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31)
어둠 속(3)
“낮잠 자기 좋은 시간입니다, 선배님!”
한태경은 아무 걱정 없는 태평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얼굴이 보였다면 참지 못하고 주먹이든 발이든 날렸을 거다. 아니,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만으로도 방향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홍석영이 허락해 줬다. 적어도 칼보다는 주먹이 낫겠지.
“한 선생님. 어떻게….”
그러나 나는 문명인이다. 야만인에 가까운 한태경을 너그럽게 용서해 줄 만큼.
“형?!”
“꼬맹아, 떨어진다! 나 꼭 잡고 있으라니까!”
“아까는 다리에 힘 풀라며?!”
“그거야 내가 숨 쉬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그렇다고 떨어지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시끄러워! 하나만 해!!”
“다리에 일부러 힘주지 마, 건방진 꼬맹이!”
한태경이 있는 방향에서 미니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이렇게 당황하게 만드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이록아?”
“헌터라면서 약한 척은…. 형!!”
미니미는 걱정이 무색하게 기운이 넘친다.
“네가 왜 한 선생님과 같이 있니?”
나는 다소 멍한 기분으로 미니미를 불렀다.
아니, 따지고 보면 혼자 있는 것보다는 다행이긴 한데. 다행이지. 다행… 다행일까? 다행이겠지?
하지만 왜 하필 한태경과 같이 있을까?
말을 들어 보니 어깨에 올라타 있는 것 같은데.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태블릿으로 고양이만 들여다보고 있을 때 깨달아야 했는데!
이게 다 지금 여기서 합숙이라도 하는 것처럼 몰려 있어서 그렇다. 미니미가 정말 제대로 지적했다.
집.
최대한 빨리 집을 구해서 나가자. 홍석영에게 길드 복지에 신경 쓰라고 닦달해야지. 돈도 많은 인간이 미래에서 온 제자에게 그 정도도 못 해 주겠냐고.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최소한 한태경만큼은 미니미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애 교육에 안 좋다.
“요 건방진 꼬맹이. 선배님? 가져갈래요?”
“…….”
“안 보이시지. 그럼 얹어 드릴까요?”
남의 동생을 무슨 짐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 줬음 좋겠다.
“아, 꼬맹이. 너 떨어뜨리면 다시 찾기 힘들어! 그러니까 얌전히 좀 있어. 선배님?”
“내려 줘!”
“한 선생님 말대로 얌전히 있어, 이록아.”
“으….”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미니미의 모습이 손쉽게 떠오른다. 그만큼 걔의 존재에도 익숙해졌다는 얘기겠지.
마찬가지로 나도 인상을 찌푸렸다. 한태경의 말을 보건대, 역시 공간이 뒤틀린 게 맞았다. 연결되어 있으면 괜찮지만 분리되면 같은 공간에 있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한태경은 어떻게 나를 찾았지? 어떻게 보고 있는 거지?
“한 선생님. 지금 보고 계시는 거 맞습니까?”
“네!”
한태경은 해맑게 대답했다. 뒤이어 설명이 나올까 싶어 가만히 기다리자 한태경이 입을 다물었다. 너무 물어본 것만 대답하는 거 아니냐.
소리가 없으니 갑작스럽게 나타난 한태경과 미니미가 환영 같았다.
“오, 오빠?”
한은영이 불안함을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오빠를 불렀다. 내 생각에 얘가 저렇게 간절하게 오빠를 불러 본 건 처음이지 않을까 싶었다.
“오빠? 거기 있어?”
“응! 아, 또 뒤틀리네. 은영아, 손 줘 봐. 아니다. 내가 잡을게. 잡는다?”
오빠니까 놀라지 말고. 자, 이렇게. 오빠 옷 잡고 있어. 선생님 옷도 계속 잡고… 안 놓게 조심해. 알았지?
놀랍게도, 한태경은 제법 어른스럽게 말했다.
한태경이라고 해도 늘상 가볍게 미친 것처럼 구는 건 아니다. 던전 공략할 때는 나름대로 팀장, 공략대의 대장처럼 굴기도 했다. 그것도 안 했으면 1팀은 진작 와해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한태경을 보아 온 세월 동안 저런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 보았다. 낮고, 부드럽고, 다정한.
