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90)
일상(3)
‘그러니까 제한을 두면 안 됩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게 애들 발목 잡는 일만큼은 피해야죠.’
‘…오. 그렇게 말하니까 선생님 정말 선생님처럼 보이는데요?’
‘다른 사람들이 선생 구실을 전혀 못 하는 게 아니라요?’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는데…. 아무래도 다들 누구 가르치던 사람이 아니다 보니까요.’
이미선이 어깨를 움츠렸다. 항상 자신감 넘치고 헌터들을 손끝으로 부려 먹던 모습이 아니다.
분명 강태우가 알기로, 우희재는 자신과 같은 연구소 출신이었다. 출신이라는 것만 같을 뿐, 맡은 역할이야 다르긴 하지만…. 이승연의 고모처럼 대단한 사람이 꼼짝도 못 하고 잔소리를 듣고 있을 만큼 우희재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뜻일까.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자 우희재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상대가 성인이기만 해도 이렇게 신경 안 썼을 겁니다. 하지만 누누이 얘기드렸지만.’
이미선이 슬그머니 우희재의 시선을 피했다.
‘어린애들 데려다가 교육 기관 만들 거라면 지금처럼 소꿉놀이 흉내 내는 걸로 만족하지 마세요.’
‘끄응…. 무슨 말인지는 알아요. 저도 이렇게 준비 없이 학교를 만들고 싶진 않았는데, 사정이 좀 있어서.’
‘무슨 사정이요?’
‘나중에 홍 헌터님한테 물어보세요. 말해 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자라면서요? 말해 주겠죠.’
이미선이 몸을 돌렸다.
강태우는 혹시 이미선이 자신을 볼까 싶어 뒷걸음질 쳤다. 두 사람의 얼굴이 벽에 가린다. 그래도 목소리를 듣는 데에는 문제없었다.
‘그럼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할게요. 애들 숨 돌릴 겸 여행 한번 보내 주고, 딴생각 못 하게 공부나 시키면 딱 맞겠네요. 선생님은, 어디 보자. 승현이 과외 선생님 연락처는 오빠한테 있으려나.’
이미선이 중얼거리는 말은 목소리가 작아서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우희재의 말은 어째서인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미선에 비해 딱히 큰 목소리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헌터가 되면 다 그런 묘기를 부릴 수 있는 건지, 아니면 그게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이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애들이잖습니까. 하고 싶은 게 한창 많을 나이요. 하고 싶은 게 있고, 그걸 할 수 있으면 그게 제일 좋죠.’
‘그걸 위해서 애들 공부도 시키고요? 공부를 안 해도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잖아요?’
‘뭐…. 공부가 필수는 아니지만 공부를 잘하면 선택할 수 있는 목록이 늘어나지 않습니까. 각성자라고 꼭 헌터가 되라는 법도 없고. 이 헌터님도 대학 나왔다면서요? 애들이 대학 가고 싶어 할 수도 있고요.’
‘전 원래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려고 했거든요.’
‘저도 원래는 감, 크흠. 원래는 더 많은 걸 배워 보고 싶었거든요.’
우희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나이에는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 애들을 던전만 보고 살게 하는 건 어른으로서의 양심이 좀.’
‘아, 알았다니까요! 저도 알아요! 전 무슨 양심이 없는 줄 알아요?!’
‘있다면 다행이고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재벌가의 일원이 양심이 없다면 많이 걱정됐을 거거든요.’
‘…우리 아빠도 제가 헌터 되는 걸 싫어했어요.’
우희재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위험한 일이잖아요.’
‘…애들이 또 할 만한 거 있을까요?’
이미선이 슬쩍 눈치를 보며 묻자 우희재는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대답했었다.
‘글쎄요. 지금 당장은 공부만으로도 힘들어할 텐데.’
“아, 공부하기 싫다!!”
…선견지명인가. 강태우는 이승연을 보았다. 이미선과 한 핏줄이라고 알 수 있는 건 닮은 외모밖에 없다.
“날씨도 좋은데! 이런 날은 놀러 가야 한다고!”
하긴, 보통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는 하지. 창밖으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보였다. 창문을 열어 놓자 딱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이승연이 노골적으로 투덜거리자 결국 여기저기서 소심하게 동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꿋꿋하게 대답하지 않는 이도 있었다.
강태우는 그런 이들을 유심히 보았다. 어쩌면 우희재의 말처럼 던전 공략에 그다지 뜻을 두지 않고 있을 수도 있다. 마치 자신처럼.
어쩌다 보니 각성까지 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아. 이러면 이승연이 했던 말도 틀린 게 아니다.
