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92
92화 뭘 봐요
“자, 그럼.”
집으로 돌아온 후.
클레어 검사의 취조가 시작되었다.
“바른대로 불어요.”
이따금 튀어나오곤 하는 기상천외한 말재간은, 분명 도은이에게 배운 것이렷다.
“어……. 그 얘기 아직도 하는 거였어요?”
“난 진지하거든요?”
클레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진지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아까처럼 사람 잡아먹을 것처럼 구는 건 아니었지만, 훨씬 더 무게감이 느껴지는 태도였다.
클레어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창 부부 예능을 촬영하며 주가를 올리려고 준비하는 중인데, 자기 남편이 거기 출연진과 스캔들이라도 나면 농담거리도 안 된다.
내가 확언했다.
“바람 피우려는 속셈은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요.”
그사이에 클레어의 태도는 뒤집혀 있었다.
“아까는 되게 뭐라 하더니……?”
“냉정히 생각해 보니 그럴 리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클레어가 방긋 웃으며 이유를 덧붙였다.
“주예린 씨는 돈 잘 벌고 앞날 창창한 남자를 좋아한다 하더라고요. 왜, 지금 남편도 검사잖아요? 반면 당신은 전업 주부니까 어떻게 될 리가 없죠.”
“…….”
내가 떨떠름하게 입꼬리를 경련했다.
둘이 친하긴 한 모양이다. 주예린이 스튜디오 촬영에서 보여 주는 조신한 태도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남자 보는 조건이었다. 직접 말한 건 아닐 테지만, 클레어가 눈치챌 정도로 속내를 드러낸 듯했다.
나도 가면을 쓰고 주예린을 만나 보지 않았더라면 믿음직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 이유에서건, 클레어가 여유를 되찾은 건 다행이긴 했지만……. 취급이 다소 박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시다시피 저도 돈 벌 줄 압니다만.”
영감으로부터 지난 임무의 보수가 지불되어 있었다. 물론 클레어가 버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기에 아직 한 푼도 쓰지는 않았지만.
내 소심한 반항에 물주 클레어가 거드름을 피웠다.
“그래서, 말하고 다닐 거에요? 가면 쓰고 몰래 헌터 활동 하고 있으니까 사실 돈 좀 만진다고?”
“…아뇨.”
“그럼 결국 똑같잖아요.”
반박할 수 없었다.
애초에 주예린한테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고.
“그거면 돼요.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인 걸로.”
“…….”
클레어가 우후후 하고 수줍게 웃었다.
내가 남들 몰래 헌터로 활동하고 있다는 걸 제일 잘 아는 건 클레어가 아니라 센터장 영감인데.
‘거기에…….’
가면도 안 쓰고 만났는데 단숨에 정체를 알아본 샤디아나, 동업자로서 서로 얼굴을 밝힌 탐정. 가게 일로 엮인 양아치 고딩 서지유도…….
새삼 알고 있는 사람이 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 사실을 모른다. 자기 혼자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적어도 센터장 영감에 대한 건 알고 있을 텐데.
‘…냅두자.’
지금 정정했다간 큰일이 벌어질 거라고 직감했다.
* * *
“…이게 ‘호위’ 업무인 겁니까?”
주예린의 부름에 불려 나온 내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백화점이었다.
대현 백화점 강남점, 옥상 테라스.
평소 백화점이라곤 전혀 방문하지 않는 내게도 어느 정도 익숙한 장소였다. 이쪽 세계에 돌아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서 열린 게이트 때문에 사건이 벌어졌으니까.
그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 몇 마리가 주변 시설을 망가뜨려 놓았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은 찾아볼 수조차 없이 깔끔하게 정비가 된 모습이었다.
높은 곳에서 한강과 강북이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풍경에, 바람과 햇빛을 만끽하며 티타임을 만끽할 수 있도록 테라스가 조성되어 있었다.
“왔네요?”
주예린의 목소리였다.
주예린은 마치 하와이에서 휴양이라도 즐기는 것처럼 커다란 챙모자와 선글라스를 장착한 채로 선베드에 반쯤 드러누워 있었다.
옆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놓인 음료엔 칵테일에나 쓸 법한 꼬불꼬불한 빨대가 꽂혀 있었다.
“자, 그럼 저것 좀 들어요.”
주예린이 가리킨 건 몇 개나 있는 쇼핑백이었다.
“내가 왜…….”
“호위잖아요?”
이 여자는 호위를 시종 정도로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미안…….”
