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Live As An Actor RAW novel - Chapter 36
Chapter 1
대기만성(大器晩成).
배우의 유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데뷔 초부터 두각을 드러내며 배우로서의 탤런트(talent)를 발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농부가 농사를 짓듯 각고의 노력 끝에 연기자로서 인정받는 경우가 있다.
후자를 일컬어 대기만성형이라고 부르는데, 박봉(薄俸)이나 다름없는 방송가에서 그런 이들의 숫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형님 말은, 지금 영국이가 대기만성형이라는 거요?”
촬영감독 도장욱의 물음에 백장훈 감독이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까슬까슬한 턱수염 위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어딜 봐서 영국이가 대기만성형이요?”
과거 도장욱은 촬영현장에서 영국을 처음 마주했었다. 평소 아역 배우를 선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철두철미한 백장훈 감독이 어느 날 갑작스레 꼬마를 하나 대동하고 나타났다.
글쎄 첫인상은 무미건조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외관만 보자면 까무잡잡하게 그슬린 피부하며 밤톨 같은 머리카락이 시골에서 막 상경한 촌놈이나 다름없었기에. 하지만.
-형님, 어디서 저런 아이를 구해왔어요 그래?
촬영현장에서 마주한 아역의 연기는 도장욱의 눈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었다.
짧다면 짧은 까메오에 불과했지만, 뇌리에 선명히 남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이었다.
대본을 습득하는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촬영 구도의 이해도 또한 남달랐다. 마치 오랫동안 촬영 현장을 누볐던 노장처럼. 그 방증으로.
-도 감독, 내 살아생전 저렇게 촬영현장에서 부모 안 찾고, 떨지도 않는 아이는 처음 봄세. 더욱이 연기는 또 어때, 물 만난 고기처럼 그림을 만들어내는 게 어째 저놈이 나보다 연기를 더 잘하는 것 같지 않아?
함께 촬영했었던 노년의 배우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더랬다. 그만큼 아역 시절의 영국은 다른 아역 배우들과는 궤가 다를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었다. 그런 배우에게 대기만성이라니, 어불성설이다.
“지금도 보면 그래요, 촬영현장에서 영국이한테 쉽게 다가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렸을 적부터 봐왔던 우리야 쉽게 다가가지만, 촬영팀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된 풋내기들은 영국이가 시선을 주기만 해도 흠칫 떤다니까. 그만큼 연기력이 너무 뛰어나다 보니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거지, 저게 실제 모습은 아닐까 하고.”
“그릇을 정해놓았어.”
“으잉?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도장욱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자세를 앞당긴다.
“제 그릇을 정해놓은 배우처럼 연기를 한다는 사실을 말일세. 대기만성이라고 말한 뜻도 그와 같지. 자신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 그래서 오히려 어렸을 적부터 연기를 할 때 남들보다 뛰어났던 것일 수도 있지.”
“도통 이해가 안 돼요. 형님 안목이야 충무로에서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나도 인정하는 바지만 그 어렸던 놈이 제 그릇을 어찌 알고 한계를 정해놔. 그때도 들어보니, 연기를 제대로 한 지 채 몇 개월 안 됐을 때였다면서요?”
“그 후로 한참을 함께 있다 보니 느낀 것이지. 그토록 어렸던 아이가 대체 자신의 한계를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는 글쎄…….”
만약 두 사람의 대화를 영국이 들었다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지난 삶의 경험을 백장훈 감독이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니.
“대기만성형이라고 했잖수, 그럼 형님 말대로라면 이미 영국이는 가득 찬 거 아니오?”
“시작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지.”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그 순간 백장훈 감독은 고개를 들어 촬영 현장을 바라본다. 분주히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로 한 명의 배우가 보인다. 오랫동안 봐왔지만, 아직도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은 아이.
하지만 명확한 것은 있다.
“껍질을 깨고 난 후부터가, 시작일 테니.”
* * *
촬영장의 점심은 분주하다. 스태프들은 물론이고 배우들까지 수많은 인원의 끼니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지(奧地)에서 촬영을 할 때면 함바집은 물론이고 도시락조차 공수하기가 까다롭다.
그에 반해 도심은 여유로운 편이다. 더욱이 백장훈 사단은 충무로에서 최초로 밥차를 도입한 촬영 현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모, 오늘 삼계탕이네요?”
“오늘이 초복(初伏)이니까. 넉넉히 만들었으니 다들 많이 잡수세요.”
맘씨 좋은 이모의 미소와 함께 우윳빛 삼계가 입맛을 돋운다. 제철 나물로 빚은 가지각색의 반찬들은 하나같이 윤기가 흘러넘친다.
닭 다리를 한 움큼 베어 무니,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것이 과연 이모의 솜씨는 일품이다. 괜히 충무로에서 제일가는 영양사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었으니.
그때였다.
탁.
맞은편 자리에 누군가 앉는다. 영국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한다.
“형, 오늘 촬영 없지 않아요?”
손화원은 숟가락을 들어 보이며 배시시 웃는다.
“초복이잖아, 촬영 현장에서 먹는 점심이 웬만한 밥집보다 더 맛있어. 이모님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촬영 없는 날에도 생각이 나서. 내가 왜 왔겠냐? 영국이 너 보러 왔지.”
뭐?
촬영을 하다 보니 간혹가다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손화원이 여자를 좋아하기는 하는 것일까 하고, 물론 아직 젊은 배우이다 보니 이렇다 할 스캔들이 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난 삶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중년의 손화원은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거기까지만 해요. 더 나가면 나 못 참아.”
“뭘, 형이 친한 동생 보고 싶어서 왔다는 게 못 참을 정도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자칫했으면 숟가락마저 떨어뜨릴 정도로.
배우는 맡은 배역에 따라 성격이 바뀐다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손화원의 성격 또한 촬영 기간이 이어짐에 따라 능글맞아졌다. 마치 각본 속의 이호원처럼.
