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15)
애제자(2)
“제자, 라고.”
눈앞에 있는 열여섯 여자애는 내가 아는 유지은이 아니다.
잊으면 안 된다. 나는 이 나이의 유지은을 만난 적이 없다.
“네!”
작은 유지은은 평소처럼 활짝 웃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언니와 오빠들 사이에서 지내는데도 기죽지 않고 자기 할 말 또박또박 뱉는 성격이다. 내 앞이라고 말을 조심하지는 않았다.
그건 큰 유지은과 다르지 않았다. 그쪽 유지은은 내 앞에서 할 말을 가릴 이유가 없기는 했다. 나라도 초등학생 때부터 본 애가 직장 후배가 되었다면 말 곱게 하기 힘들 테니까. 심지어 직급도 내가 더 위였지 않나? 뭐, 공략팀과 상황실을 1 대 1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긴 하지만.
“저 열심히 할 자신 있어요! 선생님이 시키는 거 다 할 수 있어요. 진짜요. 열심히 할게요.”
앵무새처럼 열심히 할 거라는 말만 반복한다. 유지은이 열심히 한다는 건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 소처럼 던전을 공략해 나가던 여자. 그 과정을 내가 옆에서 봤는데.
결국 같은 사람이다.
그저 내가 알지 못하는 열여섯의 유지은일 뿐이다. 나는 유지은을 내년에 처음 만났었으니까. 눈앞에 있는 쾌활한 작은 유지은은 본래대로였다면 한평생 알게 될 일이 없었을 거다.
그러고 보면 택시를 타고 시범고에 왔을 때도 제자가 어쩌고 했었지. 내가 이런 상황이 아니라 정말 순수한 시범고 교사였다면 잔뜩 웃고는 뭐라도 하나 가르쳐 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지은은 아버지의 제자잖아. 홍석영, 오현욱의 뒤를 이어 다음 세대 대한민국 헌터계를 이끌 천재.
그런 애가 왜 나한테 이러는 거지. 그냥 얌전히 언니 옆에 있다가 내년에 홍석영에게 배우면 되는데.
지난번 중학교 졸업부터 하고 오라는 말 이후로 포기한 줄 알았는데…. 박서현과 최진우가 서로 스승님, 제자님 하는 거 보니 자기도 해 보고 싶었나?
“…….”
“막, 도망도 안 가고… 숙제도 잘 해 올게요.”
“그런 게 아니라….”
그래도 역시 타이밍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지금은 홍석영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유지은에게 신경을 쏟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타이밍 하나는 더럽게 못 맞춘다.
‘넌 살아라.’
아니, 그딴 걸 지금 떠올리지 말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나한테 물어?”
“그야 선생님이니까요.”
“아니….”
“선생님 제자가 되고 싶으니까요?”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럼요?”
대화가 이상하게 헛돈다.
난 충분히 내 의사를 명확하게 밝혔다고 생각하는데.
“내년에 시범고에 정식으로 입학할 예정이잖아. 그때 홍 선생님께 배워.”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내가 내년에 여기 계속 있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뭐, 내가 있든 말든 시범고는 똑같겠지. 문제는 이십 년 뒤에 찾아올 멸망이다.
미친 척하고 홍석영에게 말해 볼까? 보육원에서 데려온 동생이 스무 살만 더 먹으면 내가 되는데, 어쩌다가 과거로 날아와서 이러고 있다고.
…퍽이나 믿겠다.
마력 시계나 인식표 따위를 꺼내면 믿어 줄까? 아니지. 인식표면 몰라도 마력 시계는 숨기는 게 낫다. 원래 비장의 수단은 주머니 속에 넣어 두는 법이니까.
어차피 말할 생각은 없지만.
“하지만 시범고에서 배우면 남들과 똑같잖아요.”
당장은 눈앞에 있는 일부터 처리하자.
과거로 온 뒤로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게 어때서?”
“전 남들과 똑같이 강해지고 싶지 않아요.”
유지은은 입술을 쭉 내밀며 말했다. 자기가 강해질 거라는 저 믿음. 역시 크든 작든 유지은은 유지은이었다.
“남들과 똑같아지든, 더 강해지든. 그건 너 하기에 달린 거지 제자가 되는 것과는 상관없어.”
