리가.
그건 아주 자그마한 생각만으로도 금방 크게 부풀어서,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 하나 없이 온 정신을 가득 차지했다.
의식적으로 무의식을 유지했다.
“…들어와요.”
“실례할게요.”
그런 대답조차 듣기 불편했다.
낡은 여관의 넓지 않은 방은 마치 오랫동안 지내 온 자취방처럼 느껴졌다.
그곳에 클레어가 들어와 낯설게 쭈뼛대는 모습을 보니 왜 이렇게 분위기가 딱딱하냐는 물음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그러는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원랜 같은 집에서 생활하지 않았냐고 되뇌어도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 집은 쓸데없이 넓어서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으니까.
“아무 데나 앉아요.”
그러자 클레어는 침대 위에 앉았다.
나는 근처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마주 앉았다.
“…뭐 하는 겁니까?”
그 짧은 사이에 클레어는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엎드려 있었다. 어째 침대보 냄새라도 맡는 모양새였다.
이불 속에 파묻혀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클레어가 대답했다.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데려왔다면서요.”
“…들었어요?”
그 여관 주인 자식, 언젠가 혼쭐을 내 주고 만다.
“오해예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안 할 거면 대체 여자를 왜 방에 데려오는데요?”
“일 얘기 좀 했을 뿐이에요.”
“흐응…….”
식은땀이 흘렀다. 나라도 안 믿겠다 싶은 변명이었다. 이런 대사를 흰돌이가 보는 아침 드라마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거기선 어떻게 됐더라?
분명 여주인공이 칼 들고…….
생각했더니 또 오싹해졌다.
그러나 클레어는 충분히 즐겼다는 듯 픽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농담이에요. 나도 알아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
“…그래요?”
“네, 방에서 당신 냄새밖에 안 나는걸요.”
“…냄새라고요?”
…나 냄새 나나?
내가 묻자 클레어가 얼버무렸다.
“…그런 게 있어요.”
신경 쓰이는 가운데 클레어가 주제를 환기했다.
“그럼 할까요, 연습.”
“연습이라고 해도 뭘…….”
“제가 준비해 온 게 있으니 당신은 가만히 있으면 돼요.”
“…정말요?”
놀랐다. 준비까지 해 올 정도라니. 괜히 성실하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반지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녀가 검지에 끼고 있는 반지는 아공간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원래 장비 같은 거 넣고 다니던데, 이런 데에 써도 되는 거 맞나?
클레어가 반지를 통해 꺼낸 건 수트 케이스였다. 그녀는 그걸 무릎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그 안에 있는 무언가를 고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꺼낸 건 날이 시퍼렇게 선 식칼 한 자루였다.
“이게 좋겠다.”
“……?”
머리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자, 잠깐. 뭐 하려는 건데요?”
내 물음에 클레어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더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당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 없어요.”
“아니……!”
끼이익.
의자에서 일어나자 클레어도 식칼을 들고 일어나 단호하게 타일렀다.
“꼼짝 말고 있으라니까요.”
“아니, 그걸 보고도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내 대답에 클레어는 조금 토라진 듯 가슴 앞에서 양손으로 식칼 손잡이를 꼭 붙잡았다.
“나 진짜 많이 늘었는데.”
…대체 뭐가 많이 늘었다는 거야? 칼질?
“질긴 고기도 척척 썰고, 뼈도 잘 발라낸다고요.”
아무리 봐도 내 뼈와 살을 분리해 주겠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할 테니까요.”
“잘못이라뇨? 그런 거 없어요.”
“그……. 혹시 아무 연락 안 해서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진짜 남편도 아닌 주제에 성가시게 일일이 연락을 보냈다간 건방지게 애인 행세한다고 욕먹을 것 같아서…….”
“아, 그건 확실히 조금 서운하긴 했어요.”
“그럼 오늘부터는 매일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진정을…….”
정성껏 빌자 클레어가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그 정도로 충격이었나요? 제 요리…….”
“…네?”
요리라니?
그러고 보면, 클레어가 들고 있는 건 날이 잘 갈린 식칼이었다. 시퍼런 빛을 반사하는 모습에 그만 겁먹고 말았지만, 애초에 날 해할 생각이었으면 식칼이 아니라 장검을 꺼냈겠지.
클레어의 무릎에 놓인 가방의 내용물을 들여다보니 뒤집개와 주걱, 국자, 등등. 그 외에도 다양한 크기의 나이프가 들어 있었다.
“…조리 도구 가방이네요?”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연습 많이 했는데…….”
클레어가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실을 목도하자 안도감과 함께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클레어 씨.”
“네?”
허락하고 말고는 내가 결정할 내용이 아니었다.
“여기 취사 금지예요.”
“아…….”
내 말에 클레어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좁은 여관방에서 그런 게 가능하겠냐고.
“밥 먹으러 가죠.”
* * *
“어쩐 일이에요, 아저씨?”
서지유가 내게 물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었다. 토너먼트 일정이 있는 날은 대개 그랬다. 결투가 피곤한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를 사건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시간을 비워 둔 것이었다.
가게에 도착해 보니 내가 없어도 손님은 마르지 않았다. 나름대로 장사가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홀 쪽은 탐정이 담당하고. 주방 쪽은 서지유가 담당하고. 두 사람이 나눠서 담당하면 충분히 운영할 수 있었다.
“밥 먹으러.”
“온 김에 일 좀 하시죠? 한가해 보이는데.”