“걱정하지마. 나 여자 아주 좋아해.”
손화원이 영국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부연한다.
“목표로서 영국이 너를 좋아한다는 뜻이지. 배우로서 연기를 하다 보면 꼭 닮고 싶은 배우가 생기기 마련이잖아, 지금의 나는 영국이 너다.”
“무슨 동료로서도 아니고, 하다못해 라이벌도 아니고 무슨 목표예요. 누가 보면 제가 연기 경험 수십 년은 된 줄 알겠어요. 저보다 형이 더 아역 오래전에 시작했잖아요.”
“공자 왈, 가르침에는 아이고 노인이고 나이는 필요 없는 거추장스러움일 뿐이다. 오로지 배움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배우 생활하면서 그간 막혔던 길이 영국이 너를 만나면서 조금은 알게 된 느낌이거든. 그래서 촬영 없는 날에도 이렇게 나온 거고. 롤모델의 연기를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으니까.”
허.
과대평가다. 무법자(無法者)의 촬영이 이어지는 와중 때때로 손화원은 영국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연출적인 부분이 궁금했다면 백장훈 감독에게 물었을 테였지만, 연기에 관해서는 오로지 영국에게 물었으니.
그때마다 영국은 지난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심성의껏 답변에 임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이러한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게 만든 것이리라.
“형, 그럼 점심 다 먹고 저 연습하는 거 대사 좀 받아주세요.”
“연습?”
“오후에 촬영할 씬 미리 리허설 해보게요.”
영화촬영의 경우 리허설은 방송가와는 다르게 이루어진다. 드라마가 극 중 배역의 심리와 각본에 초점을 맞춘다면, 영화는 연출적인 기법에 맞추곤 한다.
때문에 촬영 구도와 조명, 배우의 동선 위주로 리허설을 해볼 뿐이지, 그 범위가 각본 자체에 전반적으로 미치지는 않는다.
자체 스튜디오를 제작하는 방송국과 달리, 촬영 현장을 섭외하는 충무로의 경우 시간적 여건이 안되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영국의 부탁에, 오히려 손화원의 표정이 밝아진다.
“오케이!”
* * *
“씬 넘버 41, 정해석의 폭주(暴走)―!”
양주의 바닥이 보일 만큼 이미 룸 안은 알콜 냄새가 가득하다. 희뿌연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가운데, 값비싼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품에 여성 한 명씩을 끼고는 앉아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돈과 여자에 관한 것밖에 없다.
“비상장주로 장난치다가, 걸리면 뭐 어때. 먹은 만큼 토해내는 것도 아니고 잠깐 구치소에 있다가 나오는 것밖에 없는데 말이야. 대한민국 법이 원래 그렇잖아, 있는 놈들한테는 한없이 선량하고 없는 놈들한테는 한없이 각박하고. 내가 이래서 이 나라를 못 떠나요. 안 그러냐, 해석아.”
“그깟 푼돈에 관심 없다.”
정해석(영국)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술잔을 들어 보인다. 재벌 2세들의 모임이다.
하나같이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자제들로, 훗날 대한민국 기업계를 이끌어갈 동량(棟樑)들이었지만 인성만큼은 볼품없다.
평범한 회사원의 연봉을 그대로 하룻밤 유흥에 날리는 것은 물론이고, 때때로는 함께 모여 마약을 즐기기도 한다.
술잔 위로 찰랑거리는 양주를 마시려고 할 때였다.
“새끼, 더럽게 똥폼은.”
그 순간 정해석이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정해석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한다.
“다시 말해봐.”
방금 전까지 서로 어울리며 술잔을 기울였던 친구들 사이에서 냉랭함이 감돈다.
하나같이 돈이라면 남부럽지 않은 이들이 아닌가. 하물며 성정조차 비슷하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듯이.
누군가가 나서서 상황을 만회하려 들지만 좀처럼 쉽지 않다.
“야야, 말실수 한번 한 거 가지고 친구끼리 왜 이래?”
“친구?”
정해석이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모습을 촬영 현장 한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손화원이 침을 꿀꺽 삼킨다.
‘와, 무슨 리허설 때는 힘 다 빼고 한 거였네.’
일찍이 점심을 먹고 난 후 영국의 리허설을 도와줬던 손화원이었다. 그때에도 지금의 대본을 그대로 연기해 보였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위압감이 달랐다. 떨리는 듯한 눈꼬리 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까지.
겉모습은 분명 웃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화가 터져 나올 것 같은 모습이지 않나. 그 방증으로 곁에 앉아 있던 여성들이 주춤거리며 몸을 뒤로 뺀다.
“친구라, 참 좋은 단어다. 그치?”
정해석이 방금 전까지 자신이 마시고 있던 술잔을 들어 보인다. 아직 채 마시지 못한 양주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다.
자신에게 모욕을 주었던 상대의 머리카락 위로 끊임없이 낙하하는 양주를 바라보며 되묻는다.
“이래도 내가 네 친구로 보여?”
“이 새끼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곱게 빚은 머리카락이 양주로 헝클어지자 사내가 눈을 치켜뜨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일어서지 못한다.
콰득.
일어서는 사내의 머리카락을 정해석이 한 손으로 움켜쥔 채 고개를 꺾어버렸기 때문이다.
강제로 자리에 앉게 된 사내의 얼굴 위로 정해석의 얼굴이 차오른다. 다른 이들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누구 하나 나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렴, 정해석의 성정을 평소에 알고 있다면 이 자리에서 나선다는 것 자체가 명을 재촉하는 일이었기에.
이윽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한다. 머리카락이 움켜쥐어진 사내는 지지 않으려는 듯 눈에 힘을 준다.
하지만 정해석은 오히려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는 말한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전부 똑같은 게 아니지.”
콱!
