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43)
2일차(1)
물론 내가 유능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라고는 해도 그 복잡한 마력측정기의 구조를 모두 이해하고 외우고 다닐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력측정기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건, 역시 마력 시계 덕분이다.
마력측정기는 라이센스 계약을 통해 국내에서 제작했다. 21년에 있었던 명동 던전 이후로 던전은 나라에서 관리하고, 관리청 설립 이후에는 관리청에서 맡았다. 당연히 그렇게 제작되어 설치된 마력측정기 또한 관리청 소관이다.
내 담당은 아니다. 하지만 관리청에 속한 이상 관련 자료는 모두 마력 시계에 저장되어 있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마력측정기의 설계도 또한 마찬가지다.
당장이라도 옮겨 적기만 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수상하잖아.
마력펜이야 원리가 간단하다. 만년필 모양의 마력펜이 아니더라도 3mm 이상의 마력석과 그걸 박아 넣을 지름 10mm 이상의 막대와 잉크 대용으로 쓸 각성자의 피만 있다면 누구나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마력측정기? 현대 마력 공학의 정수라고 불리는 그 어마어마한 물건?
룬처럼 무작정 외웠다고 하기에는 볼륨이 너무 크다. 만약 내가 구조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었다면… 없는 공학자를 꾸며 낼 필요도 없었겠지.
언론정보학과를 나올 게 아니라 마력공학과를 나왔어야 했나. 아니, 하지만 마력공학과라니. 딱 봐도 재미없어 보이잖아. 흥미도 없고.
“어차피 방주를 들먹일 예정이라며?”
내 걱정을 들은 홍석영은 별것도 아닌 걸 고민하고 있다는 얼굴로 가볍게 말했다. 주위에는 맥주캔과 와인병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다.
“알렉스 호프를 잡았더니 나왔다고 해.”
“…걔가 몬스터도 아닌데요?”
“비슷한 느낌이잖나.”
홍석영은 빈 맥주캔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꼭 놈일 필요는 없고, 음…. 기지를 털었더니 이런 게 있길래 훔쳐 왔다든가. 요절한 공학자 얘길 했으니, 그 공학자가 비밀리에 남긴 메시지를 찾아 왔다는 쪽으로 가도 괜찮겠군.”
홍석영의 도움이 있다면 꾸며 내는 거야 어렵진 않을 거다.
“너무 걱정되면 적당히 덜어 내. 꼭 완성품을 건네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 어떻게….”
“빠진 부분은 다연에서 어떻게 해 주지 않겠나? 거기가 그렇게 보여도 마력 공학에 관해서는 1위거든.”
아직 그 회사가 설립 전이니까 그렇지.
산드라 갬블의 파로스(Pharos).
그 여자가 지금 뭘 하고 있더라. 캘리포니아에 있는 자기 집 차고에서 괴상한 실험을 하고 있을 때였나.
그 희대의 천재를 포섭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원래도 괴팍하기로 유명한 여자다. 내가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없다. 차라리 이쪽에서 마력측정기를 선수 쳐서 만들어 버리면 흥미를 느끼고 다가올지도 모르지.
나조차도 겨우 한두 번밖에 보지 못했던 얼굴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기업을 사사로이 써도 괜찮습니까? 다연은 동네 구멍가게가 아니에요.”
“나한테 빚진 게 많아서 괜찮아.”
“…이미선 헌터와 관련된 일입니까?”
“아니. 그쪽은 따로 계산이고.”
홍석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한테 못 들었나?”
“선생님은 그런 이야기는 잘 안 해 주셨거든요. 뭐, 이 헌터를 하도 부려 먹길래 약점이라도 잡았나 싶긴 했지만요.”
홍석영은 낄낄 웃었다.
그 전이었다면 홍석영은 내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홍석영은 말머리를 돌리는 대신 순순히 입을 열었다.
“남의 가정사를 멋대로 떠들고 다닐 순 없지.”
“남의 가정사요?”
“썩 떳떳한 이야기도 아니거든.”
내가 눈만 깜빡이자 홍석영은 즐거운 기색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예전에, 지금 기준으로도 좀 된 이야기지. 다연에서 꽤 위험한 연구를 하고 있었네.”