‘다음번이 없을 것 같으면 다른 것도 해 보면 되지!’
처음으로 인생에 다음이 생겼다.
그렇다면 이것저것… 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강태우는 혹시라도 손에 쥔 기회가 사라질까 싶어 소심하게 생각했다.
해 보고 싶은 거야 없지는 않았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당장 하고 싶은 것들. 언젠가 해보 고 싶었던 일들. 단순하게 영화관에 가서 막 개봉한 최신 영화를 보는 것부터 서점에서 책 구경하기, 스포츠 경기 관람….
보통 그런 새로운 경험을 하는 데에는 돈이 필요하겠지만 이승연이 있지 않은가. 부럽기만 한 해맑음은 부러워할 만큼 장점이라는 소리다. 이승연은 강태우처럼 이것저것 재지 않고 원하는 만큼 남을 돕고 다녔다. 같이 바다를 보러 간 것도,
‘왜 그렇게 울상을 짓고 있냐? 아, 몰라! 야, 너도 따라와!’
‘자, 잠깐만요!’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라던 이승연 때문이었고.
이승연이 아니더라도 우희재와 홍석영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교장 선생님은 조금 무섭긴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방주에 좋지 못한 감정을 품고 있다고 해도, 피해자에게 화풀이할 성격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오히려 지원해 주면 해 줬지.
실제로 우희재는 용돈이랍시고 일주일에 한 번씩 돈을 쥐여 주었다. 신경 써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야, 강태우. 넌 공부 안 지겨워?”
강태우는 저에게 불쑥 말을 거는 이승연을 물끄러미 보았다. 강태우가 대답하기 전, 한은영이 날카롭게 외쳤다.
“이승연! 공부 잘 하고 있는 애 방해하지 마!”
“쟤 반이라도 닮아 봐.”
“아, 왜 나만 구박해!”
“그럼 욕먹을 짓을 하지 말든지!!”
“아니, 공부 안 지겹냐고 물어본 것뿐인데 왜?!”
여전히 이승연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과는 아직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친하다고 할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익숙해지기는 한 것 같았다.
‘3호.’
그 시절에 비하면 이쪽이 훨씬 마음이 편하지.
아니, 그쪽이랑 여길 비교하면 미안할 정도이다.
강태우는 이승연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내려놓았던 연필을 다시 들었다.
무엇이 되고 싶은가?
누군가 미래에 대해 묻는다면, 강태우는 그에 대답해 줄 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시범고에 입학한 게 마음에 드냐고 물어본다면. 헌터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 괜찮냐고 묻는다면.
글쎄. 우연히 이미선과 우희재의 대화를 훔쳐 들은 이후로 강태우는 며칠 동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았다.
강해지는 건 좋지. 이 험난한 세상, 운 나쁘게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리는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몸을 쓰는 방법이나 몬스터를 잡는 방법, 던전을 공략하는 방법 따위를 알아 두면, 먹고살 걱정도 없을 것이다. 어차피 현대 사회에는 그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닌가? 물론 죽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 보자.
나는 헌터가 되고 싶은 걸까?
‘…….’
그 질문에 대해서, 강태우는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았다.
헌터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가끔 뉴스에 나와 인터뷰하는 헌터들처럼 각성자가 되자마자 사람들을 구해야겠다는 사명감은 한 번도 느낀 적 없다.
그래도. 그래도 만약 자신이 헌터가 된다면…. 글쎄, 말갛게 웃던 여동생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보육원에 들어가려던 자신을 붙잡던 손길도.
역시 헌터가 되고 싶진 않다.
하지만…
…헌터가, 꼭 몬스터를 잡으라는 법은 없잖아.
범죄자들을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고. 뉴스에 한 번씩 나오잖아. 연구소에서 연구원들이 이야기하는 걸 듣기도 했고, 청소부 출신인 우 선생님도 아마.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을 만큼 하고 싶은 일은 딱 하나.
그걸 무사히 해낼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
해내고 난 뒤의 일도 다른 이야기다.
제일 하고 싶은 일을 끝낸 뒤에는.
그때도 지금처럼 지낼 수 있다면….
강태우는 천천히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겨우 한 살 차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들보다 나이가 어린 동생이 공부를 하기 시작하자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대던 분위기가 조금씩 진정되었다.
사각사각.
종이에 연필이 스치는 소리만 들린다.
* * *
쿠당탕.
복도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유혜은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조용히 문제를 풀고 있던 아이들 사이에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번졌다.
삑. 삐빅.
현관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들린다. 곧 잠금이 열리면서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아이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 왔어!”
“조용히 들어오랬지! 복도에서 또 뭐 했어?”
“어? 아니, 가방 떨어뜨렸어.”