그 순간 정해석이 테이블 위로 술잔을 내려친다. 술잔을 움켜쥐었던 손바닥 너머로 깨어진 유리잔이 비산하고 뚝뚝 붉은 핏물이 흘러내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장훈 감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분명 설탕으로 만든 소품용 술잔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날카로움에 손이 베인 것이 아닌가.
촬영을 중단하려는 순간 영국의 연기가 계속된다.
단역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세차게 흔들린다. 영국의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순간이었다. 움켜쥔 머리카락이 거세게 움직이며 단역의 고개가 꺾여진다.
‘늑대.’
번들거리는 안광과 입가에 비스듬히 머금은 조소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저는 육식동물이라는 것을.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들어 상대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쥔다. 손바닥 아래로 흐르는 핏방울이 조연의 어깨를 타고 흐른다.
“골라.”
무엇을 고르라는 것일까. 본래 대본에는 없던 대사다. 늑대가 으르렁거리며 신음을 토해내듯 정해석이 운을 띄운다.
“여기서 죽을래, 아니면 가랑이 사이로 길래.”
낮은 목소리였지만 알 수 없는 위압감이 흘러넘친다. 정해석에게 머리카락이 움켜쥔 이는 대답하지 못한다.
애드립 때문에 당황한 것이 아니다. 정해석의 눈빛이 정말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처럼 잔인하게 번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그래, 여기서 죽어.”
정해석이 핏물로 가득 움켜쥔 손바닥을 들어 주먹을 움켜쥔다. 그리고 주먹이 곧장 그에게로 날아간다. 단역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뒤이어질 일들을 예감한다. 하지만 응당 이어져야 할 타격이 느껴지지않는다. 조심스레 두눈을 반개하자, 방금전까지 안광을 번들거렸던 정해석이 어찌 된 영문인지 웃음을 터뜨린다.
“친구야, 장난 한번 해봤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얼어붙어 있는 상대 배역의 얼굴을 향해 손바닥으로 뺨을 몇 번 어루만지고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정해석이다.
살얼음판을 걷듯 촬영 현장에 진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이는 다름 아닌 상석에 앉아있는 정해석이리라.
촬영장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손화원은 침을 꿀꺽 삼키며 한시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촬영 전 마주했던 영국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작금의 모습은 전혀 떠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아닌가. 분위기는 물론이고 억양과 표정, 그리고 행동까지 전부 달랐다.
‘분명 애드립이다.’
자신의 대본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대본까지 섭렵한 손화원이었다. 그렇기에 영국의 대사가 애드립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촬영을 중단시켜야 할 만큼 사고였지만 어떻게 저토록 자연스럽게 진행시킬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라면 할 수 있을까. 속으로 되뇌어봤지만 답변은 쉽사리 생각나지 않는다.
백장훈 감독은 촬영을 중단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텔리된 화면을 마주하고 있다. 그만큼 영국을 믿고 있다는 방증이리라.
각본 속의 상황이 달라짐에 따라, 씬의 마지막 또한 변화하고 있었다.
정해석은 피가 뚝뚝 흐르는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그러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가져와 봐.”
정해석이 고갯짓으로 얼음이 담긴 통을 가리킨다. 방금 전 자신에게 머리카락이 움켜쥐어졌던 상대가 떨리는 시선으로 조심스럽게 통을 가져다준다.
얼음이 담긴 통 안으로 정해석이 자신의 손을 밀어 넣는다.
투명했던 얼음 통이 금세 핏빛으로 물든다. 정해석은 손사래를 치듯 손바닥을 털어 보이고는 거만하게 얼음 통을 방금 전 상대에게 내민다.
“목마르지 않냐.”
* * *
“아프지는 않아요?”
설탕으로 만들어진 양주잔이었지만, 생각보다 손바닥 부위의 상처가 컸다.
급히 지혈을 해서 핏물은 멈췄지만 손바닥 사이로 보이는 기다란 상처가 찢어진 것이 분명했다.
촬영 현장에서 대기 중이던 응급의료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 정도면 촬영을 중단했어야 했는데.”
영국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사실 촬영을 하며 다쳤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삶에는 주로 조폭과 경호원 등 험한 배역을 맡지 않았던가. 다찌마와(액션)를 하면서 다친 적도 부지기수였다.
“지금 바로 병원에 가셔서 꿰매야 해요.”
상처에 소독을 하고 붕대를 감았다. 뒤편에서 그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던 매니저 이봉춘은 119를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호들갑이다.
영국은 치료를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오늘 자신과 함께 합을 맞춰주었던 배우에게 걸음을 옮겼다.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각본에는 예정되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갑작스레 설탕으로 만든 양주잔이 깨지면서 피가 뚝뚝 흐르지 않았나. 더군다나 이어진 장면들은 순전히 영국의 애드립이었다. 당황하지 않고 애드립을 받아준 배우가 고마울 따름이다.
“아니에요, 제가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사실 영국 씨가 그렇게 순발력 있게 애드립하지 않았더라면 제가 놀래서 그림을 망쳤을 거예요.”
“그리고 이거는 얼마 안 되지만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의상팀 반장님이 그러시던데 의상 직접 가져오셨다고.”
“아, 아니에요. 정말 괜찮습니다.”
영국은 손사래치는 단역의 외투를 향해 흰봉투를 반강제적으로 밀어넣었다. 사실 단역들의 의상 또한 의상팀에서 마련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때때로 지금 보는 배우처럼 자신이 직접 의상을 준비해 오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렴, 주조연이 아니고서야 의상팀이 단역들의 신체 사이즈를 일일이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의 어깨맡에는 영국의 손바닥에서 배어 나왔던 핏물이 흥건히 묻은 채다.
“감독님, 장면은 어땠어요?”
영국은 촬영감독 도장욱을 찾아가 물었다. 사실 씬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치료를 받느라 모니터링도 못했고 예정되었던 그림이 아니었기에 걱정도 되었다.
