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93
93화 생각 없습니다
“자. 일단 작전을 한번 세워 보자고.”
도은이 손뼉을 크게 두어 번 쳤다.
그 소리에 도율과 클레어가 도은이 있는 테이블로 집합했다.
“…갑자기 웬 작전?”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이렇게 된 거고. 그걸 바탕으로 앞으로 어떻게 할지 방침을 정해야지. 가능하면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는 쪽으로.”
도은이 검지 손기락을 세우고 설명했다.
도은의 입장에서, 자기 오빠가 하루아침 사이에 일약 스타덤에 오른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작 띄우려고 했던 클레어는 나름대로 용을 써 봐도 실적이 없었는데, 덤으로 끼워 넣은 오빠 놈이 이렇게 될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래서 운칠기삼이라고 하는구나.’
하지만 일이 벌어진 이상 제대로 써먹어 줄 의무가 있었다.
“어떻게?”
“이제부터 오빠한테 러브콜이 엄청나게 쏟아질 텐데, 두 사람은 부부잖아. 가능한 부부 동반으로 출연해서 언니를 띄워 주는 거지.”
“…다른 데도 나가야 한다고?”
도율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 반응에 도은이 대안을 제시했다.
“공중파나 케이블이 부담스러우면 인터넷 방송 쪽을 알아보는 것도 괜찮고. 요즘 세대는 그쪽이 더 친숙하니까.”
그런 시대였다.
방송국에서 정규로 편성한 드라마보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드라마가 더 화제가 되고, 예능 방송보다 유튜브 클립이 조회수가 많이 나오는 세상.
도율에겐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 영역이었다. 덕분에 부담감은 더욱 적었다.
“그게 낫겠네.”
“좋아.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좀 친해야 분위기도 편안하고, 내용도 좋게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는 사람이라.
도율이 손바닥으로 입가를 덮었다.
그런 식으로 개인 방송이나 영상 업로드 플랫폼을 사용해서 유명세를 모은 사람을, 요즘은 인플루언서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가 아는 사람 중에 인플루언서를 자처하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도은도 거기까지 생각이 가 닿았는지 도율을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같은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 중에 그 사람 있지 않아? 주예린. 꽤 유명할 텐데. 어디 보자, 팔로워가……. 3천만? 이런 미친.”
“많은 거야?”
“졸라 많지. 암튼 이 사람한테 한번 물어볼 수 있어? 내가 보기엔 이 정도 올라갈 정도로 잘 아는 사람이면 자기도 하고 싶어 할 것 같은데, 합방.”
주예린과의 합동 방송이라는 말에 도율이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도율과 클레어를 비롯한 방송 출연진들의 앞에서 예의 바른 태도를 내비치는 여자였지만, 가면을 쓴 상태에선 그 본색을 볼 수 있었다.
선뜻 그렇게 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삐리리.
도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도율이 미간을 찌푸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벨소리 되게 촌스럽네. 좀 바꿔라.”
“신경 꺼. 그보다 난 나가 본다.”
“나간다고? 어딜?”
“알바.”
“알바아?”
“그런 게 있어.”
“언니 카드 갖다 쓰면서 뭘 또 사려고 알바까지 하는 건데! 야!”
도율이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현관까지 도율을 배웅한 도은이 집 안으로 돌아와 보니,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클레어가 있었다. 대화하는 도중에도 그랬다.
대체 뭘 하느라 정신이 팔린 건지.
도은이 클레어의 어깨 너머를 들여다봤다. 클레어가 핸드폰 화면을 조작해 인터넷 게시글에 올라온 이미지를 하나씩 저장하고 있었다.
“언니, 이걸 일일이 저장하고 있었어? 이거 전체 저장 있어.”
“아, 고마…….”
감사 인사를 전하던 클레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핸드폰을 놓쳤다.
식탁 위로 떨어진 핸드폰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클레어가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봐, 봤어……?”
그 모습에 도은이 콧방귀를 꼈다.
“뭘 나한테까지 숨기고 그러시나. 난 알 거 다 아는데.”
“…그, 그래두.”
클레어가 쑥스럽다는 듯이 새하얀 손가락을 뻗어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좋아?”
“조, 좋다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은이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우리 언니 이제 어떡하나.”
