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53)
그리하여 너는(4)
도대체 언제 온 거지?!
호프가 룬을 사용해서 이동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기척을 느끼지 못한 적은 없다. 심지어 긴장을 풀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나만 기척을 놓친 게 아니다. 홍석영도 마찬가지다. 이건 거의 뭐, 아무것도 없는 땅속에서 솟아난 거나 다름없다.
호프는 혀를 쯧쯧 차며,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성질머리대로 굴지 말랬잖아.”
“너…!”
블룸이 꿈틀거린다. 눈을 찌푸린다. 아는 사이인가? 하지만 저 녀석, 셈 블룸을 죽이라 하지 않았나.
호프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홍석영을 가리켰다.
“홍석영도 있고.”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인다. 이번에는 나를 가리킨다.
“쟤도 있으니까.”
그러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하라고 분명 말했는데. 그 몇 분을 못 참고 멋대로 구니까 이렇게 되는 거 아냐. 그렇게 내 도움을 받고 싶었어?”
“…이익!”
“그리고 계약을 막 끝냈을 땐 갓 태어난 바퀴벌레만큼이나 연약하다고 말했잖아.”
저 두 명이 아는 사이였다느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여 달라고 사주했다느니, 무언가 숨겨진 일이 있다는 암시도 호프의 괴상한 비유가 나오자 반쯤 잊혔다. 그리고 그건 셈 블룸도 똑같이 느꼈던 모양이다.
“바퀴벌레라니! 무슨…!!”
왜 하필 비유를 들어도….
“하지만 지금 너 바퀴벌레 같은걸.”
호프는 고개를 좌우로 까닥이며 웃었다.
“참고로 칭찬이야.”
도대체 어디가?
듣고 있는 나도 황당한데 당사자인 셈 블룸은 오죽하겠는가. 셈 블룸은 검이 꽂힌 어깨에서 피가 왈칵 뿜어져 나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둥거렸다.
“너! 호프!!”
그 처절한 광경에도 불구하고 호프는 이제 손뼉까지 치며 깔깔 웃어 댔다.
“그거 봐. 진짜 바퀴벌레 같다니까?”
“호프!!”
“아. 이건 칭찬 아냐.”
그건… 딱 봐도 안다.
공동에 당혹스러운 공기가 맴돈다.
“근데 처음은 진짜 칭찬이다? 이 두 사람을 상대로 용케 살아 있잖아?”
호프는 나와 홍석영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셈 블룸만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흐응. 저 두 인간이 보기보다 자비로웠을 수도 있겠다. 네가 그 꼴인데도 보자마자 목도 안 날리고. 아주 인도적이잖아.”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알렉스 호프는 나를 똑바로 보았다. 유독 눈동자 색이 짙어 보인다. 포럼 이틀 동안 내 속을 긁어내렸던 웃음은 없다.
던전 아래로 내려오기 전, 셈 블룸을 죽이라고 했을 때처럼 창백하고 어두운 얼굴이다.
“나 같으면 일단 죽이고 봤을 텐데.”
“지금 내가 죽길 원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네 실력이 괜찮았던 걸까?”
셈 블룸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호프는 제 할 말만 이어 갔다.
그러나 곧 자기가 내뱉은 말이 마치 농담거리라도 되는 듯 헤실거리며 웃었다.
“그건 아닐 테니까, 셈, 세미, 역시 네가 바퀴벌레처럼 생존 본능이 대단했던 거겠지?”
“호프!!!”
“내 이름이 그거긴 해. 보자. 대충 보니까 너 마법 썼지? 시간 벌기로? 그건 잘했어. 이길 방법도 없고,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면 도와줄 사람이 오길 기다려야지. 자기 한계를 아는 것도 되게 중요하거든.”
“…….”
“네가 아직 뇌는 안 갈아 끼웠던가?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쓸 만해 보이니까 그건 어지간하면 가지고 있… 아니다. 너 뇌 갈았니? 네 부족한 지능을 보완해 줄 만한 걸로 잘 갈았구나?”
결국 셈 블룸이 폭발했다.
“너 뭐 하려고 왔어?!”
“어… 날 부른 건 너잖아. 그새 잊었어?”
“그럼 왜 멀뚱히 보고만 있어?”
“재밌잖아.”
셈 블룸은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지 팔을 버둥거렸다. 상처가 더 벌어지고 있다. 어차피 벗어나지 못할 텐데.
