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9
9화 그냥 둘이 보내기 싫었습니다
[어때. 일은 좀 익숙해졌어?]통화 중인 동생이 물었다.
“익숙해지고 말고 할 게 있나. 내가 하는 거라곤 밥 먹이고 운전하고 하는 게 전분데.”
[그걸 못 해서 그만두는 애들이 있다니깐.]현재 나는 클레어 씨의 수발 담당 매니저로 활약 중이었다.
실제로 매니저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 던전 공략 정보 분석, 헌터 업계 동향 파악, 몬스터 및 부산물 경향 조사와 같은 일들은 모두 도은이가 맡고 있다. 난 아직 업계 용어나 익히는 정도다.
실질적으로 내가 하는 일은 아침에 일어난 클레어 씨에게 아침밥 먹이고, 도은이가 스케줄 잡아 놓은 곳으로 운전하고, 점심 먹을 시간 없으면 샌드위치라도 사다 놓고, 하는 정도다.
[완전 기둥서방이네?]“…반박 불가.”
체면이 말이 아니다. 가장 포지션에 있어야 하는 내가 제일 하는 게 없다.
[농담이야. 오빠 잘해 주고 있어. 피곤하지 않아? 언니야 헌터니까 체력 자체가 남다르지만, 난 쪽잠 자면서 버텼거든. 오빤 틈틈이 공부하느라 그럴 시간도 없잖아?]“할 만해.”
할 만하지 않아도 해야 한다.
애초에 병실에 누워 있는 애가 저 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내가 한시 바삐 일을 배워서 다 뺏어 와야 했다.
…짜장면이나 시켜 먹는 꼴을 보면 괜찮아 보이긴 하다만.
“어? 야. 사장님 나오신다. 끊어.”
[엉. 수고~]멀리서 걸어오는 클레어 씨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사장님!”
“내가 그거 하지 말랬죠.”
클레어 씨가 질색을 했다. 그래서 가끔씩만 하고 있다.
클레어 씨가 조수석에 올라타자 나도 운전석에 앉았다. 일이 끝났으면 사무실이나 자택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해 시동을 걸자, 그녀가 만류했다.
“시동 꺼요. 아직 스케줄 안 끝났으니까.”
“정말요?”
“네. 길어질 것 같아서 잠깐 휴식.”
클레어 씨가 시트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오늘 스케줄은 던전 공략의 정산금 분배였다. 던전을 공략하며 얻은 부산물을 경매로 팔거나 현물로 남겨 둬서, 공략에 참가한 인원들의 기여도에 따라 분배하는 작업.
던전 공략은 이미 예전에 있었던 일이고, 부산물도 팔 건 팔아서 오늘 자리가 마련됐을 테니. 결국 오늘 하는 일이라곤 파이 갈라 먹기 싸움이라는 건데.
돈 잘 번다고 소문난 헌터들도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아득바득 싸우고 있다는 얘길 들으니 헛웃음이 다 나왔다.
“그렇게 간단하기만 한 얘기는 아니에요.”
클레어 씨의 토막 수업이 시작됐다.
“여기서 내리는 결정이 사례가 되고, 사례가 쌓이면 표본이 됩니다. 지금 던전 공략의 공훈을 정확히 판가름하지 않으면 나중에 활동할 헌터들이 부당하게 손해를 보는 일이 생겨요. 실제로…….”
“이해했습니다.”
“아주 듣기 싫죠, 그냥?”
인상을 쓰는 클레어 씨의 입에, 나는 아까 사 둔 도넛을 물렸다.
“읍… 뭐예요, 이게.”
“들어가서도 말 많이 하셔야 할 텐데 목 아끼셔야죠.”
밥 먹을 시간이 여의치 않을 때를 대비해서 근처에 가서 사 왔다. 물론 따뜻한 커피도 함께였다. 도넛에 커피가 없으면 섭섭하니까.
“하여튼 약삭빠르기는.”
