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97
97화 그만둘까
“누구야, 이 씨. 이런 오밤중에…….”
도은이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다가 한쪽 팔을 꺼냈다.
“으, 추워.”
이불 바깥은 쌀쌀했다. 장판으로 데워진 뜨끈한 팔이 서늘한 공기를 가로질렀다. 침대 근처에 놓인 협탁 위에 손을 더듬거려 폰을 찾은 후 잽싸게 이불 안으로 가져왔다.
핸드폰에는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어둠에 적응한 동공 탓에 화면이 밝아 내용이 잘 읽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겨우 글자의 윤곽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성공]“…성공?”
내용은 그게 다였다.
앞뒤 맥락이 전혀 없는 문자에 도은이 눈을 깜빡였다. 하다못해 무슨 일을 성공한 건지에 대해서 정도는 적혀 있어야 하는 거 아닌지.
도은이 발신인을 확인했다. 발신인은 ‘울 언니♡’라고 적힌 연락처를 가리켰다.
클레어 컴벨이었다.
벌떡!
도은이 이불을 걷어치우고 침대 위에 제대로 앉았다. 추위와 졸음은 모두 달아나 있었다.
“성공이라니? 뭐가 성공했는데?”
토도도독.
도은이 빛의 속도로 액정을 두드려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오래 기다리지 않아 도착했다.
[데이트 신청]“데이트……!”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
원래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기념일이지만, 현대에서는 연인들이 서로의 시간을 갖는 의미가 더 강했다.
클레어와 도율. 두 사람은 서류상으로는 부부 관계이지만, 필요에 의해 그렇게 했을 뿐인 계약 부부 관계였다.
실제로는 연인조차 아니기에, 원래라면 크리스마스를 의식할 이유가 없었지만…….
지금 두 사람은 ‘부부의 세상’이라는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 그곳에서 평범한 부부를 연기하고 있는 만큼, 크리스마스도 조금은 특별하게 보내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방송에 필요한 일이라고 하면 오빠인 도율도 거절하지 않을 줄 알았다.
막상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복잡미묘했지만, 결국 가장 큰 감정은 기쁨이었다. 도은에게는 클레어의 행복이 가장 큰 바람이니까.
도은이 문자를 보냈다.
[우리 내일 보자. 작전 회의야.] [알겠어]* * *
“나 왔어!”
다음 날.
도은이 클레어의 집에 도착해 인사했다. 집에 혼자 있던 클레어가 현관까지 마중을 나와 반겼다.
가능하면 도율이 없는 곳에서 작전 회의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집은 피하려 했지만, 오빠란 놈은 요즘 그놈의 아르바이트가 바쁜 건지 오늘도 집을 비울 예정이라 했다.
덕분에 어디 조용한 별실을 찾으러 다닐 필요 없이 클레어의 집에서 마음 편히 회의를 진행할 수 있으니 편하긴 했지만.
“갑자기 무슨 놈의 알바가 그렇게 바쁘대? 이 인간 혹시 알바 핑계로 밖에서 노는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뭐야, 언니는 무슨 일 하는지 알아?”
“…….”
클레어가 불현듯 대답을 멈추고 부엌을 향해 등을 돌렸다.
“커, 커피 타 줄게.”
“호오.”
도은이 그런 클레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나한텐 비밀로 하고 두 사람만 아는 뭔가가 있다 이거야?”
“그… 그런 거 아니야.”
우리 언니 거짓말 되게 못하네.
딱히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오빠 주제에 숨기는 일이 있는 건 건방지기 짝이 없지만, 클레어가 밝히지 않는다면 이유가 있으리라 이해할 수 있었다.
클레어가 커피를 타는 동안 도은이 태블릿 PC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뒀다. 두 사람이 동시에 정보를 검색하거나 메모를 하기 위해 요긴하게 써먹고 있었다.
달그락.
클레어가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마셔.”
“땡큐.”
클레어가 커피를 타는 뒷모습을 감상하는 건 제법 즐거운 일이었다.
식사라고는 대부분 젤 형태의 대용품으로 때우곤 했던 클레어인 만큼, 집에 다른 간식도 없었다. 유일하게 있는 거라면 이 믹스 커피. 집에서 모일 일이 있으면 예전부터 직접 타 주곤 했다.
흠이 있다면 설탕을 제법 많이 넣는다는 거였는데……. 도은은 싫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마실 뿐이었다.
‘음?’