“싫어, 인마.”
서지유는 요즘 내게 툭툭 장난을 걸게 됐다.
그러다 내 맞은편에 앉은 누군가의 시선을 눈치챘다. 클레어였다. 맞은편에 앉은 클레어가 손등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서지유는 거기에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한 것처럼 굳어졌다가 물었다.
“…누구예요?”
“그냥 아는…….”
“아내예요.”
내 대답을 가로채듯 클레어가 목소리를 내질렀다.
“아내……?”
서지유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나도 클레어를 바라봤다. 아무리 가면을 쓰고 있다지만 너무 쉽게 얘기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클레어는 조금도 망설이거나 후회하는 기색 없이 당당했다. 뭔가 생각하고 있는 거라도 있나.
“남편께 얘기는 자주 들었어요.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에 귀여운 여학생이 하나 있다고.”
아니, 한 번도 얘기한 적 없는데.
게다가 서지유는 교복 차림도 아니었다. 앞으로 가게에 올 땐 교복이 아니라 일하기 쉬운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오라고 해 뒀으니까.
염색한 데다가 특유의 껄렁한 분위기 덕분에 사복 차림일 땐 전혀 학생다운 분위기가 없었다.
그런데 서지유가 학생인 건 어떻게 안 거야? 정말 내가 얘기해 준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 군요.”
서지유가 옷자락을 구기며 대답했다.
“…그럼 저 들어가 볼게요. 주문이 밀려서.”
“밀렸다고? 좀 도와줄까?”
“괜찮아요. 내가 누구한테 배웠는데요.”
서지유가 주방으로 떠나자 클레어가 물어왔다.
“저 애한테 요리 가르쳐 줬어요?”
“…어쩌다 보니요.”
가게 사정까지 모두 이야기하기엔 얘기가 길다. 게다가 부스트 얘기까지 꺼내야만 했고. 영감이 맡긴 일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으니 깊게 파고들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뭉뚱그리자 클레어는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곧 말을 삼켰다. 대신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주문한 메뉴가 나오는 걸 기다렸다.
탐정은 메뉴를 서빙하며 달리 조사한 내용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평소엔 먼저 물어보지 않아도 먼저 떠드는데, 오늘은 할 일만 하고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어쩌면 클레어에게 내용이 새 나갈까 봐 그런 걸지도 모른다.
“…으음.”
음식을 맛본 클레어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별로예요?”
“…아뇨.”
그렇게 대답한 클레어는 조금 초조한 듯이 접시를 내려다봤다.
식사를 마치고 클레어와 함께 여관으로 돌아왔다.
“…네?”
카운터에 서서 여관 주인과 대화를 나누던 클레어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남은 방이 없다고요……?”
내가 묵는 방은 혼자 지내기엔 괜찮아도 두 사람이 함께 사용하기엔 좁은 크기였다. 침대도 한 사람이 눕기에 적당했고.
그러니 클레어도 따로 방을 구하려 했는데, 여관 주인은 남는 방이 없다고 대답했다.
여관 주인의 태도를 알고 있는 내가 윽박질렀다.
“주인장, 개수작 부리지 말고 빨리 방 내놔.”
“지, 진짜야! 진짜 남는 방이 없다고!”
“그게 말이 돼? 이 낡아 빠진 여관에?”
“…크윽.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방이 없다는 말은 진짜라고!”
여관 주인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우리 여관은 아크투러스 토너먼트 4강까지 진출한 유명 인사가 묵는 곳이라고! 사람이 몰릴 만도 하지!”
“그건…….”
나잖아.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자 여관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을 돌아다닐 때에는 가능한 기척을 감추고 다녔기 때문에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사인이나 사진 촬영 따윌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유명세 같은 걸 느낄 겨를이 없었는데.
내가 묵는 여관이랍시고 사람이 몰릴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니. 몰랐다.
“아무튼 방이 없는 건 사실이고, 이 근처도 비슷할 거야. 토너먼트 때문에 유동 인구가 늘어서 말이지. 이 시간에 방 없냐고 물어보러 돌아다니는 것도 조금 그렇지 않겠어?”
여관 주인이 으흐흐 하고 웃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국 클레어와 둘이 방으로 돌아왔다.
찰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긴장감이 되살아났다. 아까는 단순히 방문한 것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자러 온 거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클레어가 내게 말을 붙였다.
“저기…….”
“어, 아, 네.”
클레어가 얼굴을 붉힌 채 물었다.
“옷 좀 벗어도 될까요?”
“…네?”
일순, 사고가 정지했다.
벗는다니, 대체 왜?
클레어가 뒤늦게 변명처럼 덧붙였다.
“…이대로 자면 불편해서요.”
“아아, 네. 네…….”
나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구한 클레어가 등을 보이며 먼저 아우터를 벗었다. 새빨간 귓바퀴가 눈에 들어왔다. 붉게 달뜬 피부는 목덜미까지 물들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말했다.
“다, 당신도 벗어요.”
“네… 네?!”
“나만 벗으면 억울하잖아요.”
“아니, 난……. 원래 이렇게 입고 자요.”
그리고 자기가 불편해서 벗겠다고 했으면서 대체 뭐가 억울하다는 건데.
도저히 경위를 알 수 없는 불만에 머리가 더더욱 혼란해졌다.
하지만 클레어는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안 벗으면 제가 벗깁니다.”
“…….”
폭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