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90
90화 이래도 제 수준에 불만이 있습니까?
“…벗으라고요?”
“네.”
내 물음에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흰돌이는 거실 구석에 널브러져 미동도 않고 있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니 진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전등은 모두 꺼져 있었다. 전면 유리창을 통해 어두운 밤하늘이 비쳤다. 화석 연료 사용을 중단하며 되찾은 별빛이 반짝였다.
그 대신, 거실 곳곳에 놓인 향초에 작은 촛불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향초에서는 알 수 없는 향기가 새어 나왔다.
클레어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걱정할 거 없어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클레어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당신은 편히 누워 있기만 하면 돼요.”
클레어는 설득하는 듯한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을 감고, 기분 좋은 거에만 집중하면 금방 끝날 거예요…….”
그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직접 긁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래 봬도 연습도 제법 했거든요.”
“여, 연습을 했다고요? 언제요?”
“당신 몰래. 동영상 보면서 공부도 하고.”
클레어가 장난스럽게 배시시 웃었다.
“그러니까, 자. 얼른 벗어요.”
“…….”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모든 게 정말 그런 일을 위해서 준비된 건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나도 진지하게 대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받아들이고 말고 하는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이전에.
나는 양손으로 클레어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건 진지한 이야기였다.
“클레어 씨.”
“네?”
“나는 이런 일엔 순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네에…….”
클레어는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충분히 잘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당혹스러웠다.
‘…외국인이라 그런가?’
클레어의 푸른 눈동자가 순진하게 빛났다.
아무래도 그쪽은 우리 같은 유교 국가와는 가치관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 에둘러 말하는 것만으로는 전해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말귀를 못 알아 들은 것 같으니 자세히 말해서 설득해야 했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그, 왜. 있잖아요. 우리 사이에 이런 일은 조금 부담스럽달까…….”
내 완곡한 표현에 조금 고민하던 클레어가 묘안이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정 부담스러우면 돈이라도 내실래요?”
“…네?”
“농담이에요, 농담.”
미, 미친 거 아니냐고, 이 여자!
“부담스러울 게 뭐가 있어요? 항상 내가 받기만 했으니까, 가끔 정도는 저도 해 주고 싶은 건데. 그냥 보답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언제 뭘 해 줬지?
이런 보답을 받을 만한 일은 한 적은…….
“아.”
그때 거실 한복판에 놓인 커다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얇은 천으로 베일처럼 가리고 있었지만, 그 실루엣만 보고도 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진짭니다! 사람 하나 눕혀 둘 받침대에…
흰돌이의 전음이 떠올랐다.
다가가서 천을 벗겨 내자 나온 건 작지 않은 크기의 접이식 침대였다.
천이라고 생각했던 건 어두워서 정확히 보지 못했을 뿐, 자세히 살펴보니 방수 시트였다. 오일 마사지 같은 곳에 쓰는.
‘그럼 이 조명들은…….’
미약한 촛불을 발하는 향초를 가까이 보니 아로마 어쩌고 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즉.
마사지를 위한 도구들이었다.
흰돌이가 몽둥이라고 표현했던 건 폼롤러였고, 가시 달린 철퇴라는 것도 지압 막대기였다.
“당신도 자주 해 줬잖아요, 마사지.”
“…….”
나는 말없이 웃옷을 벗고 침대 위에 엎드렸다.
얼굴을 가릴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 * *
“제가 풀코스로 모실게요.”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는 거나고요.”
십중팔구 도은이겠지만.
클레어가 주문했던 커다란 택배 상자. 그 크기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게 바로 이 접이식 침대였다. 접이식이라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구인 만큼 차지하는 크기가 있었다.
그 침대엔 한쪽 끝에 둥그렇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런 구멍을 뚫어 놓은 건지 싶었는데, 엎드렸을 때 얼굴을 넣을 수 있게 만들어진 구멍이었다.
‘진짜 평생 고개를 못 들 뻔했네…….’
나는 구멍에 얼굴을 처박고 멋대로 지레짐작하다가 자폭할 뻔한 점을 반성하고 있었다.
자칫했다간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원샷 때리는 성희롱 변태 색마가 될 뻔했다. 아니, 다행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이지. 머릿속은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작 클레어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옆에 서서 손가락과 팔꿈치를 이용해 내 몸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세기는 어때요?”
“…딱 좋아요.”
클레어는 불필요한 말은 일절 하지 않으며 마사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이 익힌 기술을 발휘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연습과 공부라는 말은 생색이 아닌 듯했다.
