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raise this family RAW novel - Chapter (535)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535화(535/576)
제535화
한국에서의 일정도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구수영 회장을 찾았다.
이번에는 다행히 병원이 아니라 집이었다. 그사이 구수영 회장은 퇴원하시고 집에서 쉬고 계셨다.
구수영 회장의 집은 저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한남동 명당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근처에는 효진뿐 아니라 삼전가를 비롯한 재벌가의 집들이 연이어 있었다.
나와 구수영 회장은 잠시 정원을 거닐었다.
날이 더웠지만, 걷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진성이에게 한 조언 잘 들었네. 나야 진성이를 이미 너에게 맡겨둔 뒤라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더구나. 이런 정국에는 경험이 많은 이들이 중요하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삼전이나 효진이나 후계자들이 윤곽을 드러내긴 했지만, 경험은 미천한 상태였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할 시점에 경험이 부족한 후계자들이 나섰다가 정부의 미움을 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구수영 회장이 잠시 멈춰 섰다. 뒷짐을 진 채 나를 쳐다봤다.
“그래, 며칠 본 동안 진성이는 어떤 거 같은가?”
“며칠로 그 사람 됨됨이를 다 판단할 순 없지만 성실하고 꾸밈이 없는 성격이라 융통성이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부분이 오히려 요즘 기업인들 같지 않아서 구진성 씨의 장점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 내가 본 진성이도 그래. 효진 같은 그룹에는 오히려 뚝심이 중요할 수가 있지.”
구수영의 말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효진 그룹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보다 현재 잘되는 사업의 내실을 다지는 것을 더 중시했다. 삼전과 다른 지점이기도 했다.
그런 기업의 수장으로서는 구진성처럼 융통성이 조금 부족해도 성실하고 묵직한 성격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장자 승계가 원칙이 아니더라도 구진성 씨는 꽤 괜찮은 기업인이 될 것 같습니다.”
“고맙네….”
구수영 회장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자네… 예정이한테 이야기 다 들었네. 예정이가 준비한 소개팅에 진성이를 내보냈다면서?”
“아, 그게….”
“예정이가 단단히 벼르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성국아, 이건 어른으로서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자네 나이 때 즐길 수 있는 일도 좀 찾아보게나. 그게 꼭 연애가 아니어도 좋고. 취미 생활이나 그런 것도 하란 말이지.”
“명심할게요, 회장님.”
“맨날 말로만.”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은 일보다 재미난 게 없어서요.”
수영과 골프 거기다 승마, 미술품 수집 등 저번 생에서 안 해본 게 없었다. 하지만 사업을 키우는 것보다 재미있는 것은 없었다.
“내가 다 아까워서 그러네. 이 인물에. 쯧쯧쯧.”
“노력해볼게요, 회장님.”
“그래, 뭐든 다 때가 있으니…. 나 건강할 때, 자네 장가가는 거 보는 게 내 소원이야. 그것만 기억하게.”
그 말을 들으니 새삼 구수영 회장의 나이와 건강이 걱정됐다.
저번 생에서 내가 죽기 전까지 구수영 회장의 부고는 듣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미래도 얼마 남지는 않았다.
“회장님, 제 자식 결혼하는 것도 보셔야죠.”
“허허. 그래. 그래야지….”
구수영 회장은 다시 한번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 * *
구수영 회장의 집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데니얼이 오늘의 나머지 일정을 이야기했다.
“대표님, 이제는 정말 화장실 갈 시간도 없습니다. 바로 강남 ‘페이스 노트’ 한국 지사 갔다가 판교의 ‘띡똑’지사 들른 후에 저녁에는 양철수 대표님과 약속이십니다.”
“네, 바로 이동하죠.”
나는 곧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차는 한남동의 길을 빠져나갔다.
한국에서의 일정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 * *
늦은 밤, 나는 오랜만에 아빠와 함께 술을 한 잔씩 하고 집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여름밤은 걷기에 적당한 온도였다.
양철수 대표와 춘천의 수유 사장님, 그리고 아빠는 이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
오늘은 특히 회사 이름에 대해서 많은 말들이 오갔다.
아빠는 수유 사장님을 배려해서 <원아저씨 보쌈>으로 시작했으니, <원다방> <원닭갈비>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아빠가 다 하고 있으니 아빠가 원래 생각한 대로 <전다방> <전닭갈비> 등으로 하자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결국, 결론은 나지 않았다.
“성국아, 처음에는 닭갈비집까지 할 줄은 몰라서 <전다방>이라고 말했지만 이제 수유 사장님의 레시피로 닭갈비집도 오픈할 거니 <원닭갈비>로 해야 하지 않나 싶어.”
