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17)
애제자(4)
“안녕하세요. 재심사 때문에 왔는데요.”
등급 재심사 절차는 간단하다.
각성자 등록과는 달리 시청과 도청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제일 번거롭다. 심지어 등급 평가는 국제이능협회에서 주관해서 주말에도 가능하다.
창구에 앉아 있는 직원은 내 말에 사무적으로 말했다.
“네, 안녕하세요. 재심사하러 오셨다고요? 먼저 라이센스부터 보여 주시겠어요? 신분증도요.”
이미선이 만들고 홍석영이 주었던 라이센스와 신분증을 건넸다. 사실 내게 가짜를 준 게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 봤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확인되셨고요. 등급 재심사는 총 삼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제일 먼저 마력 압력 테스트를 하고요, 두 번째는 전투 테스트입니다. 마지막은 간단한 인적성 테스트예요. 이건 형식적인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직원은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설명했다.
“보자…. 선생님 던전 공략한 기록이 거의 없으시네요? 이러면 테스트하는 데 시간이 길어질 수 있으세요.”
“네.”
길어져도 별수 있나. 여기까지 찾아온 헌터가 겨우 시간이 없다고 돌아가진 않을 거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마력 테스트 같은 건 금방 끝나지만….”
“괜찮습니다.”
나는 챙겨 온 서류를 내밀었다.
재심사 시간을 기적처럼 줄여 주는 마법이다.
“선생님, 이건…?”
“현역 헌터분들의 추천서입니다.”
“추천서요?”
직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류를 확인했다.
헌터 등급은 일종의 종합 평가다. 단순히 게이트 통과 시에 발생하는 마력 압력만 견딜 수 있다고 해서 높일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 그게 기준이긴 하지만 무턱대고 등급을 높여 줬다가 몬스터에게 학살당하면 무슨 인력 낭비인가. 등급 재심사는 이 정도면 이 등급 던전에 들어가서 바로 죽지는 않을 겁니다, 하는 일종의 표시였다.
그래서 두 번째, 전투 테스트의 시간이 길어진다는 거다. 보통은 공략한 던전이나 죽인 몬스터로 실력을 확인하니까.
하지만 사무직원의 말대로 나는 던전 공략 기록이 없다. 이미선이 내 라이센스를 발급하면서 체면치레로 몇 개 넣은 게 전부다. 그중 내가 직접 들어간 던전은 아이들이 공략했던 픽시 던전뿐이다.
절차대로라면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내가 가져온 이 추천서. 바로 공신력 있는 유명 헌터의 보증이라면 절차는 다소 생략된다.
그러고 보니 실적 때문에 등급이 낮은 내가 감독으로 픽시 던전에 들어갔던 건데, 이렇게 등급을 높여 버리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었었다. 홍석영은 경쾌하게 대답했다.
‘이미 반영되었으니 문제없네. 안 들키면 된 거야.’
미래의 이능관리청 본부장의 범법 행위라….
지금은 본부장이 아니니까 모른 척하자.
“어, 어어….”
추천서에 적힌 이름을 본 직원은 입을 뻐끔거렸다.
그럴 만도 한 게, 내가 가져온 추천서는 한 장이 아니다. 일단 홍석영과 이미선의 이름이 적혀 있다. 자긴 마법사라서 도움이 안 될 것 같다고 중얼거리면서도 김채민도 추천서를 썼다. 도움이 안 되기는. 대마법사의 보증을 누가 안 믿을까.
“자, 잠시만요. 정말, 그, 이분들이시라고요?”
“네. 문제라도?”
“아뇨, 문제라기보다는… 잠시만요!”
사무직원은 벌떡 일어나더니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홍석영이나 김채민만은 못하지만, 이미선도 유명하긴 했다. 실력보다는 다연과 관련된 이유로. 이미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지금은 그런 명성도 일부러 퍼뜨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이미선도 능력이 없진 않았고, 다선도 높은 공략 성공률을 보이는 길드이다. 사실 이미선만 해도 충분했는데.
굳이 홍석영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다.
원래 김채민의 추천서도 내가 뺄 생각이었다. 하지만 홍석영이 미리 준비해 뒀다며 건네주는 추천서를 내버릴 수는 없었다. 특히 지금같이 나에게 자꾸 의미 모를 말들을 던져 대는 시점에서는.
그래서 결국 세 장 다 냈다.
어차피 포럼에서 알렉스 호프를 만나면 놈이 나를 알아볼 거다. 내가 누군지 열심히 찾아보지 않았을까. 어차피 방주 내부에는 내 기록이 없을 테니 헛발질만 치고 있겠지만.
