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81
81화 책임져야 한다
“아핫, 설마 당신이 정말 우승할 줄은 몰랐어요.”
복도를 앞서 걷던 여자의 말이었다.
검은 무광의 오페라 마스크를 쓰고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였다. 여타 직원들과 다를 바 없는 복장을 하고 있어 겉모습만으로는 구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람이 가진 고유한 기의 파장을 알 수 있는 내겐 구별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내게 ‘부스터’를 건네준 직원이라는 것을.
예상 외라는 말을 입에 담으면서 그녀는 신이라도 난 것처럼 경쾌한 목소리를 자랑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그야 당연하죠. 토너먼트 우승자가 탄생한 날이잖아요. 그러는 당신은 안 좋은가요? 모처럼 우승해 놓고 표정이 영 아니올시다네요.”
“글쎄.”
토너먼트 우승 같은 건 내 목표가 아니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반환점에 불과했으니.
“상품이라도 받으면 기쁠지도 모르지.”
“아핫. 그것도 그렇네요. 조금만 참으세요. 이제 금방이니까요.”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투기장이 아니었다. 상품을 수령하기 위해서 토너먼트 운영 조직의 본거지에 와 있었다.
조직의 이름은 ‘테네브리스Tenebris’.
암흑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였다.
아크투러스 투기장뿐 아니라 이곳 불야성에서 일어나는 모든 크고 작은 일에 개입하는, 사실상의 지배자들이었다.
복도의 끝. 커다란 양쪽 문을 두 팔로 밀어젖히고 입장한 그녀가 손님을 맞이했다.
“자, 어서 오세요. 이곳이 꺼지지 않는 밤 불야성의 가장 어두운 곳. 심연深淵이라 부르는 방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조직의 수뇌부가 머무는 곳이었다.
방 안은 어두웠다. 빛 한 점 새지 않는 검은 공간에 마력이 가득 차 어둠 속을 유영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등 뒤에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약한 빛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마저도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묵색 벽지와 바닥에 흡수되어 조금도 퍼지지 않았다.
이곳엔 방금 들어온 나와 직원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직원은 나보다 앞서 방의 깊은 곳에 들어가 있어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허락도 없이 들어와도 되는 건가?”
“허락 따윈 필요 없죠.”
끼이익.
등 뒤의 문이 쿠웅 하고 닫혔다. 방 안에는 아무런 불빛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이 방의 주인이니까.”
댕그렁 하고 가벼운 철제 물품이 바닥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줌의 빛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시야를 확보하는 방법. 나는 기감氣感을 펼쳐 눈앞을 확인했다. 새까만 방 안이 손에 잡히는 듯 훤해졌다.
틀어올린 머리를 고정시키고 있던 비녀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거꾸로 쥔 부채처럼 늘어졌다.
직원들이 입는 유니폼도 벗어 던진 채 검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목소리도, 말투도 뒤바뀐 그녀가 내게 소개했다.
“반갑구나. 본녀가 이곳의 주인. ‘그림자 마녀’란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방 안에서, 그녀의 머리카락과 치마 끝자락이 부유하듯 일렁이고 있었다.
“이곳의 주인이란 말은…….”
내가 발을 디딘 곳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불야성, 이 도시를 말하는 건가?”
“바로 그렇단다.”
공권력의 손이 닿지 않는 음지, 불야성. 이곳에서 가장 입김이 강한 조직. 그 조직의 우두머리라면 성주 노릇을 해도 충분하다는 의미였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 정체를 알지 못하지.”
그림자 마녀가 어둠 속에서 스산한 웃음소리를 흩뿌렸다.
“그런데 내 앞엔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영광이군.”
“별말씀을. 토너먼트의 우승자 아니니? 이 정도 대우는 당연하지.”
제아무리 새까만 어둠 속이라 하더라도, 나는 상대의 모습을 눈에 새길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넌지시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마녀는 개의치 않고 깔깔 웃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이. 아니, 되레 그 정도는 해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지금 본녀는 기분이 좋아. 다소의 서비스 정도는 눈감아 줄 만하지.”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거지?”
“당연하잖니. 토너먼트 우승자로 이렇게 좋은 재목을 손에 넣었는걸.”
그림자 마녀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훑었다.
“물론……. 너를 말하는 거란다, 아이야.”
