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98
98화 멈추라니까
‘…그만둔다고? 내가?’
주하린은 내게 그만둘 생각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어째서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된 건지 흐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주하린에게 할 말은 며칠 전 봤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주예린을 몰래 감시하던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 그리고 그 코트는 주하린이 곧잘 입고 다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의 제복이었다.
대현의 제복.
남자는 대현 소속의 각성자였다.
‘그런 자가 왜…….’
아무리 봐도 멀리서 보며 지키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조심스러운 보디가드를 달고 있는 상태라면, 주하린이 내게 주예린의 호위를 부탁할 필요도 없었을 거다.
무엇보다도.
나는 남자에게서 익숙한 혈향血香을 느꼈다.
다른 누군가를 지키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은 족속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남자를 오너 일가의 장녀를 지키는 역할로 배치했다면, 그 지시를 내린 자의 눈썰미가 형편없다는 반증이었다.
대현 정도 되는 곳에서, 그 정도 되는 각성자를 몸에도 맞지 않는 옷을 입히며 허비할 리는 없었다. 안목이 없을 리도 없었고.
그렇다는 건.
‘솎아 내기인가…….’
대현에 소속된 누군가가 대현의 손녀를 해하려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같은 집단 내에서 이루어지는 대립이었지만,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저쪽 세상에서도 조금 규모가 있는 가문이나 문파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 중 하나였다. 특히 후계자가 둘 이상 있는 곳일 경우에.
혈연이나 정 따위란, 인간의 욕심을 앞에 둔 채로는 설득력을 잃어버리곤 했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없는 건.
“…….”
나는 주하린을 내려다보며 반응을 살폈다.
주하린은 분명 내게 주예린의 호위를 맡겼다.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한 건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자기 언니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 일인지. 아니면 그룹 내에서 물밑으로 벌어지는 일을 눈치챘지만, 감히 정면에서 그 뜻에 반할 수는 없는 것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모두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연민이나 죄책감으로 연극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건지.
주하린이 생각에 잠긴 내게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시한 자매 싸움에 말려들게 했네.”
“자매 싸움…….”
주하린의 그 말은, 그녀가 가진 생각에 대한 윤곽을 크게 드러내는 말이었다.
“진작 그만두게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네.”
“그건…….”
주하린은 씁쓸한 표정으로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내가 그만두질 않길 바라는 건 진심으로 보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가정사인걸. 가족의 일은 가족끼리 해결해야지. 관계도 없는 사람한테 계속 폐 끼칠 수도 없고.”
주예린과 주하린 사이의 후계자 싸움. 그 사이에 낀 나는 외부인으로, 싸움의 불씨를 잠재우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겠지만, 내가 진실을 알아 버렸으니 그건 더 이상 불가능했다.
나 역시 선뜻 손을 대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둘 중 한 사람의 편을 들기가 곤란했다. 후계 싸움은 단순한 인기 투표가 아니었으니까. 이런 건 당사자들끼리 정하는 게 맞았다.
그 사실을 몰랐을 땐 제법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도 했으니. 뼈 아픈 교훈이 있었다.
‘한발 빼는 게 상책인 거지.’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이었다.
주예린 역시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후련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수고했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서로를 향한 인사를 남기고, 주하린의 의뢰는 거기까지가 마지막이 되었다.
* * *
“왜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을…….”
시간이 흘러, 크리스마스 이브.
클레어와의 외출 약속 날짜가 다가왔다.
나는 지금 혼자 약속 장소에 나와 클레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집에 살고 있는데 먼저 나와서 기다리는 이유는, 이렇게 하는 걸 특별히 클레어가 주문했기 때문이다. 구태여 바깥에서 따로 만나자고.
같이 나가면 되지 않느냐는 제안에도 불구하고 클레어는 굳건한 의지를 내비쳤다.
-전 따로 할 일이 좀 있으니까, 거기서 만나요.
-네? 제가 기다리죠, 뭐.
-아, 바쁘다니깐!
결국 나는 먼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여편네 등쌀에 떠밀려 쫓겨나는 남편도 아니고.
결국 난 번화가의 교차로에 있는 커다랗고 특이한 건물 아래에서 클레어를 기다렸다.