“위험한 연구라고 하면…?”
“바깥에서 게이트를 강제로 닫을 방법이 없는지 찾고 있었다는군.”
다른 곳도 아니라 다연에서 그런 연구를 했었다고?
금시초문이었다.
“그런데 그 실험이 잘못되어서 정반대의 결과를 내 버렸어.”
“…던전이 터졌습니까?”
“그래. 그거 수습해 준 게 나였어.”
“…….”
“외부에는 운 나쁘게 연구 단지 내에 게이트가 생성되더니 바로 터졌다고 알려졌지.”
“…연구 결과는요?”
“전부 폐기. 내가 확인했으니 걱정하지 말게. 혹시나 해서 같은 조건으로 한 번 더 실험해 봤는데, 게이트에 금도 안 가더군. 실제로 연구 때문이 아니라 발표한 대로 운 나쁘게 던전이 터졌던 거일 확률이 높아. 나나 회장이나 혹시 몰라서 폐기한 거니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던전을 억지로 터뜨리는 거? 기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방주는 몰라도 다연은 이십 년 뒤에도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던전이 터져 나갔던 것에 다연이 관련되어 있다면?
“어이고, 또 생각이 많아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딱.
홍석영은 내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다연은 관계없어.”
홍석영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말했다.
“다연 회장, 그 인간이 와이프와 애들을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려 잃었어. 그런 연구를 한 것도 그래서야.”
“…이 헌터와 오빠분은 잘 계시는 걸로 아는데요.”
“원래는 육 남매였다고 하더군. 세 명만 겨우 살았지. 그때가 딱 첫 손녀가 태어났을 때인데, 손녀도 같이 그렇게 됐다고 들었네.”
“…….”
“그 뒤로 인간이 좀 돌았어.”
묵묵히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전혀 다른 부분에서 감탄했다.
다연에서 얼마나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으면 이 이야기를 내가 처음 듣고 있는가. 새삼스레 다연의 힘을 느꼈다.
“어쨌든 내 덕에 피해 없이 수습했으니 사람이 염치가 있으면 고마워하지 않겠나?”
“…고마워하는 것과 이건 별개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게 인연이 돼서 이것저것 계약을 많이 했거든.”
홍석영은 다연과 맺은 계약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기밀 유지 조항도 있었을 테지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 봤자 대단한 건 없었다. 헌터들이 으레 받는 후원 따위의 이야기였다. 그에 홍석영은 던전에서 나오는 부산물들을 넘겨주고. 다연처럼 마력석을 사용하는 마력 공학이 주력인 곳이라면 몬스터 부산물을 얻기 위해 헌터들을 후원하는 게 흔한 일이었다. 게다가 홍석영이라면 다른 헌터들이 구할 수 없는 희귀한 재료도 잔뜩 구해 올 거 아닌가.
그 인연에 이미선이 끼어들면서 지금과 같은 묘한 구조가 완성되었다.
아버지라면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거다. 이게 아들과 제자의 차이점일까?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아, 그렇지. 나도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네?”
이야기가 다연과의 계약에서 다연 회장의 욕으로 넘어갔을 무렵.
홍석영은 드디어 술병을 내려놓았다. 밤보다는 새벽이라고 부를 만한 시간이었다.
“자네 시범고를 나오지 않았다고 했잖아.”
“네. 일반고 진학해서 대학 나왔습니다.”
“그래!”
홍석영은 무릎을 내려쳤다.
“대학에서 뭘 배웠나?”
“…네?”
이 아저씨를 종잡을 수 없다. 그건 또 왜 궁금한 건데.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러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하는데, 솔직히 내가 친절한 상사는 아니잖은가.”
그걸 알고 있기는 했군?
“자네에겐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애들한테도 좋은 선생님이라고는 할 수 없고.”
알고 있었잖아?
홍석영은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거야 기껏해야 싸우는 법인데. 또 싸우는 법만 가르쳐서는 인간 되기가 힘들잖나.”
“그걸 아시는 분이….”
“그래서 자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지. 안 그런가?”
“…….”
