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86)
선택과목(2)
“…….”
아니, 오히려 거짓말이었던 게 낫지 않았을까.
아무리 미친 마법사라 하더라도, 셈 블룸이 날 때부터 그딴 몸으로 태어나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노아 미셀과 방주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돈다. 아, 이래서 한태경을 던전에 끌고 들어갔던 건데. 다른 생각할 필요 없이 공략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겸사겸사 한태경을 구박하며 스트레스도 풀고.
그런 생각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홍석영은 작게 웃었다.
“생각이 너무 많다니까.”
짜증 난다, 진짜.
“생각 좀 안 한다고 해서 안 죽어.”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라. 인간이 몬스터가 되어 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누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냐고.
몬스터. 몬스터다.
인간이 몬스터가 되면 던전 밖에서도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을까? 노아 미셀은 그런 방법을 통해 몬스터의 수명을 늘리려고 했던 걸까.
인간을 몬스터로 만든다고 해서, 몬스터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아닌데.
이십 년 뒤의 노아 미셀 주위에는 셈 블룸이 없었다. 죽었을 수도 있고, 노아 미셀의 추종자 사이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시점에는 완전한 몬스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적당히 하자는 거지, 적당히.”
홍석영은 그게 세상에서 제일 쉽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라고 알려 준 건 아냐.”
“그럼요?”
이건 걱정보다는 고뇌에 가깝다.
아닌가? 고뇌보다는.
“그냥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해 준 거네.”
“…….”
아. 그래.
원망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알았을까, 몰랐을까.
과거로 온 뒤로 종종 느끼곤 했던 감정.
방주에 대해 놓쳤다면 몰랐겠지. 하지만 알고 있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다. 만약 알았더라면 왜 나한테 말해 주지 않았을까. 내가 그렇게 미덥지 않았던 걸까? 유지은은 알았을까?
…알고 있었는데, 나에게 알려 주지 않은 거라면 사실 그 이유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라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다. 기분이 나쁘다.
내가 그동안 아버지에게 너무 어리광만 부리며 살았다는 증거 같아서.
좀 더 어른스럽게 굴었더라면 아버지를 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어허. 얼굴 펴고. 그렇게 인상 쓰면 주름 생겨.”
“그래서 선생님이…?”
“아빠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 아버지 아니라니까요.”
“그래, 그래. 그렇다 치고.”
홍석영은 내 진심 어린 부정을 귓등으로도 듣는 시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겹다는 듯 하품까지 했다. 더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플 거다.
홍석영은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자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하품하는 것을 멈췄다.
홍석영의 얼굴에 읽기 어려운 감정이 스쳤다.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날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너무 짧게 스쳐 가는 바람에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모든 걸 다 책임지려고 하지 말게. 그런 건 아무도 못 해.”
이건 또 뭐라는 거야.
마치 자기는 그런 적 없다는 것처럼.
“…선생님은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
“네.”
“내가 책임감이 넘쳐 보이나?”
“뭐…. 그렇죠?”
홍석영은 내 대답에 잠시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거나 고개를 뒤로 젖히며 껄껄 웃는 대신,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웃는지 우는지 알기 어려운…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홍석영은 웃음도 울음도 아닌, 오히려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소리를 내며 한참을 흐느껴 웃었다.
“나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이렇게 된 건데.”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이 아저씨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아니, 정말이네.”
“그런 것치고는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데요.”
“그러니까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니까.”
“던전 공략도 꾸준히 하시고. 미래에서 왔다는 몬스터도 잡고. 노아 미셀의 최종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겠죠. 그렇게 따지면….”
아버지의 수많은 별명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그런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뭐, 사람들이 부르는 걸 어떻게 막겠는가. 관리청의 존재 자체가 불안정했던 초창기에는 그런 아버지의 별명을 팔아먹으며 버텼다.
수호자 홍석영.
미국에서 붙여 준 별명이 한국에서도 유행했었지.
“미래에는 수호자라고 불렸던 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요. 내부자 증언에 의하면 현재 방주에서 가장 경계하고 있는 사람 아닙니까.”
“수호자? 그런 부담스러운 별명으로 불렸다고?”
홍석영은 드디어 그 듣기 싫은 웃음을 멈췄다.
저 별명을 싫어하는 건 여기서도 마찬가지군. 사람 취향이 쉽게 변하진 않지.
“난 그런 거창한 사람이 아닌데 큰일이군….”
“그럼요?”
“음?”
“그럼 뭡니까?”
“뭐냐니?”
나는 팔짱을 끼고 비스듬하게 서서 홍석영을 보았다.
“던전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를 잡고, 쉴 새 없이 던전을 공략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홍석영에게 목숨 하나는 빚지고 있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인데.”
“…….”
“그런 거창한 사람이 아니면 뭡니까?”
홍석영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은퇴해서 아들들이랑 평온하게 잘 살고 싶은 사람?”
“아들 아니라니까요.”
“그렇다고 치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반박하는 대신, 홍석영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십 년 뒤까지 은퇴 못 하니까 꿈도 꾸지 말고요.”
“늙은 아버지 너무 혹사시키는데….”
“당장 은퇴할 생각도 없으면서.”
“그야.”
홍석영은 머쓱하게 웃었다. 다시 평소의 홍석영이 되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구하겠나.”
“와.”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딴 말을 하면서 자긴 거창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일단 말하는 것부터 고치시죠.”
“아니, 뭐. 나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러나? 미래에서 왔다고 지랄하는 몬스터가 계속 나타나는데 그냥 놔둬? 다 죽여야지.”
“…….”
