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76)
생각하는 사람(2)
“약… 뭐라고요?”
“저 약하죠.”
한태경은 내가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로, 한태경 입에서 절대 나올 리 없다고 생각했던 말을 내뱉었다.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다.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홍석영도 있잖아. 선배라고 부른다고 진짜 내가 지도해 줄 거로 생각한 건가? 홍석영 있잖아!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눌러 삼킨 건 한태경이 퍽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게 그 한태경이라 해도, 자기가 약하지 않냐고 묻는 얼굴은 나름대로 진지해 보인다. 비록 선글라스가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상태의 인간을 나 몰라라 내버려 둘 순 없다. 고뇌하는 헌터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어디서 어떻게 터져 버릴지 모른다.
아무리 제 잘난 맛에 사는 헌터라고 해도 인간인 이상 벽에 부딪히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나한테는 그런 시기가 없었다. 난 처음부터 헌터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 내 실력에 아쉬워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유지은이 되지도 않은 조언을 해 주겠다고 자기 경험담을 늘어놨을 때 열심히 비웃었다. 유지은은 얼굴이 벌게지더니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바락바락 고함을 질러 댔다.
‘야!! 지금 잘 들어 놔라! 언제 써먹을지 모른다고!’
그렇다.
사람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법….
유지은의 조언은 훗날 관리청 헌터들을 비웃을 때 종종 쓰였다. 효과는 좋았다. 그 앞에, ‘유지은 헌터가 나에게 해 준 말인데’를 달면 헌터들은 내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든 그럴싸하다고 여기며 감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댔다.
가끔 관리청 복도를 배회하는 덜떨어진 헌터들을 제외하곤, 벽에 부딪힌 헌터들의 머리를 깨는 일은 대부분 유지은이 하곤 했다. 왜, 신입 헌터 교육은 유지은 담당이라고 했잖나.
유지은은 열심히 신입들의 머리를 깼다. 사실 머리 말고도 다른 곳도 많이 깼다.
그러고는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네가 약한 것 같다고? 잘 봤다. 너 존나 약해.’
유지은은 부서진 폐허 위에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고뇌에 빠진 헌터?
벽째로 부서뜨리고 자기 입맛대로 키우곤 했다. 그게 훨씬 빠르다고.
유지은은 그랬다.
‘야, 우희재. 하나만 딱 기억해라.’
‘뭘.’
‘오만한 놈보다는 자신 없는 놈이 살아남아.’
인정하긴 싫지만, 유지은의 말은 옳았다.
난 이 시기의 한태경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내가 한태경을 처음 만났을 때, 한태경은 이미 벽 따위는 좋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에 한 점 의심도 없는 자신만만한 미소. 별 희한한 기행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자신을 내치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
아버지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지만…. 그것도 한태경이 마흔 살쯤 되었을 때는 말이 달라진다. 그 나이의 한태경은 아버지와 엇비슷하게 싸울 줄 알게 되었다. 목숨 걸고 싸운다면 당연히 아버지가 이기지만, 놀이 감각으로 하는 대련에서만큼은. 그러니 그 사고를 쳐도 아버지가 관리청에 계속 붙여 놓았지 않았겠나.
애초에 주 무기 하나 제대로 정하지 않고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 싸우는 짓은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왜….”
항상 웃고 있는 한태경을 보아 와서일까. 이렇게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다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아니, 그거야.”
한태경은 수도꼭지를 잠갔다. 호스에서 새어 나오던 물은 금방 멎었다.
한태경은 괜히 세차용품들을 정리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뒤돌아서 가고 싶은데, 그간 보아 온 정이 있어서 참았다.
…아직 죽이지 않은 거로 그 정은 다하지 않았을까?
“…못, 했다고요.”
“뭘 못 했다고요?”
“…….”
한태경은 입을 우물거리다가 쭉 내밀었다.
아니, 진짜….
소름이 돋았다.
누가 한태경을 흉내 내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김채민의 마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거긴 하겠지?
