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74)
요정의 눈(4)
“연구원? 누구요?!”
꽤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아프지도 않은지 갬블이 벌떡 일어났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갬블을 보았다.
“말하면 누군지 압니까?”
“윽…!”
갬블은 얼굴을 찌푸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누군지 알 자신이 있지만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얼굴이다.
갬블이 호프를 나무랄 때가 아니다. 말만 안 하면 뭐 하나. 표정에서 다 드러나는데.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파로스 사의 산드라 갬블이 자꾸 떠오른다. 몇 년 사이에 사람이 그 정도로 바뀐다면 호프뿐만이 아니라 갬블도 체인질링인가 뭔가로 사람이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으….”
갬블은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우며 앉았다. 이쪽도 방 안에 있는 테이블에 이런저런 종이를 잔뜩 펼쳐놓았다. 이미선처럼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는 아니었다.
활짝 펼쳐진 노트와 흐트러진 종이는 너저분하다.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수식과 설계도가 낙서처럼 얽혀 있다.
“……!”
그래도 갬블은 이미선보다는 경계심이 있다. 내 시선이 어딜 향하는지 눈치채자마자 급하게 노트를 뒤집었다.
“안 가려도 됩니다.”
“윽….”
“어차피 이제 같은 길드에 소속되어있지 않습니까.”
“그, 그래도 지적 재산권을 넘긴 건 아니거든요!”
“길드 이름으로 발표되기는 하지만요.”
나는 내가 오기 전까지 갬블이 작성하고 있었을 노트를 들어 올렸다. 흘려 쓴 필기체는 알아보기 힘들고, 그림도 설계도라고 하기보다는 선을 직직 이어 놓은 낙서에 불과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렇지.
마력 측정기의 완성형을 아는 나에게는….
이게 뭐라고 해야 하나. 조금 시간 낭비처럼 보였다. 홍석영처럼 갬블을 확실하게 믿을 수만 있다면 마력 시계에 있는 마력 측정기의 설계도를 넘겨서 시간을 절약할 텐데. 갬블이라면 미래의 설계도를 분석해서 그다음 단계를 뱉어 내지 않을까?
물론 생각만 했다. 갬블에게는 여태 그랬던 것처럼 편리하게 방주 핑계를 댈 수도 없잖은가. 이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해야 하는가? 내가 미래에서 왔다고 알려 주기라도 해야 하나?
탁.
갬블은 내 손에서 노트를 가져갔다. 나는 손을 활짝 펴서 아무 의도가 없다는 것을 보였다.
“어쨌든 실험의 의도가 무엇인지, 호프가 아깝다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런저런 것들이 알고 싶어서 말입니다.”
“…….”
“당장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해도 앞으로도 괜찮을지는 또 모르는 일이고요.”
갬블의 눈이 흔들렸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알아야 하잖아요.”
“…그쪽도 실험 받았다면서요?”
“아. 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 나이까지 멀쩡히 잘 살고 있으니까 괜찮겠죠.”
갬블은 노트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한참을 기다렸다. 10분은 족히 지났을 거다.
그래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갬블의 표정이 휙휙 바뀌어 댔던 탓도 있었지만, 대답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생각이 많은 인간들은 그런 법이다.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을 때. 어떻게든 미룰 수 있을 만한 이유를 찾아내려고 하지만 대개 스스로를 설득하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애초에 바로 안 된다고 하지 않은 것 자체가 말해 주겠다고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건강은… 괜찮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괜찮지 않았다면 실험 초기 단계에서 죽었을 거니까요. 제가 알아봤을 때는 그 정도로 불안정하진 않았어요. 실제로 죽은 아이는 없을 거예요.”
형이 태어나기 전 죽었던 수많은 배아를 생각했다가 지웠다.
“그 연구는… 미셀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어요.”
“간이 조종기 말입니까.”
“그게 실제로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샨샨도 그 연구는 실패했다고 했잖아요. 맞아요, 실패했어요. 하지만 성공하기도 했어요.”
