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Make You a King as a Possessor RAW novel - Chapter (95)
빙의자가 왕으로 만들어 드립니다-95화(95/275)
유리페는 그날 저녁, 자신의 시종을 통해 쪽지로 대결 장소와 시간을 곧바로 알려왔다.
[ 마격 클럽의 결투장에서. 이틀 후 오후 5시. ]– 잘 부탁해! 라는 말씀도 함께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시종인은 유리페 왕녀의 성대모사를 해가며 그녀가 남긴 말을 전했다.
유타에게 쪽지 내용을 전해 들은 레이먼은 그날 밤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세계에 빙의한 이후, 레이먼은 처음으로 강력한 무력감을 느꼈다.
아니, 두 번째인가. 시스템창에게 킹메이커가 되라는 협박을 들었을 때, 그땐 정말 미치는 줄 알았으니까.
이불 속 레이먼이 손톱을 한 번 까득 씹었다.
‘정령으로 뭔가 방해하고 할까.’
[ 응? 붉은 치, 네 멍청한 생각이 다 들이는구나. 나쁜 감정을 엿듣기가 쉽지. ]‘나쁜 감정이 아니라 전략입니다.’
[ 네가 그 꼬맹이를 아끼는 건 알고 있다만… 네가 중간에 끼어들면 그 친구도 그닥 반기지 않을 거 같은데 말이야. ]아모르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레이먼도 그 정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신뢰도, 호감을 잃지 않는 범위 안에서 몰래 도우면 될 일 아닌가.
‘티가 나면 안 되니까 마법 그 자체를 도울 순 없어. 그렇다고 유리페 왕녀의 몸을 억지로 망칠 수도 없다. 그렇게 했다가는 괜한 루머가 퍼질 수도 있어. 유타에게 부정적인 소문이 들러붙는 게 앞으로의 이미지에 더 최악이다.’
……뭐, 만약 유리페 왕녀에게 질 것 같은 상황이 온다면.
‘그때 유타의 마법에 내 마력을 싣는다.’
폭발하는 한순간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거다.
레이먼의 마력은 이제 서클을 통해 나가는 마력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마력. 그건 공기 중에 퍼진 주인 없는 마력과 그 성질이 같다는 거다. 즉, 엘프족조차 레이먼이 유타를 돕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왕이 되지 못하는 왕 후보는…’
필요 없어.
그렇게 생각을 마친 레이먼은 다시 이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불 끄트머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모르는 자신의 계약자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릴 마음에다 지껄이니 몸이 축나는 게지.’
묘한 놈.
감정의 정령은 필연적으로 다채로운 감정을 지닌 이에게 이끌린다. 아모르가 자신의 하위 정령을 따라 레이먼의 곁에 왔을 때,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표정 변화도 거의 없고, 늘 뚱한 얼굴에 이성적인 말만 하는 놈이… 재미가 있다고?
그러나 옆에 들러붙어 구경할수록 이놈은 뭔가 달랐다.
‘영혼은 제 자리에 있는 게 맞다. 하지만 미묘하게 어긋나있어. 그래서 저러는 거야. 생각과 감정이 맞지 않으니 말이다.’
저런 식으로 성장하면 자신을 갉아먹을 텐데 말이야.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중한 걸 잘 지키는 계약자가 되라, 붉은 치. ]마지막 말을 마친 아모르가 소용돌이치며 희미해지더니 모습을 감췄다.
레이먼은 이불 끝을 움켜잡고 작게 중얼거렸다.
“…알고 있습니다.”
***
“유타 님.”
“응, 말해. 렌스.”
유리페 왕녀와의 대결까지 앞으로 하루.
유타가 복도를 거닐 때마다 미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응원과 질투, 호기심이 뒤섞인 시선들. 그 사이에서 유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응원하는 학생들도 다수 있었기에, 유타는 그럴 때마다 그들에게 손 인사를 건넸다.
“유타, 힘내!”