애드립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오히려 촬영감독이나 영화감독 중에는 배우의 독단적인 애드립을 꺼리는 이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촬영감독 도장욱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려 보이며 호탕한 목소리로 말한다.
“죽여줬다. 내 살다 살다 그렇게 다치면서까지 연기하는 놈은 처음 봤다. 손은 어때 괜찮아?”
“괜찮아요, 많이 다치지는 않았어요.”
“감독님한테 가 봐. 장 배우 치료 끝나면 바로 오라고 말씀하시더라.”
영국은 촬영감독에게 고개를 꿈뻑 숙이고는 곧장 백장훈 감독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백장훈 감독은 다음에 이어질 촬영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헌데 촬영 현장을 살펴보던 영국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드리워진다. 촬영 구도하며 소품, 그리고 조명들의 위치까지. 분명 예정된 다음씬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으니.
“감독님.”
공적인 자리였기에 평소처럼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영국이었다.
영국의 부름에 백장훈 감독이 천천히 몸을 돌린다. 그의 주름진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흰 붕대를 감고 있는 영국의 손바닥이다.
“병원 가 봐라.”
무미건조한 목소리다. 눈빛에는 냉랭함이 감돈다. 영국이 촬영 현장을 바라보며 무어라 물으려고 하자, 백장훈 감독이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부연한다.
“다음 촬영은, 다른 씬으로 먼저 앞당겨오기로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병원부터 다녀와. 오늘은 촬영장에 나올 필요 없다.”
평소의 맘씨 좋은 할아버지 같았던 목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근엄하며 영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갑다 못해 꾸짖는 듯한 모습이었다.
영국은 가타부타 대꾸를 하지않고 고개를 숙인 채 물러선다.
* * *
회식 자리는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고기 굽는 냄새가 가득하고 여기저기서 소주병이 기울어지며 술잔이 첨벙이며 부딪친다.
회식에 참석한 촬영팀의 주된 화두(話頭)는 다름 아닌 오늘 있었던 촬영 장면에 관한 것이었다. 모두가 목도하지 않았나. 영국이 손바닥이 찢어진 채 펼치는 열연을.
“형님, 내 영국이가 물건인 줄은 알았는데 그 정도인 줄은 몰랐습디다. 나도 촬영카메라 잡고 있다 말고 놀래 가지고 뛰쳐나갈 뻔했다니까. 근데도 눈에 힘 안 풀고 그대로 애드립치는데 참 제 손에 피가 나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쓰고, 상황에 그만큼 몰입했다는 거잖아요.”
“나도 봤네.”
“그런데 와 그렇게 영국이한테 뭐라고 하셨대요? 아까 내가 다 민망하더구만.”
백장훈 사단에서 백장훈 감독과 가장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촬영감독 도장욱이었다. 그렇기에 이토록 편하게 물어볼 수 있는 것이다.
백장훈 감독이 소주잔을 들어 입안으로 털어놓고는 소리나게 잔을 내려놓는다.
“제 몸을 아낄 줄 모르니까.”
백장훈 감독은 마른 입술을 쓸어 보였다. 촬영을 하며 자신 또한 놀랬던 것은 사실이었다. 마음같아서는 촬영을 중단하고 당장 영국을 병원에 보내고 싶었지만 그러하지 못했다.
텔리된 화면속에 비치는 영국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실제 각본 속의 정해석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행동거지는 일순 전율을 일게하기 충분했으니. 하지만.
“백번이고 천번이고,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면 또다시 계속 연기를 강행해 나갈 아이지. 그래서 걱정이 되는 바네. 감독이란 직업이 무릇 그림을 중시하지 않나. 영국이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나조차도 그 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 촬영을 강행했는데, 다른 감독인들 오죽할까.”
두 사람의 대화를 한쪽에서 손화원이 묵묵히 듣고 있다. 그는 백장훈 감독의 주름진 눈가에서 염려와 걱정이 역력히 묻어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 호랑이 감독이라 불리며 촬영현장에서 그 누구보다도 근엄했던 이가 이토록 누군가를 다정하게 생각하는 모습이라니.
그때였다.
“어, 영국아―!”
촬영감독 도장욱이 고깃집 문턱 너머로 걸어 들어오는 영국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손을 번쩍 들어 보인다. 일순 촬영팀의 시선이 영국에게로 향한다.
손에 칭칭 감은 붕대가 영광의 상처를 말해주고 있었다. 조감독이 먼저 앞장서 박수를 치고, 다른 이들도 이에 질세라 휘파람과 박수를 쳐보인다.
영국은 촬영팀 인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수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촬영감독과 백장훈 감독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가장 먼저 백장훈 감독에게 고개를 깊게 숙이고는 말한다.
“오늘 죄송했습니다, 감독님.”
백장훈 감독의 시선은 여전히 붕대가 감긴 손에 향해 있다.
“손은 괜찮고?”
“살짝 꿰매긴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깊게 베인 상처까지는 아니라고 일상생활하는 데 무리는 없다고 하셨어요.”
바늘을 꿰맸다는 말에 백장훈 감독이 침음을 삼킨다.
“정말 괜찮아요, 촬영할 때는 붕대 풀고 찍어도 괜찮다고 했고요. 실밥도 일주일 정도 경과 보고 풀자고 했으니까 흉도 안 질 거래요.”
“촬영을 중단했어야 했는데 욕심 때문에 그러지 못했어.”
“아니에요, 정말.”
“손 배우도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나는 본체 배우보다 연출을 중시하는 감독이었지.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내 가치관이 아집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단다. 영국이 네가 다쳐가면서까지 촬영을 진행시킬 줄은 나 자신도 몰랐었으니. 앞으로 영국이 너도 그렇고 손 배우도 촬영 현장에서 다치면서까지 연기를 할 필요는 없다. 배우는 소품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고.”