그녀의 말에 내가 코웃음을 쳤다.
“글쎄. 어제까지만 해도 찬밥 대우를 하지 않았나?”
“그게 불만이었니?”
“그렇다고 하면?”
그러자 그녀가 소리 높여 웃었다.
“거짓말. 너라면 얼마든지 평가를 뒤집을 수 있었잖니. 그러지 않았던 건 실력을 숨기고 싶었으니까 그랬던 거고. 그에 걸맞은 취급을 해 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니?”
“…오늘 내가 아니라 다른 녀석이 우승했어도 같은 말을 했겠지.”
“다른 녀석?”
그림자 마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
“아아, 그 아이 말이구나. 벌써 기억에서 사라졌네.”
“…….”
“중요한 건 네가 우승했다는 거고, 본녀는 네가 참 마음에 들었단 거란다.”
또각, 또각.
선명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바로 앞에 누군가 서 있다는 게 느껴졌다. 기감을 펼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본녀가… 너를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게 만들어 주마.”
“나를 지금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나는 주머니에서 약병을 하나 꺼냈다. 약병의 안에 보라색 빛이 감도는 액체가 찰랑거렸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였다.
그림자 마녀가 직원으로 가장했을 때 내게 건네준 물건. 그리고 바깥에도 나도는 물건이었다.
이 약물은 사용했을 때 일시적으로 마력을 폭주시키는 마약魔藥이었다.
“이거, 당신이 만든 거지.”
“그렇단다.”
“이걸 사용하겠다는 뜻인가?”
“그건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지.”
그림자 마녀가 손바닥을 마주 붙였다.
“그게 걱정이었니? 걱정하지 마렴. 너는 최고의 소재니까, 시답잖은 시제품으로 몸을 망칠 일은 없을 거란다. 너에게는 최고의 재료로 만든 최상품만을 사용해 주마. 그 외에도 본녀가 가진 모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할 것을 약속하지.”
“왜 그런 짓을 하지? 날 위해서는 아닐 테고.”
내 물음에 그림자 마녀가 빙긋 웃었다.
“본녀를 위한 일도 아니란다.”
“그럼…….”
“대업大業이란다.”
“대업?”
좀 더 캐물으려 들자 그림자 마녀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자세한 건 알 필요 없단다. 너는 내 말만 따르면 그만이야. 그렇게 하면 너는 더 강해질 수 있어. 불야성의 주인인 본녀가 하는 말이란다. 알잖니? 이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는 것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유혹했다.
보다 더 강해지고 싶다는 건, 각성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이다.
마력, 신체, 기술, 스킬, 장비. 각성자들은 자신의 강함을 구성하는 요소를 발전시키기 위해 매일 사력을 다했다.
그렇지만 나는 각성자가 아니었다.
“거절한다.”
내 대답에 그림자 마녀가 우후후 하고 낮게 웃음을 깔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조차 안광이 반사될 것처럼 날카로운 눈동자를 들이밀었다.
“거부권이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군.
“너는 얌전히 내 말만 들으면 돼. 그러면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 있어. 다른 어떤 인간보다도.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그림자 마녀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왜 이걸 거부하는 거니? 대체 왜?”
“강함에는 별로 뜻이 없어서.”
내 대답을 들은 그림자 마녀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구나.”
처박은 고개에서 바닥을 향해 중얼거림이 쏟아졌다.
“모르는 거야. 힘이 모자라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왜 필요한 건지.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 각성자가 한낱 딴따라로 전락해서. 사회 붕괴를 막기 위해 숨기고 있는 진실을 모르니까…….”
그림자 마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알면 되겠네.”
그림자 마녀의 몸에서 마력이 솟구쳤다.
마력은 검은색을 띄고 있었다. 색을 가질 정도로 짙은 마력은 이례적이었다. 그 모든 마력이 방 안을 가득 채우며 일련의 흐름을 띄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즉…….
‘결계.’
이 방 안 전체가 그림자 마녀의 영역이었다.
“직접 가르쳐 줄게, 강해져야 하는 이유를.”
밀폐된 방 안.
스산한 웃음소리를 남기며, 마녀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 * *
“결계인가…….”
어둠이 펼쳐진 방 안, 도율이 중얼거렸다.