하지만 이번엔 아주 평범한,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커피 믹스 그대로의 맛이었다.
“별일이네. 입맛 변했어? 설탕이 안 들어갔네?”
“그건……. 금지당해서.”
“금지? 누구한테?”
건강 검진이라도 다녀온 걸까?
하지만 각성자의 몸은 평소 왕성한 운동량과 마력의 흐름의 영향으로 일반인보다 훨씬 더 건강했다. 설탕 좀 먹는다고 건강에 지장이 있다는 소리를 하는 의사들은 모두 각성자들보다 먼저 죽곤 했다.
그러니 의사한테 한 소리 들었다고 입맛을 바꿀 리는 없었다.
“누구겠어.”
클레어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커피를 마시며 불만을 토로했다.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달리 입꼬리에 슬쩍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은이 물었다.
“혹시……. 우리 오빠 얘기야?”
“맞아.”
클레어가 수긍했다.
무슨 짓을 해 놓은 건지 설탕 유리병 뚜껑을 도저히 열 수가 없었다. 분명히 내공이 어쩌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 마력으로 어떻게 해 보려 해도 상극인 것처럼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아예 병을 부수면 꺼낼 수야 있겠지만, 그깟 설탕이 먹고 싶어서 멀쩡한 유리병을 깨부수는 것도 조금 지나치다 싶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도은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되게 말 잘 듣네?”
“…아.”
도은의 말에 클레어가 정보의 격차를 깨달았다.
그렇다고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헌터인 자신조차 열지 못하도록 유리병을 잠그는 방법을, 도율이 장치해 두고 나갔다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 난…….”
클레어가 입을 뻐끔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막다른 길이었다.
그 모습에 도은이 설핏 웃고 격려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아주 혼을 쏙 빼 버리자고.”
“…그래.”
본격적인 작전 회의의 시작이었다.
* * *
“소식 들었다.”
두 사람은 나무로 된 긴 복도 위를 걷다가 마주쳤다.
두 사람은 모두 붉은색 얼굴에 커다란 이빨을 가진 도깨비의 형상을 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동일한 모양의 가면. 두 사람이 같은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쪽은 회색 머리칼을 가진 노인. 그리고 다른 한쪽은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른 젊은 남자였다.
“별일이군.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임무를 앞에 두고 퇴패를 다 하다니.”
노인의 말에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남자가 눈을 험악하게 떴다.
“임무는 관찰, 감시가 전부였다. 마치 내가 실패라도 한 것 같은 표현은 삼가 주시지. 듣기 거북하군.”
“그 관찰, 감시를 하다가 들켰으니 실패한 거나 다름없지 않으냐.”
“…….”
노인의 말에 남자가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남자는 등 뒤에 있는 복도 건너편을 응시하며 감정을 억눌렀다.
이 복도는 그들이 모시는 주인이 있는 안채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런 곳에서 소란을 피웠다간 그에게 누가 될 것이 뻔했다.
그것만큼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심지어 상대한테 소속을 들키기까지 했다고 하지 않았나? 이거, 일이 커지면 아주 곤란해지겠어. 안 그래도 머지않은 옛날에 개인 사유 무력 집단 제재한다고 한창 피바람이 불었는데. 그래서 우리도 규모 축소하고 소수정예로 전환한 거 아닌가.”
촌철寸鐵.
몇몇 길드들이 손을 잡고 무력을 통해 보다 ‘원활하게’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조직의 이름이었다.
처음엔 정말 불가피한 일만을 처리하도록 창설된 조직이었으나, 점점 욕심이 더해져 더욱 많은 일에 손을 쓰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름이 무색하게, 업계 관계자라면 누구나 다 알 만한 망나니 칼이 되어 버렸다.
결국 그 끝은 절검絶劍이었다.
노인의 걱정은 노파심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후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으니, 대중들 앞에 드러나게 되면 곤혹을 치를 것이 뻔했다. 최근엔 여론이란 것도 기세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우려를, 남자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시끄럽다.”
그런 문제가 있는 것 정도는 말로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새 나가지 않도록……. 입막음을 하면 문제없는 일이지 않나.”
그날.
옥상에서 여우 가면을 쓴 남자와 대치했을 때, 예기치 못한 폭발이 발생해 잠깐 놓쳤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정 외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불과했다. 남자는 얼마든지 자세를 가다듬고 뒤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필 그때…….’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가디언 한 명이 다가오지만 않았어도 결착을 낼 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디언까지 손을 대면 일이 복잡해진다. 가디언의 죽음은 상당히 끈질기게 수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만 했다.