마치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달래며 사탕을 쥐여 주는 것 같은.
한은영을 보자마자 울었냐고 놀려 댄 것과는 정반대다.
“어이고,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더 못생겨졌네.”
“…아니거든!”
“헌터 라이센스도 있으면서 뭘 이런 걸로 놀래? 던전에 들어가면 더한 것도 보거든?”
그래도 그 목소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한은영을 놀리기 시작하는 한태경의 목소리를 들으며 새삼 두 사람이 남매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생판 남인 내 눈에도 열여덟 살은 어리다. 교복을 입고 있으면 특히 더 어려 보인다. 열 살 많은 오빠 눈에는 어떻겠는가.
한태경도 동생은 걱정하는구나. 저 녀석이 인간적인 감정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소득이었다.
한은영이 완전히 진정되었고, 한태경도 평소의 목청 크고 뺀질거리는 목소리로 되돌아갔다. 그제야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지금 저는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여서 말입니다. 이록이는 잠시 한 선생님이 데리고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저도 안 보이는데 같이 있다가 사고라도 나면 위험하니까요.”
“그러죠!”
“그런데 한 선생님은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두 눈으로요. 선생님한테도 달려 있고, 제 머리에도 달려 있는….”
“…….”
“…오빠. 그거 농담이라고 한 거야?”
“아니, 사실이잖아!”
지금 사태의 원인이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초보 마법사의 마력 폭주라 봐준다.
“꼬맹이! 머리 뜯지 마!”
한바탕 소란이 있은 후에야 한태경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저는, 거, 뭐시냐. 아, 이거 원래 영업 비밀이라 안 가르쳐 주는데….”
정정.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으며 엄청 뜸을 들인 다음에야 대답했다.
“선배님. 원래 헌터는 말입니다.”
“그냥 빨리 말해 주면 안 됩니까?”
“이래야 기대감이 높아지죠!”
한태경은 입으로 북소리를 흉내 내다가 마저 말했다.
“제 선글라스 덕분이죠.”
“선글라스?”
일종의 트레이드마크이긴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 선글라스라며 관리청 내에서도 괴담 취급을 받았더랬다.
선글라스를 벗으면 사실 눈이 네 개라든가, 눈알이 없다든가.
하필 왜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가 선배님이라서 보여 드리는 겁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별빛처럼 무언가 작게 반짝인다.
그사이 어둠에 완전히 동화된 눈에는 그 작은 빛도 태양처럼 강렬하게 다가왔다. 깜빡이던 빛은 천천히 고정되었다. 선글라스 알이 촘촘한 빛으로 뒤덮여 있다. 대단한 빛은 아니었지만, 이 어둠 속에서는 충분했다. 덕분에 주위가 어설프게나마 보였다.
양손을 나와 한태경을 붙잡느라 다 써 버린 한은영은 부신 눈을 가리지 못하고 질끈 감고 있었다. 한은영한테 한쪽 팔을 붙잡힌 한태경은 반대쪽 손으로 선글라스 테를 매만지고 있다. 선글라스 알이 이젠 거의 황금색으로 보일 정도로 짙게 번쩍거린다.
“…던전 아이템?”
“던전 아이템이 뭐야, 형?”
한태경의 머리카락을 열심히 쥐어뜯고 있던 미니미가 물었다.
“던전 내부에서 발견되는… 마력을 사용하여 특별한 성능을 내는 물건을 말해.”
반사적으로 미니미에게 대답해 주며 한태경의 선글라스를 보았다.
저게 아이템이었다면 한태경이 그렇게 목숨 걸고 쓰고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
“어떤 성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시력이 좋아져요.”
한태경은 선글라스에서 손을 뗐다. 선글라스가 수명이 다한 전등처럼 깜빡거리다가 팍 하고 빛이 꺼졌다.
“평범하게 볼 수 없는 걸 보여 주거든요. 지금처럼.”
“…단순히 밤눈이 밝아진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죠?”
“으하하하!”
다시 찾아온 어둠 속에서 한태경의 웃음이 크게 울렸다.