약속 장소로 곧잘 쓰이곤 하는 랜드마크였다. 1층엔 커피숍이 있어 안에서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진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약속 장소와 시간을 따로 잡고 만날 이유가 뭔지.
날이 차가웠는지 날숨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입김이 하늘 위로 오르는 모습을 하염없이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많이 기다렸어요?”
클레어의 목소리였다.
“별로 기다리지는…….”
바쁜 일이 있다더니 예상 이상으로 금방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동시에 출발한 거나 마찬가지인 시간 차. 그러게 내가 기다린다고…….
그리고 클레어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는 말문이 턱에 걸리고 말았다.
평소와는 어딘가 다른 차림이었다.
클레어가 입은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코트엔 소매와 목덜미에 양털이 달려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단정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외투였는데.
밝은 색의 코트 자락 아래로 비교적 어두운 색의 치맛단이 보였다. 그 밑으로 클레어의 새하얀 허벅지가 뻗어 있어, 잘못 봤다곤 말할 수 없었다.
…안 하던 짓을.
“…어때요?”
클레어가 슬쩍 옷자락을 들추며 물었다. 뺨이 붉은 건 날씨가 춥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안 추워요?”
내 대답에 클레어가 표정을 굳혔다.
“미쳤죠?”
“…걱정한 건데.”
그러자 클레어가 맞은편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등지고 선 벽을 향해 손바닥을 대고 몸을 가까이 붙였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런 때 정도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죠? 자, 해 봐요.”
“…….”
“내가 여기까지 떠먹여 주잖아요.”
이래도 하지 않을 테냐는 듯이, 클레어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얼른.”
클레어가 재촉했다.
여자가 데이트를 하러 곱게 차려 입고 나왔으면, 예쁘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하는 게 도리라는 걸 나도 알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껴 둘게요. 카메라 앞에서 해야 하니까.”
그건 지금, 우리가 부부 연기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틈새 사이로 슬쩍 몸을 빼내자 클레어가 입술을 내밀고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벽에 손을 붙인 채 날 흘겨보며 불평했다.
“전생에 미꾸라지가 아니었나 몰라.”
하지만 이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 고집이 어디까지 가나 봅시다.”
그리 말하며 클레어가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토라져서 거리를 두려는 건 아닌 듯한 기색이었다.
내가 따라붙어 물었다.
“어디 가는 겁니까?”
“가 보면 알아요.”
알려 주지 않고, 클레어는 앞장을 설 뿐이었다.
* * *
“…뭐예요, 이게?”
“뭐긴요? 스케이트장이지.”
도율의 물음에 클레어가 보면 모르냐는 듯한 투로 대답했다.
클레어의 말대로,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도시 한복판에 있는 종합 스포츠 센터였다. 그중에서도 스케이트장이라 불리는 빙상을 둘러싼 시설.
“여긴 왜 온 거예요?”
“왜 오긴요. 놀러 왔죠.”
“놀러……?”
시설 내에는 다른 손님들도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러 온 연인들부터, 아이와 어른으로 이루어진 가족들까지.
그런 사람들이 각자의 속도에 맞춰 커다란 빙판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도율은 그런 광경을 보며 의아하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수족관이나 놀이공원처럼 볼거리나 탈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커다란 얼음 위를 빙빙 돌기만 하는 게 뭐가 즐거운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클레어가 그런 도율을 채근했다.
“자, 빨리 갈아 신어요.”
신발 밑에 날이 달린 스케이트화로 갈아 신은 후에도 도율은 여전히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자, 자. 입장!”
클레어가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두 사람이 얼음 위에 섰다.
“흐음…….”
얼음 위에서 적당히 서 있던 도율이 조금 발을 내밀었다. 한쪽 발로 중심을 잡고, 다른쪽 발을 밀어 부드럽게 나아갔다.
“오.”
그다음엔 반대쪽 발. 두 동작이 자연스럽게 교차되며 도율이 얼음 위를 누볐다.
“…처음 타는 거 아니에요?”
“맞는데요? 잘 타죠?”
“어……. 네.”
클레어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감상이었다. 자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한데,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면서 벌써 타는 법을 익혔다.
클레어는 계획이 어그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율은 아무것도 모르고 새로 익힌 기술에 심취했다. 이내는 클레어도 잊은 채 커다란 빙상 위를 쌩쌩 돌기 시작했다.
“와, 저 사람 좀 봐.”
