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99
99화 봤어요?
“언니, 나 왔어.”
“어, 왔니?”
주예린의 집. 지금 막 도착한 주예린이 구두를 벗으며 다가왔다.
“뭐 하다 이렇게 늦었어?”
“미안…….”
방금까지 길드에서의 업무를 처리하던 주하린이었으나, 주예린의 부름에 중요한 일만 급히 처리하고 곧장 온 것이었다.
하지만 주예린에게 길드 일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대현이 운영하는 수많은 사업체 중 하나인 길드는, 추후 그룹을 이끌어 나갈 후계자에게 맡기는 주요한 계열사 중 하나였다.
언니의 앞에서 동생인 자신이 그곳을 도맡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하지만 집에는 두 자매뿐이었다. 이곳에서 같이 살고 있는 또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주하린이 물었다.
“형부는?”
“몰라.”
주예린의 대답은 간단했다. 신경 쓰는 기색도 아니었다.
둘이 죽고 못 사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도 주하린은 눈치껏 알고 있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로 결정했다.
“와서 풍선이나 좀 불어.”
“…풍선?”
주예린이 가리킨 바닥에 바람 빠진 풍선들이 널려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뭐긴, 촬영 때문이지. 크리스마스 이벤트도 있고 하니까.”
주예린은 개인용 방송 채널을 운영 중인 동시에 예능 방송까지 출연하고 있었다. 이런 기념일을 특별하게 보내기 위해 준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연한 일을 위해 연말을 앞두고 한창 바쁜 자신이 불려 나왔다고 생각하니 문득 신경질이 났다.
‘…참자.’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자, 얼른. 너는 그쪽 거부터 불어. 난 헬륨 넣고 있을 테니까.”
주예린의 재촉에 주하린이 하릴없이 앉아서 풍선을 불었다.
기가 막히는 일이지만, 막상 시작해 보니 나쁘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서 펜대 굴리며 머리를 쓰는 일에 치이다가 단순 노동을 체험하니 정신이 맑아지는 것도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방 안에 풍선 개수가 늘어나며 그럴싸한 윤곽이 드러나자, 주예린이 턱을 괴고 견적을 잡았다.
방 안을 둘러보면 주예린이 대뜸 중얼거렸다.
“천장이랑 바닥이랑 둘 다 있으니까 너무 지저분해 보이네.”
펑!
그리고 주하린이 숨을 불어 부풀려 놓은 풍선들을 터뜨렸다.
“왜…….”
“바닥엔 다른 거 하는 게 낫겠다. 양초 놓고 꽃잎이라도 뿌려 볼까?”
주하린이 찢어진 고무 조각이 되어 버린 풍선들을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런 주하린의 귓가에 태연한 주예린의 목소리가 꽂혔다.
“그거 다 치워 버려.”
“…….”
“그리고 일손도 모자랄 것 같은데, 그 가면 쓴 헌터도 좀 부르고.”
여우 가면을 쓰고 있는 그 헌터를 의미했다.
클레어를 통해 소개받았지만, 주하린 역시 조금이나마 안면이 있는 상대였다. 같이 A급 게이트를 공략하거나 라이센스 발급을 위해 보증을 서 줬던 칠칠맞은 남자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봤을 때에는 턱하고 블랙 라이센스를 꺼내 들어서 놀랐다.
각성자들은 잠깐 눈을 뗀 사이에 폭발적으로 성장하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입장에서도 그 정도로 성큼 발돋움한 경우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런 헌터를 불러다 하는 일이 고작해야 양초에 불붙이고 꽃잎 뿌리는 거라니.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을 장면이었다.
‘어차피 이젠…….’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예전에 잠깐 도와준 것 가지고 이런 짓까지 어울리게 하다니. 염치가 없어도 대단히 없는 짓이었다.
주하린의 입에서 짧은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그만뒀어.”
“그만뒀다고?”
주예린의 물음에 주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주예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목소리였다. 표정 위로 노골적인 감정의 색이 번졌다.
주하린은 그럴 때마다 따끔하게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아 왔다. 그건 너무나도 불편한 느낌이어서, 당장 없애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익숙해진 것일까. 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이전처럼 불가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주하린은 이번에는 미안하다고 사과하지도 않고, 변명하거나 둘러대지 않았다.
“내가 그만두라고 했어.”
“네가 그랬다고? 넌 왜 그걸 상의도 없이 멋대로 정하니?”
“멋대로인 건 언니잖아.”
