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63)
외장형 인간성(2)
옛날, 옛날.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태양 아래에는 꿈 많은 흑인 소녀가 살고 있었답니다. 아버지와 단둘이서 살고 있던 소녀는 우연히 예쁜 여자아이와 마주치고 친구가 되었답니다….
사실 옛날이라고 할 만큼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그 애는 여자아이도 아니었고, 친구라고 할 법한 사이도 아니었다.
마력 공학자인 아버지는 길드와의 협업 건으로 한동안 호주에서 지내게 되었다.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 딸을 혼자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산드라도 자연히 아버지를 따라 호주로 갔다. 거기서 아버지가 일하는 길드의 마스터의 아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처음엔 남자애인 줄도 몰랐다. 하도 예쁘장하게 생겨서.
대만인인 모친을 꼭 빼닮은 알렉스 호프는 어릴 때도 작은 체구에 유난히 뽀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어딜 가든 예쁜 아이라며 시선을 받았다. 산드라가 알기로는 아동 모델 같은 것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아주머니, 이쥔이어도 아들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모델을 시켰을 거다.
지금이야 속에 든 게 무엇인지 아니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지만, 당시 알렉스는 말 그대로 인형 같은 아이였다. 단순히 예뻐서 인형 같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인형이었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앉아 있다가 엄마가 말을 걸 때만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쥔은 아이가 자폐증이라고 생각했다. 주변 자극에 둔감하고 관심이 없는 건 무시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우연히 알렉스를 본 산드라는 바로 눈치챘다. 왜 어른들이 모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산드라는 슬쩍 알렉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엄마가 그렇게 좋아?’
알렉스는 천천히 산드라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너 엄마 관심 받고 싶어서 그러고 있는 거잖아. 엄마가 힘든 건 괜찮고?’
그 말을 듣고 알렉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달쯤 뒤, 산드라가 두 번째로 알렉스를 만났을 때는 인형같이 가만히 있던 아이는 없고 활발하게 웃으며 뛰어노는 버릇없는 일곱 살짜리 꼬맹이만 있을 뿐이었다.
길드원들의 자식 중에는 알렉스 또래가 없었다. 그래서 자연히 산드라는 알렉스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손이 많이 가긴 했지만 어지간한 여자애보다도 예쁜 아이이다 보니 산드라도 알렉스를 싫어하지 않았다. 원래 그 나이 때에는 예쁜 걸 좋아하는 법이었다. …꼭 그 나이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닌데, 세상에 예쁜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생각해 보면 그게 함정이었다. 달콤한 향기로 벌레를 꼬여 내는 식충 식물 같은 거였지.
그렇지만 인형처럼 예쁜 애가 엄마가 매어 준 커다란 리본을 달고서 방긋방긋 웃으면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산드라도 다르지 않았다.
‘산드라. 넌 똑똑하니까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쳐 줘.’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가면 안 됐었는데!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렇게 깊게 발을 들인 이상 빠져나올 길은 없었다.
…아니다. 사실은 있었다. 하기 싫다고 알렉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했다면 알렉스는 들어줬을 거다.
하지만 알렉스가 자신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매번 알렉스에게 내 인생 난이도를 올린 주범이라고 구박하긴 했지만, 그 반대도 똑같이 성립된다는 것을 모를 만큼 산드라는 멍청하지 않았다. 일곱 살 알렉스의 마음에 있던 좁디좁은 울타리를 박살 냈을 때부터 빠져나간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알렉스의 울타리는 좁다.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도 적다. 기껏해야 엄마와 아빠, 산드라. 세 명이 끝이다.
그리고 산드라는 그 안에 있는 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알렉스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
열네 살의 알렉스 호프와 열여덟 살의 산드라 갬블은 캘리포니아 따뜻한 태양을 느끼지도 못하고 차고에 틀어박혀서 소곤거렸다.
‘프랑스의 누구라고?’
‘노아 미셀. 유명하댔는데.’
‘그래, 유명하지! 최연소 대마법사잖아!’
