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92)
가정 방문(2)
10월 30일.
오후 10시 31분.
대다수의 재벌가 별장이 그렇듯, 이미선의 펜션도 인적이 드문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해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띄엄띄엄 민가인지 창고인지, 그도 아니면 폐가인지 하는 것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 만큼 펜션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가로등조차 드물어 해가 진 이후에는 어둡고 황량한 길이다.
그 어둡고 황량한 길을 검은 자동차 한 대가 달리고 있다.
새까만 창문으로는 내부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동차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도로를 달려 근방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거대한 저택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계절에 맞지 않게 피어 있는 장미 담벼락이 길게 이어진 저택이다.
바깥에서 보이는 위용과 달리, 담벼락 안쪽은 엉망이었다. 한때 잘 가꾸어져 있었을 정원엔 성한 잔디가 없었고, 조경수는 처참히 꺾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화단을 장식한 꽃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은 정리를 해 놓았다. 기껏해야 부서진 돌멩이와 굴러다니는 잔가지를 치운 정도였지만.
황폐한 정원을 지나 우뚝 서 있는 건물로 말할 것 같으면, 정원보다도 더 처참한 몰골이다. 한때 주인의 취향대로 현대적인 디자인이었을 외벽은 담벼락과 마찬가지로 기이할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반짝거리는 잎사귀는 누가 보아도 마력을 머금고 있었다. 제정신이 박힌 각성자라면 가까이 가고 싶어 하지 않을 만큼 선명하고 폭력적인 마력이었다.
더군다나 건물 일부는 내부에서 폭발이라도 일어났는지 시커멓게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깨진 유리창이 을씨년스럽게 입을 뻐끔거리고 있다. 건물의 나머지 부분은 화려한 조명으로 반짝거리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 불균형함이 기이한 분위기를 더욱 북돋우고 있었다.
검은색 자동차는 그러지 않아도 엉망인 정원 잔디를 짓밟으며 멈춰 섰다.
조금 뒤, 문이 열리며 운동화를 신은 발이 삐죽 나왔다.
“와우.”
새까만 자동차에서 내린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며 과장된 목소리로 감탄했다.
“산드라가 완전 좋아했겠다. 걘 이런 거 좋아하거든.”
빨갛게 염색한 머리카락이 서늘한 바람에 아무렇게나 휘날렸다. 하얀 얼굴이 그린 듯 예쁜 미소를 짓는다. 웃을 때마다 끝이 갈라지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소녀로 착각할 만한 얼굴이었다.
알렉스 호프는 더욱 즐겁게 웃었다.
“아포칼립스라고 하던가? 신기하더라고. 굳이 종말을 상상한다는 게. 그래서 기억하고 있어.”
호프는 안내를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소꿉친구는 초대받은 집에 방문할 때는 집주인이 안내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렇게 예의를 차릴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
…아닌가? 모르는 사람일수록 더 예의를 차려야 한다고 했던가?
호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드라한테 다시 물어보면 되겠지. 어차피 안에 있을 텐데.
마력을 쫓아가는 것은 쉬웠다. 영역이라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마법사가 제법 성의를 다하여 자기주장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덕분이다. 오히려 영역이었다면 몸을 사렸을 텐데.
호프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공기 중에 떠도는 마력에서는 짙은 장미 향이 났다. 보나마나 자신을 붙잡았던 그 여자 마법사의 짓일 거다. 자신을 묶어 놓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실력이 좋은 마법사였다. 그때도 겨우 빠져나왔었는데 이렇게 칼을 갈고 나오면 앞으로는 도망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노아는 그런 쪽으로는 영 못했었는데.’
앞으로도 가망이 없을 거다. 다른 인간이면 모르겠지만, 노아 미셀의 마법에 대해서라면 호프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걔 마법이 안 귀찮다는 건 아니지만….’
훌쩍.
코가 아릴 정도로 짙어지는 장미 향에 호프는 계속해서 코를 훌쩍였다.
‘그나저나 이거 잘못하면 감각이 마비되겠는데.’
그러면 조금 곤란하던가?
지금 상황에서 대뜸 공격을 받을 것 같진 않지만,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다. 호프는 손등으로 코를 훔쳤다. 인간의 몸은 너무 약하다. 겨우 이 정도 마력 농도에도 피로를 느끼다니.
아마 마법의 주체인 마법사가 자리를 비워서 더 강해졌을 거다. 호프는 시험 삼아 바닥을 툭툭 걷어차 보았다.
스스슥….
뿌리를 내린 넝쿨이 땅속에서 기민하게 움직인다.
‘안 되네.’
호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좀 더 힘을 쓴다면 강행 돌파도 가능하겠다만, 앞으로 자주 얼굴을 볼 사이다. 소꿉친구의 조언에 따라 얌전히 있을 생각이다. 괜히 장난치지 말아야지. 아무리 그래도 자신에게도 그 정도 생각할 머리는 있다.
발밑에 고였던 마력을 풀었다. 바짝 날이 서서 틈을 엿보던 넝쿨도 얌전해졌다. 아직 자신의 주위를 맴돌긴 하지만 공격 의사가 없는 걸 보여 줬으니 금방 얌전해질 거다.
호프는 발바닥으로 흙을 살짝 어루만진 다음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장미 향이 짙어서 그렇지, 다른 마력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력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 걸어가자 공항으로 자신을 데리러 왔던 헌터들이 바싹 따라붙어 왔다.
역시 안내를 하게 놔뒀어야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이미 늦었다. 호프는 지나간 일에는 연연하지 않았다. 과거를 돌아보는 건 선지자만으로도 충분하지.
건물 안은 장미 향이 더 짙었다. 마력을 두를까 잠깐 고민했지만, 말았다. 이곳에는 볼 수 있는 이가 있었다.