“진짜 빠르다.”
“선수 출신인가?”
심지어 사람들의 이목을 모을 정도였다.
사람이 많은 스케이트장 위에서 빠른 속도로 달리는 건 주의를 받을 만한 일이었지만, 겉모습만 봐서는 전혀 빠르게 달리는 듯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부드럽게 나아가는 돛단배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속도로 빙판 위를 맴돌고 있었으니. 복잡하게 얽힌 사람들 사이를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도율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감탄을 흘렸다.
몇 바퀴인가 마음껏 돌고 온 도율이 클레어에게 들뜬 얼굴로 털어놓았다.
“이거 생각보다 재밌네요!”
“아, 네…….”
“여기 오길 잘한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한 도율이 슝 하고 멀어졌다. 클레어는 그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다가 문자를 보냈다.
[도은아. 스케이트장 망했어.]스케이트장 데이트. 이 장소를 생각해 낸 건 도은이었다.
-우선은 스케이트장. 여기로 가자. 언니, 스케이트는 탈 줄 알지?
-탈 줄은 아는데… 왜?
-스케이트 가르쳐 준다는 핑계로 손 잡을 수 있거든.
-채택할게.
이리하여 첫 번째 장소로 스케이트장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클레어는 도율이 단 한 번도 스케이트 따윌 타 본 적이 없다는 친동생의 증언에 따라 완벽한 작전을 세웠다고 자부했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본인도 못 탄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배우는 속도가 저 정도로 빠를 줄은 몰랐다. 아니, 당연히 예상해야 했던 걸까.
손을 잡아보긴커녕 쫓아가서 말을 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뭐?? 거기가 왜 망해???]클레어가 다시 한번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지금의 상황을 요약한 내용이었다.
간단히 사진도 찍어서 첨부했다. 빙상의 반대편에서 신나게 달리는 도율의 모습이었다. 너무 빨라서 흐려졌지만.
복장 터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럼 언니가 못 타는 척을 했어야지!!] [아.]지당하신 말씀이었다.
혹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지. 클레어가 도율을 손짓으로 부르자, 도율은 순식간에 얼음 위를 타고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벌써 갈 시간인가?”
“아니, 그건 아니고…….”
클레어가 난간을 붙잡으며 어설프게 자세를 무너뜨렸다.
“저, 저는 탈 줄 모르는데 좀 가르쳐 줘요.”
“…예?”
클레어의 거짓말에 도율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자기가 오자고 해 놓고서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죠. 한번 와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도율은 그런 클레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나도 잘은 모르지만.”
도율이 긍정의 뜻을 내비치자 클레어가 잽싸게 받아들였다.
“그, 그럼……. 손을…….”
클레어가 머뭇거리며 손가락 끝을 내밀었다. 이 순간을 위해서 장갑도 채 끼지 않은 채 맨손으로 빙상 위에 올랐다.
그러나 도율은 그 손을 잡지 않고 클레어의 등 뒤에 서서 양손으로 허리를 붙잡았다.
“잠… 이건 좀 갑작스럽…….”
“원래 뭐든지 해 봐야 빨리 느는 거라고요.”
“…네?”
슈우웅!
도율이 엄청난 속도로 클레어를 밀며 나아갔다. 허리를 붙잡힌 클레어는 그 속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잠까아안……!”
뒤에서 미는 힘이 엄청나 멈추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빙상의 얼음을 죄다 갈아 버리는 수준이 아니면 멈출 수 없었다. 그건 민폐였다. 하지만 뒤에 있는 사람도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클레어가 정면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계속해서 밀려났다.
“멈추라니까……!”
그러나 결국 저항하지 못하고, 도율이 멈추는 순간까지 바람막이가 되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광란의 스케이팅이 끝난 건 모두 도율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기 때문이었다.
“전화 좀 받고 와도 될까요?”
클레어는 바닥에 자빠져 손으로 낯을 가린 채 다른 손을 휘저었다. 다녀오라는 뜻이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앞머리는 산발이 된 데다가 얼굴도 빨갛게 얼어붙어서,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깜빡했다, 이 인간…….”
클레어가 지난 기억을 되새겼다.
“남 가르칠 땐 눈 돌아가는 성격이었지…….”
작전은 완전히 실패.
하지만 두 번 다시 시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