몸 곳곳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서 내공을 사용해 몸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마사지를 받아도 상태가 더 나아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클레어가 무게를 실어 옆구리 부분을 깊게 눌렀다. 그러면서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어때요. 아프죠?”
“글쎄요. 그닥.”
“…그래요?”
조금 실망한 듯한 반응이었다.
“왜요. 아팠으면 좋겠어요?”
“그, 그게… 나는 아팠으니까요.”
“그래요?”
“그래요. 고작 손가락으로 누르는 건데도 얼마나 아팠는지…….”
그 분노를 담듯 클레어가 내 몸을 꾹꾹 눌러 댔다. 아무리 그래 봐야 아프진 않았다.
“그래도 자주 해 달라고 했잖아요.”
“그야 처음엔 아팠지만, 점점 익숙해지니까 기분 좋아졌는걸요.”
“……?”
아니, 내 딴엔 효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고 한 말인데.
마사지가 뭉쳐 있는 혈과 근막을 자극하는 거라 아픔은 필수불가결했지만, 그로 인해 신체의 운동 능력과 마력의 흐름이 나아졌다는 걸 체감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클레어는 갑자기 부끄러워진 건지 내 등을 찰싹 때렸다.
“뭐, 뭘 말하게 하는 거에요!”
…누가 보면 내가 시킨 줄 알겠다.
“자. 이제 천장 보고 누워요.”
“…….”
똑바로 누우란 말에 나는 따르지 않고 망설였다.
“저기,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무슨 소리에요? 아직 반도 안 한 건데. 자. 뒤집어요, 얼른.”
“전 충분히 만족했으니…….”
“제가 만족을 못 했다구요. 어서!”
클레어가 나를 힘으로 들어 올렸다. 손이 자꾸 미끄러지자 아예 침대 위에 올라왔다.
“잠깐……!”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침대에 깔린 방수 시트나 내 몸은 마사지 오일로 인해 상당히 미끄러운 상태였으니까. 안 그래도 좁은데.
결국 내 몸이 뒤집히는 것과 동시의 클레어의 무릎이 미끄러졌다.
“꺅!”
중심을 잃은 클레어가 내 몸 위로 엎어졌다.
철퍽!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뿌린 오일에 앞이고 뒤고 할 거 없이 다 젖은 맨살의 위로, 가벼운 옷차림을 한 클레어의 몸이 겹쳤다.
얇은 옷자락이 순식간에 기름에 젖어들었다.
“차거……!”
클레어가 손으로 내 몸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중심을 잡기 어려운 건지 손바닥과 허벅지가 계속해서 움찔거렸다. 클레어의 몸이 자꾸만 상하좌우로 흔들렸다.
결국 내가 클레어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아, 감사…….”
감사의 말을 전하던 클레어가 시선을 내리고 입을 닫았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자세가 좀…….
“…일단 내려가시죠.”
“…네.”
클레어가 먼저 마사지 침대 위에서 내려갔다. 입고 있는 옷이 기름에 젖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슬쩍 시선이 닿자 클레어는 팔을 앞으로 모아 몸을 가렸다.
“더 할 거예요?”
“…아뇨.”
클레어의 목소리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마사지 이벤트는 여기서 마무리되는 듯했다.
기름 범벅인 나와 클레어, 둘 다 샤워가 필요했지만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한 클레어의 사정이 더 급해 보였다.
“먼저 씻어요.”
“…아, 네. 그럼 감사히…….”
문득 걸음을 멈춘 클레어가 내게 물었다.
“그 흉터들은 혹시…….”
“…….”
모두 오래된 흉터들이었다. 최근에 생긴 건 클레어의 칼에 베였던 작은 자상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클레어의 표정에 수심이 드리웠다. 내가 저쪽 세계에 가게 된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 흉터들을 보고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워낙 책임감이 강한 여자니까.
“이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
그렇게 말해도 큰 위안은 되지 않는 걸까.
클레어가 처연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 * *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주하린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지금 여우 가면을 쓰고 클레어가 일러준 약속 장소에 와 있었다. 그 상대는 전에도 몇 번인가 본 적 있던 주하린이었다.
한국의 4대… 아니, 이제는 3대라고 불러야 하는 길드 중 하나인 대현의 실세라고 불리는 헌터였다.
-부탁받은 게 있어서요.