“아무것도 못 했다고요.”
나한테 뭔가 상담을 하고 싶다면 말을 똑바로 해 줬으면 한다.
내가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사람 속을 읽어 내는 재주는 없다.
더군다나 한태경과는… 사실 친한 사이도 아니잖아? 시범고 애들이야 내 앞에서 돌아가면서 하나씩 우는 중이지만 걔넨 그래도 뭐가 문제인지 알기 쉬웠다고.
아니, 근데 난 이제 한태경도 챙겨 줘야 하는 건가? 내가 처음 계획했던 건 한태경을 두드려 패서 그럭저럭 평범한 사람처럼 말할 줄 아는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거였는데.
재빨리 한태경의 얼굴을 살폈다. 검은색 선글라스에 눈이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울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마법사의 마법이 보조해 줬는데도 침입자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하고.”
“아.”
“진짜 저 너무 쓸모없지 않습니까? 홍 선, 아니, 교장 선생님은 제 실력을 높이 사서 데려온 거라고 했는데 정작 저는….”
“한 선생님 지금 등급이 뭐였죠?”
“네? A인데요.”
보통 헌터들은 더 많은 통행세를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즉 평소 들어가던 것보다 한 단계 높은 던전에 들어갈 때 벽을 느끼곤 한다.
말은 이렇게 해도 주로 A급 헌터가 S급 던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되면 많이들 무너진다.
통행세를 많이 낼수록 던전 안에 있는 놈이 강해진다. 던전 등급이 S까지 있는 건 그냥 단순히 그 이상의 통행세를 요구하는 던전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게 꼭… A급 던전의 몬스터보다 살짝 강한 수준이 아니라는 거다.
‘살짝’이라는 귀여운 단어를 쓸 수 있는 놈도 있겠지. 하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한 놈도 있을 수 있고, 진입한 헌터들이 모두 죽어서 몬스터의 정체도 판명되지 않은 던전도 있을 수 있다.
A급 던전을 쉽게 돌면서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알게 된 헌터들은 그런 규격 외의 존재에 쉽게 무너지곤 했다. 내가 모르는 데에서 한태경도 그런 경험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어린놈으로 보였는데, 제가 그런 이상한 놈한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요?”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사이비 단체에 소속된 미친 마법사가 아니라.
“그래서 이번에 집에 있는 동안 제가 생각을 좀 해 봤거든요.”
“…생각이요.”
“저는 사실 존나게 약한 게 아닐까 하고.”
왜 결론이….
“아니, 물론 저보다 약한 애들이 많은 건 알고 있죠. 하지만, 그.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 한태경이라는 인간은 훨씬 나약한 게 아닐까 하는….”
“침입자한테 당해서요?”
“저 그래도 교장 선생님께도 인정받은 놈입니다. 팔에 깃털 달린 닭 새끼 같은 놈한테 당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요.”
“…….”
조금… 한태경의 생각을 알 것도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셈 블룸과는 상성이 안 맞았지. 차라리 던전에 들어갔던 거였다면 한태경은 잘했을 거다.
칭찬하긴 싫지만, 한태경은 임기응변에 강한 헌터다. 한태경의 1팀은 던전 공략도 공략이었지만 탐사에 좀 더 능력이 치중되어 있었다. 팀장이 어지간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만큼 갓 발생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 소질이 있었으니.
관리청의 던전 공략을 보조하고 있었던 만큼 나는 한태경의 전투 방식, 약점을 훤히 꿰고 있다. 한태경은 자신과 체급 차이가 날수록,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은 곳일수록 진가를 발휘한다. 체급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는 인간에, 좁은 건물 안은 한태경의 움직임을 오히려 제한한다.
그런 상태에서 치고 빠지는 것으로 김채민의 마법을 회피해서 공격을 지속하는 셈 블룸은 한태경의 천적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당시 한태경에게는 우이록이라는 짐 더미도 하나 있었다.
…아.
“저기. 한 선생님.”
“그러니… 네?”
