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195)
본능(1)
“헨리는….”
한참을 고개를 갸웃거리던 호프가 겨우 문장을 끝마쳤다.
“귀엽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지만.
“세미는 좀, 징글징글 맞고. 그래도 헨리는 귀여워.”
“저, 실례하지만 제 의견은 아니에요.”
“그 부분을 착각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꽤 심각한 분위기였는데? 이상도 하지.
내 잘못인가?
그럴 리가.
“생긴 것도 헨리가 더 귀여워. 동글동글하고 감자같이 생긴 게.”
“동글동글?”
“찌그러진 피망처럼 생겼거든.”
홍석영을 슬쩍 보았다. 가족이라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유하게 대했던 게 잘못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 홍석영의 인정 넘치는 행동 자체가 문제라는 건 아니고. 만약 거기서 호프를 죽였더라면 노아 미셀에 관해서 듣지 못했거나….
이번엔 갬블을 흘깃 보았다.
“그건… 피망 얘기도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닐까.”
알렉스 호프의 주변을 파다 보면 산드라 갬블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을 거다.
인류사의 구원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대단한 천재가 손가락 틈 사이를 빠져나가다 못해 우리를 적대할 가능성을 없애 버렸으니 헛된 짓거리는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 수도 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나쁠 건 없지.
나는 그냥.
그냥…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적으로 모든 정보를 호프에게 의지하고 있는 이 상황이.
“피망이고 자시고 간에, 좀 더 자세히 말해 봐요. 그 인간이 진짜 방주의 보스라는 건가요?”
“아니, 진짜는 노아지.”
“저 헌터님 말은 그게 아니야, 샨샨.”
“엥…. 아. 소문의 주인공이냐는 거지! 나 이제 잘 알아듣지 않나?”
호프가 정보를 주는 거야 좋지. 당장 우리는 방주에 대한 모든 게 부족하니까. 뭐라도 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우리에게 이득이다.
하지만, 호프가 우리에게 확인해 보라며 준 던전 목록만 봐라. 그 목록에 명동과 방이동이 있는 이상 우리는 선택권이 없다. 무조건 그 던전들에 들어가야만 한다.
“헨리와도 일을 몇 개 같이 해 줬는데 그게 소문난 걸 거야. 난 사실 그런 거에 관심 없어서 헨리보고 알아서 하랬는데. 노아가 시켰나?”
“그 여자는 도대체 널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당연히 죽이고 싶겠지?”
“…본인 손으로 죽일 자신이 없으면 시도도 하지 말라고 그래. 가서 또 걔 놀리고 와.”
“그럴까? 근데 걔 지금 내가 여기 와 있는 거 아니까 충분히 짜증 내고 있을걸. 또 찻잔 여럿 깨 먹었을 거야. 깨고 나서 후회하면서 배우질 못한다니까.”
그리고 아메리카에서의 일? 헨리라는 놈이 거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든 노아 미셀과의 연결 고리가 있는 이상 우리는 확인해야만 한다.
알렉스 호프는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정보를 줄줄 읊어 주고 있지만 그게 가져올 결과물을 보아라. 우리는 마치 알렉스 호프의 명령을 듣고 있는 것처럼 놈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
심지어 제일 중요한 정보는 듣지도 못한 채.
노아 미셀이 왜 던전 밖으로 몬스터를 꺼내려고 하는지.
알렉스 호프가 가족들이 살아 있는 동안 미뤄 달라고 한 것이 무엇인지.
코끝에 불에 타는 냄새가 잡힌다. 인류를 멸망시키는 게 목적인 건가? 아니면?
처음 명동에서 눈을 뜬 이후로 진척은 많다. 실마리라곤 전혀 없을 세계 멸망의 주범들에 대해서도 이젠 알고 있지 않은가.
긍정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쨌든… 어느 쪽 발가락이랬죠? 오른쪽이었나?”
이미선이 저런 얼빠진 소리를 내뱉고 있는 게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게도 했다. 호프에게 이미 말려들었다는 이야기 같아서.
“헨리? 헨리는… 산드라, 내가 어느 쪽 발가락이라고 했었어?”
“그게 정말 중요해서 물은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어….”
호프와는 실제로 이야기 나눈 적은 몇 번 없었고, 그나마도 적대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경계를 풀다니. 조카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는 이미선도 이렇게 빈틈이 많은 사람이었나….
“…….”
“아하하.”
호프는 그런 이미선을 보며 소리 높여 웃었다. 청량한 목소리가 답답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즐겁게 느껴졌다.
뭐… 그렇지. 고민해 봤자 나도 모르겠는데 한 번쯤은 되는 대로 흘러가게 놔둬 보는 것도.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그 헨리라는 사람 성이 뭔가요? 국적은? 키? 성별은 남자가 맞고요?”
“흐으응, 성이 뭐더라. 내가 알기로는… 어디였지? 프랑스?”
“독일.”
“아, 맞아! 독일, 독일. 남자가 맞고, 키는 한… 요만큼?”
“확실한가?”
“내가 이렇게 올려 봤으니까 맞을걸?”
이렇게 고민하는 것도 다 쓸모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분위기가 다시 느슨해지고 있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을 놓았을 때 원래대로 돌아가기는커녕 늘어나서 어설프게 축 늘어져 있는 것처럼.
나도 어쩐지 긴장하고 있는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래. 진전은 있다. 이렇게 천천히… 한 발자국씩 나아가다 보면.
“………….”
아니.
아니아니아니.
잠깐만.
