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8)
지하 5층(1)
2021년 5월 15일.
23시 10분.
경기도. 어느 폐쇄된 수련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도대체 저 인원은 어디서 데려온 겁니까?”
“쉿!”
“아니, 그러니까….”
“쉬잇!!!”
무슨 말도 못 하게 하나.
마찬가지로 까만 옷을 입은 채 내게 손가락을 세우고 있는 김채민을 보았다. 재차 나에게 조용히 하라며 손짓하던 김채민은 눈을 찌푸리며 불 꺼진 수련원 건물을 노려보았다.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된 건물은 빈말이라도 보기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근처에서 던전이 열린 적이 있는지 1층 벽과 주차장이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누가 일부러 깬 것처럼 성한 게 하나도 없는 유리창과 녹슨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는 문…. 호러 영화를 보면 이런 데에 멋모르고 놀러 온 애들이 저주받아서 죽던데.
김채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우, 제가 이런 류에는 약하거든요.”
나보곤 말도 못 하게 하더니.
“던전도 이런 데는 안 들어간단 말이에요.”
“대마법사가 되어서 그래서 되겠습니까?”
“대마법사가 되었으니까 일을 가려 받는 거죠.”
…말이 되는데.
아니. 이렇게 잡담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홍석영을 보았다. 휴대폰을 든 채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나는 다시 수련원을 보았다.
어떻게 좋은 말로 포장해 보았자 폐허다.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위치를 들은 홍석영도 내게 몇 번이나 확인했다.
하지만 이곳이다.
이곳이 내가 있던 연구소다.
뭐, 정확히 말하면 있었던 연구소 중 하나다. 하지만 가장 오래, 마지막까지 지냈던 곳은 여기다. 방주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였다.
“준비는 끝.”
홍석영은 통화를 끊고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홍석영을 보았다.
“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직원들.”
기괴한 수식어다.
“되게 믿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들리는데요.”
“아냐. 그런 쪽에서는 철저하거든. 믿을 수 있어.”
“누구길래?”
경찰이라면 저렇게 비밀스럽게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저 움직임은 분명 헌터다. 그것도 훈련된.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던전 공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돌입 직전의 특수 부대에 가깝다.
관리청도 없다. 이 시기에 도대체 누가 헌터를 저따위로 쓴단 말인가. 인력 낭비지.
홍석영의 휴대폰이 반짝거렸다. 홍석영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20분이 되면 우리가 먼저 들어간다.”
김채민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는 아이들을 확인하는 것. 도주로를 차단할 수 있다면 차단하고. 겸사겸사 중요 정보들을 놈들이 파기하기 전에 얻을 수 있다면 좋고. 높으신 분처럼 보이는 놈을 미리 잡는 것도…. 뭐, 괜찮겠지. 대충 그러고 나면 신호를 보내서 연구소를 뒤엎도록 하자고.”
“그냥 다 하라는 말 아닙니까?”
“이런 건 다 임기응변이지.”
홍석영은 내게 검을 돌려주었다. 유지은의 검. 오랜만에 잡는다.
물론 내 발목에 있는 마력제어구는 그대로다. 홍석영은 내게 경고했다.
“전투가 있을까 싶어 돌려주는 거야. 내가 곁에 있을 거니까 뽑을 일은 없을 거긴 하지만.”
김채민은 조금 의아한 얼굴로 나와 홍석영을 번갈아 보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는 않았다. 나는 내 입으로 말하기는 상황이 마땅찮아서 말았고, 홍석영은 모른 척했다.
어차피 저 안에 들어가면 알 수 있을 수밖에 없다. 아니면 내가 위치를 제공했다는 걸 들었으니 이미 눈치를 챘을 수도 있고.
좋아.
정신 차리자.
지금부터 나는 방주의 내부 고발자 우희재다.
하…. 너무 굴러떨어진 거 아니냐. 내가 어떻게 그 자리에 올라갔는데.
차라리 내가 관리청을 만들어서 본부장 자리를 꿰어 차…. 아니지. 그럼 본부장이 했던 개고생도 내가 해야 하잖아. 감투를 쓸 거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있지.