아버지를 따라 마력 공학자로서의 길을 밟고 있는 산드라는 던전 정보에 민감했다. 천재 대마법사로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낭트의 보석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그게 이 녀석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걔가 보스야?’
‘보스라고 해야 할까…. 일단은?’
알렉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은 나올 수 없잖아. 그러니까 당장은 걔가 보스겠지?’
알렉스는 산드라가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불안하고, 걱정이 가득한 얼굴.
산드라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럼 걔 말을 꼭 들어야 하는 거야? 걔가 뭘 시켰는데?’
‘유예 기간을 받긴 했어.’
‘유예 기간?’
‘응. 엄마랑 아빠랑… 네가 살아 있는 동안은 진행하지 않기로.’
알렉스를 알게 된 이후로 할 말을 잃어버린 적은 많지만 단언컨대 이런 적은 또 처음이었다.
산드라는 멍하니 알렉스의 얼굴을 봤다가, 고개를 숙였다가, 천장을 봤다가, 뒷덜미를 주무르다가, 다시 겨우 알렉스를 보았다.
‘……왜?’
알렉스는 뭘 당연한 걸 묻고 있냐는 얼굴로 산드라를 보았다.
이쥔을 꼭 닮은 단정한 입매가 유려한 곡선을 그린다. 만개한 금영화처럼 화사한 미소다.
‘그거야 내가 좋아하니까!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항상 웃고 있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했다면 개소리하지 말라며 주먹을 흔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렉스는 다르다. 알렉스가, 그 알렉스가….
눈이 시큰거렸다.
‘…울어?’
‘안 울어!’
산드라는 코를 훌쩍거렸다.
‘킁. 좋아. 걔가 널 왜 불렀어? 뭘 시켰다고?’
‘유예받긴 했지만, 준비를 안 할 순 없으니까….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은데 손이 부족하니 나보고 하나씩 하래. 근데….’
‘근데?’
‘이거 하면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도대체 뭘 시켰길래 네가 그래?’
알렉스는 천천히 노아 미셀의 명령에 대해 하나씩 설명했다. 그 말이 이어질수록 산드라의 얼굴은 굳었다. 머리가 차가워졌다.
산드라는 알렉스에게 소리를 치지 않기 위해 크게 심호흡했다. 알렉스의 잘못은 아니다. 아직 인간에 대해서는 걸음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알렉스는 어렸을 때처럼 산드라의 소매를 흔들며 말했다.
‘산드라는 똑똑하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줄 수 있지?’
‘…그럼 내 말 잘 들을 거지?’
‘응. 어떻게 하면 세 사람을 지킬 수 있어?’
‘제일 먼저.’
노아 미셀을, 이름부터가 멍청한 방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알렉스도 강하지만 알렉스는 할 수 없다.
그러니 누군가, 나쁜 놈들을 막는 데에 관심이 있을 만큼 정의감이 투철하고 대마법사 노아 미셀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 그런 이가 필요하다.
…그딴 게 길거리에 굴러다니면 여기에 앉아서 이러고 있지 않았겠지.
산드라는 눈을 감았다 떴다. 공구가 어지럽게 널브러진 차고가 보였다.
‘회사를 세워야겠다.’
‘회사?’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건데, 인간 사회는 돈이 있으면 대체로 많은 걸 해결할 수 있단다.’
산드라는 알렉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얼마든지 자신의 손길을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스는 머리가 엉망이 되든 말든 얌전히 있었다.
‘회사 이름은… 그래. 파로스. 파로스로 하자.’
‘파로스?’
‘알렉스와 산드라잖아. 우리 둘 다 알렉산더에서 따온 이름이고, 똑같이 그 이름을 딴 도시가 있거든. 알렉산드리아라고, 옛날에 엄청 큰 도서관이 거기에 있었대.’
‘산드라가 책을 좋아해서?’
‘…뭐, 그 이유도 있고. 근데 중요한 건 그 도시에는 엄청나게 큰 등대가 있었다는 거거든?’
‘등대?’
인간의 역사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알렉스는 대충 산드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만 했다. 그걸 알면서도 산드라는 신이 나서 설명했다.
