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86
86화 쉬고 있어요
“클레어 컴벨? 진짜요?”
“그래, 인마.”
“우와!”
신정훈 피디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그의 곁에 따라붙은 방송 작가가 눈을 빛냈다.
“갑자기 이정아 김훈 부부 나가리 됐다고 들었을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어디서 이런 대어를 물어 오셨어요? 역시 피디님 인맥 하나는 끝내주시네요!”
“어, 그, 그렇지.”
사실 카페에서 한탄하고 있을 때 우연히 만난 것에 불과했지만.
“헌터 아내와 일반인 남편의 일상. 이거 백 퍼센트 먹히네요. 심지어 그 클레어 컴벨이라니, 시청률은 따 놓은 당상이겠는데요?”
작가가 싱글벙글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김칫국을 마시고 있긴 했어도, 신정훈 피디 역시 다르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헌터들의 방송 진출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클레어의 존재는 그중에서도 단연 특별했다.
그녀는 희소한 존재였다. 많은 각성자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헌터들 중 하나라는 S급인 것도, 한국인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금발을 자랑하는 외국인 여성인 것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카메라에 담기만 해도 한 폭의 그림이 되는 미인이라는 점까지. 빼놓을 수 없는 흥행의 보증수표처럼 느껴졌다.
“근데 그 남편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남편…….”
“안 만나 보셨어요?”
안 만나 봤다.
신정훈 피디가 출연 계약을 할 땐 당사자인 클레어 컴벨과 매니저인 이도은이 함께했다. 하지만 정작 또 다른 당사자인 이도율은 본 적이 없었다. 촬영 동의 역시 서류상으로만 받은 상태였다.
사실 부부 두 사람이 장면을 만들어 가는 예능인 만큼, 두 사람의 자체적인 요소와 그 시너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러니 클레어가 제아무리 흥행의 보증 수표라 해도, 그 파트너인 도율이 꽝이라면 전혀 도움이 안 됐다.
아니,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기사 뜬 거 보니 인상은 멀끔한데요. 뭐, 사진이야 보정 때문에 믿을 게 못 되니…….”
그 말대로였다.
게다가 몇 번 정도 카메라 앞에 서 본 데다가, 대중 앞에 선다는 의미를 아는 클레어와 달리 이도율은 완전한 일반인으로 보였다.
기사를 뒤져 보면 매니저 활동을 했다는 기록도 나오긴 하지만, 그 역시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유명세를 타는 직종은 아니었다.
그때 신정훈 피디의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였다.
“…신정훈 피디입니다. 여보세요?”
[피디님이십니까?]목소리 역시 생소했다.
[촬영에 대해 여쭙고 싶은 부분이 있어 전화드렸습니다.]“…누구십니까?”
[아차.]전화기 너머로 가볍게 웃는 소리가 나더니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도율이라고 합니다.]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도율.
방금까지 이야기하고 있던 남자의 이름이었다.
* * *
“따로 주의해야 하실 점은 없고,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면 됩니다. 당연히 프라이버시에 관련된 내용은 무조건 함구하고요. 나중에 익숙해지시면 VJ도 동원하긴 할 텐데, 아무튼 최대한 불편하지 않으시도록 맞춰 드릴 테니…….”
신정훈 피디가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설명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방송국 근처의 한 카페였다. 피디는 방송 촬영 관련하여 몇 가지 질문 사항이 있다는 도율의 말에 뛰쳐나왔다.
“물론 이후 일상생활도 정상적으로 영위하실 수 있도록 악의적인 편집도 일절 하지 않으리라 약속드리겠습니다. 편집본을 출연자분께서 사전에 확인하실 수 있도록…….”
신정훈 피디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도율.
그는 아주 짙은 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셔츠와 넥타이까지 모두 갖춰 입은 상태에서 머리도 깔끔하게 넘긴 상태였다.
그런 자가 말없이 다리를 꼬고 서류를 넘겨 가며 읽고 있었다.