아빠는 지금도 같은 의견이었다.
“저도 이름의 통일성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편하고, 원으로 시작하는 체인점이나 밀키트 등은 이제 믿고 사도 된다는 믿음이 생겼으면 하거든요. 앞으로 우리가 개발할 밀키트도 <원키트>로 하면 좀 더 사람들이 인식하기 쉬울 것 같고요.”
“내 생각도 그래. <원아저씨 보쌈> <원다방> <원닭갈비> <원키트>….”
아빠는 중얼거리더니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재벌 된 거 같구나.”
[아빠, 재벌 된 거 같은 게 아니라 이제 곧 요식업계의 재벌이 될 거야.]나는 아빠의 느긋한 보폭에 맞췄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묻지 못한 이야기를 물었다. 술김에….
“아빠, 아빠는 어릴 적 꿈이 뭐였어?”
“꿈?”
“응.”
아빠는 내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아빠의 사연팔이를 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 밤이었다.
여름밤의 바람은 적당했고, 나는 조금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그때… 보육원에서 자랄 때 꿈이 뭐였냐면… 꿈을 가지는 게 꿈이었어.”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아빠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보육원에서 자라면 현실을 빨리 알거든. 부모가 없다는 것. 세상에 의지할 데가 아무 데도 없다는 것. 그런 사람들은 꿈보다는 현실을 생각해야 한다는 거였거든. 학교에서 아이들이 대통령이 되겠다. 과학자가 되겠다. 의사가 되겠다. 그런 말을 할 때, 아빠는 식당을 하고 싶다고 했어….”
“식당?”
“보육원에서 밥 먹을 때, 우리한테 밥 퍼주는 그분들이 제일 부러웠거든. 굉장한 권력을 쥐고 있는 것 같아서….”
아빠는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내 딴에는 가장 높은 사람 같았거든.”
“아빠는 그럼 꿈을 이룬 거잖아?”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수유 사장님 만나고 돌아온 날 밤에 그런 생각을 했어. 사실 나만큼 꿈을 이룬 사람도 없다고…. 어릴 적 식당 주인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친구들은 다 웃었거든. 보육원 출신이라 못 먹어서 저렇다는 비아냥거리는 말도 들었고…. 담임 선생님도 다른 꿈을 가져보라고까지 했어. 그래서 그땐 꿈을 가지는 게 꿈이었는데….”
아빠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적 일을 이토록 자세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니, 아빠에게 그날 일이 큰 상처였던 게 분명하다.
“근데 지나고 보니 꿈을 이룬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아는 대통령 중에 내 친구도 없고… 과학자나 의사가 되겠다고 한 녀석들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식당 주인이 되기보다 더 어렵잖아.”
“아빠 같은 식당 주인은 아무나 되는 거 아니잖아.”
“그런가…. 사실은 요즘 왜 이런 생각이 났냐면, 얼마 전에 초등학교 동창회 한다고 메시지가 왔거든. 참석 여부 알려달라는데, 아직 답을 못 해주고 있어서….”
“아빠, 안 나갈 거야?”
“식당 일도 바쁘고….”
아빠는 말끝을 흐렸다.
보육원에서 자란 아빠에게 초등학교 때 좋은 기억은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아빠, 종종 기억은 왜곡되잖아. 나는 분명 그 시절에 힘들었는데, 사실 그땐 다 어린아이였잖아. 그리고 보고 싶은 친구들도 있지 않아?”
“있긴 있지…. 그 녀석들 어떻게 사는지도 궁금하고….”
“아빠, 동창회가 언제야?”
“이번 주말. 근데 서촌에서 하는 거고….”
“아빠, 내가 데려다줄게!”
“네가?”
“응!”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저번 생에서 나도 한 집안의 가장이었고,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자식을 낳고 가장 어깨에 힘 들어갈 때는 뻔했다. 누구보다 잘난 자식을 볼 때였다.
[나, 전성국이야.]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대한민국 출신의 유명 기업가!
* * *
“아빠, 내가 선물한 롤아이 안 차?”
“아빠, 넥타이 그거 말고….”
“아빠!”
동창회가 열리기 다섯 시간 전, 나는 연신 아빠를 찾았다.
“이 녀석아, 아빠 좀 그만 찾아. 그리고 아빠는 평소보다 조금만 더 깔끔하게 나갈 거야.”
“아빠, 슈트는 입을 거지?”
“성국아, 아빠는 동창회 가는 거지 시상식 가는 거 아니거든.”