그래도 거슬려서 발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제압만 했는데, 역시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분질러 놓는 게 나으려나.
몬스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셈 블룸을 떠올렸다. 그게 어떤 행위였든지 간에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하지 않을 짓인 건 확실했다.
홍석영을 보았다. 미간을 좁히며 알렉스 호프를 경계하고 있던 홍석영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은 받았고.
“알렉스 호프.”
나는 나직하게 호프를 불렀다.
호프가 셈 블룸을 직접 죽이러 왔다고 보긴 힘들다. 셈 블룸이 저렇게 짜증 내고, 호프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는….
호프가 놈을 구해 주러 왔기 때문이겠지.
“너 분명.”
“자, 이제 우리 바퀴벌레의 인내심이 끝난 것 같거든!”
나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바퀴벌레라고 부르지 마!”
“네가 거부한 걸 알면 바퀴벌레가 서운해할 텐데.”
저놈, 지금… 내 말을 잘랐지? 다른 말 못 하게?
“바퀴벌레가 도대체 지금 무슨 상관인 건데! 당장 날 구하든지 꺼지든지 해!”
“기껏 와 줬는데 그러면 섭섭한데. 내가 정말 꺼지면 섭섭한 건 너잖아?”
“…그럼 할 일 하든가!!”
“흐으으응.”
호프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셈, 넌 나한테 명령할 만한 존재가 아니거든.”
“…….”
“내가 저번에 말했지? 나한테 부탁하고 싶으면 어떻게 말하라고?”
“…….”
끼이이이….
셈 블룸은 손톱을 세워 바닥을 긁었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붉은 자국이 남는다. 빠진 손톱이 지금 셈 블룸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셈 블룸은 팔, 혹은 날개를 축 늘어뜨리며 조용히 말했다.
“……다.”
“응?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나는 묘한 표정으로 호프를 바라보았다.
설마 저 새끼, 마음에 안 드는 직장 동료를 죽여 달라고 말한 건 아니겠지?
“도, 와, 주세요.”
“흐응.”
“부탁, 드, 립, 니다.”
“흐으응.”
“제발요….”
“그래!”
호프는 히죽 웃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발끝으로 룬을 그리거나 바닥을 툭툭 걷어차지도 않았다. 그냥 사라졌다.
“귀여운 바퀴벌레가 도와 달라고 하는데.”
내 뒤에서 호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줘야지. 안 그래?”
강태우를 습격했을 때처럼 날카로운 살기가 나에게 꽂힌다. 홍석영을 무시하고 나에게 덤벼들다니. 배짱이 좋다.
셈 블룸을 죽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구하려고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많았다. 알렉스 호프는 누구이며, 셈 블룸의 노림수는 무엇이며, 노아 미셀은 정말로 이 모든 일을 꾸민 장본인인가.
던전을 나가면 머리 아픈 일만 있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알렉스 호프의 손이 내 목을 향해 뻗어 온다. 무엇을 노리는지 훤히 보이는 단순한 움직임이다.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함정인가 싶다가도, 바로 그걸 노리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습격 당시 짧게 부딪쳤을 때 그런 잔머리를 굴리는 타입 같지는 않았지만 모르잖는가.
흠.
호프가 사라졌다.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젖혔다.
직전까지 내 머리가 있던 자리에 호프의 발이 지나간다. 호프는 다시 사라졌다.
룬을 그렸던 건 눈속임이었던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데려갈 때는 그려야 했던 건가?
귀찮은 능력이다.
셈 블룸을 놓아줄 수 없으니, 셈 블룸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 움직이느라 제약이 너무 심하다.
어쩔 수 없이 피하는 걸 멈췄다.
이야기 중에 슬쩍 나타났을 때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동안 기척을 숨기는 일은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나를 공격하기 직전, 모습을 다시 드러냈을 때 호프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내가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 이상 호프가 나타날 곳이야 뻔한 탓도 있다.
호프와 싸운 건 딱 한 번뿐이다. 아이들을 습격했을 때.
당시 호프는 폭력적인 마력 흐름을 이용해 공격했었다. 내가 손쉽게 파훼해서 그렇지, 자칫 잘못하면 주변을 모조리 날려 버릴 만큼 흉악한 공격이었다.
지금 호프는 셈 블룸 때문이라도 그런 방법은 쓰지 못한다. 하지만 손을 사용하는 버릇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나는 팔뚝으로 공격을 쳐서 올린 다음 반대쪽 손으로 놈의 팔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시 팔꿈치로 놈의 허리를 찍었다.