“뭘 어떡해? 방송?”
“아니, 그거 말고. 우리 오빠 이제 경쟁자가 많이 늘어서 빡셀 텐데. 어떡하면 좋아?”
도은이 쿡쿡 웃었다.
그와 상반되게 클레어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최근 들어 볼 일이 없었던, 처음 만난 시절의 클레어나 지을 법한 냉담한 표정.
더욱 무서운 건 거기에 옅은 미소가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
“어, 언니……?”
“도은이 네 말대로,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
클레어가 그 미소를 더욱 짙게 드리웠다.
“괜찮아. 다 방법이 있으니까.”
“…….”
그 방법이 무엇인지.
도은으로서는, 도저히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 * *
“…일 날 뻔했네.”
아무도 없는 인기척 드문 골목길.
가면을 쓰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주예린이 부른 장소에 가는 길엔 차를 타고 이동했다. 하지만 차 안에서 가면을 쓰고 나올 순 없었다. 차량 번호를 대조해서 정체를 들킬 수도 있으니 그러지 말라고 들었다.
차에서 내린 후 아무도 보지 않는 곳까지 이동한 후에 가면을 써야 했는데, 문제는 그 직후였다.
주예린답게 이번에도 사람 많은 번화가 근처로 불러냈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한 거였다.
“헉, 저거 이도율 아니야?”
“와. 진짜인 것 같은데?”
“가서 말 좀 걸어 볼까?”
그런 사람들이 내가 어딜 향하는지 유심히 지켜보는 덕분에 조금은 골머리를 앓았다. 결국 전부 따돌리긴 했지만.
무사히 여우 가면을 착용하고 약속 장소에 도달하자, 먼저 와 있던 주예린이 핀잔을 줬다.
“조금 늦었네요?”
부르자마자 튀어나왔는데 이런다.
“오늘은 또 뭡니까?”
장소는 호텔이었다. 잘 닦인 바닥에 천장의 모습이 그대로 비칠 정도로 깨끗했다.
공항을 방불케 하는 널찍한 로비에 고급 가죽을 쓴 것처럼 보이는 소파가 넓은 간격을 두고 놓여 있었다.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주예린과 주하린 같은 유명 인사를 보고도 태연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주예린은 내 대답을 깔끔히 무시하고 질문을 던졌다.
“당신, 수영복은 있어요?”
“…예?”
이 겨울에?
그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잠시 후.
나는 주예린이 그렇게 물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대현힐 파크 호텔에 새로 개장한 온수 풀 체험을 위해 와 봤는데요!”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주예린이 막대 끝에 달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호텔의 옥상엔 수영장이 지어져 있었다. 야외였지만 투명한 유리 벽이 바람을 막아 주는 데다가 바닥에서 열이 올라와 수영복만 입고도 크게 춥진 않았다.
주하린 역시 주예린이 건네준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부끄러운 건지 은근하게 어깨나 팔로 몸을 가리려 했다.
…문외한인 내가 봐도 얌전한 차림은 아니었다.
“그쪽은 진짜 안 갈아입을 거예요?”
반면 나는 정장 차림이었다.
어차피 카메라에 나갈 일도 없으니 분위기 맞춰 수영복을 입을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시험 삼아 갈아입었더니, 주예린이 흉터를 보고 기겁을 했다. 평범한 사람에겐 가만히 보기도 어려운 몸이었다.
“젖어도 난 몰라요.”
“그럴 일 없습니다.”
옷이 젖는 건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물 위를 걸을 수도 있었다.
주예린이 주하린의 옆에 폴짝 뛰어들었다.
“오늘은 제 동생! 하린이와 함께…….”
주하린이 카메라를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주예린이 등 뒤로 주하린의 몸을 멋대로 주물렀다. 등이 말려 있는 주하린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세를 다듬었다.
그리고 주예린의 지시에 따라 주하린이 카메라를 향해 정해진 인삿말을 내뱉었다. 그러는 동안 주예린이 주하린의 수영복 끈을 잡아당겼다.
주하린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언니, 나 이런 건…….”
“왜? 부끄럽니?”
주예린이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다.
“너 무슨 조선 시대에서 태어났니? 아니면 뭐야? 이런 부끄러운 짓은 너한테 시키지 말고 나나 잔뜩 하라 이거야? 네 언니가 하는 일이 쪽팔려?”