“다음은 없다.”
그리 말하고 남자가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아. 이놈의 수평 조직 문화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군. 한참 어린놈한테 반말이나 들어야 하는 신세라니, 원.”
요즘 젊은 것들은. 하는 의미 없는 중얼거림을 입가에서 굴리며 노인이 가던 길을 재촉했다.
복도의 끝. 반투명한 창호가 발려 있는 문으로 막혀 있었다. 문 위로 얆은 나무 살들이 교차되어 있었다. 그 중앙엔, 손가락만 대도 부러질 것 같은 섬세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노인이 창호 문을 앞에 두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너머, 그의 주인이 기거하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기다리자, 누구도 손 대지 않은 창호 문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열렸다.
노인이 거대한 몸뚱이를 일으켜, 그 안으로 입장했다.
* * *
“얘. 나 지금 살해 협박 받고 있으니까, 사람 좀 붙여 주련?”
어느 날 주예린이 주하린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
너무나도 허황된 말에 주하린이 되물었다. 그러자 주예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넌 왜 한 번 말하면 바로 알아 듣는 법이 없니?”
꾸지람을 들으리라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누가 대현 그룹의 장손녀를 해하려 한단 말인가. 후계자는 아닐지언정 엄연한 핏줄이었는데.
어쩌면 공인 활동을 하며 악질 팬에게 악의가 담긴 메시지라도 받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대개 실행에 옮길 능력과 의지까지는 없는 족속이라 봐도 무방했다.
“언니, 너무 예민해서 그래. 좀 쉬고 나면…….”
“너 지금 내가 헛소리라도 한다는 거니?!”
“그런 건…….”
“그럼 빨리 알아 와! 너도 썩어도 헌터라고, 아는 애들은 많을 거 아냐? 제일 실력이 좋은 놈으로. 기대하고 있을게.”
터무니없는 부탁이었다.
아무리 주하린의 주선이라 해도, S급 헌터나 되는 인물이 평범한 사람을 호위하겠다고 나설 리가 없었다. 던전 한 번 도는 게 훨씬 쉽고 이득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살해 협박이라니. 대뜸 그런 소릴 해도 믿어 줄 사람은…….
차라리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이유는 적당히 갖다 붙인 거라는 편이 훨씬 신빙성 있는 얘기였다. 그건 전례가 있다 못해 익숙한 일이었다.
‘그렇구나.’
주하린은 깨달았다.
겉으로는 말 잘 듣는 착한 동생인 척. 언니의 부탁은 뭐든 들어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지만.
‘나, 언니의 말을 의심하고 있어.’
진정으로 주예린의 말을 믿지는 않고 있었다.
나이를 먹고 사이가 멀어져 자연스럽게 그리 변한 건 아니었다. 주하린은 언제나 주예린을 의지하고 싶은 다정한 언니로 남기고 싶었다.
지친 거였다.
밥 먹듯 이어진 거짓말, 질투, 시샘, 괴롭힘. 어린 시절의 추억만으로 버텨 오기엔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만둘까.”
귓가에 울린 무거운 목소리에 주하린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방금 그건 누구의 목소리였지? 두말할 것 없이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럼 그 말의 내용은 대체 뭐였지? 그만둔다니, 대체 무엇을?
주하린은 생각하는 걸 그만뒀다. 그 질문에 답을 구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정답을 알아내고 나면 두 번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저기…….”
남자의 목소리였다.
여우 가면을 쓴 사내가 어느샌가 다가와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어느 틈에 다가온 건지. 분명 숨기고자 한 건 아니었다. 알아채지 못한 건 주하린이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어. 그래. 왜? 무슨 일인데?”
주하린이 표정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상대도 캐묻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진지한 목소리에 주하린은 그녀의 기분 역시 함께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만두려나.’
바보 같은 일에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예전에 조금 도움을 주긴 했다지만, 이런 일에 너무 오래 어울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주예린은 이 사내 앞에서도 까칠하게 굴었으니.
한참도 전에 진저리를 내며 그만둔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운을 띄워 놓고 여우 가면은 말하기가 어렵다는 듯 선뜻 말을 뱉어 내지 못했다. 입술을 혓바닥으로 축이는 모습을 보며, 주하린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그래, 그동안 수고했어.”
“…예?”
주하린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이제 그만둘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주하린은.
내심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길 기대하는 자신을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