“그래도….”
결국, 아빠는 넥타이를 매지 않은 슈트 차림으로 동창회에 가기로 나와 타협을 봤다. 그리고 롤아이도 차지 않기로 했다.
“초등학교 동창들 만나는 거니까 편하게 갈 거야. 동창회 장소도 동네 횟집이야.”
“알았어, 아빠….”
초등학교는 건너뛰고, 미국에서 최고의 사립 명문 학교를 나온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긴 했다.
[아빠, 우리는 동창회 가면 명품 콜렉션이야.]이때, 엄마가 지나가다가 우리를 보고는 다가오더니 내 후드티를 딱 잡았다.
“성국아, 내가 보기에는 아빠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야.”
“내가 왜?”
“너, 이 후드티 늘어난 거 입고 갈 거야?”
“엄마, 사람들은 전성국 하면 후드티에 청바지를 떠올린다고.”
“그건 아는데… 부모를 가장 빛나게 해주는 건 자식이라고. 네 아빠가 손목에 롤아이 차는 것보다, 네가 멀끔하게 하고 가는 게 제일이야. 너, 근데… 세수는 했어?”
아빠 챙기느라 나는 뒷전이었다.
“지금 하려고 했지.”
“눈곱 봐라. 얼른 씻어!!!”
나는 엄마에게 등 떠밀려 욕실에 들어갔다.
* * *
데니얼이 나와 아빠를 보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대표님, 저도 얼른 결혼해서 아이 낳아야겠어요. 대표님 부자는 누가 보면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제라고 해도 믿겠어요.”
“데니얼, 데니얼은 이미 나이도 늦었고요. 모든 아버지가 젊다고 다 멋있는 건 아니거든요.”
“대표님이 후드티를 벗어서 대표님 같지 않았는데, 이런 직설을 들으니 역시 대표님 같으시네요.”
[지금 내 욕한 건가, 데니얼?]데니얼은 얼른 차 문을 열었다.
“어서 가시죠. 서촌까지는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더라고요. 도로가 막히면 미국이나 한국이나 답이 안 나오잖아요.”
나는 아빠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오랜만에 아빠의 고향 서촌시로 향했다.
* * *
어느 동네 귀퉁이에 있을 법한 크지 않은 규모의 횟집.
그 앞에 ‘서촌 초등학교 22회 졸업생 동창회!’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아빠는 차에서 내리더니 살짝 긴장한 얼굴로 시간을 살폈다.
“너무 늦었나….”
고속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우리는 약속 시간보다 20여 분 늦게 도착했다.
“아빠, 우선 들어가 보자. 이미 동창들 다 와있을 거잖아.”
그런데 아빠는 자꾸만 머뭇거렸다.
“동창들이 나…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네….”
이제 내가 아빠 등을 떠밀어야 할 때였다.
“그건 만나서 확인해 보면 되지!”
“어… 어….”
우리는 횟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담한 규모의 횟집 안에는 많지 않은 아빠 또래의 남녀가 섞여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보자마자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반갑게 반겼다.
“전지성! 나, 김도훈이야. 기억하지?”
“어… 도훈이. 기억하지. 너 살 많이 빠졌네.”
“야, 그게 언제 적인데….”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아빠에게 알은척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누군가 나를 알아봤다.
“어머, 뒤에 아들이야?”
“응. 성국아, 인사드려.”
나는 오랜만에 입은 슈트 깃을 살짝 매만지고 인사를 올리려는 그 순간, 동창생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지성아, 네가 우리 서촌 초등학교 22회 졸업생 중에서 꿈 이룬 유일한 사람인 거 알아?”
그 순간, 아빠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누군가 아빠의 꿈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아빠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너 그때 식당 하는 게 꿈이라고 했잖아. 대통령, 과학자, 가수 이런 거 사이에서 평범해서 종종 기억이 나더라. 근데 네가 <원아저씨 보쌈> 사장 됐다고 했을 때, 어릴 적 그때 생각이 딱 나더라고. 진짜 축하한다!”
그러곤 여기저기서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성아, 여기로 어서 와…. 우리 잔 좀 받아라.”
“어….”
아빠는 동창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고, 나는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30여 년 전 아빠는 동창들 사이에서 보육원에서 자라는 아이.
꿈마저 소박한 아이였을지 몰랐지만, 지금은 동창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꿈을 이룬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바탕으로 이제 더 크게 도약할 때였다.
나는 가게 밖에서 오랜만에 동창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아빠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아빠, 힘내세요! 성국이가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