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03)
청춘 이벤트(3)
열 살짜리 아이의 보호자가 되면 장점이 하나 있다.
아무도 밤에 나를 불러내지 않는다.
덕분에 모든 일을 내일로 미뤄 두고 편하게 쉴 수 있었다.
“형, 나 심심해.”
“…….”
편하게 쉬진 못했다. 보호자는 아이를 돌봐야 하는 법이지.
“잘 시간인데?”
“벌써?”
미니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침대 위로 주섬주섬 올라갔다.
가끔… 가끔은 아니다. 미니미에게서는 꽤 자주 연구소 시절의 버릇을 볼 수 있었다. 평범한 아이였다면 한 번쯤 자기 싫다고 떼를 쓸 법도 한데 그런 거 하나 없이 얌전히 침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아라.
내가 소장의 속을 긁어 내렸던 것과 이런 생활 패턴은 궤가 다르다. 간식거리나 새 장난감을 요구하는 건 소장이 짜증을 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들어주는 범주에 속하지만, 아무리 떼를 쓴다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도 있다. 기상 시간, 취침 시간, 매일 먹어야 하는 약, 주사. 뭐, 그런 것들.
그나마 나는 아버지한테 입양될 즈음에는 그 버릇도 많이 사라졌었다. 미니미처럼 보육원에 가서도 방주의 관리를 받았던 게 아니라서. 학교에서 또래 애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연구소 때와는 다른 의미로 강해져야 했었다. 나는 강했고, 살아남았다.
미니미에게서 저 버릇이 사라지려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거다. 옆에서 지도를 해 주면 더 빨리 사라지겠지. 하지만 그러다가 괜히 이른 반항기라도 찾아오면 귀찮아지니 그냥 놔둘까도 싶지만….
“형. 잘 자.”
내 속도 모르고 태연하게 누워서 인사를 하는 녀석을 보니 기운이 빠진다.
금세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는 얼굴을 보니 애는 애다 싶었다. 나를 향하는 조건 없는 신뢰. 내가 자기 형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눈.
됐다.
답이 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나는 마력 시계를 매만졌다. 시계 패널을 가볍게 문지르자 화면이 켜졌다. 생긴 게 시계인 만큼 당연히 시계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다.
이십 년의 세월이 있다고 해도 시계 디자인이 획기적으로 바뀔 리는 없고. 지금 시점에서도 그냥 투박하게 생긴 시계처럼 보일 뿐이다. 아날로그시계는 아니니 굳이 따지면 스마트 워치 정도나 될까.
다른 점이 있다면, 글쎄. 전기가 아니라 사용자의 마력을 동력으로 삼는다는 것?
2021년에는 없는 기술이지. 반영구적인 마력 배터리. 멋진 기술이다. 휴가 끝나고 오면 본격적으로 상용화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이것저것 많이 만들려고 했는데. 다 날아갔지.
음.
혹시나 싶어서 한 번 더 마력 시계에 알렉스 호프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어차피 결과는 알고 있다.
[검색 결과 – 0건]어쩔 수 없지. 국내 자료만 있으니까.
노려보아 봤자 0건의 검색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
됐다. 미니미도 자고 있으니까 다른 거나 하자.
나는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 뒀던 휴대폰을 잡았다. 미니미 덕분에 방해를 받는 일도 없으니 작업하긴 편하다.
작업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 대단한 건 없다. 휴대폰으로 지금 활성화되어 있는 던전 목록을 켜서 마력 시계에 저장되어 있는 과거 던전 목록을 비교하고 있다. 지난번 홍석영과 김채민이 공략했던 세이렌의 둥지는 본래 공략이 아니라 터졌을 던전이다. 명동에서 아이들이 모두 살아 나왔으니 홍석영이 원래보다 던전 공략도 많이 했을 거다. 이런 건 미리미리 체크해 놔야지 마음이 편하다.
노트북이라도 있으면 훨씬 간단하게 하겠지만…. 인터넷 기록은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잖아. 이미선이 국제이능협회 소속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그냥 내 노동력으로 때우는 게 낫다.
휴대폰에서 충전기가 분리되었다. 2021년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불쌍한 필수품이다.
…이승연의 방에 없던 것이기도 했고.
생각은 다시 이승연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이승연이었다면 고모의 추적을 피하려면 더 복잡한 방법을 썼을 거다. 어차피 현금은 충분하니 버스표를 여러 장 사서 혼선을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하지만 이승연은 범죄자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가출 청소년이다.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생각할 건 없었다.
