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29)
어둠 속(1)
조금만 신경을 덜 써도 시간은 징그러울 정도로 빨리 흘러간다.
“시간이 참 빨리 흘러간단 말이지.”
홍석영은 보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벌써 9월이라니.”
나는 단호하게 홍석영의 말을 끊었다.
“쉴 생각 하지 말고 일하세요.”
“…….”
홍석영은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곤 조용해졌다.
다시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린다.
“…….”
“…….”
결국 백기를 들었다.
탁.
나는 보고 있던 종이를 테이블 위에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홍석영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뭡니까?”
“아니, 뭐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나는 턱 끝으로 내가 내려놓은 서류를 가리켰다.
이미선이 가져다준 세계미공략던전 포럼 참석자 명단이다.
“관련 있습니까?”
“음? 아니.”
이어서 참석자 명단 아래에 깔린 서류를 턱짓했다.
마찬가지로 이미선이 마무리가 됐다며 건넨 시범고의 설계도이다.
“그럼 이건?”
홍석영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번엔 홍석영이 보고 있던 서류를 보았다.
김채민이 작성한 시범고 보안 설계도이다.
홍석영은 눈을 찌푸렸다.
“할 이야기가 일 이야기밖에 없나?”
나는 양손을 펼쳐 테이블 위를 내려 보았다.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종이들. 화면이 켜진 노트북과 마찬가지로 혹사 중인 업무용 태블릿 PC. 빈 커피잔들.
할 일은 많다.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포럼 말고도, 시범고 건물 짓는 것도 급했다. 일이 년 쓰고 말 건물도 아니지 않은가. 처음 지을 때 잘 지어야 했다. 보안뿐만이 아니라 내구 문제도 있고. 앞으로 규모가 더 커질 것까지 고려해야 하지만… 당장 10명도 안 되는 학생 수를 생각하면 무작정 크게 지을 수도 없다.
거기에 홍석영과는 상관이 있다면 있고, 덜하다면 덜한 마력 가림막 룬 공개도 있다.
시범고와 관련이 없는 일?
이미선과 다선에서 조사한 보육원 관련 정보를 확인해야 하고, 그 외에 방주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최근에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에는 홍석영의 질문 세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뭐가 필요한 정보인지 아직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꼭 방주와 관련된 정보가 아니어도 미래 지식은 쓸모가 많다. 하다못해 시범고 건물도 내가 알고 있는 헌터 아카데미를 바탕으로 세울 수 있지 않은가.
이렇듯 나는 바쁘다.
그 덕분에 자연히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덜한 시범고 수업에서 손을 반쯤 떼고 있다. 어차피 커리큘럼은 대충 준비해 둔 게 있으니 김채민과 다선의 헌터들에게 맡겨 놓았다. 솔직히 언제까지고 다선 헌터들에게 수업을 부탁할 수는 없긴 한데, 그렇다고 한태경에게 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겨우 달래 놓은 한은영에게 그런 힘든 시련을 안겨 줄 순 없다.
“…그래도 사람이 쉴 땐 쉬어야지!”
“쉬세요. 저는 계속 볼 거니까.”
“나만 쉬어, 그럼?”
홍석영은 짐짓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됐고, 왜 그러시는데요. 궁금한 게 있다면서요.”
“물어봐도 되나?”
“싫으면 일하시고요. 안 말립니다.”
“음….”
“일하실 거면 알렉스 호프나 한 번 더 체크 하세요.”
“이미 질릴 정도로 봤네. 이번 주 금요일에 한국에 들어온다더군. 아니, 이게 아니라.”
홍석영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물어볼 게 뭐냐면….”
“뭐, 부쉈습니까?”
“음?”
“아니면 누구 쳤어요?”
“으음?”
“목격자만 없으면 됩니다, 목격자만…. 아니, 목격자가 있어도 증거만 남기지 않았다면…. 특히 카메라를 조심해야 돼요.”
“…….”
“목격자도 있고, 영상도 남았거든 S급 던전이라도 하나 공략하고 나오세요.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라면 어쩔 수 없이 넘어가게 되거든요.”