“아야!”
놈은 힘 빠지는 신음을 냈다.
시야가 일순 뒤틀린다. 그래도 호프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호프는 나와 함께 이동했다. 고속 이동인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다. 이동해 보니 알겠다.
호프는 몇 차례 더 이동했다.
“귀찮게, 진짜!”
네 번째 즈음에, 호프는 공동의 천장으로 이동했다.
바닥으로 추락한다. 이번엔 호프가 팔꿈치로 내 명치를 꾹 눌렀다. 어차피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죽진 않는다. 호프도 알고 있다. 놈은 충격으로 나를 떨쳐 내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놀랍게도 홍석영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재밌는 재주를 가지고 있군.”
홍석영은 간단하게 땅을 박차는 것으로 우리 근처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뻗어 호프의 뒷덜미를 잡더니 바닥을 향해 던졌다.
콰아아앙!!!!!!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인 소음이다.
던전이 흔들린다. 먼지구름이 자욱하다. 내가 찔러 넣은 검을 빼기 위해 바르작거리던 셈 블룸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홍석영을 보았다.
홍석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들고 있는 창을 아래로 던졌다. 알렉스 호프가 떨어진 곳이다.
창은 큰 소리를 내진 않았다.
나는 몸을 돌려 바닥에 조용히 착지했다.
호프에게 다가가던 홍석영은….
“실수했군.”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야야….”
단 한 번. 홍석영에게 붙잡혔지만 그 한 번으로도 알렉스 호프는 성하지 못했다.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머리. 기침을 할 때마다 입 안에서 시뻘건 피가 흐른다. 내가 잡고 있었던 팔은 부러졌고, 홍석영에게 집어 던져진 충격으로 다리와 어깨가 나갔다.
그런데도 여전히 두 다리로 서 있다. 홍석영이 대충 집어 던진 것도 아니다. 포럼에 참석한 이들 중 방금 그 공격을 받아 낼 수 있는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알렉스 호프는 시야를 가리는 피를 벅벅 닦았다.
“내가 튼튼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과하게 튼튼한데. 던질 게 아니라 바로 베었어야 했어.”
“다음번은 안 봐줄 거라는 소리 같은데.”
“제대로 들었어.”
홍석영은 사납게 웃었다. 알렉스 호프는 히죽 웃었다.
“그럼 조만간 다시 보자.”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도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 셈 블룸보다도 더욱.
“가자, 바퀴벌레야!”
알렉스 호프는 셈 블룸의 어깨에 박혀 있는 유지은의 검을 잡았다. 호프를 인정하지 않은 검이 멋대로 타올랐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쨍그랑.
놈은 화상을 입은 손을 흔들었다.
“안녕!”
호프는 발을 톡톡 두드려 셈 블룸과 함께 사라졌다.
* * *
“홍!”
레이첼 베넷이 사람들을 밀치며 다가왔다.
“던전 안에서 느껴졌던 그 진동, 홍이 한 거지?”
“왜 나라고 생각하나?”
“그럼 누가 해?”
홍석영은 레이첼 베넷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래. 내가 했네.”
“역시.”
베넷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에, 하필 여기서 던전이 발생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게 말이네.”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헌터들이 다 모여 있는데…. 보스가 어떤 몬스터였는진 모르겠지만 좀 불쌍한걸.”
끝까지 바퀴벌레 취급을 당한 파란 머리 마법사를 떠올렸다.
홍석영은 베넷에게 물었다.
“그래서, 사상자는 집계가 좀 되었나? 던전 내부에서 다른 몬스터를 보진 못해서 괜찮았을 텐데.”
“호텔 직원들 중 몇 명이 넘어져서 접질린 거 말고는 괜찮아. 대신 게이트 발생지에 있던 마법사들이 다쳤지.”
“그래?”
“아마… 나도 몰래 들은 건데.”
베넷은 목소리를 깔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일 가까이에 있던 마법사 하나가 죽었나 보더라고.”
“폭발이 있었던 것 같긴 했는데…. 운이 나빴군. 누군지 아나?”
“원래는 여기 참석할 자격이 안 되는 마법사인데, 프랑스의 그 여자 추천을 받아서 왔었나 봐.”
“그 여자?”
“왜, 노아 미셀 말이야.”
“…아. 그 대마법사.”
베넷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린 모양이던데 안됐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