그놈들로서는 답답하겠군. 분명 연구소 출신인 것 같은데 남아 있는 게 없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아까 안으로 들어갔던 직원 대신 좀 더 직급이 높아 보이는 이가 나왔다.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는 아닌데… 아무래도 추천서를 써 주신 분들이 워낙 유명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확인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건 이해합니다. 길드 다선에 연락을 하면 안내해 줄 겁니다.”
“크흠. 원래 추천서의 진위는 꼭 확인해야 합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음.”
나는 짧게 신음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홍 헌터님께서 학교를 하나 시범 운영하고 계십니다.”
“아아.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제가 거기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서요.”
“학생들을요?”
“네. 그리고….”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가 어쩌고 하는 감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냥 육성으로 내뱉고 싶어지지 않는 단어였다.
하지만 내 위장 신분이라고도 할 수 있고… 애초에 그런 설정이 되었으니까….
젠장. 이래서 근로 계약서에는 신중히 사인해야 하는 거다.
이미선이 자기네 길드에 들어오겠냐고 물었을 때 갔으면 길드를 옮길 수 있었을까?
뒤늦게 후회되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하려다가 말았다. 자기 길드를 밝히는 데 너무 심란해하면 이상해 보이잖나.
그래도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지는 못했다.
“홍 헌터님의 길드… 미미의 소속 직원이라서요.”
* * *
홍석영 이름 석 자가 적힌 추천서는 마법을 부렸다.
마력 압력 테스트는 기계가 측정하는 거니 제일 빨리 끝났다. 홍석영이 요청한 대로 A급에서 끝냈다.
인적성도 뭐… 솔직히 이걸 정신 감정으로 바꿔야 한다니까. 형식적인 인적성 테스트로 뭘 알아볼 수 있겠나. 이번에 홍석영이 관리청을 세우고, 그 옆에서 도울 수 있다면 제도적인 문제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헌터도 상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야지, 지금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고 멀리해서는 안 된다. 제2의 박서현, 오현욱이 탄생할지 누가 알겠는가.
“수고하셨습니다. 결과는 보름 안에 문자로 안내해 드립니다.”
도청 밖으로 나왔다.
거리의 풍경이 낯설다. 오래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가게의 간판이나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김채민에게 부탁했고, 김채민도 투덜거리던 반응과는 달리 이번에는 무슨 차를 타겠냐고 신이 나서 물어 오긴 했다.
그런 김채민을 거절한 건 나였다.
내가 조금 더 뻔뻔했다면 계속 김채민에게 부탁했겠지만, 영역 문제로 피곤해하는 마법사를 부려 먹을 정도로 못돼 먹진 않았다. 그러다가 터지면 누가 뒷감당을 해야 하는데.
도청까지 데려다준다는 다선의 헌터들도 물리고, 정말 오랜만에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생각해 보면 과거로 와서 이렇게 혼자 있는 건 처음이다.
시범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 숙소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땐 마력제어구도 있었고, 홍석영이 심심할 때마다 불러냈다. 가끔 숙소를 나왔다가 학생들과 마주친 적도 많았고.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나를 막는 것도, 나를 아는 사람도.
“…….”
이십 년 전의 거리를 걷는다.
이대로 도망칠까?
홍석영이라고 하더라도 눈 밖에서 사라진 놈을 찾는 건 어렵다. 한국에서 해외로 나가기는 어려울 테지만 찾아보면 방법이 없진 않을 거다. 일단 해외로 나가는 데만 성공하면 잠적하는 건 쉬울 테지.
나를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으로 가서… 이십 년간의 유예 생활을 즐기는 거지.
적어도 그 생활에는 돌봐야 할 아버지도, 학생도, 동생 비슷한 것도 없을 테니까.
내가 꿈꾸던 은퇴 생활과 비슷하려나.
조용하고, 한적하고, 평온한 나날.
눈을 감았다.
눈을 떴다.
눈앞의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도 거의 일흔까지 살았지. 그럼 나도 최소한 그 나이까지는 살아야 하지 않겠나. 헌터 평균 수명 120세. 최소한 그 절반까지는 살아야 억울하지 않다.
게다가 이른 은퇴는 재미없다. 연금도 없다고.
돌아가자.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와, 동생 아닌 동생이 있는 곳으로.
…뭐, 인심 쓴다. 나름 제자 비스무리한 것들과 직장 동료가 있는.
집은 아니지만, 집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데굴데굴 굴러간 돌멩이는 하수도에 빠졌다.
* * *
펜션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재심사에 걸리는 시간보다 오고 가는 시간이 더 걸렸다.
갈 때만 해도 별생각 없었는데, 올 때가 되니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김채민의 말이 옳다. 면허를 따야겠다.
“이록아?”