내가 본부장 아래에서 지내면서 알게 된 게 있는데, 그건 의외로 헌터 아카데미 교장이 꿀보직이라는 점이다.
교장도 공무원이기는 해서 이래저래 꼬박꼬박 돈이 나오는데, 아카데미 교장이라고 다들 알은체하면서 대접해 준다. 아카데미 출신 중에 대단한 헌터는 또 얼마나 많은가? 매년 스승의 날마다 본부장 앞으로 오던 선물만 생각하면….
그래. 교장이 되자. 관리청을 만들어서 저 아저씨를 쫓아낸 다음, 나는 아카데미 교장이 되는 거다. 어차피 지금도 애들에, 대마법사 하나도 가르치고 있는데 교장이 별거냐.
“흠? 우 선생. 집중해야지.”
“…집중하고 있습니다.”
“긴장되는 건 알지만, 조금만 더 버텨 보라고.”
홍석영은 어째서인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야?
“동생 걱정하는 거야 당연하지. 그래도 여기까지 왔잖아?”
“어머, 동생이요?”
“동생이라고요?”
김채민이 화들짝 놀라고, 나도 깜짝 놀라서 얼빠진 얼굴로 홍석영을 보았다.
“그래. 동생.”
동생? 난 그딴 거 없, 아니. 내가 신분을 잠깐 빌려 쓰고 있는 이름 모를 조직원에게는 있으려나.
그 김 군이 전해준 정보 중 하나였던가?
안 좋다.
“날 믿어 줘서 고맙네. 동생은 무사히 데리고 나올 수 있을 거야.”
내가 나서지 않아도 홍석영이 알아서 착각해 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빠르게 내가 했던 말들을 되새겼다.
…워낙 두리뭉실하게 말했다 보니 딱히 의심받을 만한 말은 없었다.
하지만 김 군의 내부자에 대한 정보를 추가했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 조직에서 나오고 싶었나?
어설프게 아는 척 대답했다가는 뭣도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말을 돌렸다.
“아직 시간 안 됐습니까? 들어갑시다.”
* * *
스스스….
김채민의 덩굴이 바닥을 기어간다.
단순히 몬스터를 붙잡는 것 말고도 김채민의 덩굴에는 기능이 많았다. 덩굴이 뻗어 간 범위 내의 탐색이라든지.
김채민은 감았던 눈을 떴다.
“감지되는 게 없어요.”
“아무것도?”
“네. 날벌레 정도는 있지만 그 이상의 생명체는 보이지 않아요. 감시 카메라도 없고…. 정말 여기가 맞나요?”
“맞습니다.”
김채민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폈다. 동생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내내 저 모양이다.
“지하에도 느껴지는 게 없습니까?”
“네….”
나는 눈을 찌푸렸다. 방주도 바보가 아니니 들어가자마자 연구소 시설이 보이게 해 놓진 않았다.
수련원은 산속에 있는 외딴곳이고, 사유지기까지 하다 보니 불법 증축으로 공간을 확보했다. 아이들은 가장 깊은 곳에 있다.
나는 살아생전의 김채민을 만나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다른 헌터와 마찬가지로 대마법사들은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능력을 갖추고 있다.
김채민이 헌터로서의 경험이 길진 않아도 대마법사는 대마법사다. 김채민의 눈을 피할 만큼….
방주의 대비가 철저하던가?
“들어가겠습니다.”
“뭐? 잠깐!”
홍석영이 날 붙잡았다. 마력을 싣진 않았다. 나는 물 흐르듯 부드럽게 홍석영의 손을 피했다.
아직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던 김채민의 덩쿨이 움찔거리며 옆으로 움직였다. 나는 수련원 정문 앞에 섰다. 굵은 사슬과 자물쇠로 잠겨 있다.
검을 쥐었다.
자물쇠는 크기만 컸지, 조잡하다. 마력까지 쓸 필요도 없다. 아직 검을 쓰는 게 손에 익진 않았지만 아주 못 쓰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난 유지은의 검을 믿었다.