백장훈 감독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영국은 입안이 바짝바짝 타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태껏 백장훈 감독과 오랫동안 지내왔지만 이러한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그 순간 백장훈 감독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정중히 영국에게 말을 건넨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느낌이 아니라 영화감독과 배우로서.
“열연을 해주어 정말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장영국 배우님.”
* * *
“장영국 배우님!”
리포터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가 넘쳐흐른다.
영화 무법자(無法者)의 인터뷰 촬영이다.
충무로뿐만 아니라 방송가에서도 백장훈 사단의 명성은 대단하다. 촬영팀의 인터뷰를 가져오는 것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힘들다 하니 오죽할까.
“뜻밖의 악역을 맡으셨다는 소식에 지금 세간의 관심이 대단합니다.”
배우들 사이에서는 불문율이 있다. 성공가도(成功街道)를 달리기 위해서는 무리한 이미지 변신은 오히려 독이 된다고.
때문에 영국이 악역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았다.
아무렴, 평범한 악역이 아니지 않은가. 신념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안하무인에 개차반의 성정을 지닌 재벌 2세 역이니.
“장영국 배우님의 과감한 이미지 변신에 항간에서는 앞으로 대한민국 영화계를 이끌어갈 트로이카가 될 재목이라고 평가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또 다른 누군가는 아집과 자만의 결과라고도 했다. 배우라고 해서 무조건적인 이미지 변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건축물을 쌓아 올릴 때 지반공사가 중요하듯, 기반을 제대로 갈고닦아야 하는데 중구난방식으로 이미지 변신을 하다 보면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남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백장훈 감독님과 촬영장에서의 정식 호흡은 아역시절 까메오 출연이후로 처음으로 알고있는데 어떻습니까?”
평소에는 맘씨 좋은 할아버지였지만, 촬영장에서는 그 누구보다 냉정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이 원체 그렇다. 한순간의 장면전환과 연출이 그 영화의 방향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기에 항상 예민할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거대한 유람선이라고 할지라도 일말의 방심이 빙하를 만나지 않는가.
백장훈 감독의 입장에서는 수많은 승무원을 태운 유람선의 조타(操舵)를 잡은 선장이 되는 것이다.
“저, 장영국 배우님……?”
리포터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서 이 지루한 인터뷰를 끝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손바닥을 꿰매었던 실밥을 풀었지만 여전히 욱씬거린다. 상념을 지워내기 위해서는 대본을 읽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는데.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손화원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른다.
“예?”
“아, 계속 말씀이 없으셔서 혹 제가 불편하게 한 거라도…?”
“아 죄송합니다. 인터뷰 처음부터 다시하시죠.”
분명 입밖으로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으로만 대답을 한 모양이다.
정해석이라는 각본 속의 인물을 맡으면서부터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물음에도 제대로 답변하지 않고 오히려 깔보는 시선이 많아진다. 마치 정말 내가 정해석이라도 된 것처럼.
* * *
“어휴, 살벌하다.”
인터뷰 촬영을 끝마친 PD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불과 삼십 분밖에 되지 않은 짧은 인터뷰 찰영이었다.
백장훈 사단의 촬영장을 찾는 것은 그야말로 흙 속의 진주를 캐내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인터뷰 촬영 자체를 허가하지 않았기에.
더욱이 현재 세간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는 배우들이 집합한 영화가 아니었던가.
“미진 씨, 장 배우 원래 저래? 인터뷰 촬영하면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니까. 사람 눈빛이 어찌나 그렇게 차가워 보이던지. 전에 왜 장 배우 인터뷰 한 번 해봤다고 하지 않았어?”
“몇 년 전이기는 한데, 그때는.”
드라마 청춘 때였다. 당시 국민 첫사랑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을 만큼 청춘의 향기가 그득한 고등학생의 모습이었다. 지금처럼 차갑고 냉혈한의 모습이 아니라.
헌데 오늘은 간단한 질문조차 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답변에 불성실했던 것도 아닌데.’
배우들 중에서는 간혹가다 인터뷰 자체를 싫어하는 이도 있었다. 세간의 관심을 먹고 사는 직업이었지만 탑스타가 될수록 그것을 귀찮다고 여기는 경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경우에는 전자와 궤가 달랐다. 귀찮아하기보다는 그저 사람 자체가 차갑게 느껴졌다. 수년 전 청춘을 촬영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나저나 장영국에다 손화원이라니.”
현재 대한민국 20대 배우들 중 가장 뜨거운 배우들이 뭉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메가폰을 잡은 이가 다름 아닌 충무로의 전설이라 일컬어지는 거장 백장훈이 아닌가.
“모르긴 몰라도 이번 영화 대박 터질 거라는 의견이 자자해. 참 촬영현장 짤막하게 스케치는 해도 된다고 했지?”
“예, 그렇다고 들었어요.”
“미진 씨는 어떻게 할래? 인터뷰는 끝났고 어차피 스케치야 나랑 카메라 감독 둘이 남아서 따면 되는 문제니.”
“저도 남을래요.”
방송가의 리포터로 있으면서 백장훈 감독의 촬영 현장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행운이 아니다.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고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오늘 인터뷰 촬영에서 마주했던 한 배우의 모습이 계속 눈가에 아른거리지 않는가.
* * *
“장 배우, 내가 대사를 받아줄까?”
노년의 배우다. 각본 속 정해석의 아버지인 왕회장 역할을 맡은 이였다. 영국은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생님.”
촬영장에서 백장훈 감독만큼이나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배우였다. 젊었을 적부터 충무로를 종횡무진하며 경력을 쌓아온 이가 아닌가.