“그땐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못 했고, 나중에는 한 선생님이 애들 인솔하러 가서 말을 못 했는데.”
한태경한테 이런 말 하는 게 자존심 상하긴 했지만, 이건 허구한 날 경위서나 써 오는 미친놈이 아니다. 자기가 약하니 어찌하니 지껄이는… 직장 후배를 향해서라면 조금 친절하게 대할 수 있다.
음. 내가 유지은이라고 생각하고 하면 되려나. 그래도 유지은이 신입들을 잘 키우긴 했다. 매년 유지은 생일마다 카네이션이니 뭐니 하며 큼지막한 꽃바구니를 들고 찾아오는 헌터가 한 무더기였을 만큼.
유지은. 유지은이라….
‘머리에 뭐가 들었냐! 장식이야? 장식이냐고! 그럼 내가 예쁘게 다듬어 주마. 목 딱 씻고 기다려.’
…….
좀 더 친절한 버전의 유지은으로.
‘올해 신입들 정말 대단하다. 믿을 수가 없어. 어쩜 이렇게 예쁜 놈들만 들어왔을까? 어깨 위에 참 예쁜 걸 들고 다닌다. 텅텅 빈 게 정말 예뻐.’
…뭐, 나중에 고민해 보고. 일단 이것부터 말하자. 아버지는 다른 건 몰라도 감사 인사만큼은 꼭 하라고 가르쳤다.
“이록이 도와줘서 감사합니다.”
“…예?”
“한 선생님이 지금 자기가 약하다고 하는데, 정말 약했으면 제 동생 못 구했죠. 이록이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한 선생님이 바로 몸 날려서 구했다고 하던데요.”
한태경은 거짓말 안 하고, 일 미터는 족히 뛰어올랐다.
“어. 아. 그.”
애 하나 구하겠다고 걜 안고 몸으로 공격을 막아 내던 헌터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툭 내뱉었다.
“…저, 그, 누가 고맙다고 하는 거 처음 들어 봤습니다.”
“그렇습니까?”
“그, 던전 브레이크 뒤처리 하다 보면 들을 수 있다는데, 전 던전 들어가는 게 더 좋아서요….”
어쩐지 한태경은 한결 차분해진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하?
왠지 모르겠지만 한태경을 다루는 방법을 찾은 것 같은데.
더듬거리며 말하고 있는 한태경의 얼굴 위로 어쩐지 박서현이 겹쳤다. 닮은 점이라고는 팔 두 개 다리 두 개 달렸고 머리가 검은색이라는 것밖에 없지만, 칭찬에 반응한다는 점이.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어른도 때로는 칭찬이 필요한 법이다.
박서현한테 해 줬던 것처럼 해 주면 되려나. 걔도 미래가 확실한 만큼 칭찬하는 건 쉬웠다. 한태경도… 비슷하지? 무작정 칭찬만 해 주면 기고만장해질 것 같긴 하지만.
“음.”
나는 목 뒤를 벅벅 문지르고 있는 한태경을 보았다.
“본인이 너무 약한 것 같다고요?”
“너, 너무까지는 아니고 살짝…?”
“헌터 실력에 살짝이 어디 있습니까. 약하면 죽고, 강하면 살아남는다. 그 두 개밖에 없어요.”
“…….”
자기가 자기를 약하다고 여기는데 주변에서 백날 말해 봤자 가슴에 와닿진 않을 거다. 알은 스스로 깨고 나와야 의미가 있다.
아직 A급이라고는 해도 충분히 쓸만하다. 박서현이야 그럴 실력이 되지 않았으니 반은 내가 칭찬해 주고, 나머지 반은 김채민이 키우긴 했지만.
한태경에게는… 좀 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도 될 것 같다.
마침 적당한 일도 하나 있다.
“한 선생님. 저와 던전 하나 공략하지 않겠습니까?”
“던전이요?”
그동안 내가 한태경 대신 들어간 던전이 몇 개인데. 이제 나 대신 한태경이 공략할 때가 되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