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94
94화 잠깐 나 좀 볼까요?
“그 망할 남자!”
자택으로 돌아온 주예린이 핸드백을 소파 위에 내동댕이쳤다.
이어서 그 위로 몸을 던지듯 깊게 눌러앉았다.
“뭔데 내 제안을 거절하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주예린이 손톱을 깨물었다.
그녀가 이토록 역정을 내는 이유. 그것은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있었던, 이도율이라는 출연자와의 대화 때문이었다.
‘제법 쓸 만한 소재라고 생각했는데…….’
이도율. 지금까지 그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지만, 그 클레어 컴벨의 남편이라는 이유로 방송에 출연한 덤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것도 첫 방영 개시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이 바닥에 뜨고 지는 걸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지만, 이도율은 정말 예상치도 못하게 화제 몰이를 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본인조차도 예상치 못한 것처럼 얼떨떨하게 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쪽에 아예 관심이 없는 거거나.
‘일부러 그때를 노린 건데.’
주예린은 일부러 따로 연락하지 않고 스튜디오에서 다 같이 촬영하는 날까지 기다렸다.
그런 타입은 따로 연락을 하면 괜히 겁을 집어먹고 틀어박힐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촬영을 목적으로 만난 날에 지나가는 말처럼 흘린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불발이었다.
‘다시 물어본다고 생각을 바꿀 태도가 아니었어.’
보통이라면 다른 사람도 있는 자리에서 물어보면, 그 자리에서 수락하거나 생각 좀 해 보겠다고 에둘러 말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도율은 미련도 없다는 듯이 딱 잘라 거절했다.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얼어붙을 정도로.
누군가가 손톱을 물어뜯는 주예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말했지.”
임지훈. 주예린의 남편이었다.
그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주예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는 법이라고.”
그러자 주예린이 조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패배한 개들끼리 서로 상처나 핥아 주면서 살자고?”
“…주예린.”
“내가 틀린 말 했어?”
임지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예린의 가시 돋친 언성은 그칠 줄을 몰랐다.
“너나 나나 집안에서 끈 떨어진 연 취급이었는데, 그놈의 정치니 뭐니 하는 지긋지긋한 것 때문에 어디로든 팔려 갈 신세였던 거 아니야? 다른 집에 들어가서 등쌀 견디며 사느니 나 같은 미친년이라도 끼고 사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거고. 틀렸어?”
“…….”
임지훈이 입을 다물었다.
주예린과 임지훈. 두 사람 모두 대단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배경을 차지할 수 없는 신세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집안과의 정략결혼이 예정되어 있던 두 사람이 만나 합의하에, 서로의 사생활에 크게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결혼한 것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결혼이었으나 두 가문도, 두 당사자도 모두 만족했다.
방송에 출연한 것도 그런 활동의 연장선이었다.
사이 좋은 부부를 대중 앞에서 연기하며, 좋은 레스토랑 따위를 예약해 촛불 앞에서 샴폐인 잔을 부딪치는 게 두 사람의 일이었다.
하지만 둘만 있는 곳에선.
“서로 참견하지 말자고 했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도 너 알아서 해. 그 잘난 검사 놀이 계속하든, 나가서 다른 여자라도 만들든 마음대로 하라고. 나는 하나도 신경 안 쓰니까.”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임지훈이 체념한 듯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래.”
임지훈이 다시 집을 나섰다.
넓은 집 안에 주예린이 홀로 남았다.
* * *
“아가씨! 작은 아가씨! 어디 가셨어요!”
어린 소녀가 중년 여인의 말을 무시한 채 사탕을 입에 물었다.
소녀는 방학을 맞아 조부가 있는 시골 어딘가에 있는 본채에 놀러온 참이었다. 본채라 불리는 집은 아주 넓은 마당과 길을 잃을 정도로 복잡한 구조를 지닌 한옥이었다.
하지만 소녀에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장소여서, 소녀는 툭하면 본채에서 빠져나와 군것질하러 시내에 놀러 가곤 했다.