유혜은이 죽었을 때야 언니의 복수니 뭐니 하면서 이를 갈았겠지만 언니가 죽지 않은 지금은 얘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내 탓도 있다. 유혜은이든 유지은이든 보고 있으면 화염이 가득한 서울 속에서 죽어 가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라서 말을 붙이기가 영 힘들다. 게다가 유혜은은 치유사다 보니 내가 수업할 거리도 없었고.
“그렇지만….”
잔뜩 인상을 찌푸린 유지은은 피를 토해 내던 여자와 똑같이 생겼다. 그래도 유지은은 마지막에는 웃었다.
그렇게 불장난을 치더니 결국 불 속에서 죽은 거 봐라.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유지은의 검을 매만지며 얼굴을 슬었다.
“이유라도 알자. 굳이 제자를 고집하는 이유가 뭔데?”
그것도 내 제자.
유지은은 눈을 반짝였다.
“선생님은 강하니까요!”
“그러니까, 강한 걸로만 따지면 홍 선생님이 더 강하잖아.”
“홍 아저씨, 교장 선생님은 아무리 졸라도 안 들어줄 것 같단 말이에요.”
“…난 들어줄 것 같고?”
유지은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배시시 웃었다. 대답을 한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 * *
물론 내가 미쳤다고 유지은을 제자로 두겠냐. 마법사도 아닌데 제자를 두는 것도 우습고, 다른 누구도 아닌 유지은을 그렇게 할 생각은 없다.
굳이, 가르친다면….
“형?”
“음.”
미니미는 눈을 깜빡였다.
애들 사이에 한번 던져 줬더니 의외로 괜찮다는 걸 알았는지 생활 반경이 넓어졌다.
“저 누나들 또 왔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은영과 유지은이 미니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둘 다 목적이 명확했다.
“선생님. 자퇴하겠습니다.”
“네 보호자가 네 오빠로 되어 있거든. 오빠 허락부터 받고 와라.”
“…….”
한은영을 무사히 격퇴하고 유지은을 보았다.
“싫어.”
“아, 쌤!”
“싫다니까.”
“이제 한 번쯤 해 줄 때 됐잖아요!”
“한 번만 해 주면 되니?”
“헌터의 한 번은 영구 아니겠습니까.”
“어디서 이상한 걸 배워 와서는…. 한 선생님이 그러던? 한은영, 네 오빠 관리 좀 해라.”
“자퇴하겠습니다!”
“오늘 수업은 한 선생님한테 맡겨 볼까?”
“학교 열심히 다닐게요!”
한태경이 그렇게 싫은가.
싫을 만하지.
한은영과 유지은을 돌려보내자 이미선이 찾아왔다.
“선생님. 혹시 승연이랑 이야기해 보셨어요?”
아.
그것도 해야 하지. 한태경 때문에 잊고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점점 일이 늘어나고 있는 기분이다.
“아뇨. 조카잖습니까. 이 헌터님이 해 보시는 게?”
“저한테는 입 닫고 아무 말도 안 하려고 하더라고요.”
“아니면 홍 선생님한테 미루세요. 원래 그러기로 했잖습니까. 알렉스 호프 덕분에 얘기할 틈이 없었지만.”
이미선은 잊고 있던 걸 떠올린 얼굴로 날 보았다. 저쪽도 똑같군.
“아아니, 그래도 가출까지 한 애를 홍 헌터님한테 떠넘기기는 그게. 그렇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가족이 나서야죠.”
“저한텐 입을 안 열려고 한다니까요?”
“음….”
짧은 가출 이후로 이승연은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가출하는 동안 강태우와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잃어버린 동생이라도 찾은 것처럼 딱 달라붙어서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하루 종일 떠들어 댔다.
강태우가 아직도 다른 아이들과 데면데면하다는 걸 생각하면 놀랍다. 그나마 최근에는 이승연 덕분에 다른 아이들과도 그럭저럭 어울리기 시작한 모양이지만.
강태우와도 이야기해야겠지.
“알겠습니다. 나중에 제가 한번 이야기해 보죠.”
“감사해요, 우 선생님!”
이미선은 조카처럼 활짝 웃은 뒤 사라졌다.
“…….”
좋아. 할 일을 정리해 보자.
먼저, 홍석영이 모른 척하고 있는 동안은 나도 모른 척할 거다. 솔직히 내 움직임에 대해서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지 정하지 못했으니 당장 나를 취조하지 않는 건 다행인 일이었다.
게다가 홍석영도 이대로 계속 모른 척하진 않을 거다. 아닌 척 가끔 날 확인하는 걸 보아라.