정확히는 성능을 믿었다.
검을 검보다는 몽둥이처럼 사용하던 유지은이다. 그런데도 한 번도 날이 상하지 않았다. 유지은의 검은 언제나 예리했다.
원래 무기가 좋으면 반은 날로 먹는다.
휙.
파삭.
단 한 번.
사슬이 잘렸다. 떨어지면서 큰 소리를 내기 전에 잡아서 조용히 내려놓았다. 홍석영와 김채민이 내 뒤로 다가와서 섰다.
스륵.
나는 그대로 문을 열었다. 먼지가 퀴퀴하게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내부도 마찬가지로 엉망이다. 먼지와 쓰레기, 돌멩이들이 가득하다. 이곳엔 아무도 없다고 수련원이 내 귀에 대고 소리치는 듯한 모양새다.
속지 않는다.
눈 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곳이다. 홍석영과 김채민이 나를 따라오고 있다. 나는 수련원 안쪽으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를 찾아야 한다.
수련원은 지하 1층과 지상 6층으로 된 건물이다. 멀쩡했을 때는 대기업의 연수원으로 주로 사용되었다고 들었다. 한 번에 이용하는 수가 많아서 그런지 엘리베이터도 세 대나 있다.
그중 가운데. 문 사이로 검을 집어넣어 억지로 비틀어 열었다. 먼지가 폴폴 난다. 속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숫자가 보인다. 버튼을 눌렀다.
6.
6.
6. 5. 1. 2. 6. 6. 3. 4. B1.
“…….”
아무런 반응이 없다.
“젠장.”
원래라면 엘리베이터에 전기가 들어와야 한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뛰쳐나왔다. 이쪽 엘리베이터가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시도하면 된다. 여긴 바깥쪽 입구다. 만약 놈들이 우리를 알아챘다면 제일 먼저 막을 곳이다.
“우 선생!”
“우 선생님!”
계단을 찾았다. 내 발걸음을 따라 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한때 사람들이 많이 다녔을 중앙계단에는 아무런 속임수가 없다. 내가 찾는 것은 비상계단이다. 직원들이 주로 사용하던 곳.
그 옆에 있는 화물용 엘리베이터.
억지로 문을 비틀어 열었다.
여기도 버튼이 있다. 손을 들었다. 전기가 들어왔다면 숫자가 표시되었을 곳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반응이 없다.
버튼을 눌렀다. 입구 엘리베이터에서 눌렸던 것과는 반대 순서다.
B1부터. 4. 3. 6. 6. 2. 1. 5. 6. 6. 6.
“…….”
여긴 방주의 연구소다.
방주의 연구소여야만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젊은 아저씨가 어린 우희재를 비롯하여 다른 아이들을 구하는 곳.
바로 그 세계여야만 했다.
세상에는 시간 여행을 다룬 작품이 많다. 과거로 갔다가 자신이 사라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부모님의 연애를 돕는 영화나. 과거를 바꾸다가 끝내 태어나기도 전에 자살하는…. 이건 아닌가.
어쨌든 그런 작품들의 주인공들이 취하는 행동은 보통 두 가지다.
과거를 지켜 미래를 보존하거나.
과거를 바꿔 미래를 꿈꾸거나.
그러나 또 다른 고전 영화에서는 지금 상황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말해 준다.
평행 세계.
이곳이 내 과거가 아니라면?
또 다른 세계라면?
마력 시계에 있는 정보를 쓸 수 없는, 내가 아는 모든 미래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라면?
아니.
애초에 명동에서 눈을 떴던 그 순간부터 나는 과거를 바꿨다. 그렇다면 이곳은 열 살 우희재가 겪었던 세계인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세계인 것일까?
…알 수 없다.
아마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곳이 나의 과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가 방주의 연구소여야 한다. 내 시간에서는 그랬으니까.
띵.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벨 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 버튼에 깜빡거리며 불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가 말했다.
[어 서 오 세 요.]저 빌어먹을 목소리가 눈물 나게 반가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