시녀가 한 명 따라붙었지만, 보다 자유롭게 놀기 위해 따돌리는 게 마음 편했다.
그런 것보다.
소녀는 시선을 돌려 자신을 따라온 어린아이에게 또 다른 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너도 한번 먹어 봐. 얼마나 맛있는데.”
“…진짜 먹어도 돼?”
“안 죽어, 안 죽어.”
소녀는 히죽 웃더니 직접 포장을 까서 아이의 앞에 들이밀었다.
아이는 미심쩍은 눈길로 사탕을 바라보다가, 크게 다짐한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소녀처럼 입에 집어넣을 자신은 없어 혀끝을 내밀어 톡 가져다 댔다.
그러자 시고 달콤한 맛이 퍼져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침샘이 뻐근해졌다.
“으……!”
“으힛! 셔?”
아이가 몸을 부르르 떨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먹지 말래? 내가 다 먹어 버릴까?”
“…….”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이의 손에 사탕을 쥐여 주었다.
손에 들어온 사탕을 보고도 아이는 선뜻 입을 대지 못했다. 처음 맛본 사탕의 맛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달리 우려하는 일이 있는지.
“할아버지한테 혼나는데…….”
아이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내가 다~ 책임질게!”
“…진짜?”
소녀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히 벌린 입 사이로 혓바닥이 들여다보였다. 아이가 그 모습을 보더니 안색이 파래졌다.
“어, 언니……!”
“응? 왜?”
“혀, 혀가 파래……!”
“어어?”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파란 사탕을 먹었으니 혀가 파래지지.
소녀는 그렇게 설명하려다 말고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소녀가 아이를 향해 입술을 베- 내밀고 물었다.
“이거 말이야?”
“히……!”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하, 할아버지가 하지 말라는 거 해서……. 죽는 거야? 언니?”
“풉. 킥…….”
결국 소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바보야! 사탕이 파래서 그래. 그거 먹으면 다 파래져!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아.”
“진짜야? 아픈 거 아니야?”
“하나도 안 아파.”
소녀가 주변을 살폈다. 근처,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하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찾아보았다.
이윽고 소녀가 아이의 손을 잡아끌어 유리창 앞에 세웠다.
“그리고, 봐. 너도 파랗잖아?”
“…진짜다.”
아이는 혓바닥 색이 파래진 게 그렇게 신기한 지 유리창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그러다 혀를 내민 소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두 사람이 혓바닥을 내밀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왠지 재밌다, 언니.”
“그렇지?”
소녀가 사탕을 와그작 씹었다.
“자, 아직 다른 것도 많다고!”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그렇게 어린 동생의 손을 맞잡고 문방구나 오락실을 전전하며 이런저런 군것질거리를 사서 나눠 먹었다.
보석 모양 사탕을 손가락에 끼우기도 하고, 빨대 안에 들어 있는 과자를 빨지 않고 후 불어서 바닥을 향해 쏴 버려 울상 짓는 모습도 구경했다.
해가 질 무렵.
두 사람을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다.
“아가씨, 작은 아가씨. 한참 찾았습니다.”
“켁.”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소녀는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런 복장을 한 남자들의 말을 거슬러서 좋을 건 없다는 것을.
하지만 벌써 제법 늦은 때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네. 돌아갈까.”
한 수 접어 주는 듯한 말투에 동생이 언니의 손을 꼭 붙잡았다. 돌아가기 싫다는 듯이.
“언니…….”
“솔직히 오늘은 많이 놀았잖아. 그치?”
게다가 오늘만 날이 아니었다.
내일도, 모레도. 이 시골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지루한 나날은 이어질 것이다. 시간이라면 썩어 날 정도로 넘쳐났다.
“…그러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의 차에 올라타, 두 사람이 본채에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소녀는 동생을 만날 수 없었다.
“네?”