그 옆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몰래 사과하는 건 그 여동생이자 의뢰주인 주하린이었다.
자기 언니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S급 헌터를 불러다가 고작 쇼핑백 짐 셔틀로 사용하는 건 진주로 공기놀이를 하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니까.
주하린의 안절부절못하는 시선을 받으며, 나는 조용히 쇼핑백을 들었다.
“괜찮습니다.”
딱히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주하린은 나를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는 데다가 그 존재조차도 기밀에 부쳐진 S급 헌터로 여기고 있는 듯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익숙하구만.’
평소의 난 사회의 그림자에 숨어 아무도 모르게 대단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딱 이런 상황과 비슷한 일을 하곤 했으니까.
도은이가 클레어와 나를 끌고 나가서 옷걸이와 짐 셔틀로 써먹는 건 이미 익숙했다.
백화점은 한산한 수준을 넘어, 우리와 직원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백화점에 전세를 낸 상태였다. 이런 게 가능하다니, 재벌들이란…….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주예린이 탈의실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기다리는 것도 이제는 익숙했다.
여성복 매장에서 혼자 짐 떠안고 멀뚱히 서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정도의 레벨이었다. 백화점에 전세를 낸 덕에 직원 외엔 아무도 없으니 더 쉬웠다.
…이건 도은이한테 감사해야 하는 건가?
“어때요?”
옷을 갈아입고 나온 주예린이 물었다.
“어, 엄청 예뻐! 언니!”
“쯧. 시끄러. 누가 너한테 물었니?”
“미안…….”
주하린이 깨갱하고 찌그러졌다.
주예린은 그런 동생의 반응엔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고 내게 물었다.
“남성분의 의견을 듣고 싶은 거니 솔직하게 말해 봐요. 어때요?”
클레어의 말대로 주예린은 다소 과감한 옷을 입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 입고 나온 것도 그런 의도가 드러나는 원피스였다. 너무 짧거나 얇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몸매를 부각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의도가 다분하군.’
나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뱉은 건조한 칭찬에 기대로 가득 차 있던 주예린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흠. 재미없네.”
가면을 쓰고 있어서 편한 건 표정 관리를 할 필요가 없는 점이었다.
“됐어요. 그럼 다음은…….”
“여기 있습니다.”
내가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옷을 건넸다. 주예린이 어리둥절하게 그 옷을 받아들었다.
“어… 네, 고마워요……?”
이 새끼 뭐지 하는 눈빛이었다.
이게 모두 도은이의 훈련을 거친 결과였다. 덕분에 여자들이 쇼핑하고 옷 갈아입어 보고 할 때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한 행동 양식을 빠삭하게 익혀 놓을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나는 잘 훈련된 셔터맨답게 사모님의 쇼핑을 훌륭하게 보조했다.
쇼핑을 마칠 때쯤 되자 주예린도 만족한 건지 만면에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 까탈스러운 여자가 즐거운 목소리로 물어볼 정도였다.
“당신 정말 헌터 맞아요? 사실 어디서 수행 비서라도 하던 거 아니에요?”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흘렸다.
“유능한 헌터는 배워 둘 일이 많다는 것만 말씀드리도록 하죠.”
“네, 정말 그렇네요. 이 둔한 애가 보고 좀 배웠으면 좋으련만.”
그러는 와중에도 주예린은 동생에 대한 험담을 꼭 빼놓지 않았다. 틈날 때마다 해 두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칠 듯이.
주하린은 면전에서 그런 소리를 듣고도 멋쩍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어머.”
주예린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놀라운 소식이라도 전해 들은 듯이.
“무슨 일이야?”
“네가 알 거 없잖니.”
어깨를 붙이려는 주하린을 홱 피하며 주예린이 가슴으로 핸드폰을 끌어당겼다.
“응…….”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내 시선을 느끼고 주예린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조금 재밌는 일이 벌어져서요.”
재밌는 일?
그리 말한 주예린이 시시덕거리며 웃었다.
“알려 줄까요?”
“됐습니다.”
별로 궁금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주예린과 나는 사는 세계가 달랐다.
저쪽은 인플루언서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직업을 가진 여자였다. 개인 방송이라든가, 인스타 사진이라든가, 모두 나와는 연이 멀었다.
‘…나랑은 관계 없는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 *
“야, 이 미친 오빠 새끼야-!”
도은이가 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왜 네가 뜨고 지랄이야아아-!!”
“…난들 아냐.”
클레어와 함께 출연한 ‘부부의 세상’이 방영되었다.
예정된 일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새 벌써 그런 시기였던 것이다.