“…….”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홍석영은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자네, 내가 미래에는 공무원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능관리청 본부장을 단순한 공무원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복잡한 이권이 얽혀 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무원이죠.”
“그런데 자네 말을 듣다 보면 꼭 시정잡배마냥….”
“선생님이 할 것처럼 행동하셨죠.”
“젠장, 그래! 내가 할 것처럼 말하는군!”
홍석영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그렇게 웃고 난 다음에야 홍석영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진정했다.
“자꾸 말 돌리지 말게.”
“안 돌렸습니다.”
“그럼 그렇다고 치고.”
홍석영은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커피로 목을 축였다.
“9월 30일 말이야.”
“…네?”
“자네가 생일이라고 대답했던 그거 말야. 진짜인가?”
뭘 물어보나 했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요?”
“아니, 자네 꼬맹이와 이야기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꼬맹이 생일도 그날이라길래.”
우이록이 나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홍석영은 미니미에게 다가가는 데에 더 망설임이 없어졌다. 그 전에도 망설였나 하면 딱히 그건 아닌데, 그래도 보호자인 내 눈치를 살피는 시늉을 하긴 했다. 한태경 같은 놈도 있는데 그게 어디냐 싶긴 했다.
…아직도 난 한태경이 어떻게 미니미한테 그 고양이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보여 줬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홍석영의 머릿속에는 ‘미래의 제자 = 미래의 제자의 어린 시절 = 내 제자’라는 공식이 완성되었다. 쓸데없이 미니미한테 친근하게 구는 걸 보면 뻔했다. 미니미는 갑작스럽게 좁혀진 거리감에 당황스러운 눈치였지만.
홍석영을 다시 아버지로 둘 순 없겠지만 형의 직장 상사 같은 위치 정도도 괜찮을 듯싶었다. 여차할 때 나 말고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른이 있는 게 좋으니까.
“보통 형제가 같은 날 태어나기는 어렵잖은가.”
“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일입니다.”
구출된 뒤. 병원에서 형의 이름을 얼결에 말했다고는 하나 그 외에는 잘 대답했다. 나이나 생일이나 뭐 그런 것들. 음. 부모의 이름 빼고 말이다.
처음 바깥세상으로 나와서 정신이 없다고 해도, 그걸 말하면 안 된다는 정신은 있었다. 같이 구출된 아이 중에서는 내가 전 연구소장의 아이였다는 걸 아는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동생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어?”
홍석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처음 내가 실종된 형을 흉내 내고 있다고 했을 때도 홍석영은 딱 저런 표정을 지었다.
말리고 싶은데 말릴 방법이 없는 얼굴.
내가 봐도 이게 최선이다. 아무도 내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미래인보다는 사이비 단체의 피해자가 동정심을 얻기 편하다는 것도 있고.
“형제니까 생일이 같다고 하면 됩니다.”
“…그걸 자네 동생이 믿을까?”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면 걘 아무 생각 없을걸요.”
“으음….”
“서로 축하해 주는 날이라고 하면, 뭐.”
“동생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홍석영은 잠깐 생각하다가 정정했다.
“자네 스스로를?”
“저 자신이니까 더 무시하는 거죠.”
“…….”
홍석영은 허가 찔렸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다시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런데 생일은 갑자기 왜 묻습니까?”
“아, 애들이 묻더라고.”
“…애들요?”
불안한 소리다.
“원래 담임 선생님의 생일은 학생들에게는 깜짝 이벤트나 다름없지.”
나는 당연한 사실을 지적했다.
“학생들에게 사적인 선물을 받으면 부정 청탁입니다만.”
“그래?”
홍석영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음을 가다듬으며 내려놓았던 서류를 다시 들었다.
“우린 정식 교육 기관이 아니라서 상관없어.”
감사 나오면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네.
* * *
나는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만 한 작은 화면 속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대부분의 헌터가 그렇듯 검을 쥐고서 몬스터와 싸우고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튀어나온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는 것인지 주변에 부서진 도로가 보였다. 소리를 키우면 비명도 들릴 테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영상에 집중하려고 일부러 소리도 꺼 놨다.
