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96
96화 데이트 한번 하죠
“그 전에 잠시 묻지.”
날카롭게 벼린 마력을 뒤로하고, 남자는 곧바로 덤비진 않았다.
나 역시 성격이 급한 편은 아니었다. 싸움은 가급적 피하고 싶다는 평화주의자이기도 했다. 대화로 풀어 나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뭐를?”
“우리가 부딪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단순한 비즈니스라면, 슬슬 이골이 나지 않았나?”
“그렇긴 한데.”
남자의 말에 내가 어렴풋이 긍정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의뢰를 받은 상태라 하더라도 주예린 같은 여자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냐는 뜻이었다.
그야 물론 주예린이 가진 이중적인 태도나, 동생에게 대하는 개차반 같은 면모는 잘 알고 있지만.
“내 의뢰인은 주하린이거든.”
나는 의뢰인에게 의뢰 받은 내용 그대로를 충실히 이행할 뿐이다.
“우매하군.”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진정으로 아가씨를 위하는 일이 무엇인지, 너 같은 놈팽이가 알 리가 없겠지.”
“…….”
남자는 대현 쪽의 인간이었다. 입고 있는 복장을 통해 짐작했지만, 주하린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걸 통해 더욱 확실해졌다.
물론 외부인에 내가 그쪽 그룹이나 길드에 관한 사정을 자세히 알 방법은 없었다.
없지만.
“걔가 애냐?”
주하린은 엄연한 성인이었다. 본인에게 필요한 일이라면 본인이 판단하고, 실패했을 땐 스스로 책임지면 된다.
지 언니한테 구박받고 사는 건 보기 안쓰럽지만, 그래도 언니가 너무 좋다면 어쩔 수 없지.
부탁받지도 않은 일을 멋대로 하는 건 오지랖이다.
“말이 통하질 않는군.”
남자가 질렸다는 듯 대화를 잘라 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남은 수단은 힘으로 관철하는 길뿐이었다. 그를 행하기 위해서인지 남자가 자세를 잡았다.
“손은 적당히 쓰지. 부상을 입는다면 치료를 위해 임무를 중단할 수밖에 없으니, 네게도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다.”
“부상이라…….”
남자가 몸을 날려 거리를 좁혔다.
재빠르면서도 조용한 돌진이었다. 코트 자락이 어둠 속에 녹아들어 꼬리처럼 이어졌다.
동시에 검은 가죽을 장갑을 낀 남자의 주먹이 내게 향해 꽂혔다.
은밀하고 신속한 일격.
아마 웬만한 각성자였다면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당했을 거다.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는 대현의 코트를 입고 있는 건 허세가 아니었다. 제대로 볼 수 있는 놈은 없는. 그리고 본 놈들은 모두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에 찬 복장이었다.
탁.
내가 공격을 쳐 내자 남자는 당황하지도 않고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방금 그 한 번으로 내 기량을 한층 올려서 가늠했는지, 더욱 날카롭고 파괴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키이잉!
남자의 손날에선 검명이 울렸다. 마력으로 만들어 낸 칼날이 비수처럼 날카롭게 바람을 갈랐다.
‘…재밌네.’
저쪽 세계에서도 수도手刀를 사용해 싸우는 자를 만나 보았지만, 내공을 사용하는 자와는 느낌이 사뭇 판이했다.
내공과 마력은 비슷하게 운용이 가능했지만, 사용하는 방식이 달랐다.
강하고 사람을 상대할 일이 잦은 무공과, 생존과 경쟁의 수단인 동시에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익히는 마력. 수련의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마력을 저렇게 일종의 칼날처럼 빚어내 손날에 덮은 것 역시 내 입장에선 생소했다.
그러면서도 남자의 동작은 사람을 대하는 것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었으니. 두 스타일을 섞어 놓은 듯한 낯선 느낌에 상대하기가 조금은 불편했다.
오히려 그 불편함이 즐거웠다.
‘토너먼트에서 주혁이란 놈을 먼저 만나 보지 않았으면 고생 좀 했을지도.’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남자 역시 손을 늦추고 물었다.
“왜 반격하지 않지?”
“음…….”
그의 말대로, 나는 별다른 반격 없이 남자의 공격을 받아 내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급급하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 역시 아니었다. 남자는 그걸 알아볼 눈썰미가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손을 섞은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내가 죽지 않게 조절하려는 속셈이었겠지만, 조금씩 수준을 끌어올림에도 불구하고 여유롭게 대응하는 내게 경계심을 갖게 된 것이다.
“어디서 튀어나온 거냐, 음흉한 놈.”