봐라. 위치 추적을 피해 휴대폰도 버리고 간 애가 충전기는 살뜰하게 챙겨 간 걸 보면.
강태우 휴대폰도 두고 가게 시킨 건 어디까지나 연막이다. 지금 이곳에는 이승연의 부탁이라면 어지간해선 들어줄 만한 애가 하나 있지 않은가.
이승연의 소꿉친구, 순순진 말이다.
* * *
“야! 내 양말 못 봤어?”
“니 양말을 왜 나한테서 찾아. 안 빤 거 아냐?”
“새거 있거든?!”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애들은 아침부터 활기차기 짝이 없었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이미선은 보이지 않는다. 다선의 헌터들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지유건이 퀭한 얼굴로 나와서는 아이들 먹을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생님.”
“못 찾았습니까?”
주어는 없었지만 지유건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덕분에 대충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하는진 알겠는데…. 버스터미널이 오래되어서 그런가 관리가 엉망이더라고요. CCTV도 영 상태가 안 좋고.”
지유건은 크게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저흰 이런… 담당이 아니라서요.”
“왜요? 알렉스 호프는 잘만 찾아내던데.”
“그거야 특징이 너무 뚜렷하잖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다.
너무 눈에 띄는 얼굴이긴 했지. 지유건은 연신 하품을 하며 말했다.
“저희도 혹시나 해서 데이터 넣고 돌렸는데 그대로 나올 줄은 몰랐긴 했지만 말입니다.”
“정체 모를 미친 헌터를 찾는 것보단 가출 청소년을 찾는 게 더 쉬워야 하지 않습니까?”
“승연이가….”
지유건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웃었다.
“걘 분명 크게 될 겁니다. 마스터는 절대 아니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마스터를 빼다 닮았어요. 저희가 그래도 무슨 버스를 탔는지는 알아냈거든요?”
“네. 그런데요?”
“대전으로 가는 버스를 탔지 뭡니까. 그래서 하차 시간에 맞춰서 CCTV를 살폈는데….”
“살폈는데?”
“없어요.”
“…없다고요?”
지유건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당근을 썰었다. 그래도 헌터는 헌터라고, 저 몰골로 칼질하는데도 손가락을 썰지 않고 잘도 하고 있었다. 비록 당근의 형태는 보장하지 못했지만.
썰었다기보다는 산산조각이 났다고 해야 할 당근을 보았다. 입에 들어가면 다 똑같겠지.
“분명 버스에 탔는데 내리는 애가 없다고요. 도대체 뭔가 해서 새벽에 난리치다가….”
지유건은 하품과 한숨을 동시에 했다. 헌터의 손에서 버섯도 박살 나고 있다.
“그 노선이, 터미널에 도착하기 전에 승객들을 한 번 내려 준다고 하더라고요.”
“아.”
“네. 아.”
지유건은 준비한 재료를 커다란 프라이팬에 넣고 볶기 시작했다. 뭐, 저 몰골로 10인분 정도의 식사를 준비하려면 볶음밥이 제일 간편하기는 하지.
“내려서 택시 타고 이동하는 것까진 확인했습니다. 전 애들 밥 준비해야 해서 나왔고요. 음… 애기 밥 따로 드릴까요?”
애기…. 됐다.
“아뇨. 동생은 아직 자고 있어서요.”
“원래 한창 클 땐 많이 자 줘야 해요. 절 보세요. 그 나이 때 안 자서 이 모양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은 해도 작은 키는 아닌 것 같지만.
“저도 안 잤는데 잘 크던데요.”
“…부럽네요. 애기도 형을 닮아야 할 텐데.”
닮다 못해 유전자가 100% 일치할 테니 어지간하면 나만큼 크지 않을까 싶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그릇 꺼내는 걸 도와주었다. 지유건은 볶음밥을 그릇에 담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애들 불러오겠습니다.”
“그래 주면 감사하죠.”
이 시간이면 아이들은 거진 다 깨서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차피 리모컨을 두고 싸우느라 제대로 보지도 않으면서 왜 거기 모여 있는지 모르겠다.
냄새로 아침 식사가 거의 준비가 되었다는 걸 알았는지 참을성 없는 몇몇은 주방 쪽을 기웃거리고 있다.