본래 우리가 이 예능 프로에 출연한 목적이란, 대중에게 클레어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즘 헌터는 대중성도 무기가 되는 시대라고 해서.
그러니까 뜨는 건 클레어여야 했는데…….
어제 저녁.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어떤 여성분이 와서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이도율 씨 아니에요?
-…네? 맞는데요.
-와, 진짜요!? 방송 너무 잘 보고 있어요!
그때는 단순히 그냥 티비에서 본 사람 만나서 신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인식하고 나니 깨달았다. 공개된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도 은근히 나를 힐끔거리고 있다는 것을. 워낙 밝은 감각 덕분에 죄다 알 수 있었다.
‘…보통 방송 한 번 나왔다고 이렇게 관심을 끄나?’
비교할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보통 일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 건 도은이가 찾아와서 역정을 냈기 때문이다. 지금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내가 화제라나 뭐라나.
처음엔 그거 하나 때문에 집까지 찾아왔나 싶었지만.
[제목: 야, 나 클레어 컴벨이 일반인이랑 결혼했다길래] [내용: 뭐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나? 했는데(사진)
이번 생에 구한듯… ㅇㅇ]
도은이가 보여 준 인터넷 게시글이었다. 그 아래로 댓글들이 굉장히 많이 달려 있었다.
[댓글: 쓰니야 이거 제목 뭐야??] [댓글: └ 부부의세상이라고 갓나온 따끈따끈한 신상 예능!! ㅋㅋ] [댓글: 와, 나 금흑 커플링에 환장하는거 어떻게 알고 이런 부부 캐스팅해온거야?? 피디님 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ㅠㅠㅠㅠ] [댓글: 오케이 저장] [댓글: 진짜 내용 격공이다 나 클레어 팬이라 이 갈면서 봤는데 바로 아빠미소됨;;] [댓글: 왜케 난리임? 솔직히 난 잘 모르겠던데 (X)] [댓글: └ 네 환자분 거울 보고 오세요~] [댓글: 호들갑 쩌네 ㅅㅂ (X)] [댓글: └ 열폭 쩌네 ㅋ] [댓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말투 참 적응 안되네.
그중 눈에 띄는 댓글이 있었다. 홀로 꿋꿋이 대세를 거스르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댓글들엔 하나같이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야. 그런데 이 X자 쳐진 댓글은 뭐냐?”
“아. 그거 내가 쓴 댓글이라 삭제 가능한 거.”
이마를 짚었다.
동생이라는 년이…….
핸드폰 화면 위로 푸시 알림이 나타났다.
[핫 게시글 등록! ‘요즘 핫한 부세상 이도율 움짤 쪄왔어’]“움짤이 뭐야?”
“움직이는 짤방.”
백문이 불여일견. 도은이가 알람을 눌러 게시글로 이동했다.
그곳엔 방송에 출연했던 내 모습이 짧은 영상 형태로 기록되어 있었다. 사진과 달리 몇 초 정도 짧게 움직이고 있었다.
맨 위엔 카메라를 보고 멀뚱히 서 있다가 어색하게 인사하는 영상이었다.
“얼씨구? 이거 뭐야? 뭐, 왜 이런 거야? 카메라 처음 봐? 원시인이세요?”
“아니…….”
카메라에 대고 인사 좀 한 거 가지고 이렇게 화제가 될 줄은 몰랐다.
“그거 하나가 다겠어? 봐 봐라. 스크롤 내리면 아주 그냥…….”
“…그만 봐.”
“그만 보긴 뭘 그만 봐? 이미 방송 다 나가서 본방에 재방에 클립에 하이라이트에 아주 오만 데서 다 갖다 쓸 텐데! 아이고~ 내 우리 오빠가 이리 화면발을 잘 받을 줄은 몰랐네.”
나는 귀를 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은이 녀석은 지금 잔뜩 뿔이 난 상태니 그나마 말이 통하는 클레어와 앞으로의 일을 상담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클레어는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클레어 씨.”
“히꺄악!?”
내가 다가가 인기척을 내자 클레어가 핸드폰을 손에서 놓쳤다. 공중에서 몇 번 저글링을 하던 클레어의 핸드폰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
한술 더 떠서, 클레어가 잽싸게 무릎을 꿇고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뒤집어엎어 버렸다.
퍼억!
…좋지 않은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괜찮아요?”
클레어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사나운 눈빛을 내뿜었다.
“뭐, 뭘 봐요.”
나는 그저 조용히 핸드폰 액정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