“…….”
“미셀은 자기가 뭘 성공했는지 모를 테지만요. 셈 블룸이 살아 있었다면 모를까.”
호프는 끈질기게 셈 블룸을 죽이라고 했다. 셈 블룸에게는 알아볼 만한 수단이 있었나. 아무리 그래도 블룸이 미셀보다 뛰어난 마법사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미셀은 모르지만 셈 블룸은 알고 있다’라.
“원래 걔가 여길… 여기에 왔던 건 샨샨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였어요. 미셀은 증거가 남지 않게 실패작을 없애는 거라고 말했지만, 뻔하죠.”
그걸 알면서도 호프는 자신의 손으로는 셈 블룸을 죽일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구해 주기까지 했었지.
블룸이 실시간으로 미셀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면 놈을 죽인다고 해서 우이록에 대한 정보가 넘어가지 않았다고 확신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다른 게….
갬블에게 묻자 의외로 쉽게 가르쳐 주었다.
“블룸이 죽으면 누가 죽였는지 정보가 미셀에게 넘어가요.”
“아. 그런 마법사들이 있죠.”
“네. 블룸은 그런 마법사 중 하나거든요.”
간혹 있지. 죽어서도 어떻게든 상대를 엿 먹이고 싶어 하는 이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고, 죽자마자 터지도록 자기 심장에 폭발 마법을 걸어 놓는 게 한때 마법사들 사이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스웨덴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한 마법사가 건물 하나를 날려 버린 뒤로 금지되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블룸은 얌전한 축이다. 아직 신체 일부에 폭발 마법을 영구적으로 거는 게 불법이진 않으니까.
어쨌든 원하는 대답을 얻었으니 다시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럼 블룸이 호프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왔다가 제 동생을 발견했다는 겁니까?”
“사실 그 던전 안에서 홍석영 헌터와 그쪽을 보게 된 건 블룸의 계획이 아니었어요. 던전을 열어서 발을 묶은 다음, 볼일을 끝내고 서둘러 나와 누명을 씌우고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을걸요. 던전이 있으니까 알리바이로는 충분하잖아요?”
“…그런데 호프가 끼어들어서 저희와 마주쳤다?”
“네. 그래도 샨샨의 얼굴을 보게 했으니 목적은 이루었다고 생각했을걸요.”
“목적을 이루었다면 왜 습격을 강행한 겁니까?”
“좀 더 확실하게 샨샨을 엿 먹이고 싶어서?”
“아, 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홍석영 헌터님, 이제 마스터라고 해야 하나요? 사장님? 보스?”
“편한 대로요.”
“그러면 보스로 할래요. 운 좋게 보스가 샨샨을 죽이면 좋잖아요.”
“음….”
“하지만 보스가 셈 블룸을 죽였고, 미셀에게 보고할 틈이 없었어요. 만약 미셀이 알았더라면 제가 여기 있든 말든 상관 안 하고 애들을 데려가려고 했을 거니까….”
“그렇군요.”
“네.”
“…….”
“…….”
갬블은 방긋 웃었다.
나도 똑같이 웃어 주었다.
“말 빙글빙글 돌리지 말고 제 질문에나 대답해 주는 건 어떻습니까?”
“하하….”
“셈 블룸이 아이들을 데려가려던 이유. 뭐라고요?”
“으…….”
이제 고민은 다 끝났을 거로 생각했는데 갬블은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
이제 같은 길드에 적을 둔 사람이니 점잖게 말로만 하고 있었는데. 약간 겁을 주는 게 좋을까? 아니, 그래도 비각성자에 가까운 사람이니까….
“아, 알았어요, 알았어!”
드디어 갬블의 입에서 항복 선언이 나왔다.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이라면…?”
“윽, 양보해서 보스까지는 괜찮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안 돼요.”
“말이 새어 나갈까 봐 그렇습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인데요.”