이곳에 오게 된 건 클레어의 소개 때문이었다. 주하린은 지금 손이 비는 S급 각성자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한가한 S급 헌터라는 건 외계인 정도로 찾기 어려운 존재였다.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곤란을 겪던 와중, 클레어가 날 보낸 것이었다.
약속 장소는 카페였다. 주하린은 커피를 다 마신 후 얼음을 아그작 씹고 있었다.
‘…일단 등짝부터 맞고 시작할 줄 알았는데.’
내가 아는 주하린은 손버릇이 고약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부를 때 손바닥으로 등을 퍽퍽 치는 습관이 있었으니.
그런데 오늘은 그러긴커녕 인사할 힘조차도 없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무슨 일이 있긴 한 모양이다.
“오늘은 시간 내 줘서 고마워. 재촉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 될까?”
“물론입니다.”
클레어의 소개라고는 하지만, 내가 이곳에 온 건 주하린에게 빚이 있기 때문이다. 내 각성자 라이센스 발급을 도와준 게 그녀였으니까.
센터장 영감의 ‘현학’ 쪽에서도 급한 일은 없었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어려운 일은 아니야. 위험한 일도 아니고. 그냥 간단한 호위 업무인데…….”
호위?
“누구를 말입니까?”
“그건…….”
그때 카페의 문이 열리며 종소리가 울렸다.
한 여자가 하이힐 소리를 또각거리며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주위를 살피던 그녀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드르륵.
그녀는 짜증스럽게 의자를 잡아 끌더니 털썩 주저앉으며 불평을 내뱉었다.
“넌 무슨 약속 장소를 이런 촌발 날리는 곳으로 잡았니? 하여튼 너란 애는 옛날부터 똑바로 하는 일이 없어요.”
“…미안해, 언니.”
언니라고?
내가 두 사람을 번갈아서 쳐다봤다. 주하린이 언니라고 부른 여자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미 한 번 만나 본 사람이었기에 기를 통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주예린.’
함께 예능 프로그램 ‘부부의 세상’에 출연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설마 그녀가 주하린과 자매였을 줄이야. 이름은 비슷하다고 해도, 쉽게 연관 짓지 못한 건 주하린의 지위 때문이었다.
장녀인 주예린이 있다면 왜 여동생인 주하린이 길드를 비롯한 대현의 후계자로 활동하고 있는 건지.
‘…각성자이기 때문인가?’
언니인 주예린은 일반인이었다. 같이 스튜디오 녹화를 진행하며 들었던 내용이기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초대형 길드를 운영하는 대현 그룹은, 장자 승계를 따르기보다는 각성자인 주하린에게 그 왕관을 물려주기로 한 것이라 예상됐다.
주하린이 헛기침을 하고 날 소개했다.
“언니, 이분이야. 언니를 호위할 각성자. 실력은 내가 보증할게.”
“흐음.”
주예린이 선글라스를 슬쩍 내려 치뜬 눈으로 나를 유심히 관찰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주예린이 주하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금 장난하니?”
“어……?”
주예린의 말에 주하린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런 어디서 굴러먹는지도 모를 개뼉다구를 데려왔어? 네가 분명히 말했잖아. 네 그 잘난 인맥을 사용해서 가장 대단한 사람을 앉혀 놓겠다고.”
주예린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게 이거야? 우리 대현 그룹이 이것밖에 안 돼? 아니면 뭐야, 나한텐 이런 개차반이 딱이라 이거야? 너 지금 언니가 우습지?! 우습다 이거지!? 네 수준엔 이 정도가 딱이다, 돌려 말하는 거지!”
“어, 언니…….”
주하린이 말을 잃었다. 그녀의 시선이 나와 주예린 사이를 오갔다.
여기서 주예린에게 사과하면 그녀의 말을 수긍하며 내게 실례를 저지르는 일이고, 그렇다고 내 체면을 세워 주면 주예린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됐다.
“왜 대답이 없니?!”
“아, 으…….”
주예린의 재촉에 주하린이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가정사에 끼어드는 것 같아서 불편하지만…….’
툭.
내가 테이블 위에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을 내려놓았다. 검은 무광 처리가 된 카드였다.
“블랙 라이센스.”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주예린이 라이센스 카드를 들어 올렸다.
“센터장 최강현이 직접 서명한 겁니다.”
센터장 최강현이라는 이름에 주예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주하린 역시 예상치 못했다는 듯 작게 입을 벌렸다.
“이래도 제 수준에 불만이 있습니까?”
대답은 침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