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0)
지하 5층(3)
내가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긴 하지만, 이 시기의… 열 살의 나는 좀. 뭐라고 해야 하나.
기분 나쁜 애였다.
아니, 음침하다거나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냥 나는… 눈치가 빨랐다.
납치되어서 온 아이들은 엄마를 찾으며 칭얼댔지만, 보육원 출신들은 아니었다. 물론 나도 아니었다.
그런 애들은 기민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였다. 연구원들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심성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되바라진 아이라 하더라도 창 하나 없는 지하 공간에 던져지면 겁을 먹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거기서 한층 더 나아갔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끊임없이 뭔갈 적어 가는 연구원들은 충분히 기분 나빴다. 가끔 약을 먹길 거부하는 아이들에게 욕설을 내뱉거나 장난감을 뺏으며 윽박질러 댔다. 하지만 그걸 유심히 보고 있노라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놀이 시간에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게 하거나, 반성문을 쓰게는 시켜도 밥을 굶기거나, 잠을 못 자게 하거나, 신체적 체벌을 가하진 않았다.
왜?
아이들이 다치면 안 되나 보지.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때리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나 말고도 그 사실을 눈치챈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그 애들을 모아 놓고… 내가 뭘 했냐면,
선동했다.
선동이라고 말하니까 이상한데, 그 정도로 대단한 짓을 하진 않았다. 새 장난감이나 간식을 요구했을 뿐이다. 나중에는 애들을 못 이겨서 결국 방 안에 TV도 넣어 주고 영화도 보여 줬다.
물론 24시간 감시 중이니 내가 하는 짓인 건 금방 들켰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소중하신 샘플이 그러겠다는데. 간식이나 더 주고 말지.
그래서 소장은 날 엄청나게 싫어했다. 할 수만 있었다면 한 대 쳤을 거다. 다행히 날 치기 전에 아저씨가 소장을 쳤지만.
이 방을 보니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뭘 찾아요?”
내가 방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김채민도 조각난 유리를 밟고 다가왔다.
“아마… 있을 거라서요.”
이곳에 어린 내가 있었다는 증거.
“뭐가요?”
“여기에….”
납치되어서 정서 불안에 휩싸인 아이들 중에는 다소 특이한 애도 몇 명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아빠가 변호사라고 했던 아이다.
이런 일은 증거가 중요하다면서 여자애들이 색칠 놀이 하던 종이를 가져와 일기를 쓰기 시작했었지. 나중에 재판에서 요긴하게 쓰일 거라나 뭐라나.
연구원들도 거기까지 신경 쓰진 않았다. 걔넨 애들이 찡찡대지 않고 건강하고 약 잘 먹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그렇게 쓴 일기는 침대 매트리스 밑에 숨겼다. 솔직히 지금은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고, 당시에는 이상한 애도 다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끔 옆에서 훈수를 두면 재밌긴 했다.
이 내용을 써라. 저 내용을 써라.
내가 증언해 줄 테니까 연구소장이 애들을 때렸다고 써라.
‘아빠가 증인은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럼 때렸다고 써.’
‘우린 안 때리잖아.’
‘가끔 다른 연구원들은 발로 차고 그랬잖아.’
‘으응… 그렇긴 하지만.’
‘연구소장이 자꾸 사람들을 때리고 있어서 무섭다. 그냥 이렇게만 쓰면 되잖아. 그럼 거짓말도 아니고.’
나중에 그 일기가 재판에 실제로 도움이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난 연구소장이 싫어서 조금이라도 골탕을 먹일 수 있다면 좋았다.
이야기가 잠시 샜는데, 어쨌든 대부분 일기는 그 애가 썼지만 가끔 나도 몇 자 보태기는 했다. 이게 중요하다.
‘…연구소장이 짜증을 낸다. 던전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이런 건 왜 적는 거야?’
‘나중에 연구소장이 도망가면 이런 정보가 있어야 잡을 수 있으니까.’
거듭 말하지만 난 진짜 연구소장을 싫어했다….
연구소에 있던 아이들 중 나만큼 연구소에 오래 있었었던 아이는 몇 없다. 그 덕에 나는 다른 애들보다 알고 있는 정보가 많았다.