신정훈 피디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커피를 마시려 해도 빨대에서 바람 새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제가 방송은 잘 몰라서.”
마침내 도율이 입을 뗐다. 신정훈 피디는 지옥 같은 침묵이 끝났단 생각에 안도했지만, 다시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도율의 날카로운 눈빛이 한낱 종이 뭉치가 아니라 자신을 향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좀 찾아봤습니다만.”
도율이 협탁 위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가 읽었던 기사 화면이 드러났다.
기사에는 타 예능 프로그램의 장면이 참고 자료로 올라와 있었다. 사진이었지만 아래에 써진 자막을 통해 어떤 내용이 오고 가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자료 속의 부부는 부부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화두로 삼고 있었다. 기사 역시 이러한 점을 비판하고 있는 기사였다.
그 외에도 불륜, 도박과 같은 자극적인 이야기는 물론 민감할 수 있는 사생활도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다.
“상당히 솔직하던데요.”
도율이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신정훈 피디는 방송계에서 굴러먹은 짬과 눈치로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도율은 웃고 있었지만. 결코 긍정적인 의미를 담아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신정훈 피디가 변호를 늘어놓았다.
“물론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해서 인기를 끌고자 하는 예능들도 있지만, 저희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대도 가족 시간대에 편성이 되어 있고. 최대한 가족의 따듯한 모습과 코믹한 장면 위주로…….”
신정훈 피디는 스스로가 산전수전을 다 겪어 봤다고 자부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하는 프레젠테이션 정도는 익숙하다는 말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도율의 시선을 받으며 말을 하자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알겠습니다.”
도율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신정훈 피디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도 도율과 신정훈 피디는 몇 가지 질답을 주고받았다. 주로 방송 내용과 주의 사항에 대한 이야기였다.
“전 괜찮지만…….”
도율의 관심사는 하나였다.
“제 아내에 대한 건 부디 신중하게 다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으레 하는 그런 겉치레가 아니었다. 도율의 목소리엔 힘이 담겨 있었다. 그 말을 듣지 않으면 무언가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하하… 예, 물론이죠.”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도율을 배웅하고 신정훈 피디가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방송 작가가 물었다.
“어땠어요?”
“뭐가?”
“이도율 말이에요.”
작가가 한쪽 눈을 찡그리고 양손의 검지와 엄지로 사각 프레임을 만들었다.
“실물도 그림이 제법 나오는 것 같은데요? 화면발도 잘 받을 것 같으니 선남선녀 컨셉으로 가면 보는 맛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신정훈 피디가 인정했다.
그 순간, 어떤 날카로운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러게는 무슨 얼어 죽을 그러게냐?”
신정훈 피디와 작가가 돌아보자 그곳엔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서 있었다.
“최운종 부장님……!”
최운종 부장.
그가 두 사람 앞에 다가와 옆통수에 대고 커다란 나사를 돌리는 시늉을 했다.
“요새 시청자들은 그런 쉽고 편한 예능 안 봐. 무조건 새로운 거, 신선한 거, 자극적인 거! 이 빡통을 치열하게 굴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라고.”
“예…….”
“신정훈 피디.”
“넵.”
“이번에 새로 들어가는 프로그램에 유명한 헌터 한 명 섭외했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잘했어.”
“네……?”
난데없는 칭찬에 신정훈 피디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최운종 부장이 웃고 있었다. 눈을 씻고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손을 마구 흔들었다.
“이, 대중들의 관심, 열기가 가장 쏠리는 게 지금 헌터들이라고. 왜겠어?”
“그야…….”
“그래, 맞아. 그 치들이 잘나가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부러움, 열망, 시기, 질투, 어? 이런 감정들이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거라고.”
최운종 부장이 신정훈 피디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신정훈 피디가 동의하자 최운종 부장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던 최운종 부장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모든 것이 부질없다 말하는 염세주의자와도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만 하면 안돼.”
“네? 그게 무슨……?”