“가방을 왜… 아냐, 됐어. 가서 손 씻고 와.”
유혜은은 골치 아픈 얼굴로 벌떡 일어나 동생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잔소리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별일 없었고?”
“없었지.”
“정말?”
“없었다니까.”
유지은은 축축한 손을 털며 거실로 나왔다. 동생이 현관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책가방을 수거한 유지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뭐야! 다들 공부 중이야? 완전 웃겨.”
“무슨 소리야, 유지은. 너도 내년에 해야 하거든?”
“그건 내년 되면 생각해 볼게!”
중학생 여자애 하나가 왔다고 어두침침하던 분위기가 바뀌었다. 유독 유지은의 성격이 밝은 덕분도 있을 것이다.
동생에게 못 참고 잔소리를 퍼부으려던 유혜은도 결국 포기했다.
“교복 안 불편해? 옷 갈아입고 올래? 점심은 먹고 왔지? 배 안 고파?”
“괜찮아, 괜찮아.”
정작 동생은 그런 언니의 관심이 귀찮았던 모양이지만. 유지은은 언니의 말을 흘려들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아침에 다선의 헌터가 와서 채워 준 냉장고는 먹거리로 가득했다.
방 네 개, 화장실 두 개짜리 아파트는 원래 기숙사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이미선이 구한 아파트는 두 채였다. 이 층은 남자아이들이, 두 층 위의 집은 여자아이들이 사용했다. 여행도 재밌었지만 돌아와서 공부만 하고 있는 오빠와 언니들이 내심 웃기다고 생각한 유지은은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달려와 구경하기 바빴다.
학교로 돌아가서 헌터가 되기 위한 수련을 하고 있었더라면 배가 아팠을 텐데, 꼼짝도 못 하고 앉아 있는 꼴을 보라지.
유지은은 키득거리며 웃기 바빴다.
“그럼 지은이 빼고 간식 먹을까?”
“아, 나도!”
“괜찮다며?”
“그거랑 이건 다르지!”
유지은이 왔다는 사실은 오후 공부가 끝났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카페에서 주문할 건데 먹고 싶은 거 말해!”
이승연이 휴대폰을 들고 외쳤다.
강태우 또한 이번에는 연필을 확실하게 내려놓고 문제집을 덮었다.
평화로운 오후가 흘러간다.
나중에, 강태우에게 또다시 ‘다음’이 생긴다면.
그땐…….
글쎄. 그때쯤 되면 조금 더 마음 편히 친해질 수 있겠지.
발견
[선생님. 던전 중에서는 마력 농도가 짙은 곳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장소에서 마법을 사용하면 제 의도와 상관없이 마법의 위력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마력 운용과 관련해서 궁금한 게 생겼는데, 혜은이랑 얘기하다 보니 아무래도 마력 운용에서 차이가 있더라고요. 마법사와 힐러가 다른 거야 당연하지만 또 논문을 보면 둘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말도 있어서요.]보낸 사람의 새침한 얼굴이 떠오르는, 마찬가지로 새침한 메시지다. 단정하기 짝이 없는 문장으로 구성된 질문을 보며 김채민 또한 괜히 자세를 바로 하고서 진지한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두드렸다.
톡. 톡톡톡. 제법 길게 답변을 쳐서 보낸 다음, 김채민은 다른 대화창을 확인했다.
[쌤샘ㅅ맷쌤샘]시작부터 분위기가 다르다.
[아니 그거 머지 왜 저번에 쌤이 말해줫더ㄴ 그거 있자나요] [던전에거는 공명? 공면 맞죠] [에서] [공명] [던전에서는 공명 생긴다고요] [그거 꼭 속성 그게 맞아야 일어나는 거 에여? 아니면 그런거상관없이 걍 되는 거에요???]오타투성이의 메시지가 화면을 채운다.
마법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마법사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정작 얼굴을 맞대고서는 얌전한 척 박서현 흉내를 내며 점잔을 빼는데, 김채민의 눈에는 그것마저 그저 귀엽기만 했다. 이래서 다들 제자를 두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김채민은 이번에도 성의를 다해 답장을 보냈다.
당분간 던전과는 관계없이 일반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을 공부한다길래, 마법 쪽도 손 놓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역시 기우였다. 마법사란 그렇게 쉬이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마법사로 자라 온 박서현이라면.
김채민은 홍석영에게서, 그리고 박서현 본인에게서도 자라 온 환경에 대해 들었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사의 시점으로 본다면 박서현은 마법사치고는 유하게 자랐다.
