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01)
우주 만물(2)
헨리 레만의 인생은…
평이했다.
태어난 곳은 독일의 작은 도시. 유년기도 독일에서 보냈다. 학교에 들어갈 무렵, 직장을 옮긴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살게 되었다. 헨리 레만의 인생에서 특이히다고 할 만한 사항은 그게 전부다.
그 뒤로는, 글쎄.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구가 눈에 들어 미식축구도 해 보고, 제법 좋은 결과를 내기도 했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아 오래 하진 못했다. 공부도 곧잘 했지만 대학도 비슷한 이유로 자퇴했다. 아르바이트를 해 보기도 하고, 정비소에 취직도 해 보았지만 하나같이 금방 그만두고 말았다.
부모님은 외동아들의 방황에도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해야 한다며 놔두었다. 헨리 레만은 그런 부모님의 방침을 좋아했다. 부모님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아서 서너 달에 한 번씩 안부 전화를 걸었다. 명절이면 집으로 돌아가 얼굴을 내밀기도 했고. 부모님은 양복을 입고 단정한 차림새의 헨리 레만이 방황을 접고 제대로 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여겼는지 더 자세한 걸 묻진 않았다.
어쩌면 그런 평이한 인생이어서 좀 더 자극점이 높은 일을 찾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이거 영화에 나오는 사이코패스들이 하는 얘긴 것 같은데.’
헨리 레만은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를 털어 냈다.
누군가는 영화 속의 살인마와 헨리 레만이라는 남자가 비슷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레만은 본인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영화에 나오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은 주로 자신의 쾌락을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헨리 레만이라는 인간, 혹은 무언가에게는 단순 쾌락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영화에 나오는 범죄 행각들은 보통 제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행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헨리 레만은 인간적인 도리를 지키고 있었다.
…최소한 헨리 레만이라는 무언가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앗, 차가워!”
레만의 머리카락에서 튀긴 물방울에 맞은 이는 화들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헨리 레만은 머리를 털다 말고 고개를 든 채 씩 웃었다.
“안녕, 알렉스.”
이쪽은 무려 계시를 받았잖아. 그런 사이코패스와 같은 취급을 하면 곤란하다고.
빨간 머리 소년이 허공에서 툭 떨어졌다. 얼핏 소녀라고 착각할 만큼 고운 얼굴을 가진 소년은 비틀거리던 것도 잠시, 금방 균형을 잡고 레만을 향해 웃었다.
“안녕, 귀염둥이 발가락.”
생소한 호칭에 레만은 손을 멈췄다.
“발가락?”
“그런 게 있어.”
소년, 알렉스 호프는 손등에 묻은 물방울을 옷에 대충 닦아 냈다.
마른 손등을 코에 가져다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호프는 곧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라. 귀염둥이야, 너 원래 음악 틀어 놓지 않았어?”
호프는 눈을 잔뜩 찌푸리며 레만의 방을 둘러보았다. 낡은 안락의자, 책 더미에 올려진 컵,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종이들.
“여전히 정신 사납게 살고 있구나.”
방을 훑던 호프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시선 끝에는 산산조각 난 오디오가 있다.
“노아가 다녀갔구나?”
“노아가 시끄럽다고 박살 내고 갔지 뭐야.”
호프와 레만이 동시에 말했다.
둘 다 잠깐 말을 멈추고 박살 난 오디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노아라니까. 세미가 죽은 이후로 신경이 날카로워 보이더라고.”
“알렉스, 그건 알렉스가 신경을 긁은 탓이 아니라?”
“그것도 있고.”
호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세미 데리고 욕심부린 건 노아잖아. 아닌가? 세미가 혼자서 난리 친 거였나….”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런가?”
“그래.”
“…….”
호프는 잠시 상념에 빠진 듯 조용해졌다가 깔깔 웃기 시작했다.
“노아가 기분이 나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걔가 싫어하면 나야 좋지.”