“그건 그냥 끌어당기기만 하고 끝날 뿐이야. 흩어진다고. 시청자들은 금방 싫증 내니까.”
최운종 부장이 다시 눈빛을 바꿨다. 탐욕으로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럼 그 시청자들이 떠나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건…….”
“자극이야. 새로운 자극.”
최운종 부장이 손가락 하나를 위로 뻗었다. 그리고 손목을 돌려 바닥을 가리키도록 뒤집었다.
“잘나가는 사람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 모습이 뭐겠어? 바로 추락과 몰락이지. 안 그래?”
“…그 말은.”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정훈 피디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출연자들을 팔라 이 말입니까?”
그러자 최운종 부장이 발뺌했다.
“어허, 이 사람아.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나? 항상 피디로서, 시청자들이 진정으로 보고 싶어 하는 장면이 뭘까. 잘 상기하라는 뜻으로 한 말이지.”
“…….”
“쓰읍. 내가 원래 이런 조언 쉽게 안 해 주는데. 그래도 자네 생각하는 건 나밖에 없어.”
신정훈 피디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감사합니다.”
“그래. 일 봐.”
최운종 부장이 뒷짐을 지고 멀어졌다.
싸늘하게 굳은 표정의 신정훈 피디 옆에서, 작가가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피디님이랑 최 부장님, 입사 동기 아니에요? 왜 피디님이 존댓말을 해요?”
“이젠 직급이 다르니 그렇게 해 달라더라.”
“네……?”
작가가 미간을 찌푸렸다.
“군대에서도 안 그러지 않아요?”
“면제래.”
“아…….”
작가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자 신정훈 피디가 피식 웃었다.
“별 수 있냐. 까라면 까야지.”
사회 생활이 그런 법이거늘.
* * *
“…이게 그 카메라인가.”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집안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들이 눈에 띄었다.
나름대로 숨긴다고 숨긴 것 같지만, 싫어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수풀이나 바위 사이에 숨어 암기를 날리던 살수도 찾아내곤 했으니, 모던한 집에 툭하고 매달린 불청객을 모른 척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때 카메라에 불빛이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9시 정각이었다. 이 시간부터 촬영을 한다고 했지.
대놓고 카메라를 보고 있었는데 모른 척하기도 뭐하고. 이게 방송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면 뭘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나는 간단히 목례했다.
“그럼…….”
오늘은 휴일이었다.
나야 말할 것도 없이, 영감이 따로 부르지 않는 이상 언제나 휴일이었고. 클레어는 일정이 비어 있는 날 중 하나였다.
촬영은 휴일을 겨냥해 진행되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일상을 촬영하는 예능이라면 집에 가장 오래 있는 휴일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게 가장 풍부한 장면이 나올 테니까.
예능을 찍는답시고 회사까지 따라갈 수는 없으니. 특히 헌터인 클레어가 일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면 던전에 들어가야 한다. 그것도 S급 던전을.
‘목숨이 아까우면 그런 짓은 안 하겠지.’
찰칵.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향하는데, 클레어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
갓 샤워를 하고 나온 건지 증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가 불그스름했다.
“좋은 아침.”
클레어가 조금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원래 일어나자마자 조식 메뉴 뭐냐고 물어보는 게 일상이었는데.
“오늘 좀 일찍 일어났네요?”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잖아요.”
“무슨 소리예요? 원래 휴일엔 10시나 11시쯤 느지막히 일어나서…….”
사실 그때 일어나면 아침밥도 아니고 이미 점심 수준이다.
그런데 클레어가 갑자기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갑자기 무슨 짓이냔 생각으로 쳐다보니 그녀가 손가락으로 몰래 카메라를 가리켰다.
“아.”
헛기침을 했다.
뒤늦게 깨달았다. 오늘은 휴일이지만 휴일이 아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으니까.
이거 편집해 주려나.
“…아침 준비할 테니까 쉬고 있어요.”
“…….”
할 말을 전하고 주방으로 도망쳤다.
등 뒤로 클레어의 시선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