하지만 촬영장에서는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출근을 하였고, 대기시간이 길어진다고 할지라도 불평불만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다른 배우들은 스탠바이가 길어진다 해서 불평을 토로할 수조차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각본을 들고 대사를 연습했다. 이미 헤질 대로 헤진 각본이었기에 짧은 지문조차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지만 부러 놓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씬의 시작부터 끝까지 대사를 받아주던 노년의 배우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이거야 원, 촬영장에서도 느꼈지만 내가 무슨 조언을 해주고 싶어도 해줄 게 없구만 그래.”
“아닙니다, 선생님.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정말이야, 일부러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가르칠 게 없어.”
노년의 배우는 촬영 현장을 바라보며 부연한다.
“오늘 예민해 있었던 게 전부 나 때문이지?”
“…….”
“요 며칠 내가 알게 모르게 티를 낸 모양이야. 이제 나도 각본 속에서 사라지는 인물이 되니 어찌나 마음이 싱숭생숭하던지. 더군다나 이번 영화를 끝으로 나도 은퇴를 하니…….”
각본 속에서 퇴장을 한다는 것은 배역의 죽음과 동의어였다. 주연이 아닌 경우에야 언제고 각본 속에서 퇴장을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배우 또한 사람이니만큼, 애정을 품었던 배역을 갈무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노배우는 작금의 영화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지 않았던가.
“내가 배우 생활을 시작한 게 딱 장 배우 나이대였을 거야.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지. 시골에서 상경해서 영화에 얼굴 한 번 비쳐보겠다고 충무로를 뻔질나게 돌아다녔지 뭔가. 연기의 연 자도 모르는 무지렁이가 그토록 충무로를 두드리니 어느 한 조감독이 불쌍해 보였는지 단역으로 출연을 시켜주더라고. 하지만 웬걸 그 단역을 맡고 난 이후에 감독들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를 했었지.”
주름진 시선이 과거를 회상하듯 깊어진다.
“지금의 나이가 되어 보니, 젊었을 적에 내가 왜 그렇게 게을렀고 자만했는지 후회가 돼. 시골에서 상경했던 촌놈은 어디 가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는 배우랍시고 후배들에게 잔소리를 해대고 스탠바이가 길어지면 조감독을 불러와 혼을 내곤 했었지.”
지금으로선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이다.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게 내 잘못이란 걸 알았다네. 사실 처음 장 배우를 마주하고서는 고민을 했어. 장 배우가 젊었을 적의 나를 닮은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알겠더군. 자네는 나와 결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야. 단순히 재능으로서 빛을 발하는 배우가 아니라 노력이 자네의 그림자에 진하게 배어 있다는 것을.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어.”
노년의 배우는 영국이 배우로서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대다수의 이들이 젊은 영국을 두고 그저 재능을 타고는 천재형 배우라고 추켜세우지 않았던가.
하지만 노배우의 시선에 비친 영국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이를 악물고 노력하는 배우로만 보였다.
“자네는 대성할 거야, 지금도 유명하지만 앞으로는 더욱 잘될 테지.”
“과찬이십니다, 선생님.”
때마침 촬영 현장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 빗방울을 바라보며 노년의 배우가 말을 잇는다.
“자, 가 볼까. 내 마지막 촬영을 자네와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라네.”
* * *
추적추적.
빗방울이 굵어진다. 한여름날의 장마가 무더위를 식히고 있다.
살수차(撒水車)가 필요 없을 정도로 내리쏟아지는 장대비에 촬영 카메라가 현장을 향한다. 마치 범인을 뒤쫓는 형사의 시선처럼.
“해석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정일병원의 VIP 병동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정일그룹의 임원들이다.
그중 정일식품의 사장 김민철(고모부)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다가온다. 어찌나 다급히 왔던지 어깻죽지에는 빗방울이 스며들어 음영이 진 채다.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임원들이 웅성거린다. 아무렴, 정일그룹의 왕회장이 쓰러졌다는 것은 그만큼 큰일이다. 아직 엠바고가 되어 매스컴을 타지 않았을 뿐이지, 만약 보도된다면 대한민국이 시끌벅적하다 못해 요란해질 일이었으니.
때마침 고모까지 등장한다. 정일식품 사장 김민철은 그제야 때가 되었다는 듯이 고모를 대동한 채 병실로 들어서려 한다. 하지만.
“못 들어갑니다.”
“뭐?”
“주치의가 최대한 안정을 취하랍니다. 그러니 돌아들 가세요.”
김민철은 도움을 요청하듯 자신의 아내를 바라본다. 왕회장은 이미 노년의 나이였다. 언제고 병상에서 급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병을 앓고 있지 않았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언 한마디 듣지 못한 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면 그 향후의 일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김민철의 아내이자 정해석의 고모가 눈을 치켜뜬 채 성큼 걸음을 옮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꼭 오빠를 봐야겠어, 해석이 너도 그만!”
그때였다.
콰득.
정해석이 다가오는 고모의 어깨를 한 손으로 잡은 채 눈을 번들거린다.
“돌아가라고, 내가 말했을 텐데요.”
정해석의 성정은 이미 정일그룹 내에서 유명하다. 형제의 난을 일으켜 정일그룹을 집어삼켰던 왕회장과 판박이라고 할 정도로 닮은 성정이 아닌가.
원로들은 정해석을 보며 이따금 젊은 시절의 왕회장이 떠오른다고 할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한없이 냉정하며 때로는 혈육에게조차 잔인한 인물, 그것이 바로 왕회장의 모습이었다.
추적추적.
굵은 장대비가 병실의 창가를 요란스럽게 때린다. 하지만 그 소리조차도 각종 기계음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병상에 누워 있는 왕회장의 몸에는 수많은 생명유지장치가 달려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살려내겠다는 의지가 돋보인다.
정해석은 홀로 병실을 찾았다.
“아버지,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시니 버러지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찾아오는 거잖습니까.”