피도 눈물도 없다고 유명하던 대마법사라고 해도 그래도 손녀는 귀엽긴 했나 보지.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는 냉한 성격이던 박서현도 처음만 어색했지 금방 다른 학생들과 곧잘 어울렸다. 홍석영이 그랬다. 그 아저씨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홍석영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던전 안에서의 일과 던전 외부. 특히 사춘기 여자애에 대한 평가는 이제 반백 살이 넘어가는 아저씨의 말을 믿기 어렵지 않은가?
김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믿을 수 없지.
그래도 지금 박서현을 보면 홍석영의 판단이 아주 잘못되지는 않았을 거다. 그게 아니어도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다 보면 날 선 성격도 둥글둥글 변했을 수도 있다. 하나같이 어디서 이런 애를 데려왔나 싶을 정도로 착한 애들이니까.
‘그렇게 보면, 역시 서현이보다는 진우가 더 마법사 같지 않지?’
결국 마법사도 인간인 이상 자라 온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얼마 전에야 각성한 최진우는… 앞으로도 마법사치고는 매우 수더분할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었다.
어떤 마법사는 무시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또 그런 최진우를 좋아할 것이다. 김채민은 알고 있다. 자신의 경험담이었으니까.
…물론 김채민은 대마법사였으니 누구도 감히 비난할 마음을 품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었지만.
‘불만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라지!’
그럴 용기도 없는 놈들의 말에 휘둘릴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다.
‘진우한테도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가르쳐 줘야지…. 서현이는 대충 협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스승과 제자라는 이유로 열여덟 살 어린애를 내버려 둘 만큼 김채민은 모질지 못하다. 제자로 받을 생각은 없지만, 학교 선생님 정도의 거리감이라면….
김채민은 자신이 다소 특이한 성정의 마법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마법사인 할아버지와 아버지. 마법사이기는커녕 각성조차 하지 않은 할머니와 어머니.
그런 가족들 사이에서 자란 김채민은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달리 좀 더… 그렇다. 쉬운 말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적이었다. 딱히 마법에 미쳐 있는 것도 아니고, 마법사만이 제일 잘났다는 생각도 없었다.
아니, 당연하잖아? 마법사들이라고 꼭 마법사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닌데!
물론, 일반적으로 마법사는 마법사와 결혼하기 때문에 김채민의 가족이 특수한 케이스라고 마법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회자가 되는 것이긴 했다.
끼이익….
김채민은 휴대폰을 쥔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마룻바닥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삐걱거렸다. 영역이 파괴된 뒤, 홧김에 봉인해 버린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었다.
환한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둡다. 마른 넝쿨이 창문은 물론 모든 것을 칭칭 휘감고 있다. 지붕, 벽, 바닥,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가구까지. 단 한 명의 침입자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본래 이 집이 어땠는지 아는 입장에서는 그만큼 속이 쓰린 일도 없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라면 집 안은 항상 밝은 햇빛으로 가득했다. 꽃과 나무들이 사시사철 화려하게 피어 있었고, 그 덕에 싱그러운 풀 냄새는 마음을 쉽게 진정시켜 주었다. 김채민은 여타 다른 모든 마법사가 그렇듯이 자신의 영역을 아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취향대로 꾸민 집이었는데, 영역이고 자시고를 떠나 어떻게 아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제정신이었다면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공간을 절대로 이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 당시의 김채민은 제대로 사고할 수 있는 정신이 아니었고, 그 결과 자신에게서도 차단해 버렸다. 김채민은 부서진 자신의 영역으로 무슨 도둑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금살금 조심스레 들어갔다.
끼익.
김채민은 마룻바닥을 노려보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실내이건만 작은 새싹 하나가 마루 사이의 틈에서 삐죽 튀어나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싱그러운 연두색을 띠고 있는 두 장의 떡잎은 마치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처럼 연신 실룩거렸다.
“…요게 어디서 마력을 주워 먹었지?”
당연하지만 그 새싹은 김채민의 마법이었다.
정확히는 마력의 잔재. 영역이 망가졌을 때 눈에 뵈는 게 없이 마력을 터뜨렸으니 이런 새싹이 싹트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상한 건 이게 아직도 살아 있다는 거지.
마력으로 핀 싹이니 주기적인 마력 공급이 없는 상황이라면 금방 시들었어야 한다.
왜일까.
왜 저게 아직 살아 있지?
김채민은 마지막으로 영역에 있었을 때를 천천히 되짚어 보였다. 대단한 건 없었고… 영역을 부순 놈들을 잡아서 거꾸로 매단 다음….
그때 뭐가 깨지는 소리가 나긴 했다. 아마 이런저런 실험을 한다고 가져다 놨던 재료들일 거다. 아니면 실험을 하고 있었을 플라스크라든지.