“고마워.”
“그래! 져도 암말 안 할 거야!”
“야, 유타가 이길 거야.”
물론 응원하는 모두가 유타가 이길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타의 실력을 제대로 아는 이는 거의 없었고, 아마 유리페 왕녀도 마찬가지일 거다. 하지만 유타 역시 유리페 왕녀의 실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마리아 선배에게 들은 바로는 흥미 있는 마법인 저주 마법만 성적만이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마법도 다 쓸 줄 알겠지. 왕족은 포레스튼 입학 전, 이론적으로는 전 학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선행 교육을 끝마친 후에야 입학시키니까.’
왕족이 다른 이들 앞에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나 뭐라나. 하지만 거기서도 유타는 제외였다. 별궁에 사는 버려진 왕자는 홀로 묵묵히 버텼다.
혼자 공부했다. 선생 따위 없어도 해낼 수 있었다. 아니, 자신은 해내야만 했다. 해내야만 했기에 할 수 있었다.
– 유타, 너는 잘할 수 있어
– 네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선 똑똑해야 해. 성실해야 해. 실력 있는 마법사가 되어야 해.
– 유타, 유타, 유타.
자신만 의지하던 그녀의 목소리.
그러나 유타가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 사람을 위해 왕을 꿈꾸는 게 아니야.’
렌스가 학생들 사이를 지난 이후에야 뒤늦게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야, 내가 질 거 같아?”
“…아닙니다.”
복도를 가로지른 유타는 예배당 앞에서 멈춰 섰다.
유타는 힘들 때마다 별궁 근처에 마련된 작은 예배당 안에서 늘 기도했다.
– 이 개 같은 현실이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 신이시여,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제발 부탁이니 이 이상의 시련을 제게 내리지 말아 주세요. 버틸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면 저는 더 이상 어떤 상황도 버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그리고 만약, 만약 그 상황을 제가 이겨낼 수 있다면 그걸 증명해주세요.
이 엿 같은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그 증명을 자신에게 달라고.
‘그리고 만났다, 레이먼을.’
이상하게 처음부터 신경에 거슬리던 놈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친해지고 싶었다. 만약 기왕 누군가와 친해진다면 이 애가 가장 처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포레스튼에 입학 후, 가장 처음으로 신뢰하게 된 친구가 바로 레이먼이었다. 이후 그는 친구로서, 또 조력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해주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유타는 미묘한 패배감을 느꼈다.
“렌스.”
“네.”
“내가 후보로 나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왜 레이먼은 선거에 나오지 않지? 라는 말이 돌았어. 인정해. 레이먼은 훌륭해. 1학년 수석이고 마법 실력도 뛰어나지.”
한 번 뜸을 들인 유타가 천천히 이어 말했다.
“난 레이먼을 좋아하지만.”
“네.”
“진짜 왕이 되려면 레이먼에게,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잡아먹혀서는 안 돼.”
“…….”
“레이먼의 도움 없이, 녀석과는 전혀 상관없는 장소에서 내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즐거워. 유리페 누님 덕분에 그럴 기회가 빨리 온 거니까.”
유타는 예배당 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랜만에 들리는 예배당이었다.
예배당 단상 쪽 벽면에는 작은 주스테 신상이 걸려 있었다. 유타는 이번에도 기도했다.
‘당신이 먼저 응답해주셨으니 저도 증명하겠습니다.’
‘제가 왕이 될 자격이 있다는 걸.’
‘거기서 얌전히 보고 계세요.’
휙. 짧은 기도와 함께 몸을 돌린 유타의 작은 등 뒤로 렌스가 따랐다.
***
“다들 이쪽이야.”
“오늘 누가 이길까?”
“그야 물어볼 것도 없이 유리페 선배님이지. 당연한 거 아니야?”