홍석영은 내가 노려보자 요란하게 헛기침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이면 제대로 된 선생님을 붙여 줬을 거네.”
“설마 그게 한태경을 말하는 건 아니시죠?”
“아니, 한태경이는 조교 정도로 두려고 했지.”
본래 홍석영의 계획은 정식 교육기관으로 허가를 받기 위한 처음 몇 달만 자신이 가르치는 거였다. 허가를 받거든 국어나 수학 정도의 기본 과목 정도는 같이 수업할 예정이었다고.
던전과 관련된 사항도 체계적으로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래. 생각만 했다.
“그런데 왜 안 하셨습니까?”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실천했다면 내가 안 해도 됐었잖아.
“명동 던전 일로 그럴 시간이 없었네. 교육기관 허가도 못 받았으니까.”
결국 또다시 명동으로 돌아온다. 그놈의 명동! 내가 명동에서 애들을 안 구했으면 도대체 어쨌으려고?
…어쩌기는. 내가 아는 대로 흘러갔겠지.
“자네가 애들 대하는 거 보니 사범대라도 나왔나 싶어서.”
“…….”
교양으로라도 아동심리학을 들을까 후회하긴 했었지.
“아뇨. 전.”
“음?”
“…영상 쪽을 전공했습니다.”
“영상?”
유지은은 한참 뒤에야 내가 들어간 과를 듣고 뒤집어져라 웃었었다.
잘 어울린다면 잘 어울리고, 안 어울린다고 하면 끝내주게 안 어울린다면서.
“왜요, 영화 만들고 하는 그런 거.”
“…….”
“……뭡니까?”
“아니. 의외라면 의외인데, 또 듣고 보니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치외교학과 복수전공 했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지.
* * *
세계미공략던전 포럼.
2일 차.
아침이 밝았다. 거실에는 빈 술병과 맥주캔들이 굴러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각성자는 알코올의 영향에 굴복하지 않았다. 나는 넥타이를 매며 간밤의 대화를 되새겼다. 혹시나 실수한 건 없었겠지? 홍석영을 아저씨라고 부른다거나.
물론 나는 그런 허술한 실수 따윈 하지 않았다.
내가 준비를 다 끝냈을 무렵, 홍석영은 메인 침실에서 배를 긁적이며 나왔다. 용케 셔츠와 정장 바지를 챙겨 입고 있다. 넥타이는 어깨에 걸쳐져 있었지만.
홍석영은 하품을 쩍 했다.
“젊음이 좋군.”
“무슨 소릴 합니까. 약한 척하지 말고 넥타이나 똑바로 매세요.”
“잔소리는….”
그래도 홍성영은 느릿하게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오늘은 마법사들이 올 거야.”
홍석영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냈다.
“자네도 알겠지만 귀찮은 족속들이니 여차하면 김 선생 이름을 팔아먹게나.”
“…보통 여기선 자기 이름 팔아먹으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내 이름? 내 이름보다 김 선생 이름이 더 잘 먹히는데 왜 내 이름을 팔아.”
홍석영의 이름값이 대마법사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나는 코웃음 쳤다. 그래도 홍석영의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비상용으로 댈 수 있는 이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홍석영은 회장으로 향하는 내내 마법사들에 대해 투덜거렸다. 마법사를 싫어하는 거야 어느 헌터나 똑같지.
“어!”
그리고 공교롭게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알렉스 호프를 비롯한 호주의 헌터들과 마주쳤다.
알렉스 호프의 손을 흘깃 보았다. 손가락이 드러나는 장갑을 끼고 있다.
“…….”
이게 정말 우연일까 궁금해졌다.
“안녕하세요.”
통역 마법은 일반적인 통역기와 다르다. 화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한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뇨.”
“우리 부대장이 성격이 조금 급하거든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따가 따로 이야기를 잠시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이 기분 나쁠 정도로 공손한 자세도 알렉스 호프가 의도하고 있다는 말이다.
“무슨 이야기를?”
“어제도 말했었는데.”
호프는 자신을 조용히 시키려는 동료들의 몸짓을 무시하며 꿋꿋하게 말했다.
“신세 진 일이 있어서 인사드리고 싶다고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