화면 속 인물이 움직인다. 체구가 작은 만큼 힘으로 승부하는 타입은 아니다. 금발로 탈색한 머리가 휘날린다. 몬스터의 날카로운 발톱을 피하고, 다리를 사용하여 몬스터의 목에 올라탔다. 검을 들어 목덜미에 박아 넣고 몸을 뒤로 젖혀 텀블링하여 몬스터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 반동으로 몬스터의 몸에 박혀 있던 검이 빠져나왔다.
소년, 혹은 소녀처럼 보이는 중성적인 얼굴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눈동자가 카메라를 향하자 카메라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이미선이 어렵사리 구한 알렉스 호프의 전투 영상이었다.
영상이 찍힌 곳은 3년 전, 호주. 브리즈번.
오래된 영상인 것을 고려해도, 나와 싸웠던 놈과는 움직임이 너무 다르다. 얼굴이 같지 않았더라면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같은 사람일까?
아니면 외관을 빌린 다른 사람일까? 외형을 바꿀 수 있는 마법을 사용했더라면 내가 알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알렉스 호프에게는 그런 기미가 없었다.
물론 던전 내에서 나온 아이템을 사용했다면 말이 다르다. 사람 하나를 과거로 통째로 날려 보내는 아이템도 있는데 모습 하나 바꾸는 아이템이 없을까.
만약 그렇다면 왜 굳이 알렉스 호프의 외관을 선택했냐는 문제가 남아 있긴 한데….
“저, 선생님.”
휴대폰 화면을 껐다.
한은영이 멋쩍은 얼굴로 다가왔다. 저 얼굴을 보니 일전에 한은영과 했던 대화의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는 뻔했다. 그게 아니어도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보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나한테 안 찾아오길래 그러려니 했는데. 역시 모범생답게 나한테 보고하러 왔다.
“잠깐… 괜찮을까요?”
“무슨 일인데?”
“그, 지난번에 해 주신 이야기요…. 학교 관두는 그거요.”
“왜? 관두게?”
한은영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뇨!”
내가 가만히 웃자 한은영은 혀를 살짝 빼물었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보기로 마음먹었어요.”
“오빠 때문에 그만둔다고 하려니 자존심 상해?”
“어…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렇게 어정쩡한 마음으로 그만두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요.”
“그래?”
“처음에 길, 동아리 얘기 할 때도 경영 지원이면 던전에 꼭 들어가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서한성이 전 던전 공략법 찾는 걸 잘하니까 아예 그쪽에 집중해 보는 건 어떻냐고 하길래.”
한은영은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해 보려고요.”
“그래…. 음. 잠깐만.”
“네?”
나는 한은영을 세워 두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거 분명 어디에 챙겨 뒀었는데.
아. 찾았다.
나는 찾은 물건을 손에 들고 한은영에게 돌아갔다. 한은영은 내가 들고 있는 걸 보더니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한은영의 이마에 스티커를 붙여 줬다. 칭찬 스티커.
“열심히 해 보라는 의미에서.”
“어, 어,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희 지금 동아리 활동으로 뭐 하는 거 있니?”
“아뇨. 아직은…. 이것저것 의견은 내 보고 있긴 해요. 그런데 채민 쌤이 기왕 하는 거 마법 이론 토론회도 열어 보는 건 어떻냐고 해서….”
그 대마법사가 진짜.
“승연이가 잘하면 대마법사도 포섭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서현이랑 진우가 채민 쌤을.”
김채민이 열여덟 살짜리 애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갈까 싶었지만, 그 여자는 룬에 눈이 돌아가서 취직한 사람이다.
…알아서 잘하겠지. 김채민이 정말 애들한테 넘어간다면 이미선이 땅을 치겠지만, 그만큼 이승연과 아이들의 수완이 좋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도 저희랑 같이….”
“고문 자리로 부족하니?”
“에이, 아빠가 계약서 쓰기 전에는 아무것도 장담하지 말랬어요!”
한은영이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동시에 어둠이 모든 것을 삼켰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