“피차 얼굴 가리고 일하는 신세인데 말이 너무 심하시네.”
반면 나 역시 남자의 수준을 점치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공방 도중에 상대의 기량을 침착하게 살필 여유가 있다는 건, 남자 역시 아직 전력이 아니라는 뜻.
대현이라는 집단에 속한 만큼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리라 예상했지만, 일개 살수 하나라고 보기엔 가벼운 실력이 아니었다.
“혹시 대현엔 당신 같은 사람이 수두룩한 건가?”
“대답할 의무는 없다.”
“그럼 곤란한데.”
뭐가 곤란하다는 거냐. 눈빛으로 쏘아 보는 듯한 기색에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나도 그 주대현이란 사람을 한번 만나 보고 싶어서.”
주대현. 그와 직접 대면해 확인하고 싶은 것과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대기업 회장이라는 노인이 나 같은 녀석을 일일이 만나 줄 리는 없었다. 제아무리 클레어의 빽을 쓴다고 해도 역부족이겠지. 그렇다고 주하린에게 부탁하는 것도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결국 다소 일방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는데, 방해꾼들이 실력이 이렇게 좋아서야 피곤한 일로 이어질 가능성 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주대현을 해칠 생각이 있는 건 아니니까 다소 참작해 줬으면 좋겠지만.
“네가.”
그 순간.
남자의 턱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금니를 강하게 붙인 채로, 그가 말했다.
“네깟 놈이 함부로 입에 담을 분이 아니다.”
쿠우웅!
폭발적인 소리와 함께 남자의 검은 외투 바깥으로 선명하고 푸른 마력이 솟구쳤다.
여기가 아무리 높은 건물 옥상 위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 짙고 커다란 마력을 뿌려 대면, 눈에 띄기도 하는 데다가 주변에 있는 다른 각성자들은 피부로도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다.
눈에 띄지 않길 바라는 내게는 갑작스러운 악재였다.
“이봐……!”
“그 입.”
남자가 가면 너머로 억눌린 목소리를 뱉어 냈다.
“다시는 멋대로 지껄일 수 없게 만들어 주지.”
아까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재빠른 속도로 남자가 달려들었다.
쾅!
남자가 주먹을 내리꽂은 자리에 콘크리트 파편들이 튀어올랐다. 말할 것도 없이 건물 옥상이 박살 나며 생긴 조각들이었다.
나는 이미 뒤로 튀어오르며 공격을 피한 상태였다. 저 정도로 힘 조절을 안 할 줄은 몰랐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도심에서.
‘…이거 보험 되나?’
남자가 등 뒤에서 나타났다.
“어딜 보는 거지?”
남자가 섬전과도 같이 주먹을 내질렀다. 미처 피하지 못해 공격을 막아 낼 수밖에 없었다.
투쾅!
동시에 마력과 내공이 뒤섞여 엄청난 폭발을 만들어 냈다. 공격에 실린 엄청난 크기의 마력과 그와 비례해 반응한 내공이 예상 이상의 위력을 자랑했다.
그 폭발을 피하기 위해 나는 거리를 벌렸고, 남자는 예상치 못했는지 직격으로 맞고 날아갔다. 이러나 저러나 멀어진 셈이었다.
…녀석이 다시 덤빌까?
기감을 펼쳐 남자의 위치를 가늠하는 도중, 범위 내에 남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감지됐다.
‘이런 시간, 이런 곳에?’
제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도망을 가도 모자라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인물은 이곳을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속도 역시 일반인의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각성자라는 뜻인데.
‘…가디언!’
머릿속에서 그 가능성을 점치자 쭈뼛하고 등골에 소름이 타고 올라왔다.
이런 현장에 상황 파악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얼굴부터 들이밀고 보는 족속이라면 분명히 가디언일 것이다. 예상이 확신으로 물들었다.
혹시 사정 청취라도 하게 되면…….
나는 얼굴 위를 손으로 덮었다. 가면은 제대로 쓰고 있지만 이건 내가 다른 일을 할 때도 쓰던 놈이었다. 그러니까, 센터장 영감과 아는 사이라는 게 어느 정도 밝혀진 상태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대현 쪽의 인간. 두 사람 모두 걸렸을 때 센터와 길드의 갈등이 빚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길드 하나 박살 내 버린 전과가 있는데.
“튀자.”
나는 급히 현장을 이탈했다.
‘저 녀석은…….’
저 녀석도 눈치가 있다면 알아서 몸을 내빼겠지.
이 부분에 있어선 상대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 * *
“늦었네요.”