‘노아 미셀의 방주는 빛 따윈 필요 없는 모양이니까, 우리가 빛 그 자체가 되어 주는 거야. 그래서 파로스(pharos)야. 사람들이 방주에 홀리지 않고 길을 찾을 수 있게.’
그리고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희망(Hope)의 등대가 되어 주는 거다.
산드라는 알렉스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알렉스가 산드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자신의 존재 의의를 거부한 것처럼.
그러니 산드라 갬블은 지금 이 기회를 날려 버릴 수 없었다.
“그거야 미셀 그년이 눈치채면 희생물로 바쳐 버릴 테니까요.”
공구로 대충 지지대를 만들어 세워 둔 휴대폰을 보았다. 손바닥만 한 작은 화면 안에는 세 명의 한국인이 있다.
방주를 싫어할 만큼 정의감이 넘치고, 방주가 경계할 만큼 강한 사람이!
있었다!
홍석영이 방주를 추적하고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건 잘한 일이었다. 생소한 언어를 배우느라 고생했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더불어 알렉스에게 몇 년에 걸쳐서 신신당부한 보람도 있다.
알렉스가 지겨워하며 짜증 낼 때까지 말했었지.
‘방주 인간은 죽여도 돼. 하지만 절대! 절대 관련 없는 인간은 죽이지 마! 어린애도 마찬가지야!!’
‘윽. 하지만 노아가 한국에서의 일이 틀어질 수도 있으니까 처분할 준비를 해 놓으랬는데?’
‘……기다려.’
정작 파로스를 만들기도 전에 급하게 재단을 세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이들을 빼돌리는 건 까다로웠지만 한 번 성공한 뒤에는 자신감이 붙었다. 몬스터 사체와 마력, 그리고 약간의 룬과 마법을 사용한 눈속임이었다. 한국처럼 던전 브레이크 희생자가 많은 나라에서는 시신을 빠르게 화장한다는 허점을 노린 방법이었다. 재가 되면 영영 증거가 사라지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자신과 무세이온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대화를 주도하고 있는 젊은 헌터가 홍석영의 휴대폰을 가져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뻔하다.
그래도 괜찮다.
이것이 지금 산드라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샨샨.”
산드라는 화면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알렉스를 불렀다.
알렉스의 어머니, 이쥔이 아들에게 붙여 준 애칭이었다. 알렉스의 가족만이 부를 수 있는 특별한 이름.
“너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데. 괜찮지?”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젊은 헌터의 옆에서 익숙한 빨간 머리통이 불쑥 올라왔다. 눈을 접으며 웃고 있는 꼴이 단단히 묶여 있는 모습과는 달리 태평하다.
산드라는 그런 알렉스를 보며 똑같이 웃었다. 여차해서 일이 틀어진다고 해도 알렉스라면 빠져나올 수 있을 거다. 홍석영이 있으니 몸 성히는 힘들지라도…. 다치더라도 도망치는 게 먼저지.
상처는 나중에라도 치료할 수 있으니까.
“설명할 거야 많지만, 먼저 알아 둬야 할 게 있어요.”
-호프에 대해서?
아직 이름도 듣지 못한 젊은 헌터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작은 화면으로도 적대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그야 그렇겠지.
분명 알렉스가 괜한 말을 해서 수상함만 늘렸을 거야. 안 봐도 훤하다.
그래도 긴장한 티를 낼 순 없다. 이미 잔뜩 긴장하고 있지만! 긴장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 들켰을 테지만!
산드라는 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을 옷에 슬쩍 닦았다.
“던전 공략 많이 해 봤어요?”
-…….
헌터는 산드라의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눈을 찌푸렸다. 산드라는 이어서 물었다.
“그럼 혹시 던전 안에서 요정 만난 적 있어요?”
-요정?
홍석영이 끼어들었다.
산드라는 험상궂게 표정이 일그러진 노련한 헌터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네. 샨샨… 알렉스는 체인질링으로, 던전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유일한 요정이에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