“그렇지는…….”
“하, 됐어. 그럼 시설 소개는 나 혼자 할 테니까 찌그러져 있어.”
주예린이 풀장 밖을 가리켰다. 촬영에 방해가 되니 구석에 가만히 있으란 뜻이었다.
주하린이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자 주예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촬영을 재개했다. 처음부터 혼자 있었던 것처럼.
넓은 시설을 하나씩 둘러보기 위해 주예린이 카메라를 들고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명색이 호위 일을 맡고 있는 만큼, 나도 주예린을 따라 이동하러 가야 했지만… 시야 한구석에 밟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물 빠진 생쥐 꼴을 한 주하린이 풀장 바깥에 나와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각성자니까 마력을 끌어 올리면 젖은 몸으로도 추위 따윈 느끼지 않을 텐데. 주하린은 물에 젖은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
이동하기 전, 나는 말없이 정장 재킷을 벗어 주하린의 어깨에 걸어주었다.
그러자 주하린이 애써 웃는 얼굴을 지었다.
“고마워.”
감사 인사를 들었는데도 기분이 편하지 않았다.
* * *
“이야. 난 처음부터 도율 씨가 이렇게 화제를 몰고 올 줄 알았다니까!”
스튜디오 안, 촬영을 마친 후 강종우가 너스레를 떨었다.
주예린의 남편인 임지훈은 인상이 좋고 매너가 몸에 배어 있긴 했지만, 다른 출연자들과 친하게 지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반면 강종우는 곧잘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곤 했다. 나도 그와 말을 섞는 사이가 됐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렇다니까! 기억하죠? 내가 처음 만난 날 했던 말. 그 클레어 씨의 남편이란 것만으로도 주목의 대상인데……. 방송적으로 좋은 내용까지 더해지니, 당연히 반응이 올 수밖에요!”
“…처음 녹화 했던 날엔 아무 말 안 했잖아요.”
“크흠, 흠.”
모두 결과를 보고 하는 말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결국 잘됐으니 축하한다는 소리나 다름 없었으니까. 연예인도 아닌 내가 관심을 끌어서 크게 좋을 일 따윈 없다 하더라도.
그때, 여성의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도율 씨?”
최근 아주 익숙해진, 못 알아듣기가 더 어려운 목소리. 그 주인은 주예린이었다.
“잠깐 얘기 좀 가능하실까요?”
주예린이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강종우가 빠져야 하나 눈치를 봤지만,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말씀하시죠.”
주예린은 내 쌀쌀맞은 반응에 조금 의외라는 듯 멈칫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를 두르고 내 말에 따랐다. 다른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도 말할 수 있는 당당한 용건이라는 듯이.
“좋아요. 사담을 안 좋아하시는 듯하니 거두절미하고 바로 물을게요. 혹시 이 기세를 몰아 다른 방송에도 출연할 계획이 있으신가요?”
“다른 방송이라면?”
“개인 방송이라든가.”
개인 방송.
도은이와 말했던 게 바로 그거였다.
주예린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아시다시피 제가 개인 방송을 진행하는 채널이 있어서요. 거기 게스트로 출연해 주시길 부탁하는 거예요.”
당당한 부탁이었다.
옆에 선 강종우가 자기한테 한 소리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떨며 팔뚝을 두드렸다.
“들었어?! 와, 예린 씨 채널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래! 지금 거기 웬만한 연예인도 섭외받고 싶어서 안달 난 대형 채널이라고! 이야, 땡 잡았네 도율 씨!”
옆에서 잔뜩 바람을 잡는 강종우의 말에 주예린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주예린은 한껏 여유롭게 제시했다.
“물론 원하신다면 클레어 씨도 함께 동반 출연으로…….”
“됐습니다.”
내 칼 같은 대답에 주예린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러다 재밌는 농담이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아이, 참. 클레어 씨가 들으면 서운해 하겠어요. 알겠어요. 그럼 도율 씨만…….”
“아뇨. 그게 아니라.”
내가 단언했다.
“거기 나갈 생각 없습니다, 저는.”
“…네?”
주예린의 웃는 얼굴 위로 커다란 금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