방의 출입문은 도율의 등 뒤에 있었다. 방에 들어온 후 몇 걸음 채 걷지 않았기 때문에, 뒤돌아 걸으면 금방 문에 다다라야 했다.
하지만 닿은 건 매끈한 벽뿐이었다. 문고리나 경첩의 형태를 한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율이 그 위에 손을 얹고 벽을 따라 걸었다.
오래 걷지 않아 방 귀퉁이를 만났다. 도율은 수직으로 이어진 다른 벽을 이어 걸었다.
그렇게 네 번을 반복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문을 비롯한 가구나 전등 스위치 따위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이곳은 완전히 매끈한 정육면체의 감옥이었다.
‘밀실이군.’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어디선가 검은 칼날이 날아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 날아오는 불의의 일격. 도율이 기감을 펼쳐 경로를 파악한 후 몸을 슬쩍 돌려 피했다.
“호오. 이걸 피하는구나.”
어둠 속에서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방 안에서 균일하게 울려 퍼졌다. 귀를 여는 걸로 그림자 마녀의 위치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지만, 아직 끝이 아니란다.”
도율의 기감에 검은 칼날이 생성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 개수는 하나가 아니었다.
“어디 한번 이것도 버텨 보렴.”
수십 개의 칼날이 쇄도했다.
이제 몸을 돌리는 것만으로는 피할 수 없었다. 도율이 몸을 날렸다. 그의 발끝이 머무르던 자리에 검은 칼날들이 날아와 부딪쳤다.
칼날들이 쉼 없이 날아와 도율의 신형을 뒤쫓았다. 도율과 검은 칼날들의 술래잡기가 이어졌다.
단순히 속도만으로 도율을 쫓던 칼날들은 그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자 칼날들의 더욱 늘어나 도율의 앞길을 동시에 가로막았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보이는 그물 속에서 끊임없이 묘수를 찾아 나가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 순간.
기잉.
중력이 뒤집혔다.
‘…….’
바닥에 닿으려던 도율이 천장으로 추락했다. 그 위치로 칼날들이 달려들었다.
결코 피할 수 없이 옥죄어 오는 칼날들이 맞물렸다.
카가각-!
귀를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도율이 천장, 지금은 바닥이 된 면을 향해 착지했다. 그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림자 마녀가 그 모습을 살폈다.
‘어떻게……?’
칼날은 분명히 몸을 빼낼 수 없는 각도로 좁혀져 있었다. 죽으면 곤란하기 때문에 치명상을 입힐 위치는 아니었지만, 아무 피해 없이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도율은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털고 있었다.
“…보기보다 재주가 더 많은가 보구나.”
당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직 그녀가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전력을 낸 것도 아니었다. 도율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해 힘 조절이 조금 모자랐을 뿐. 그렇다면 지금 실력에 맞춰 조정하면 그만인 이야기였다.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결승전에서 보여 준 모습 이상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의미이기에.
그림자 마녀가 미소 짓는 사이에, 도율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름값은 하는군.’
검은 방 안, 목소리는 들려 오지만 그림자 마녀의 위치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기감을 펼쳐도 마찬가지였다. 이 공간 안에는 마치 자신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없다면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정말 이 안에 없거나.
기의 파악조차 속여 넘길 수 있는 개념의 기술, 파경대계이거나.
방을 부숴 본다거나 하는 수도 있었지만, 당장에 너무 눈에 띄는 짓을 하는 것도 꺼려졌다. 센터장 영감의 당부도 그렇고, 망량에게 들었던 이야기도 신경 쓰이는 점이었다.
정 방법이 없으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소용없단다.”
생각에 잠겨 있는 도율의 귀에 그림자 마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방의 이름은 심연, 다른 세계와는 격리된 나만의 공간. 여기서 아무리 애를 써도 바깥에 소식을 전할 수 없고, 바깥에서도 이곳을 결코 찾아낼 수 없으니까. 널 도와주러 올 사람은 없단다.”
그림자 마녀가 속삭였다. 절망을 선사하는 부드러운 음색으로.
“이곳에 따라온 순간부터 네 패배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단다.”
그러나 그 선언은.
도율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이봐.”
“응?”
도율이 반색하며 물었다.
“그 말, 책임져야 한다.”
밀폐된 공간 안.
기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