지금 내 사고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잖아. 너무 평화롭지 않나? 이게 뭐지?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간다고? 방주에 관힌 이야기인데? 홍석영, 저 아저씨도 그렇다. 처남 얘기한다고 잔뜩 날을 세운 게 바로 직전이다. 호프와 갬블이 시신으로 장난치고 다녔다는 건 아니었다지만… 잠깐. 이것도 이야기가 마무리가 안 됐잖아. 아메리카 방주에서 새어 나가는 돈에 불만을 품고 있다고 말하면서 주제가 넘어갔잖아.
‘던전에서 사람을 죽이고 헌터의 시신을 거래한다’는 최악의 범죄는 아니더라도 갬블이 본인 입으로 고한 일들도 가볍게 넘어갈 내용은 아니다.
그런데, 왜? 아니, 그래. 발가락에 대한 정보도 중요하긴 한데, 중요한데!
“…….”
“희재 군?”
“우 헌터님?”
“잠깐만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초조함에 벌떡 일어났다. 자연히 나에게 시선이 쏠렸다.
당황한 얼굴들이 보인다. 크게 심호흡을 해서 요동치는 생각을 가라앉혔다.
냉정하게. 여긴 집이 아니다. 퇴근하고 난 뒤 친구들과의 모임이 아니다.
업무의 연장. 시간은 12시를 향하고 있다. 야근이다.
낮에 한가하다가 퇴근 시간에 바빠져서, 눈코 뜰 새도 없이 밤새워 일하는 게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 줄 아는가.
그렇게 일해 봤자 언론에서는 하는 일도 없이 세금을 받아 간다며 욕하고, 그에 휩쓸린 사람들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욕을 더 한다.
젠장, 새벽 2시에 긴급 알람이 울려서 소집된 적 있냐고. 일주일 내내 던전에 갇혀 있던 공략팀에게 휴식 시간은 못 줄망정 바로 다음 던전에 들어가 달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있냐고.
모처럼 받았던 휴가가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엉망이 되어 본 적도 없잖아!
“너!”
“우 헌터님?!”
나는 호프의 멱살을 잡았다. 가벼운 몸은 반항도 없이 손쉽게 나에게 딸려 올라왔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응?”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뭐가?”
알렉스 호프는 인간이다.
그러나 알맹이는 본인이 밝혔듯 몬스터다. 정확히는 홍석영이 지긋지긋해하고, 몹시 경계하는 요정종.
아름다운 얼굴과, 높은 지능. 그에 어울리지 않는 잔혹한 성정 때문에 요정이 나오는 던전은 주 출몰 지역인 유럽에서도 악명이 높다.
호프는 던전 밖으로 나왔다. 육체는 인간이지만 본인을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통해 인간이라는 정체성이 생겼다 하더라도 요정으로서의 능력을 쓰지 못한다는 게 아니다. 발을 툭툭 치던 버릇. 발끝으로 그리던 룬. 대마법사의 마법을 피해 달아나던 실력.
…몬스터는 인간에게는 없는 능력이 있다.
호프가 본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내게는 몬스터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지금.”
“그러니까, 지금. 뭐?”
호프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나 그래도 설명 잘 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저번에 산드라한테 많이 혼났단 말야.”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내가 갬블의 입장이었다면 호프에게 입마개라도 씌워서 절대 입을 열지 못하게 했을 거다.
“…….”
이를 악물었다. 호프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려던 걸 가까스로 유지했다.
“방금도.”
“어어? 방금?”
“마법인가?”
“마법?”
“경계심을 낮추거나… 젠장, 그만하라고!”
호프는 반항도 없이 내가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인간도 아닌 인형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아서.
“…….”
순진하게 깜빡거리던 호프의 눈이 가늘어졌다. 평범한 갈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가늘어진다. 불길한 금색을 띠며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
“너 도대체 뭐야?”
“뭐?”
“인간 맞아?”
“무슨.”
“그건 마법 같은 게 아니라… 생존 본능이야.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냐.”
여전히 홍석영과 이미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우릴 보고 있었다.
그게 더 이질적이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처럼. 이십 년 전이라는 과거로 이동한 것보다 지금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생존 본능…. 껍데기는 인간이더라도 속은 아니니까 위화감이 생기잖아? 그걸 완화시켜 주는 거야.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육신에 갇혀 있는데 그 정도 안전장치는 있어야 하잖아.”
호프는 헤실헤실 웃었다. 개미가 피부 위를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날 싫어할수록 효과가 좋아. 저번에는 나에게 호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길 구석이 없었으니 안 통했는데…. 이번에는 정식으로 이야기하는 자리라서 그런가? 나도 놀랬어.”
“…….”
“내성이 생기는 종류라서 자주 써먹을수록 안 먹히지만. 눈치만 채면 기합으로 이겨 낼 수 있어. 봐, 너한테도 안 통하잖아?”
개미가 발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내 몸을 잠식해 간다. 기분 나쁘다. 눈앞에 있는 건 인간인가? 아니면 몬스터? 둘 다? 혹은 아무것도 아닌가?
“이렇게 빨리 알아차리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무슨 속셈으로….”
“아니, 생존 본능이라니까. 넌 숨 쉬는 거 멈출 수 있어? 영원히 숨 쉬지 않아도 괜찮아?”
“…….”
“이건 본능이라서 나도 조절 못 한다니까.”
나와 호프의 대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를 채기 시작했는지, 홍석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아저씨라면 본인의 감정이 어떻게 강제적으로 식었는지 바로 알아차렸겠지.
“네 부모님에게도 그랬나?”
“날 버리지 못하게 꿈에 그리는, 이상적인 자식이 되기는 했지. 이것도 본능이야. 아, 그래도 내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했단 건 아니고! 엄마가 좋아하면 나도 좋으니까!”
“…….”
이미선도 홍석영보다는 늦었지만 알아차리긴 했다. 갬블은….
갬블은 한숨만 푹 내쉬고 있었다. 놀라지 않은 걸 보니 이쪽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거 완전 놀아난 거 아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