“알렉스는 정말 노아 싫어하는구나.”
“난 나보고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애들을 안 좋아하거든.”
“그런 것치고는 길드에서 다른 인간들과 잘 지내는 것 같던데?”
레만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을 지적하자 호프는 도리어 기분이 상한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그렇게 멍청한 줄 알아? 나도 참아야 할 때는 알아.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들과 원만하게 지내려면 그런 흉내쯤은 낼 줄 알아야 한다고.”
“그게 알렉스의 인간이 가르쳐 준 거야? 제법 좋은 걸 가르쳤잖아.”
그리고 노아 미셀이 들었다면 속 터져 할 말이기도 했다.
“그럼 노아한테는 왜? 노아와도 잘 지내라는 말을 들었잖아.”
“걘 내 앞에선 내 말을 듣는 척하는 주제에 뒤에선 나 죽이기 바쁜데 내가 왜 사이좋게 지내야 해?”
호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기억해, 헨리. 요정 앞에서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고 싶으면 겉과 속이 일치해야 한다고. 다르면 눈치챌 가능성이 크니까.”
“음.”
“어쨌든!”
호프는 목소리를 높여 주위를 환기시켰다.
“걔가 뭐래?”
“노아? 별거 없어. 홍석영 옆에 알렉스, 알렉스가 있으면 반드시 죽인 다음에 내가 죽든지 살든지 하라던데.”
호프는 입을 떡 벌렸다.
“아아아, 별거 없다니. 헨리, 너도 인간치고는 이상하다니까.”
아직도 자신을 인간이라고 불러 주는 건 정작 완전한 인간이라곤 할 수 없는 호프밖에 없다.
그 아이러니함이 웃겨서 레만은 호프를 볼 때마다 샐샐 웃음을 흘리곤 했다.
이번에도 레만이 가만히 웃고만 있자 호프는 금방 우는 소리를 멈추고 입술을 비죽거렸다.
“역시 노아는 노아라니까. 우리끼리 싸우지 말랬는데 그걸 듣는 시늉도 안 하고.”
“이르려고?”
“에이. 난 그 안에 들어가기 싫어. 쉽게 들어갈 수도 없다고.”
“알렉스라면 몰래 들어가는 건 쉬울 텐데.”
“지금은 몸을 조금 사려야 할 때라.”
호프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 보았다. 레만은 제법 놀랐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호프의 성격상 살살 자극만 주면 손쉽게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정말 숨겨야만 하는 중요한 이야기라면 아예 입에 담지도 않았을 거다. 그 정도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레만은 호프를 오래 알았다.
호프는 살짝 다급하게 느껴질 만큼 빠르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래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라는 건 분명했다.
레만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호프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뭐, 어찌 되었든 요정님의 기분이 항상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떨어지는 정보는 부수적인 수입 같은 거고.
“그래서 그러겠다고 했어?”
“뭐.”
레만은 어깨를 으쓱였다.
“노력해 본다고 했지. 홍석영이 옆에 있는데 솔직히 어떻게 손을 써? 홍석영은 어떻게 막는다고 해도… 알렉스는 나한테 순순히 죽어 주지도 않을 거잖아.”
“당연하지.”
“그런데 이걸 묻는 걸 보니… 진짜 홍석영과 같이 오려고? 그 인간에게 붙은 거야?”
“붙었다기보다는… 노아가 자꾸 날 귀찮게 하니까. 살짝 혼을 내 주겠다는 거지.”
“노아를 혼내는데 왜 헨리한테 오는 걸까?”
“그러게.”
“…….”
“…….”
레만은 깜빡이지 않는 눈으로 호프를 보았다. 먼저 눈을 피했던 노아 미셀과는 달리 호프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접으며 싱긋 웃기까지 했다.
“헨리, 내가 널 귀엽게 여기기는 하지만… 마냥 널 봐줄 생각은 없거든.”
“아하.”