센스 있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배가 고픈 건 아닌지, 먹는 속도가 빠른 건 아니었다. 클레어 씨는 그저 달콤한 걸 입에 넣고 씹으며 즐길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나른한 표정을 보면 지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진짜 매니저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바람에 클레어 씨는 매니저가 대신 참석할 수 있는 자리에도 모두 얼굴을 비치고 있다. 내가 한 사람 몫의 매니저가 아닌 탓에 더욱 고생하는 거였다.
그런 그녀가 휴식 장소로 택한 건 이 차 안이었다. 선탠을 진하게 발라 안쪽이 보이지 않는 차량 안. 제법 비싼 차여서 나름대로 아늑하지만, 회의실에서 주차장까지 굳이 이동할 정도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히 짐작 가능했다.
바깥에는 없는 것이다. 그녀가 편히 휴식을 취할 만한 장소가.
그렇다면 하다못해 이곳에 있는 시간은 최대한 편히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게, 부족한 매니저인 내가 할 일이었다.
똑똑.
그때, 차량의 바깥에서 누군가가 창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 바깥에는 한 남자가 미소를 띤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얼굴을 내비치려는 의도였다.
“아는 사람인가요?”
“회의 참가자예요.”
클레어 씨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차 문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내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놀라서 이쪽을 보는 클레어 씨의 뺨을,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훑었다.
“…뭐 하는 짓인데요, 이게.”
“도넛에 초콜릿 씌운 건 사지 말 걸 그랬나 봐요.”
눈치채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클레어 씨가 쉬는 시간 동안 초콜릿 도넛 먹고 뺨에 묻히고 다니는 칠칠치 못한 여자가 될 뻔했다.
클레어 씨는 손으로 자기 뺨을 되짚었다. 내가 떼 준 부분이었다. 이젠 괜찮대도 그러네.
“…다음부턴 말로 해요.”
클레어 씨가 차 문을 쾅 닫았다.
…문짝 떨어지겠네.
바깥에서 들려오는 건 클레어 씨의 싸늘한 목소리였다.
“여기까진 왜 오신 거죠?”
“시간이 거의 다 돼서 알려 드리려고 왔죠.”
“그런 건 제가 알아서…….”
나도 운전석에서 내렸다. 클레어 씨와 직장 동료분은 내가 내릴 줄 몰랐는지 놀란 눈치였다. 남자가 나를 경계하며 물었다.
“클레어 씨, 이분은……?”
“안녕하십니까!”
나는 허리를 바짝 숙였다.
“이번에 새로 일하게 된 신입 매니저 이 도 율 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클레어 헌터님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두 사람 모두 굳어 있었다.
내가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모두 도은이가 해 줬던 충고 때문이었다.
—매니저? 음, 일단 인사만 잘해도 반은 먹고 들어가지. 헌터란 놈들은 기본적으로 속이 배배 꼬였다고 생각하면 돼. 책잡히기 싫으면 늘 웃고, 인사 열심히 하고 다녀. 그럼 일단 반은 간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단 말도 있잖아?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받았다.
“어, 어. 그래요. 나는 A급 헌터 정민성이에요. 잘 부탁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자신을 정민성이라고 소개한 남자와 악수까지 끝마치고 나서야 허리를 폈다. 그리고 웃는 얼굴.
클레어 씨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손바닥 하나로 얼굴이 거의 다 가려진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이 나왔다.
“…도은 씨가 입원했다고 했죠. 고생이 많네요.”
“…네, 정말로.”
정민성이 떨떠름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를 떨쳐 내기 위한 말을 꺼냈다.
“그럼 저흰 회의 재개 시간이 가까워져서 이만…….”
“회의 말인데요.”
내가 클레어 씨에게 물었다.
“저도 참가해도 되겠습니까? 차에서 대기하는 것보다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요.”
“…이봐요, 거기가 무슨 장난…….”
“마음대로 해요.”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렸다. 하지만 어느 쪽을 따를지는 자명했다. 내 사장은 클레어 씨니까.
“감사합니다!”
클레어 씨가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
“하, 뭔…….”