그중에 저 새싹이 빨아먹을 만한 마력을 지닌 게 있던가?
김채민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없진 않겠지.
아니, 당연히 있겠지.
다른 곳도 아니고 영역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마법사의 영역이다!
보통 마법사들은 국가의 감시를 받는 기분이라고 안 하긴 하지만, 평범한 준법정신을 가진 할머니와 어머니를 둔 김채민은 마법사 영역 신고도 성실하게 완료했다. 영역을 만들자마자 주민 센터에 가서 서류를 작성하였단 말이다. 하지 않는 마법사들도 존중하지만, 마법사를 이웃으로 둔 사람은 또 무슨 잘못인가?
‘아. 보통 마법사들은 이런 생각도 안 하겠지.’
그래도 신고 절차를 거친 영역은 공공장소가 아닌 마법사의 사유지 내에 있다면 좀 더 확실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침입자들에게 사적 제재를 가해도 정당방위로 인정받기도 쉽고, 세금 감면의 혜택도 있고….
김채민은 자신의 2층짜리 단독 주택을 모두 영역으로 지정했다. 도심지가 아니라 주변에 논밭밖에 없는 인적 드문 시골 마을이어서 승인받는 건 쉬웠다. 반경 1km 이내에 다른 민가도 없었기 때문에, 김채민은 마음 놓고 식물을 키우고, 마법 실험을 했다.
어차피 침입자를 막는 마법도 빽빽하게 시전했으니 다소… 위험한 재료들도 마음 놓고 사용했었다.
“아아아아….”
김채민은 머리를 부여잡고 쭈그리고 앉았다.
“진작 확인했어야 했는데! 안이 얼마나 엉망이려나? 엉망이겠지? 당연히 엉망이겠지!”
어머니가 자신을 향해 아빠를 꼭 닮았다며, 뒷정리하는 꼴을 못 봤다고 잔소리했을 때 더 귀담아들었어야 했다.
엄마가 말한 건 이런 뜻이 아니었나?
하지만 뒷정리하지 않아서 곤란해진 건 지금도 마찬가지니 결국 같은 말이 아닐까.
끼익. 끼이이익.
마룻바닥이 길게 소리를 냈다. 그게 김채민의 귀에는 마치 어린 동물이 상처를 입어 우는 것처럼 들렸다.
김채민은 바닥에 남아 있는 봉인 마법을 마저 해체한 다음 아직도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새싹을 확인했다.
김채민의 손가락이 새싹에 닿자 여린 잎사귀 위로 밝은 빛이 피어올랐다. 잎맥이 푸르게 빛났다.
“으음…. 상태는 나쁘지 않은데.”
김채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새싹에 마력을 더욱 불어넣었다. 마력을 머금은 새싹은 순식간에 덩치를 키워 자라났다.
김채민은 그게 늘 보던 장미로 피어날 줄 알았다. 그야 자신의 마법은 장미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니까.
“…어?”
그러나 김채민의 앞에 나타난 식물은 장미가 아니었다.
“뭐야. 왜 장미가 아냐? 내 장미 어디 갔어?”
장미야 어릴 때부터 항상 보던 것이니 어떻게 생겼는지 훤히 안다. 장미가 아니라면 자주 쓰는 것은 넝쿨. 그것도 아니라면.
김채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쑥쑥 자라나는 새싹은 김채민이 예상한 것 중 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은 생김새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혀 모르는 미지의 식물이라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건 또 왜 여기서 나와?”
김채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갈대처럼 길쭉길쭉한 줄기는 거의 김채민과 눈높이가 비슷했다. 가느다란 줄기를 손가락에 걸고 끌어당기니 안개꽃처럼 작은 꽃송이가 잔뜩 매달린 끝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푸른 꽃가루가 먼지처럼 확 번졌다가 공기 중에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김채민은 한 번 더 꽃을 흔들었다. 푸른 꽃이 김채민의 마력에 반응해서 반딧불이처럼 은은하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이거….”
김채민이 알기로 이 식물은, 이 꽃은 던전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었다. 쓰이는 곳이 많은 식물이니만큼 당연히 던전 밖에서 키우려고 시도한 사람은 많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사용했든 던전 밖으로 나온 꽃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바싹 마른 채 죽었다. 던전 밖에 나온 몬스터들이 삼 개월 이상 살지 못했던 것처럼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삼 개월. 김채민이 알기로 이 꽃이 던전 밖에서 버틴 가장 오랜 기간이었다.
“마력초잖아.”
이런 푸른 꽃을 알아보지 못할 마법사는 없다.
김채민은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한참 동안 꽃을 어루만지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