“그건 당신 입장에서나 그렇고요. 저는 만난 지 겨우 며칠 된 사람을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홍석영을 믿을 이유는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간 홍석영과 접촉하기 위해 조사를 했다고는 해도 직접 만난 것과는 아무래도 다르지 않나.
의심스러운 눈으로 갬블을 보다가 얼굴을 폈다. 뭐, 말해 준다는데 일단 듣고 판단하자.
“말했듯이, 미셀의 연구는 전혀 다르게 적용했어요.”
“네. 본론부터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우리. 아까 그것도 말해 줬거든요.”
“…그러니까, 일종의.”
갬블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마력에… 마력에, 민감한.”
갬블의 목소리가 점차 낮아졌다.
“몬스터, 정확히는 요정과 닮은 육체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어요.”
* * *
뭐라고 해야 할까.
갬블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지만, 동시에 놀랍지는 않았다.
사람이 너무 충격적인 소리를 들으면 감각이 마비된다고들… 한다지만, 아니다. 그런 나약한 소리는 아니고.
그냥, 어디선가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 각성자보다는 차라리 그쪽이 더 방주에 어울리는 연구라는 감상이었다.
방주의 목적. 미셀의 뜻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를 낳아 준 부모는 자신들의 연구를 인류의 빚이라 불렀다. 인류가 그들에게 진 빚. 그 연구를 성공하면 인류는 다음 단계로 진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형이라면 더 구체적인 사항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렸던 내가 접근할 수 있었던 정보는 그게 전부였다.
‘희재야. 아저씨가 했던 말 기억하지.’
헌터 라이센스를 따러 가기 전에 아버지가 날 붙잡고 거듭 말했다.
‘마력을 볼 수 있다는 거….’
‘말하지 말라고요. 알았어요! 진짜, 몇 번을 말하는 거야.’
‘아저씨는 당연히 희재가 잘할 거라고 믿지. 그래도.’
‘알았다니까요!’
…역시 알고 있었을까?
지금이야 우리가 연구소를 털기 전에 놈들이 도망가서 자료를 못 털었다지만, 그때는 달랐잖은가. 관리청 데이터베이스에 남아 있지 않을 뿐, 연구 자료가 아버지 손에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 연구소장과 연구원들도 줄줄이 잡혀갔으니.
알았겠지.
그랬으니 내게 거듭 당부했던 거겠지.
“그렇다고 요정을 키웠거나 그런 건 아니구요…. 비슷하게 흉내만 낸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그으으….”
갬블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끙끙거렸다.
나는 갬블 대신 적절한 단어를 내뱉었다.
“인공 장기요?”
“그으, 너무, 심한 단어 아닌가요?”
“당사자성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
갬블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미셀이 원하던 것과는 달랐지만, 그렇다고 원하지 않은 건 아니거든요. 특히 눈. 마력을 볼 수 있는 눈이요.”
갬블은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볼 수 있다고 들었어요.”
“네.”
“그게 정말 요정처럼 볼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에요. 기껏해야 마력, 마력의 흐름 정도만 볼 수 있지 않나요?”
“…진짜 요정은 다릅니까?”
“마력에서 태어나는 몬스터인걸요. 당연히 다르죠.”
갬블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어, 저도 샨샨이 말해 준 걸 말하는 거지만요. 샨샨도 애들 데리고 왔을 때 신경도 안 썼는데…. 그쪽이랑 마주친 이후로 미셀이 완전 삽질만 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고 그랬거든요.”
“…미셀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게 셈 블룸이 그쪽 동생을 데려가려던 이유인데…. 아마 열심히 확인하고, 자기한테도 시도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눈을 찌푸렸다.
갬블은 그런 나를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제약이 덕지덕지 붙은 계약 말고도 눈을, 더 나아가서 신체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생긴 거잖아요? 인간 혐오증에 걸린 그 여자라면 당장이라도….”
인간 혐오증?
“실험을 받았던 게, 동생이랑… 한 명 더 있죠? 걔도 마력에 민감하다고 들었는데.”
“…네.”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으면 최대한 숨기는 게 좋을 거예요.”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