“걔네가 세계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자명하잖나…. 다른 사람한테도 똑같이 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만 그런다고 치면. 그게, 그러니까.”
“그래요, 잘 알겠습니다.”
“전혀 알겠다는 표정이 아닌데….”
“본인이 말했으니 지키세요.”
“뭘?”
“세상을 구할 때까지 은퇴는 못 하는 겁니다.”
“…그게 왜 그렇게 되지?”
“은퇴하고 싶으면 세상을 구하시든가요.”
“…….”
홍석영은 가만히 나를 보았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결국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그래, 알았어. 이거 아들 무서워서 살겠나.”
“아들 아니라니까요.”
“은퇴하고 아들내미 재롱이나 보며 살기 어렵구먼. 세상에 누가 은퇴 조건이 이렇게 까다롭나?”
“실력만큼 특별 대우 해 주는 겁니다.”
“그거참 고맙군.”
홍석영은 전혀 고맙지 않다는 얼굴로, 정말 고마워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알 게 뭐야.
내가 재롱부릴 나이는 지났지만 우이록이 있지 않은가. 걔가 다 크기 전에 은퇴할 수만 있으면 되겠지.
결국….
져 주게 된다니까.
* * *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홍석영은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직도 남았습니까, 본론이?”
셈 블룸 이야기 하려고 날 부른 거 아니었어? 정작 다른 이야기를 실컷 해 버리긴 했는데.
홍석영도 똑같이 생각했는지 다소 민망해하는 얼굴이었다.
“좀 남았네.”
“좀?”
“원래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길어졌지?”
“다 선생님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죠.”
“나 때문이야?”
“그럼 저 때문입니까?”
“난 자네의 그런 당당함이 좋아. 내가 잘 키운 것 같아서.”
“아, 네….”
“어쨌든.”
홍석영은 목소리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이제 진짜 일 얘기다.
“갬블 박사가 알렉스 호프를 들먹였으니 이것부터 정리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프가 언제 올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쪽도 그 전에 준비해 둬야 하는 게 있다.
“호프가 왔다가 간 뒤에 애들을 부르는 게 낫겠죠?”
“음?”
“호프의 얼굴을 본 애들이 있잖습니까.”
강태우와 이승연은 알렉스 호프의 얼굴을 보았다.
특히 강태우는 호프가 여동생을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승연이는 둘째 치고, 태우 학생에게는 설명을 해 줘야 하니까.”
홍석영은 턱을 매만졌다.
“그건 호프가 언제 올지 날짜가 정해지면 다시 얘기해 보자고. 호프가 여길 온다면 미셀도 덩달아 주시할 거야. 태우 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혹시 모를 건더기를 줄 필요는 없지.”
“네.”
홍석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난 이렇게 상대에게 휘둘리는 걸 안 좋아해.”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거야 그렇긴 한데.”
홍석영의 눈가에 불만 어린 주름이 졌다.
“셈 블룸의 일도 마찬가지네. 그거 분명 갬블 박사와 알렉스 호프는 알고 있을 거야.”
“몬스터화요? 뭐, 갬블이 어떤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호프는 알고 있었겠죠.”
“그럴 거면 미리 말해 줬으면 편하지 않나? 놈의 시체를 분석하는 데 얼마나 걸린 줄 아나? 알고 있었다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말해 줬으면 검증 안 하고 바로 믿으시려고요?”
“…아니. 검증은 했겠지만 찾아야 하는 게 뭔지 알고 있으니 시간 낭비가 줄어들었겠지. 그럼 우리도 더 빨리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거고.”
“대책이라고 해 봤자 뭐 대단한 게 있다고.”
“…그냥 내 기분상의 문제야! 됐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홍석영의 말꼬리를 하나하나 잡긴 했지만 뭘 말하려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갬블과 호프와의 협력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우리가 마냥 사이좋은 공동 이익체인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이득을 위해 손을 잡았긴 하지만, 저의야 어쨌든 간에 갬블은 우리에게 인질이었다.
반대로 우리 또한 저들에게 인질이 잡혀 있다. 갬블이 숨겨 둔 아이들. 대마법사를 알아서 처리할 수 있다는 호프의 무력도 무시할 순 없다. 홍석영만 멀쩡하다고 해서 괜찮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갬블이 우리에게 있다고 해서 우리도 함부로 대할 순 없다.
그런 상황에 더해서 저쪽은 우리에게 모든 정보를 넘기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정보의 선이 어디일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호프가 오면.”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갬블과 최대한 떨어뜨리세요.”
“역시 그게 좋겠지?”
“살살 꼬여 내면 알아서 줄줄 내뱉지 않겠습니까. 뭘 말하는지 들어 보고 향후 방향을 정하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갬블 박사가 입단속시키진 않았을까?”
“그걸 안 해서 호프가 아이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걸 잊어버린 것 같습니까?”
“그건 그렇군.”
홍석영은 수긍했다.
이런 걱정을 사서 할 사람은 아닌데. 명동 던전이 터졌을 때 죽은 아이들이나,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말해 줘서 그런가. 어쩐지 감성적으로 군다.
…갱년기인가? 헌터도 저 나이에 갱년기를 겪던가? 노화가 느린 걸 고려하면 일흔은 되어야 갱년기 증상을 보이지 않을까 했는데.
“이 이야기 하려고 그렇게 거창하게 군 겁니까?”
“아, 거창하다는 말은 그만하고…. 아니, 진짜 본론이 남아 있네.”
그놈의 본론….
“자네 말이야.”
홍석영은 드물게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런 말 하기가 나도 내키진 않는데…. 인간형 몬스터 잡아 본 적 있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