“뭐?”
주하린이 보여 주는 흔치 않은 모습에 주예린이 의아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는 듯한 주예린의 뻔뻔한 얼굴에, 주하린의 가슴 속에 아주 작은 불티가 튀어 올랐다. 가만히 두면 순식간에 사그라들 그럴 불티가.
하지만 지금까지 쌓아 둔 불만은 커다란 화약 창고처럼 기폭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속에 불꽃이 있었다. 그 불꽃이 너무 뜨거워서, 당장 몸 밖 어딘가로 끄집어 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집어삼켜질 것만 같았다.
“매번 쓸데없는 일로 불러내기나 하고. 급하대서 가 보면 쇼핑 짐 들어 달라, 촬영 컨텐츠 출연해 달라, 혼자니까 밥 같이 먹어 달라.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한 일이야? 난 바쁘다고……. 언니와 달리 길드도 관리해야 하니까!”
한 차례 말을 쏟아 내자 목구멍부터 얼굴까지 화끈거렸다.
길드 얘기를 꺼낸 건 실수였다. 그것 때문에 바쁜 건 사실이었지만, 주하린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언니 앞에서 길드에 관한 내용을 입에 올린 적이 업었다. 주예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후계자 자리를 빼앗긴 장녀와 자의가 아닌 타의로 그 자리를 차지한 차녀.
둘 모두에게 상처가 되는 이야기였다.
지금에 와서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언니인 주예린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도 없었고, 자신은 철이 들 때부터 그렇게 길러졌는지.
모든 것은 그룹의 회장이자 그녀들의 할아버지인 주대현의 결정이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상의나 언질도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통보였다.
“…….”
주하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언니의 가장 아픈 상처를 쑤셨으니, 그 반동으로 폭언이 쏟아질 차례였다.
그러나 주하린의 예상과 다르게, 주예린은 날카로운 말을 앞세워 동생을 몰아붙이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고요한 적막이 맴돌았다.
이어지는 침묵에 주하린이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주예린은 냉정했다. 여느 때와 달리 무미건조한 표정은, 어딘지 달관한 듯이 보이기까지 했다. 분노로 말을 잃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평온 속에 있는 듯한 상태였다.
그런 주예린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 역시 가지런한 음색을 띄고 있었다.
“똑바로 말할 줄도 아네.”
“……?”
의아해하는 주하린에게 주예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너도 그만둬.”
“어……?”
“그럼 됐지?”
주하린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의외인 말을, 주예린은 당연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불러도 찾아오지 말고, 어디 가도 신경 쓰지 마. 그렇게 살면 되잖아.”
“언니, 그건…….”
앞으로는 남남처럼 지내자는 뜻일까.
차라리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렸다면 내가 잠시 미쳤었다고 사과하며 달래기라도 할 텐데. 주예린은 오래 간직해 왔던 생각인 건지 아무런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알겠어.”
그 생소한 반응에, 주하린은 당장 잠자코 따르는 것 외의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 * *
이튿날.
밤 늦게까지 뒤척이느라 느지막히 잠에서 깨어난 주하린이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켜 주예린에게 연락을 하려다 그만뒀다.
“…이제 그럴 필요 없지, 참.”
주예린은 본인이 직접 부르는 것뿐만 아니라, 주하린이 주기적으로 연락하지 않을 때에도 역정을 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을 넣고는 했다.
하지만 어제 그만두라는 얘기를 들은 참이었다. 지금까지 해 오던 일을 하루 아침 사이에 그만두려니 신경은 쓰였지만, 일단은 말을 듣기로 했다.
저러다가도 금세 심경이 바껴서 왜 연락 안 했느냐고 화를 낼 수도 있지만…….
‘일단은 지켜보자.’
그런 다짐과 달리 주하린은 핸드폰을 통해 주예린의 상태만 확인했다.
따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지만, 여차할 때를 대비해 설치해 둔 보안 관련 어플이 있었다. 거기엔 지정한 대상의 위치나 건강 상태를 알 수 있는 기능이 포함되어 있었다.
화면에 나타난 정보엔 모든 것이 정상이라 표기되어 있었지만, 한 가지 요소가 주하린의 눈에 밟혔다.
‘위치가 왜 이래?’
서울이 아니었다.
기념일을 앞두고 특별한 장소로 이동해 촬영을 하는 걸 수도 있고, 남편과의 사이 좋은 부부 어필을 위해 둘이 여행이라도 간 척 하는 걸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밖에 나갈 건데 왜 집에서 이벤트 준비를 해?’