“우리 산, 내 인간이 그러는데 이쪽에 묘한 소문이 돈다고 하더라고?”
“소문?”
“남미 암시장을 주름잡는 모 조직의 보스의 인상착의 같은 거 말이야.”
“아. 그거.”
“응. 그거.”
호프와 레만은 눈을 마주한 채 방긋방긋 웃었다.
먼저 웃음을 멈춘 쪽은 레만이다. 레만은 생글생글 웃고 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모든 표정을 지운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귀염둥이야. 노아를 엿 먹이려고 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모른 척 넘어가 줬지만…. 그건 나를 가만히 놔뒀기 때문이란다.”
“……”
“날 끼우지 말았어야지. 아니면 티 나지 않게 했어야지. 날 끌어들여서 뭘 하고 싶었니?”
호프는 대답이라도 해 보라는 듯 말꼬리를 한껏 올렸다. 그러나 정작 레만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레만이 입을 열려고 하자 손을 뻗어 레만의 입을 막았다.
자신의 체구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여린 손이다. 손목을 비틀면 부러지지 않을까. 눈앞에 있는 이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랬을 텐데.
레만은 금색으로 빛나는 눈을 마주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선다. 움직이면 죽는다.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쉽게 당할 생각은 없다. 약한 놈이 죽는 건 당연하지만, 반항도 안 하고 포기할 수는 없다. 이쪽도 비장의 한 수 정도는….
“헨리.”
호프의 목소리가 생각을 끊었다. 여전히 다정다감하고, 애교가 스며들어 있으며, 기조 없이 무관심한 목소리였다.
“살고 싶으면 진심으로 덤벼야 해. 난 홍석영을 자극해서 널 죽이자고 할 생각이거든.”
“……그건.”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린다. 레만은 억지로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었다.
“큼, 그건, 명령 위반인.”
“에이. 언제 내가 죽인대? 홍석영이 할 거라니까.”
환하게 웃는 호프의 얼굴을 보니 다른 쪽으로 머리가 뱅글뱅글 돌아간다. 호프의 입에서 나오는 홍석영 이름 석 자가 묘하게 친근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친 요정이라고 해도 자기 정체를 밝혔을 리는 없고….’
홍석영 길드에 취직했다던 인간이 유능한 인재였던 건가. 길드원 지인의 말을 들어줄 만큼.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헨리? 나를 죽일 생각이라면…. 홍석영이 널 죽이기 전에 최대한 열심히 시도해 보렴.”
* * *
“정말.”
호프는 침대에 누워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나도 한몫 보태고 있으니 할 말은 없지만….”
방주의 핵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세 명이 모두 서로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니.
괜찮은가? 정말 괜찮은 건가?
“이러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나….”
뭐, 솔직히 말하면 노아 몰래 뒤에서 참 많은 걸 말아먹긴 했다. 따지고 보면 연구소가 동북아로 옮겨진 것도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이었고, 그 외에도.
어릴 때부터 마법 사회에서 자란 미셀은 자신의 말대로 이루어지는 일에 익숙하다. 호프와 레만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호프야 인간으로서 살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미셀의 뜻과는 공존할 수 없었다. 레만은 미셀의 대의는 그렇다 쳐도 그걸 이루는 방식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여기서 홍석영이 막타를 먹이면….”
노아가 뒤로 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호프는 히죽 웃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방을 나가는 호프를 향해 작은 빛 무리가 길을 비켜 주었다. 오색찬란한 빛은 호프가 지나가자 그 뒤를 느리게 따라갔다.
호프는 방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빛을 쓰다듬었다.
“가엽게도.”
아직 모든 게 완전했던 시절, 호프에게 내려졌던 가르침은 힘이었다. 힘을 가진 이들이 세상을 지배했다.
“하지만 패잔병이 무얼 할 수 있겠다고.”
호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을 나왔다.
방문을 지키고 있는 인간이 호프를 바라본다. 호프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
부디 이 가여운 종족이 생존할 수 있기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