아버지는 유지은에게 항상 머리를 차갑게 두라고 가르쳤다. 맞는 말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날 내버려 두고 있는지는 냉정해진 머리로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만큼 홍석영이란 인간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은 또 없으니까.
이건 아버지가 사고 친 부하들을 압박할 때 쓰곤 하는 방법이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냥 상대가 먼저 꼬리를 내리고 찾아오길 기다리는 거다. 찾아온 다음엔 잘 구슬려서 자기편으로 만들고. 대부분은 그 홍석영이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말에 홀려 감복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을 찾아오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놈들을 좋아했다. 그런 놈들이 던전 안에서 아득바득 살아서 돌아온다나 뭐라나.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일종의 기 싸움이다. 아버지가 했던 것도, 지금 홍석영이 하고 있는 것도.
나도 종종 써먹곤 했었다. 유지은이 날 하도 낙하산이라 부르고 다니니 내가 진짜 낙하산인 줄 아는 신입들이 간혹 생겨서 불가항력이었다.
신입이라면 실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그런 거지. 이렇게만 말하면 내가 악독한 상사로 보이지만 가끔 이렇게 기강을 잡아 주지 않으면 기어오르는 놈들이 있다. 주로 신입 헌터들 중에서.
관리청에는 헌터뿐만이 아니라 비각성자들도 많다. 공략팀이 아니면 사실상 비각성자들뿐이다. 그리고 헌터나 비각성자도 사람인 이상 일하다 보면 언성이 높아지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보통 그런 일이 생기면 비각성자들이 겁을 먹는다. 헌터 쪽에서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흥분한 헌터가 툭 치기라도 한다면 비각성자는 중상이다. 그러니 한 번씩 신입 헌터들 기강을 잡아야 했다.
사고 쳐 놓고서는 안달복달 못 하며 뭐 마려운 개마냥 낑낑거리는 게 어찌나 웃기던지….
난 도중에 신입을 불러서 다그쳤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기다렸다. 사고 친 새끼가 결국 꼬리를 말고 고해하러 올 때까지.
여기서 밀리면 홍석영에게 끌려다니는 미래밖에 없다.
…지금도 그렇지 않냐 하면 할 말은 없긴 한데.
젠장.
이걸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진 거나 다름없잖아.
“우 선생님.”
이미선이 가자마자 김채민이 나타났다.
“이록이도 안녕.”
“…안녕하세요.”
김채민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인사를 하는 걸 보니 미니미의 사회화도 잘 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한 건 딱히 없던 것 같지만.
“선생님, 혹시 알고 있는 룬 중에서 식물 키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거 없어요?”
“…식물요?”
“뭐든 좋아요.”
쓸 만한 게 있으려나.
“글쎄요….”
“우 선생님이 아는 마법사는 식물도 안 키웠대요?!”
이 사람은 왜 이래.
갑자기 주먹을 꽉 쥔 채 인상을 찌푸리는 김채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김채민은 뒤늦게 나와 미니미를 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요즘 좀 예민해서.”
“아, 네….”
“진짜예요. 평소에 저 안 이러는 거 알잖아요.”
“네….”
“제가, 그, 제 영역이, 그래서…!”
“네, 알겠습니다.”
김채민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룬이 더 급했는지 나를 닦달했다.
“어쨌든 아는 룬 있으면 가르쳐 주세요!”
“어디 쓰시게요?”
“시범고 건물 올릴 때 제 숙소에 쓰려고요!”
“나중에 생각나는 거 정리해서 줄게요.”
마력 시계 뒤지면 하나 정도는 나오겠지.
김채민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마워요, 우 선생님!”
그리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아침부터 날 찾는 사람이 많은데. 누구 또 오는 건 아니겠지.
“선배님!”
아, 제발.
멀리서부터 들리는 재앙의 목소리에 머리가 아파졌다. 슬그머니 방으로 도망가려는 미니미를 붙잡았다. 얘가 나고, 내가 얘인데 혼자만 도망가게 둘 순 없다.
미니미는 또다시 배신감 어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우 선생, 있나?”
그러나 한태경은 혼자 온 게 아니었다.
한태경의 뒤에서 홍석영이 어슬렁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뭐지, 이 사람. 벌써 인내심이 다했나. 최소 이틀은 더 모른 척할 줄 알았는데.
홍석영은 한태경을 옆으로 치우고는 턱을 긁적이며 다짜고짜 내게 물었다.
“자네, 혹시 창 쓸 줄 아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