어젯밤, 주예린이 뭘 준비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는 주하린에겐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궁금하다면 본인에게 물어보거나, 주예린이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면 된다. 평소였다면 주예린이 먼저 멀리 가니까 따라오라고 했을 것이다.
이제는 갈 필요가 없다. 언니가 뭘 하든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마음에 걸려서.
“…하아.”
주하린이 연락처에서 가장 최근한 등록한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 대기음이 걸리는 동안에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이제 와서 끊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부재중 기록이 남을 테니까.
달칵.
[여보세요?]“아, 저기…….”
막상 목소리를 들으니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구질구질하게 싸웠다는 얘기까지 다 꺼내는 건 왠지 곤란했다. 그런 꼴을 안 보이려고 그만두게 한 거였는데, 그래서야 본말 전도였다.
결국 다소 범용적인 물음을 건네야만 했다.
“…우리 언니 말인데, 어디 좀 멀리 간다고… 들은 거 없어?”
[당연히 없죠.]확실한 대답에 주하린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뭘 기대한 걸까.
“그래, 그렇구나…….”
그 목소리를 들은 수화기 너머의 여우 가면이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응? 아냐. 아무 일도 아니야. 괜히 신경 쓰지 마. 끊을게.”
주하린이 급히 둘러대며 통화를 종료했다.
* * *
“…뭐야?”
갑작스럽게 걸려 온 전화.
주하린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녜요.”
주하린의 질문은 주예린이 어디 멀리 간다는 사실을 듣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나에겐 금시초문이었다. 주예린 그 여자가 내게 미리 일정을 알려 주고 움직이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부르는 대로 불려 나가기 바빴지.
…애초에 호위 일은 그만두기까지 했고.
‘근데 어디 멀리 갔나?’
주하린의 반응에 의하면 그녀에게도 말하지 않고 어딘가로 가 버린 듯한 상황으로 보였다.
멀리 가 버린 언니를 왜 찾는 건지. 오히려 없으면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게 아니면 가까이 두고 감시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걸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자매 싸움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정했다.
“스케이트나 더 탈까요?”
“아뇨, 그건 이제 그만…….”
클레어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혹시 추워요?”
“…네, 그렇네요.”
마력을 사용하면 추위 따위는 금방 쫓아낼 수 있을 텐데. 이런 공공장소에서 클레어 정도 되는 각성자가 마력을 썼다간 가디언이 뜰지도 모른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스케이트장을 나섰다.
“다음에 또 오죠.”
“…그래요. 다음에.”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는지 클레어의 표정엔 영혼이 없었다.
추위를 달래기 위해 근처의 카페에서 따뜻한 음료를 주문했다. 음료가 나와 진동벨이 울리자 나와 클레어가 동시에 일어났다.
“제가 다녀올게요.”
“아뇨, 제가…….”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던 와중, 클레어의 몸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이건……?”
“자, 잠깐!”
무어라 글씨가 적혀 있는 작은 쪽지였다.
“메모?”
휙!
자세히 읽기도 전에 클레어가 내 손에서 낚아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클레어가 날이 선 눈빛으로 물었다.
“봐, 봤어요?”
“조금요.”
솔직하게 시인하자 클레어가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정말 조금이었다. 스케이트장 어쩌고 하는 말이 써져 있었던 걸 보면 아무래도 오늘 계획표가 적힌 커닝 페이퍼로 짐작될 뿐이었다.
픽 웃음이 나왔다.
“…도은이가 써 준 거예요.”
클레어가 그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더는 자세히 얘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인지 음료를 가지러 가 버렸다.
“사이좋네.”
정작 친남매인 나랑은 필요할 때가 아니면 연락도 하지 않으면서. 피가 이어지지 않은 클레어와는 곧잘 어울리곤 했다.
싫다는 건 아니었다. 갑자기 살갑게 굴어도 느끼할 것 같고. 둘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게 하나의 즐거움이었으니까.
반면, 피가 이어진 사이면서도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자매도 있는 법이었다.
“자요.”
“잘 마실게요.”
게다가 지금은 며칠 전에 약속한 클레어와의 외출 도중이다. 저래 봬도 준비를 많이 한 것처럼 보이니까, 실망시킬 순 없었다.
“뭔가 고민거리라도 있어요?”
“아뇨, 아무것도.”
커피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