그러니 작은 우희재가 있었다면, 분명 여기에 적어 놨을 거다. 연구소를 비우던 날, 소장이 무슨 지랄을 했는지.
벽 쪽에 붙어 있는 이층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여기까지 너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조금 망설이는 편이 좋았을까?
아냐. 이미 돌이키긴 늦었다. 뻔뻔하게 밀고 나가자.
매트리스를 뒤졌다. 애들이 숨긴다고 숨겨 봐야 뻔해서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연구원들은 왜 이걸 그냥 놔뒀을까. 그래 봤자 애들이니까 뭘 해도 소용없을 거라 여겼겠지. 멍청이들.
김채민이 슬쩍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애들이 쓴 거예요?”
“애들이 뭘 썼다고?”
못마땅한 눈으로 내부를 훑어보던 홍석영이 뒤늦게 다가왔다.
나는 바닥에 종이를 펼치며 말했다.
“일기 쓰는 아이가 있었거든요.”
“동생?”
“아뇨.”
어디 있지. 어디야. 있을 텐데. 있어야 할 텐데.
…….
“있다.”
“네?”
어린 시절의 내 글씨.
그땐 나름대로 글씨를 잘 쓴다고 자신했는데, 이제 보니 삐뚤빼뚤한 게 엉망이다.
이곳에도 내가 있다.
그럼 됐다.
“뭐가 있다는 거예요? 잠깐, 어, 이거….”
“왜 그러나?”
“홍 헌터님. 여기, 이것 좀 보세요.”
김채민은 일기 한 장을 가리켰다. 뒤늦게 나도 김채민이 가리킨 일기를 보았다.
변호사 아들내미가 쓴 글은 영양가 없는 내용이다. 김채민도 그걸 가리키진 않았다. 김채민이 보라고 한 건 그 아래, 구석에 자그맣게 쓴 글씨. 어린 내가 쓴 글.
홍석영은 눈을 찌푸렸다.
“…연구소장이 TV를 박살 냈다. 컴퓨터는 비싸다고 부수지 못하면서 꼭 여기까지 들어와서 TV를 부순다. 재수 없어. 어린 애들이 겁먹었다. 기껏 안 울게 달래 놨더니. 던전이 실패했단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야?”
던전?
나는 저런 내용을 쓴 적이 없다.
언제지? 며칠 자 일기야?
“명… 동에서 던전이 어떻게 되든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고. TV나 빨리 다시 놔 줬으면 좋겠다.”
종이에 적힌 날짜.
4월 5일.
…내가 과거로 넘어온 날. 명동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날.
“……우 선생.”
홍석영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
“명동 던전이… 실패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나?”
“아뇨, 저도 알고 싶습니다.”
“자넨 모르는 일인가?”
나는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저흰 다른 기관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지 못해서요…. 저는 모릅니다.”
“그래? 이 일기는 누가 쓴 건가?”
“일기 자체는….”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일기 자체는, 납치되었던 아이가 썼던 거긴 합니다.”
“여기, 이 부분은? 다른 아이가 쓴 것 같은데?”
“네….”
고민은 짧았다.
“제가, 뭔가 특이한 일이 생기면 적으라고 시켰습니다.”
“…누구, 아, 동생?”
“그냥, 뭔가 집중할 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홍석영의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
“전 계속 옆에 못 있어 주니까, 지금처럼 헤어지게 되는 상황에서는 저에게 정보를 남기라는 의미도 있었고요.”
“동생이 여간 똑똑한 게 아닌가 봐요.”
“네?”
김채민은 종이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이게 가장 마지막에 쓴 일기 같거든요. 일주일 전이에요.”
변호사 아들내미는 그날 일기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나는 썼다.
[5월 7일] [연구실 이사] [이유는 모름. 소장이 송파구에서 생긴 던전에 대해 말하는 걸 들었음]그리고 급하게 덧붙인 문구가 있었다.
[누가 도망쳤나 봐]* * *
딱. 딱.
“그러니까… 허탕이죠?”
딱.
경박한 소리를 내며 껌을 씹던 여자는 비스듬하게 선 채로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천으로 된 검은 정장만 입고 있는 모습이 좌우에 선 무장한 헌터들과 비교된다.