“죄송합니다. 지금 작은 아가씨께선 수학에 힘쓰고 계십니다.”
시녀의 말이었다. 동생을 만나게 해 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소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였다. 방학 때까지 수학 공부를 할 이유가 있는 건가 싶었다.
“아, 알겠어요. 이번엔 진짜 밖에 안 나가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냥 같이 공부하면 안 돼요? 수학이라면 나도 잘해요. 나 약분도 할 줄 알고, 통분도 할 줄 알아요.”
“죄송합니다.”
시녀는 말없이 고개를 수그릴 뿐이었다.
말이 안 통한다는 걸 알자 소녀는 포기한 척 몰래 잠입하기 위해 방 주위를 서성였다. 하지만 보이는 곳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자들이었다.
“…뭐냐고, 진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 *
“쇼핑은 저번에도 하지 않았습니까?”
내 물음에 선글라스 너머로 주예린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당신, 모솔이죠?”
“네… 네?”
모솔.
모태솔로냐는 뜻이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이래 봬도 결혼까지 한 몸이다. 비록 진짜 결혼은 아니지만.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드는 게 더 이상한가?
…그보다 솔직하게 대답할 필요가 있나? 가면도 썼는데.
“얼마 안 있으면 크리스마스잖아요. 이런 것도 모르는 거 보니, 모솔 맞죠? 잘나가는 헌터면 뭐 하시나.”
할 말이 없었다.
주예린은 남편과 보낼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위한 상품들을 고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부 동반 예능에 출연하고 있으니, 방송에 나갈 것도 고려해서 그런지 신중한 모습이었다.
물건을 들여다보며 주예린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여자들한테 쇼핑을 왜 그렇게 자주 하냐는 것만큼 무의미한 질문도 없는 거 알아요? 모르면 이참에 알아 둬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다.
도은이도 툭하면 클레어를 데리고 쇼핑을 하곤 했으니까. 심지어 클레어도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고.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긴 했다. 이렇게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넓은 부지를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물건을 구경한다는 건, 필요하거나 즐거운 일이라기보다 귀찮고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일이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한 가지, 저번과 다른 점을 물었다.
“오늘은 전세가 아니네요?”
직원은 물론 다른 손님들도 북적이고 있었다. 주예린 말대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어서인가.
“오늘은 하린이가 없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
내 질문에 주예린이 잠시 말을 골랐다.
“뭐, 결국 나 같은 딴따라한테 백화점을 전세 낼 만한 파워는 없다는 뜻이죠. 동생 년 바가지라도 긁지 않으면 불가능한 짓이라고요.”
…그런가.
대답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주하린이 바쁜 일이 있어서 이 자리에 없다 하더라도, 전세는 내 달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나 깊게 파고들기 전, 얕게 펼쳐 둔 기감에 경종이 울렸다.
명색이 호위다. 주예린에게 정말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도 최소한의 경계는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기감도 그 수단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범위 내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걸렸다.
…그것도 두 사람이나.
기의 파악이 틀린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게다가 쐐기를 박듯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요즘은 이 브랜드가 되게 명성이 자자하던데. 들어 봤어?”
“아니……?”
“그럼 한번 둘러보자고.”
깨달았다.
부부 동반 예능에 출연하고 있는 건, 비단 주예린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전혀 피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클레어는 지금 내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그 내용이 주예린을 호위하는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나, 주예린, 클레어, 이도은. 네 사람을 한 자리에 모아 놓는다고 상상해 보면…….
나는 황급하게 주예린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당장 이곳을 떠야 합니다.”
“네? 갑자기 뭔데요? 아직 사야 할 게…….”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목숨이 걸린 일이에요.”
그러자 주예린의 안색이 굳었다.
누구 목숨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만.
“무, 무슨 일이…….”
동의를 구하긴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언니? 아는 사람이야?”
“흐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쭈뼛하고 멈춰 섰다. 저쪽 세계에서도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는 존재에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잠깐 나 좀 볼까요?”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신은 대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