마법 결투 당일 오후 5시. 수업을 마친 고학년 학생들과 생활관에서 대결을 기다리고 있던 1, 2학년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마격 클럽에서 진행될 결투 심사를 맡은 교수들도 클럽 하우스 쪽으로 오고 있었다. 단연 화제가 되는 건, 이번 대결에서 누가 이길지에 관해서였다.
“유리페 선배님은 왕족 정규 교육을 받고 온 거야. 하지만 알잖아, 유타의 옛날 별명.”
“그래도 유타는 성적이 좋잖아. 유리페 선배는 3등 안에 든 적도 없는걸?”
“그래봤자 유타는 1학년이라니까?”
“어쨌든 여기서 이기는 쪽이 회장이 되겠지?”
“자자, 어차피 곧 결과가 나올 텐데 그만들 싸우고 안쪽으로 들어와서 앉아. 오늘은 구경꾼이 많으니까 의자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유리페는 일찌감치 경기장에 도착했다. 그녀는 마리아 스웨인과 함께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화사한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반한 학생들도 한두 명 있었다.
“마리아. 이 저주 마법 말이야. 인형에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생명이 없는 인형이라고 내 말대로 움직일까? 아냐, 아니다. 차라리 정령을 집어넣고 인형을 움직이게 하는 편이 손쉬울 거 같다.”
“네가 이런 대화를 하고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 못할 거다.”
“어머? 그래?”
“그래.”
마리아 스웨인이 폭 한숨을 내쉬었다. 팔짱을 낀 채 발끝을 까딱하더니 그녀가 물었다.
“이길 수 있는 거지?”
유리페가 쿡쿡 웃었다. 발그레한 볼로 그녀가 말했다.
“글쎄에, 그건 해봐야 알지 않을까?”
“그럼 왜 하자고 한 거야? 나한테 상의도 한 번 안 하고.”
“그것도 글쎄. 아, 시작한다. 다녀올게, 마리아.”
탁탁탁. 즐거운 발걸음. 실제로 유리페는 콧노래를 흥얼대고 있었다.
저 멀리서 친구들과 함께 걸어오는 유타가 보였다.
“야, 이길 수 있냐? 이것도 못 이기면 죽인다.”
“오닉스 너는 날이 갈수록 입이 험해지네.”
“뭐?”
“이기고 돌아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레이먼, 너는 기사 쓸 준비 해둬. 제목은… 그래! ‘유타 스테디움 스턴, 드디어 회장으로의 한 보를 내딛다.’ 이런 거 어때?”
“촌스러워.”
너무하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타 역시 결투장 위로 올랐다.
마격 클럽은 정식 결투 시엔 꼭 교수를 불러 심판으로 세웠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심판은 클레임 교수였는데, 학생들은 클레임 교수라면 믿을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이딴 걸-’
물론 아무도 클레임 교수의 스케쥴은 고려하지 않았다. 마법 결투 심판 때문에 예정에도 없던 야근을 하게 된 클레임은 이미 평소보다 세 배는 더 절망적인 얼굴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도 궁금하긴 했다. 그동안 레이먼에 가려진 유타 5왕자의 실력을 말이다.
“준비가 끝나면 말해라. 두 명 다 끝났다고 대답하면 10초 뒤 결투를 시작한다.”
클레임이 말했다. 결투장 위, 새하얀 원 위에 선 유타가 유리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누님.”
“응. 잘 부탁해.”
준비가 끝났다는 말이 클레임 교수에게 전해지고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10… 9…
“역시 한 번 더 인사를 해야겠다.”
“네?”
그렇게 말한 유리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내려가는 눈꼬리가 어쩐지 섬뜩했다.
마지막 3초가 남았을 때, 유리페의 입 모양이 작게 움직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들렸다.
‘잘 부탁해.’
들을 수밖에 없었다.
발음을 따라 입술이 움직였다 꽃처럼 피길 계속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고,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믿을 수 없는 단어가 보였다.
‘유-리-아.’
유타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짐과 동시에 클레임의 손이 하늘 위로 올라갔다.
“결투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