“선생님!”
“날 반기는 거냐, 밥을 반기는 거냐?”
“어, 둘 다요?”
최진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나는 코웃음 치며 턱 끝으로 부엌을 가리켰다.
“가서 밥이나 먹어라.”
“넵!”
“그리고 순순진?”
“…네?”
“잠깐.”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순순진이 미심쩍은 얼굴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아이들이 전부 부엌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순순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줘 봐.”
“뭘… 요?”
“네 휴대폰.”
순순진은 눈을 깜빡였다. 필사적으로 이름처럼 순진한 표정을 짓느라 고생하고 있지만 노력만큼 따라 주지 않았다.
“제가, 그. 휴대폰….”
“음.”
“애, 액정이 깨져서.”
“괜찮아. 있는지 확인만 하려는 거니까.”
“사, 사, 사실은, 잃어버려서.”
“그래? 큰일이네. 이 헌터님에게 말해 줄까? 없으면 불편할 텐데.”
“어, 어어….”
순순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승연이 가져갔지?”
“…그게.”
“혼내려는 건 아니고, 그래도 어디 갔는지 파악은 해 둬야 하니까 확인하려고 물어봤어.”
“죄, 죄송해요….”
“혼내려는 거 아니라니까.”
알렉스 호프가 세 번째로 습격하진 않을 거로 예상하지만 이미선의 걱정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그렇게 작정하고 가출한 애가 억지로 데리고 온다고 해서 얌전히 따라올 것 같지도 않다. 살살 달래서 돌아오게 하는 게 깔끔하지. 그리고 어디로 갔는지만 알면 거리를 두고 지켜볼 수도 있지 않은가.
“이 헌터님에게는 말 안 할 테니까 걱정 마.”
“넵….”
“가서 밥 먹고.”
“네….”
순순진은 어쩐지 기운 없는 얼굴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 우 선생님, 식사 안 하세요?”
지유건이 불쑥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동생 일어나면 같이 먹으려고요.”
“아하. 네. 애기 거까지 챙겨 놨으니까 드시면 됩니다.”
지유건에게 대충 인사한 다음 휴대폰을 꺼냈다. 순순진 번호가, 보자.
뭐라고 보내 볼까.
‘확인하면 전화해. 네 고모한테 말하기 전에.’
반응은 빨랐다.
나는 손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보며 비웃었다. 밤새 이동한 주제에 부지런하기도 하지. 아니면 아직도 움직이는 중인가?
각성자의 좋은 체력을 이렇게 쓰다니. 낭비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물었다.
“어디야.”
-어…. 아, 안녕하세요?
“안녕은 무슨. 어디냐고.”
-꼭 말씀드려야 할까요…?
“네 고모가 화 엄청 났거든.”
-아, 역시요?
이승연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것 같아서 더 있다가 돌아가려고요.
그 맥 빠진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미선의 걱정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이래서 조카 새끼 키워 봤자 쓸모없다. 물론 난 조카 따윈 없지만.
“일주일.”
-네?
“일주일 주마. 딱 일주일만 선생님이 네 고모를 막아 줄게.”
-가, 감사합니다?
“대신.”
이승연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음질 좋네.
“지금 어디 있는지 말해. 숙소도. 이동하게 되면 바로 보고하고. 아니, 매일 밤 나한테 전화해.”
-…….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가? 너도 네가 생각 없이 행동한 거 알지?”
이승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더 말하지 않고 기다리자 결국 이승연이 입을 열었다.
-……네.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난 모르겠다. 하지만 네가 너무 열심히 가출했길래 일주일 주는 거야. 일주일 뒤에는 뭐든 간에 결정해.”
이번에는 조금 더 빨리 대답이 돌아왔다.
-네. 감사합니다. 죄송해요.
평소와 달리 기가 죽은 목소리를 들으니 뭐라고 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태우는?”
-지금 옆에 있어요.
“그래. 계속 같이 있고…. 지금 어디야?”
-지금요? 여수요.
“…여수?”
-네. 바다 구경하려고요.
“그래… 바다 구경…. 펜션 앞에도 바다 있는 거 알지?”
-에이. 그 바다랑 이 바다가 같아요? 여기가 훨씬 낭만적이잖아요.
낭만은 얼어 죽을.
안쓰러움이 사라지고 욕지거리가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내뱉지 않은 건 순전히 내 인내심 덕분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