정해석은 고개를 내려 병상에 누워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본다.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을 역력히 말해주는 주름과 이전보다 범위가 넓어진 검버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해석은 그를 바라보며 고해성사를 하듯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나약했던 제 자신을 언제고 단단해질 수 있도록 채근하셨죠. 정일그룹이라는 거대한 기업체를 물려받기에는 제가 너무 나약한 자식이라고 하시며.”
왕회장은 원체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때문에 형제들을 모두 제치고 이토록 정상에 홀로 우뚝 설 수 있었을 테다.
욕망이란 끊임없는 우물과도 같다. 물을 부어도 부어도 끝까지 차오를 수가 없는 것이기에.
그 깊고 넓은 욕망에 사로잡혔기에 늙고 병들어가면서도 결코 경영 volume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런데 정말 궁금합니다.”
정해석의 입꼬리가 비틀린다. 자세를 앞당긴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잔인하게 안광을 번들거린다.
“이렇게 나약한 자식한테 자리를 뺏길 생각은 정말 못하셨을까요?”
* * *
[촬영 현장의 열기가 후끈합니다. 충무로의 거장이라 불리는 백장훈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무법자(無法者)는 도심 속에서 벌어지는 법원 volume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두 명의 연산군을 연기했던 배우 장영국 씨가 악역을 맡았다고 알려져 화제가 되었는데요. 한번 현장을 살펴보도록 할까요!]브라운관 속에서 리포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껏 들뜬 그녀의 목소리가 대변해 주듯 촬영 현장은 숨 가쁘게 돌아간다.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배우들은 감독의 지시를 받으며 동선을 재차 확인하는 모습이다.
찰나의 휴식시간이 주어지자 리포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무법자의 두 배우에게 향한다.
[손화원 배우님, 장영국 배우님!]흑과 백을 나누듯, 전혀 다른 모습의 두 배우다. 수수한 차림의 손화원에 비해 장영국은 마치 온몸을 명품으로 휘감은 듯 보인다.
하지만 그 모습이 결코 과장돼 보이지 않는다. 고급스러움이 한껏 가미된 것이 마치 원래 모습인 양 자연스럽다.
촬영 카메라를 향해 짧게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대중들이 왜 그를 원하는지 단숨에 알 수 있을 정도다.
“와아.”
브라운관을 바라보고 있던 김지수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쥔다. 지수의 아버지인 반찬가게 사장님과 영국의 어머니 또한 저녁을 먹다 말고 브라운관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항상 저녁은 세 사람이 모여 먹는 게 일상이 되었다.
“오빠 진짜 멋지다.”
지수가 감탄을 토하며 브라운관 속 영국을 바라본다.
뭐랄까 평소와는 풍기는 분위기가 다소 다르다. 평소의 영국이 친근한 인상을 풍겼다면 지금은 귀티가 흘러넘친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것처럼.
“영국이 저렇게 보니까, 딴 사람 같네요. 정말.”
김 씨 아저씨도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일찍이 시상식을 통해 유명한 배우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흡사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은 느낌이었으니.
영국의 어머니 또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눈을 천천히 꿈뻑인다.
‘내가 알던 국이가 맞나?’
평소와 분위기가 첨예하게 다르지 않은가.
이윽고 이어지는 촬영 현장의 스케치 영상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짧은 영상이었지만 촬영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었는데, 정해석 역을 맡은 영국의 연기가 어찌나 사람을 몰입시키는지 입안이 바짝바짝 타오른다.
이윽고 장면이 전환되자 그제야 지수가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감탄을 터뜨린다.
“아줌마, 이 영화 대박 날 거 같아요.”
짤막한 예고편에 불과한 영상이었지만, 이미 지수의 마음은 들뜬 듯하다.
반면 영국의 어머니는 그것보다 야윈 아들의 얼굴이 신경 쓰인다. 촬영이 얼마나 고되면 저렇게 말랐는지. 남들은 몰라도 어머니는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그러지 말고, 서울 한번 올라갈까요?”
김 씨 아저씨가 어머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한다.
* * *
“광고 촬영이요?”
송원 엔터테인먼트를 찾은 영국은 뜻밖의 소식에 의아한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광고는 정말 오랜만이다.
“한참 동안 안 들어오지 않았어요?”
김성환 대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안 들어온 게 아니라, 내 선에서 잘라낸 거지. 영국이 네가 촬영 중에는 광고 촬영 꺼리는 거 알고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일전에 연산 드라마 찍고 난 이후에 주가가 더 올랐어. 광고주들이 아주 난리다 난리.”
“이번에 맡았던 배역 이미지 때문에 광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에이, 악역이라고 해서 광고 안 들어올 거였으면 사제의 고백 때부터 안 들어왔겠지.”
“그런가.”
사제의 고백 때 맡았던 김무진이라는 배역은 살인마였지만 그래도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때문에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이는 광고주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 맡은 무법자의 정해석이란 배역은 말 그대로 안하무인의 전형적인 재벌 2세의 모습인데 의외였다.
“어제 방영한 연예가중계 때문에 지금 난리도 아니다.”
아, 그 인터뷰.
“촬영현장 스케치 짤막하게 나갔을 뿐인데 벌써부터 연락 오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야. 그리고 영국이 네가 인터뷰 촬영할 때 입었던 명품들은 벌써 매장은 물론이고 편집샾에서도 싹 품절이란다.”
허.
의외가 아닐 수가 없다. 각본 속 정해석이 입고 있던 복장 그대로 인터뷰에 임했을 뿐인데 완판이라니.
“촬영 기간이 넉넉하게 잡혀서 중간에 쉬는 날도 있으니까, 짬을 내서 광고 촬영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 싶어서. 영국이 너 광고 촬영 안 한 지도 꽤 오래됐잖아. 그렇다고 네가 예능을 나가서 얼굴을 비추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어때?”
흐음.
본래 광고와 거리가 멀었던 삶이다. 예능 또한 마찬가지다. 입담이나 장기라고 할 만한 재주가 없어 출연을 꺼리지 않았던가.