정민성은 날 짜증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러나 나는 시종일관 웃는 낯을 유지했다.
결국 그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 * *
회의에 들어가기 전, 구석진 복도에서 클레어 씨가 내게 신신당부했다.
“알겠죠? 그냥 지켜보기만 할 것.”
“제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요.”
“…퍽이나.”
클레어 씨가 머리를 쓸어 넘기고 중얼거렸다.
“걱정이다, 진짜.”
“지금 제 걱정 하시는 겁니까?”
“당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걱정이에요, 당신이…….”
내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걱정이면 그냥 떼어 놓고 오지 그랬습니까.”
“당신이 먼저 오고 싶다고 했잖아요. 설마 그냥 심심해서 그랬다는 건 아니겠죠? 회의가 장난이에요?”
클레어 씨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다. 모처럼 현장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허락해 줬으니, 대충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건…….”
“바른대로 말해요.”
전에 없는 차가움이었다.
클레어 씨는 내가 평소에 장난을 치면 싫은 소리 하긴 하지만, 이렇게 냉랭하게 반응한 적은 없었다.
반면에 헌터 쪽 관련한 일에 대해선 늘 이랬다.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도은이가 병에 걸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을지.
하지만 이번엔 나도 장난친 게 아니었다.
“그냥 둘이 보내기 싫었습니다.”
눈 딱 감고 내지른 말에 클레어 씨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날카로운 눈매가 휘둥그레 풀어졌다.
“……네?”
“불편해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 정민성이라는 사람.”
“그, 그렇긴 하죠.”
“그래서 끼어들었습니다. 네. 솔직히 회의 참관은 별로 관심 없어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회의실 앞까지 에스코트했으니 내 역할은 끝난 셈이다. 이대로 회의를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클레어 씨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치였고 해서 물었다.
“저… 돌아갈까요?”
클레어 씨는 눈을 내리깔고 답했다.
“이왕 온 거 앉아 있다 가요.”
“아니, 그래도…….”
“혼자 있으면 자꾸 누가 말 걸려고 하던데. 옆자리 비었냐고 물어보고.”
클레어 씨가 고개를 돌린 채 시선만 나를 흘겼다.
“같이 온 사람이 있으면 좀 나을지도…….”
솔직하지 못하기는.
나는 웃음을 삼키고 장단을 맞췄다.
“이것도 현장 공부라고 생각하죠, 뭐.”
“…날이면 날마다 있는 기회가 아니니까요.”
클레어 씨가 흡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깐 틈을 내 도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민성이란 남자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병원에 있으면 심심한지 빨리 받는 편이었다.
[어, 오빠.]“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정민성이란 사람 알아?”
[아아~]도은이의 목소리에 짜증이 팍 묻어 나왔다. 전화기 너머로도 인상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질 정도였다.
[알지. 언니한테 졸라 질척거려. 궁금하지도 않은 지 인맥 자랑에 장비 자랑. 생일엔 누굴 불러서 놀았고, 새로 구한 아티팩트가 몇억 짜린지 씨불인다니까. 심지어는 자기 길드로 옮기라는 둥, 던전 공략 같이하자는 둥. 급도 안 맞으면서 씨밸롬이…….]“어… 그래?”
[어. 근데 그건 왜 물어봐? 혹시 그 새끼 아직도 그러고 다녀? 와, 징하다, 징해.]동생의 평가에 나는 안쓰러운 기분을 느꼈다.
신랄하게 까이는 걸 보니 불쌍할 지경이다. 관심 좀 사 보려고 뭐라도 하는 것 같은데……. 어쩌면 표현 방법이 서투른 순정남이 아닐까? 오랜 기간 한 여자만 바라보는.
[근데 오빠. 내가 개웃기는 거 알려 줄까.]“뭔데?”
[그 새끼 언니 없을 땐 나한테도 그 지랄함.]“…….”
[빌런은 뭐 하나 몰라. 저런 새끼 안 족치고.]이 새끼는 그냥 용서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