“아. 왔군.”
“안녕!”
호프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제 몇 번 얼굴을 봤다고 자신에게 익숙해졌는지, 인간들은 슬쩍 인상을 찌푸릴 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보자마자 공격하거나 하다못해 죽일 듯 노려보진 않으니 괜찮은 성과라고 생각했다. 첫인상이야 안 좋았지만 차츰 이렇게 친해지면 되는 거다.
호프는 소파에 앉아 있는 갬블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소꿉친구는 수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행히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게 나쁜 인간이었다면 처음부터 손을 잡겠다는 생각도 안 했을 거다.
호프는 갬블에게 똑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 다음에야 다른 인간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행기 타고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홍석영이다. 정리하지 않은 머리. 듬성듬성 난 수염 자국. 히죽 웃는 얼굴이 다소 멍청하게 보이지만 방심하면 안 된다.
홍석영은 현재 살아 있는 인간 중에서는 한 손에 꼽힐 만큼 강하다. 산드라의 계획에서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
그게 아니더라도….
‘그건 지금 신경 쓸 일은 아닌가!’
홍석영의 뒤쪽에는 머리를 대충 묶은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서 있다. 인간의 얼굴은 잘 외우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소꿉친구가 하도 요란법석을 떨어서 기억해 뒀다.
이름은…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이능 협회와 관련된 인간이라면 조심하는 게 맞았다. 인간으로 이십여 년을 살다 보면 결국 배우게 되는 게 있기 마련이다.
협회에 밉보이면 귀찮은 일이 생긴다. 그럼 엄마와 아빠가 힘들어한다. 산드라도.
알렉스 호프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동기는 없다.
호프의 시선이 여자에게서 옮겨진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젊은 남성으로.
‘그 연구소에 저런 인간은 없었던 것 같은데.’
연구소를 급히 비우면서 데이터가 흩어진 게 아쉽다. 덕분에 이쪽도 바로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스스로 밝히기를, 연구소 출신이라고 했으니 그렇다고 믿을 뿐이지만. 동생이라는 그 남자애의 얼굴은 알고 있다. 정리해야 할 목록에 있었으니까.
‘어… 아, 그럼 정확히는 거기 출신이 아니겠구나? 나이를 따져 보면… 그렇겠네. 걔네가 방주에 들어오기 전에 했던 거기에서 만들어진 인간이겠구나. 그것도 완전히 실패하기만 한 건 아니네.’
그러고 든 생각은.
‘노아가 몰라서 다행이다.’
확신이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남자를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이렇게 웃으면 좋아해 주었으니 저 인간도 마찬가지겠지, 하는 일차원적인 사고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그 미소를 정면으로 받아야 했던 당사자는?
‘저 새끼가 왜 실실 쪼개는 거지.’
그렇지 않아도 나빴던 우희재의 기분이 더욱 바닥에 처박혔다.
* * *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을 해 봤는데.”
호프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을 바꾸었다.
“산드라가 고민을 했었는데.”
정직… 한가?
본인의 주제를 모르는 것보다야 나은가 싶기도 한데.
갬블을 슬쩍 보자 배시시 웃고만 있었다. 저 여자는 호프의 뚫린 입에 그렇게 당황해 놓고서는 또 말하게 놔두는 건가. 그러니 내가 내민 근로 계약서에도 수정 없이 사인한 거겠지.
“아무래도 그쪽이 우리 편의를 많이 봐주고 있더라고.”
그거야 그렇긴 한데.
호프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늘어놓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것도 갬블이 시킨 거겠지.
“어쨌든 주고받는 게 있는 편이 좋잖아요.”
호프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손을 놓고 있겠다는 건 아닌지 갬블이 끼어들긴 했다.
우리가 양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갬블이 알고 있어서 다행인가. 타인의 인간성을 자처할 만큼 도덕적인 인간은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이… 동맹인지 아닌지 아직도 확신할 수 없는 관계가 한 인간의 양심에 달려 있다니.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말을 해 줄 순 없지만, 그쪽이 알아내는 건 막을 수 없으니까요.”
“자. 이거.”
호프는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접은 종이를 내밀었다. 홍석영이 그 종이를 받았다.
“여기… 확인하면 좋을 곳들? 뭐라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곳이라고 해야 하나?”
홍석영 곁으로 자리를 옮겨 종이에 뭐가 적혀 있는지 보았다. 빈말로라도 잘 썼다고 할 수 없는 자기주장 강한 글씨가 종이 위에 흩뿌려져 있었다.
제일 위에 적혀있는 단어.
Myeongdong.
명동.
눈을 찌푸렸다.
“한국에 있는 던전들만 먼저 추려 봤거든? 몇 개는 닫혔을 수도 있어. 그것까진 실시간으로 확인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건 현지 헌터들이 확인하는 게 더 빠르잖아.”
명동 옆에는 뿔 달린 소 그림이 그려져 있다. 빠르게 종이에 적힌 지명을 확인했다.
어지러운 글씨체 속에서도 발이 잔뜩 달린 지네 그림은 우스울 정도로 쉽게 눈에 들어왔다.
방이동.
“…….”
짜증 나네.
홍석영은 호프가 준 던전 목록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고서는 이미선에게 넘겼다. 이미선 또한 목록을 확인하더니 안색을 굳혔다.
“음, 또 무슨 이야기 해야 하더라?”
“벌써 끝난 건가?”
“아니, 뭐 더 있었는데….”
호프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갬블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던 찰나, 홍석영이 먼저 나섰다.
“그럼 우리도 질문을 해도 되겠나?”
“어?”
“자네에 대한 재미있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거든.”
“나?”
“자네가 방주의 보스라고.”
“어….”
호프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그 이야기를 좀, 자세히 들려줬으면 하는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