펜션에 도착하자마자 미니미부터 찾았다.
내가 나갈 일이 생겼다고 하자 미니미는 신경질을 잔뜩 냈다. 자길 두고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심사만 받고 돌아올 텐데 미니미를 데려가는 것도 그렇고. 미니미도 나 없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 툴툴대는 미니미를 두고 나왔다.
“이록아.”
“응.”
우이록은 소파에 앉은 채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두 번째에 대답은 해 주네.
“형 왔는데 인사 안 해 줄 거야?”
“응.”
대답하는 꼴은 귀엽지 않았지만.
“이록… 뭐 보고 있어?”
“응.”
“…….”
보고 있는 거에 정신이 팔려서 그런 거였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미니미에게 다가갔다. 미니미는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태블릿 화면은….
“…….”
왜 저 빌어먹을 핑크색 고양이가 저기 있을까.
한태경의 차 보닛에 있는 고양이가 갈색 머리 여자애와 함께 춤을 추고 있다.
“이록아.”
“…응? 형, 언제 왔어?”
오늘 아침만 해도 자길 두고 가지 말라고 내 정강이를 걷어차던 애가 맞을까?
“아냐… 그거 재밌어?”
“흐, 흥. 그, 그렇게 재미는 없는데, 그냥 보고 있어.”
“…혹시 한 선생님이 보여 줬니?”
“내가 심심해하니까 보라고….”
빌어먹을 고양이. 빌어먹을 한태경.
“그래….”
나는 미니미에게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턱에 힘을 줬다. 그래도 내 얼굴에서 뭔가를 봤는지 미니미는 슬쩍 눈치를 봤다.
눈치만 봤다.
어느새 일시 정지 되었던 화면이 다시 움직였다. 핑크색 고양이는 여자아이의 다리에 볼을 부비며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저, 저, 저 가증스러운 놈!
태블릿에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푹 빠져 있는 미니미를 놔둔 채 나는 한태경을 찾기 위해 나왔다. 누구한테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 미니미를 봐주기로 했던 다선 헌터들? 이미선? 아니면 김채민?
봐준다면 감사하지만 한태경과 같이 두라고는 안 했는데…!
“아, 우 선생.”
“…뭡니까.”
“잠깐 나와 이야기 좀 하지.”
그러나 또 방해를 받았다. 타이밍이 수상할 정도로 좋다.
홍석영은 자길 따라오라며 턱 끝을 까딱였다.
홍석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내가 원래, 기다리려고 했거든.”
“…뭘 말입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느긋하게 있을 만한 상황은 아니더라고.”
홍석영의 안전 불감증이 나았다면 환영할 만한 소식이다.
“알렉스 호프는 잠시나마 방주의 보스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인데,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소문이 날 리는 없고… 최소한 간부라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겠나.”
“그렇겠죠.”
“그래서 나도 패를 미리 준비하는 게 좋겠더라고.”
“그래서 제가 등급 올린 거 아닙니까?”
“중 하나지. 내가 생각했던 패 중 하나.”
이 아저씨, 또 생각이란 걸 해 버렸나.
홍석영은 펜션 구석, 생활 공간과 떨어진 조용한 복도에 와서야 걸음을 멈췄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홍석영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홍석영에게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더 불안해졌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챈 홍석영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고. 몇 가지만 확인하면 되네.”
“…….”
홍석영은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목소리에도 평소처럼 장난기가 묻어나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
아니, 너무 많은 감정이 일렁거려서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는 눈. 가까이서 보니 알 수 있었다.
홍석영의 눈에 일렁거리는 빛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걱정과 호기심, 기대와 염려가 모두 뒤섞여 있다.
“우 선생. 자네 말이야.”
“…….”
이것도 아버지가 하곤 했던 기 싸움의 일종일까? 아니면 아직도 나를 떠보려고 하는 말 중 하나일까?
“몇 년 뒤에서 왔나?”
그러나 아버지는 항상 내 예상을 뒤엎었다.
“난 내가 제자 따위는 안 둘 줄 알았는데. 미래에는 달라지나 봐?”
“…………네?”
“그렇게 놀라면 미안해지는데.”
홍석영은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홍석영의 질문도 이해되지 않았고, 그런 표정도 이해되지 않았다.
“거, 한번 생각해 보게.”
뭐야?
뭐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공략한 던전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순간적으로 숫자가 떠올랐다가 목이 막혔다. 홍석영이 대답을 원할 것 같진 않았다.
“내가 죽인 몬스터는 몇 마리나 됐을 것 같나?”
“…….”
“마지막으로.”
“…….”
“자기가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몬스터를, 내가 몇 마리나 죽여 봤을 것 같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