그때 김성환 대표가 자세를 앞당기며 말을 잇는다.
“영국아, 내가 원래 같았으면 너한테 말도 안 꺼내봤을 텐데 이번은 조건이 너무 좋아서 그런다. 그리고 저번처럼 당황스러운 설정도 없는 것 같고.”
“무슨 광고인데요?”
배우란 무릇 연기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속사 대표인 김성환의 입장에서는 다르다.
사시사철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고 있는 입장인데 제 발로 차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번에 제의가 들어온 광고 물건은 꽤나 탐스럽다.
“정장.”
정장이라, 몇 번쯤 들어왔던 광고주제다. 배우라면 탐이 날 만한 광고였다. 이미지에도 전혀 무리가 가지 않으며, 오히려 고급스러움을 더해주는 주제였으니.
하지만 이토록 김성환 대표가 설득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 정도라면 여태껏 몇 번이나 있지 않았나. 그 순간 김성환 대표가 침을 꿀꺽 삼키며 부연한다.
“국내 광고가 아니야.”
* * *
Desiderio.
명품 중의 명품이라 불리는 ‘데시데리오’는 이탈리아어로 욕망을 뜻한다.
의류를 기반으로 오랫동안 명성을 갈고닦은 데시데리오의 주 고객층은 상류층 중에서도 상류층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이다. 유럽 명문가의 자제들이나 태국으로 치면 하이쏘와 같은 부류였으니.
그도 그럴 것이 정장 한 벌이 수천만 원을 호가하니 오죽할까.
“벨로(아름다워).”
데시데리오의 수석 디자이너 모니카는 커다란 빔프로젝트 속에서 보여지는 한 남성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평소에도 수많은 장르의 영화를 섭렵한 영화광이었다. 고전부터 시작해서 유럽과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다시 봐도 역시나 너무 아름다워.”
모니카가 아시아의 이름 모를 남자 배우에게 이토록 빠져든 것은 몇 달 전의 이야기다. 우연찮게 친분이 있었던 영화감독의 초대로 인해 칸영화제를 방문한 적이 있지 않았나. 그곳에서 상영되었던 초청작품 중 한 작품이 그녀를 진하게 매료시켰다.
사제의 고백.
처음에는 포스터만 보고 단순히 아시아의 종교영화이거나, 혹은 엑소시스트와 같은 부류의 오컬트 호러 장르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속내를 까보니 웬걸, 인간의 7대 죄악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었다.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로다. 주여.
-그를 벌하소서.
이미 수차례 반복해 봤던 영화이지만 사제복을 입은 남자 배우가 경건하고도 잔인한 모습으로 임종경을 읊는 모습은 온몸에 전율이 끼치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피날레는.
-악인에 대한 단상이 잊히듯, 세상은 그것을 망각이라는 단어로 잊으며 또다시 악인을 방관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끝까지 오만할 것이다.
헝겊 아래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잠식되는 그의 시선처럼, 모니카의 가슴속에 깊은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주여, 나를 벌하소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모니카가 미친 듯이 장영국이라는 아시아의 신인 배우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수석 디자이너로서 데시데리오를 이끌어가면서도 계속해 장영국이라 불리는 배우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의상을 디자인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턴가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재단을 하지 않았나.
그녀는 빔프로젝트 스크린 속 영국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며 아련하게 말한다.
“실제로 보면 어떨까.”
얼마 남지 않았다. 그를 만나기까지.
* * *
“데시데리오라…….”
영국은 며칠 전 김성환 대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이탈리아의 하이엔드 명품 패션브랜드인 데시데리오 측에서 영국과 미팅을 하고 싶다고 몇 차례나 연락이 왔다고 한다.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애초에 데시데리오는 광고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기에.
하물며 이탈리아에서까지 자신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 의문이었다.
“오, 영국아? 웬일이냐?”
안중현이 영국의 의상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뜬다. 혹시 데이트라도 가는 것이 아니냐고 재차 물어온다. 광고 미팅 때문에 나가는 것이라고 말하자 정말이냐고 재차 묻기까지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의 복장이 평소와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정해석이 된 느낌인데.’
김성환 대표가 직접 의상까지 준비해 주지 않았나. 아무래도 서구 volume 명품 브랜드와의 미팅이다 보니 신경을 쓴 것이리라. 더군다나 국내 광고도 아닌, 해외 광고였으니.
가만 생각해 보면 국내 배우 중에서 해외를 목표로 광고 촬영을 한 배우가 작금의 시대에 몇 명이나 있을까.
백장훈 감독의 작품 경우 촬영 기간을 최대한으로 잡는 편이었기에 이렇게 짬을 낼 수 있었다.
각본 속 정해석처럼 차려입은 영국은 매니저 이봉춘이 운전하는 차량에 탑승하고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서울에서도 알아준다는 한옥 건물로 된 한정식집이다. 각 방마다 개별로 나눠져 있어 정치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고도 했다.
“영국아!”
김성환 대표가 먼저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어찌 보면 영국보다도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대표님, 왜 이렇게 땀을 흘려요.”
“그게 외국인하고는 처음 만나보니까. 더군다나 데시데리오잖냐.”
“어차피 그쪽에서 만나자고 계속해서 연락 온 거잖아요. 통역도 대동하고 온다는데.”
마음이 급한 것은 영국이 아니라 데시데리오 측이었다. 사실 영국은 아직도 데시데리오가 자신을 왜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며 방 안으로 두 명의 남성이 들어선다. 전형적인 이탈리아인의 모습처럼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장 자리에 앉지 않고 뒤이어 들어오는 사람을 기다린다.
이윽고 은발의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들어선다. 김성환 대표가 눈을 크게 뜰만큼 웬만한 여배우보다도 입이 떡 벌어지는 미인이었다.
그녀는 곧장 들어서자마자 영국을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보니 더 환상적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