“그건 그것대로 재밌겠는데요!”
한태경은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아닙니다! 혹시 밤눈이 어두우면 당근을 많이 먹으십쇼, 선배님!”
“아, 네….”
“이래저래 편리한 기능이 많긴 한데, 당장 지금 써먹을 수 있는 건….”
한태경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은영이 더듬거리며 오빠를 쫓아가고, 내가 마지막으로 따라갔다.
“들숨을 쫓아 볼까요?”
* * *
“아….”
김채민은 난감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해요?”
“잠깐만. 선생님 지금 생각 중이거든.”
손이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맴돌았다. 김채민 옆에 서 있는 최진우도 난감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채민은 울상을 지으며 최진우를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걸 저한테 물으면 어떡해요! 선생님은 대마법사시잖아요!”
“대마법사라고 만능은 아닌걸!”
“그치만 선생님밖에 없잖아요!”
“…우 선생님은 어디 계시니?”
최진우는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들었다.
“저 안에 계시겠죠.”
“…….”
김채민은 최진우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 앞에는 검은색 구체가 있었다. 구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어떻게든 형태를 유지하려고 움찔거리고 있으나 오래가진 못했다. 검은 물질은 바닥에 질퍽거리며 늘어졌다가 다시 뭉쳤다가, 뚝뚝 흘러내리기를 반복했다.
“…교장 선생님은?”
“정원도 비어 있던 걸 봤잖아요. 저기 계실걸요?”
“교장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해 주지 않을까?”
“교장 선생님이 이걸 마력 폭주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러진 않을 것 같은데요.”
김채민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조금 전 자신이 최진우에게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렇지….”
김채민은 초조한 얼굴로 구체를 바라보았다. 대마법사의 눈총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구체는 형태를 완전히 풀어 버리고 바닥에 넓게 퍼졌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소파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 소파의 그림자와 동화되었다.
김채민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애야.”
저 작은 그림자에 몇 가지 마법이 결합되었는가. 그림자, 공간, 흡수….
박서현은 똑똑한 아이이기는 했다. 김채민의 눈에도 재능 있는 마법사였고, 대마법사였던 조부의 가르침 덕분인지 마법 이론에 대한 지식도 박학했다. 박서현에게 부족한 건 속성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었다. 그림자 속성은 보기 드물었기 때문에 김채민도 박서현을 위해 마법사 커뮤니티와 외국 논문들을 뒤져 정보를 찾아 주곤 했었다.
대마법사가 될 것이라 단언할 순 없지만 뛰어난 마법사가 될 건 분명했다.
제자 욕심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박서현이나 최진우가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눈을 똘망똘망 빛내는 걸 보면 왜 다들 제자를 못 들여서 안달 냈는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제자를 들이지 않겠다는 결심은 여전했으나 이 어린 마법사들의 성장을 돕는 일은 재밌었다.
요 며칠 동안 박서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별거 아닌 장난에도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자 슬슬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최진우는 아직 갈 길이 남았지만 박서현은 이제 마법사 티가 나곤 했다.
‘그래서 영역 선포하는 걸 가르쳐 주려고 했던 건데!’
왜 이렇게 됐을까?
어차피 이곳은 이미선의 영역이다. 박서현이라고 다르게 느끼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어린 마법사이니 약식으로나마 영역을 선포해 보면 마력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다.
그래. 도움이 되기는 했다.
김채민은 우울한 얼굴로 소파를 밀었다. 그림자가 분리되었다. 박서현이 만들어 낸 작은 영역은 화들짝 놀라더니 다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차라리 마력의 폭주라면 훨씬 처리하기 쉬웠을 텐데.
김채민은 손가락을 들어 그림자를 쿡 찔렀다.
손가락을 미는 압력이 느껴진다. 찢고 들어갈까?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어린 마법사의 첫 영역이지 않은가. 억지로 비집었다가는 쇼크로 죽어 버릴 수 있다.
손가락을 빼자 마치 칼로 난도질을 해 놓은 것처럼 상처가 잔뜩 나 있다.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김채민은 그림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걸 어쩌나, 진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