현관에서 이어지는 복도, 그 미닫이문 문틀에 기대어 서서 클레어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름대로 조용히 들어온다고 들어온 거였는데.
“…안 자고 기다리고 있던 거에요?”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왜……?”
“할 말이 있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니까 그렇죠.”
“내일 해도 되는데…….”
“내가 안 되겠어서요.”
클레어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고개를 내밀어 내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 보는 건지, 냄새를 맡는 건지 모를 행동을 했다. 그러다가 금세 내 옷이 상한 부분을 찾아내곤 가리켰다.
내가 또 어디선가 무슨 일을 벌이고 왔다는 걸 눈치챈 거였다.
“워낙에 바쁘신 몸이시라, 하루라도 빨리 말해 두지 않으면 불안해서요.”
“하하…….”
찔리는 게 많아 마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럴 땐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상책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나랑 데이트 한번 하죠.”
클레어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그렇게 말했다.
“네……?”
그 태도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최근 클레어는 여러모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탓인지 감정 표현이 풍부해진 편이었다. 나조차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니, 누구나 다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확실했다.
특히 이런 낯부끄러운 소리에 면역이 없는지 어설프거나 머뭇거리는 모습을 곧잘 볼 수 있었는데.
데이트 같은 소리를 하는 클레어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 광경은 처음 만났을 때의 클레어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그럼 그런 걸로.”
결론을 낸 클레어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며 돌아섰지만, 나는 아직 어벙벙한 채였다.
“갑자기……?”
“갑자기는 무슨 갑자기예요.”
걷다가 멈춘 클레어가 내게 돌아와 쿡 하고 내 턱 끝을 찌를 듯이 가리켰다.
“내가 바가지 긁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당신 이번 주 금요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금요일…….”
“크리스마스라고요, 크리스마스. 방송국에서 부부가 보내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모습을 촬영하겠다고 일정도 잡혀 있었는데, 기억 안 나요?”
“아.”
그러고 보니.
주예린도 크리스마스 이벤트 때문에 쇼핑을 하고 있었지.
“아아?!”
클레어의 미간 위로 주름이 잡혔다. 지금의 내게 보다 익숙한 건 이쪽이었다.
“풋…….”
“뭐가 웃겨요!”
“아, 미안합니다. 어, 아무튼 알겠어요. 크리스마스 이브란 말이죠. 그럼 그날 식사라도…….”
“식사? 어디서요? 레스토랑? 호텔?”
클레어의 물음에 대답이 막혔다. 어디서 식사 하냐는 물음은, 정말 어디냐는 대답을 원해서 하는 말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의 크리스마스다. 게다가 방송에 나가기까지 할 예정이다. 동네에서 돈까스라도 썰었다간 내가 칼로 썰리게 생겼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 더 답이 없는 일이었고.
“지금부터 알아보면…….”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요? 촬영도 할 거니까 미리 양해도 구해야 하고요.”
“…….”
그건 미처 생각을 못 했다.
촬영을 할 거라면 카메라맨이 있을 자리도… 아니, 다른 손님께 방해가 될지도 모르니 가게 자체를 전세 내야 할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어째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이런 건 처음이라…….”
“흐음.”
클레어가 싸늘한 목소리로 미래를 그렸다.
클레어는 그런 고뇌에 빠진 내 얼굴을 뾰루퉁한 얼굴로 올려다 보더니 픽 웃음을 지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면목이…….”
“그래서 준비는 내가 다 했어요.”
“네……?”
클레어의 말에 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일정도, 장소 섭외도, 예약도 모두 다 했으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입을 맞춰 보는 걸로 해요. 아무래도 당신이 리드하는 걸로 해야 그림이 깔끔하니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아, 네. 그렇게 해 주시면…….”
“네, 그럼 이야기는 끝. 그럼 전 들어가서 잘 테니까 씻고 자요.”
“주무세요.”
클레어를 먼저 보내며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크리스마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 꽤 예전부터 미리 준비해야 하는 일이었을 텐데.
클레어가 아니었다면 방송 나가고 욕 좀 먹지 않았을까? 초호화 유람선을 대절해도 모자란 놈이 뭐가 잘났다고 집에서 놀고먹는 거냐고.
‘…가정과 일을 양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군.’
거실에 도착하자 흰돌이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하아암. 무슨 일입니까, 대협? 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던데.」
「별거 아냐. 내가 잘못했어.」
내 대답에 흰돌이는 다시 눈을 감으며 몸을 뉘였다.
「언제나 있는 일이구만요.」
저 자식 확 갖다 버릴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