여자는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곁에 있던 헌터 하나가 자연스럽게 품에서 꺼낸 손수건을 손 위에 올려 주었다. 여자는 손수건에 껌을 뱉고 헌터에게 돌려주었다.
헌터를 자기 집 하인처럼 부려대는 저 꼬라지. 아는 얼굴 때문이 아니더라도 저 시건방진 모습을 보면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은 하나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는데. 대한민국에 헌터를 사병처럼 부리는 사람은 저 여자 하나뿐이다.
이미선.
길드 다선의 마스터이자, 다연 그룹 오너의 막내딸. 이승연의 고모.
젊을 때도 똑같았군.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자중하던 거였다.
“에이, 엄밀히 말하면 허탕은 아니지.”
홍석영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정보는 제대로라고.”
“알맹이가 없잖아요, 알맹이가.”
이미선은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이러면 곤란하죠, 홍 헌터님. 약속과 다르잖아요.”
“여기가 놈들의 연구소가 아니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여길 보라고. 여기가 그냥 폐쇄된 수련원으로 보여? 여긴 진짜배기야. 진짜배기 방주의 연구소.”
그것까지는 이미선도 부정하지 못했다. 이미선이 홍석영과 무슨 거래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물러날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미선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에 남아 있는 게 있었다면 저도 이런 말 안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마스터. 폭탄은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래요? 수고했어요.”
이미선은 발을 가볍게 까딱거렸다. 그러다가 주머니에서 플라스틱 통을 꺼내 손바닥에 톡톡 쳤다. 껌이다.
이미선은 껌을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이 아저씨가 말을 빙글빙글 돌리는 걸 보아하니… 아직 나한테 말 안 한 게 있나 본데. 뭐예요?”
“흠.”
홍석영은 히죽 웃으며 날 보았다. 자연히 이미선의 시선도 내게 향했다.
아니, 난 이승연을 통해서 소개받고 싶었는데. 그쪽이 나에게 좀 더 호의적일 거란 말이다.
이미선은 주위에 서 있는 헌터들에게 손짓했다.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 있으니까 가서 할 일들 해. 다 뒤집어서 건질 만한 게 있는지 확인해.”
“네, 마스터.”
헌터들은 얌전히 물러났다.
“…….”
좀, 뭐라고 해야 할까.
이십 년 뒤에 이미선 나이가 몇이더라? 쉰이 넘었었지? 그때도 길드원들을 제멋대로 휘두른다는 인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막 대하지는 않았다.
나도 관리청에서 헌터들을 많이 봐서 안다. 헌터란 것들은 머리에 든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기가 뭐 대단한 거라도 되는 줄 아는 존재의 준말이다. 본부장 말도 안 듣는 헌터가 매년 댓 명씩 나오는데…. 말 다 했지.
가끔 길드원한테 칼에 찔렸다는 신고도 접수된다. 그게 바로 헌터라는 족속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미선은 이십 년 동안 칼 한 번 안 찔리고 길드 마스터 자리를 유지했지? 하다못해 오현욱도 두 번 찔렸는데?
이미선은 본부장이 항상 상대했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별로 깊게 생각한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 보니… 이미선이야말로 진정 대단한 인재가 아닐까? 태어났을 때부터 재벌가의 막내딸이었고, 스스로도 나쁘지 않은 재능에…. 귀찮은 일들을 모두 떠넘길 수족들도 있고.
“자. 이제 됐어요?”
“예민한 문제가 걸려 있어서 말이지.”
“예민? 얼마나요?”
“글쎄….”
홍석영은 나와 김채민을 보았다.
“분류는 다 끝냈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종이 뭉치를 흔들었다. 김채민도 마찬가지였다.
“진작 다 끝냈죠.”
우리는 한번 골라낸 일기를 홍석영에게 주었다. 어린 내가 쓴 일기가 추가되어 있는 장이다.
이미선은 눈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없었다면서요?”
“연구원들이 남긴 건 없었지.”
“저건 뭔데요?”
“납치되었던 아이가 남긴 거야. 정확히는 여기, 우 선생의 동생.”
“동생?”
홍석영은 문제의 일기를 이미선에게 건네주었다.
명동 던전이 거론된 그거.
이미선은 의아한 얼굴로 일기를 읽었다.
빠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명동 던전? 실패?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