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02)
현실(1)
답답하다.
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받을 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저지르는 일을 수습하는 것이 최대치의 스트레스라고 여기며 살아왔거늘.
관리청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 던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사실 공략팀의 소관이었으니 공략만 짜서 던져 주면 내가 손댈 일은 거의 없었다. 한태경의 라이센스 정지 건은… 수습 과정이 귀찮아서 그렇지, 그 미친놈 탓으로 돌리면 관리청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은 예상보다 적은 편이었다. 한태경의 기행이야 유명했으니까.
간혹 나나 아버지가 나서야 할 정도의 사건이 일어나면…. 대부분 아버지는 내게 일임하는 편이었다. 나는 홍석영의 얼굴과 이름을 팔아먹으며 어떻게든 사건 규모를 축소해 흐지부지되게 했다.
관리청에서 근무하는 이들도 그 구조에 익숙했다. 솔직히 나도 억지를 부린 적은 없다고. 다소 무리한 일을 밀어붙인 적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해결했다. 필요도 없는 해외 출장을 억지로 끼워 넣은 적도 없다고.
그러니까.
“당연히 안 되죠!”
“왜요?!”
“제정신이에요?!! 이 시기에 미국? 절대 안 돼요!!”
내가 미국에 놀러 가자는 것도 아니고!
못마땅한 눈으로 이미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안 돼요.”
“…….”
“무슨…. 그렇게 봐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거든요?!”
이미선은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선 똑같이 나를 노려보았다.
“애도 아니고. 선생님도 다 알잖아요. 안 그래도 민감한 시기라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를 해야.”
“민감한 시기요?”
명동 건으로 인한 던전 문제가 아직도 시끄러운가. 던전 관리 주체가 사설 길드가 아닌 국가로 넘어가면서 며칠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기는 했다. 물론 일주일 넘게 가진 않았다. 그냥 그런 게 있었다,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뭐, 민간인들의 인식이 그렇다는 거지 국가의 인식은 다를 거다. 이미선이 나에게 경고하기도 했었고.
아니, 그렇지만 역시 이건 이야기가 다르지. 내가 어디 없는 일을 지어내기라도 했나, 미국에 관광이라도 하러 가자고 했나.
헨리 레만이라는 놈이 미국에 있다니까 가자는 거잖아.
알렉스 호프는 결국 탈탈 털렸다.
…아직 덜 털었긴 하지만, 최소한 헨리 레만이라는, 노아 미셀의 또 다른 수족에 대한 신상정보만큼은 확실하게 내뱉게 했다.
국적 독일. 미국 영주권 있음. 거처를 자주 옮기기는 하지만 시카고의 작은 아파트를 개인 공간으로 두고 자주 사용하는 중.
처음에 그놈을 잡으러 가자고 한 건 수많은 생각에 시달린 끝에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날,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역시 가야 한다.
아닌가? 여전히 내가 충동적인가?
…아니다. 역시 가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네. 민감한 시기요!”
이미선은 왈칵 짜증을 냈다.
“솔직히 이리저리 벌려 놓은 일이 너무 많아요!”
“그건 이 헌터님 사정이죠.”
“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나겠냐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홍 선생님?”
“그래요! 그 인간이 8할 정도는 돼요!!”
이미선은 꽥 고함을 내질렀다.
이 자리에 홍석영이 있었다면 마침내 이미선이 자제심을 잃고 홍석영의 머리를 쥐어뜯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턱을 매만졌다.
알렉스 호프를 감시할 만한 이가 현재로서는 마땅찮았다. 이미선을 비롯한 다선의 헌터들은 호프를 감당하지 못했고, 나는…. 놈과 싸워서 질 거라고는 생각 안 하지만 작정하고 도망치면 붙잡을 자신도 없다. 갬블이 여기 있는 이상 호프가 그렇게 도망칠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대신 나는 압수한 호프의 휴대폰을 보았다. 호프의 대책은 새로 세워졌다. 산드라 갬블과 단둘이 두지 말 것. 둘이서 이야기할 수단을 제거할 것.
“그리고!!”
“네?”
“그건 뭐예요?!”
“뭐가요.”
“아들! 아들이라고요?”
“아. 그거요.”
홍석영이 처음으로 나에게 아들 타령을 하기 시작했었을 때, 그걸 호프가 들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사실 그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도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뭔데요! 무슨 얘기가 오갔던 거냐고요!!”
헨리 레만보다 이게 더 궁금한 건가?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제 동생을 아들 삼고 싶나 보더라고요.”
“…이록이요?”
“요즘 홍 선생님이 이록이한테 친한 척하는 거 눈치 못 챘습니까?”
“어, 으음.”
이미선이 주춤거렸다.
“어린애가 돌아다니는데 신경 안 쓰는 게 이상하죠.”
“…그건 그렇군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괜히 여기서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쪽이 더 수상하게 보인다. 평정심을 유지하자.
“어쨌든 정말 아들을 삼고 싶은 건지, 가족놀이를 하고 싶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홍 헌터님은 그런 이야기를 장난으로라도 입에 담지 않아요.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얘기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에요.”
“…….”
이미선은 어쩐지 잔뜩 지쳐 보이는 얼굴로 내 말을 가로챘다.
요 근래 과중한 업무로 인하여 피곤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의미로 기운이 빠진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러냐고 묻고 싶은데, 입을 여는 순간 이유를 알아 버렸다.
그래. 홍석영이라면 절대 가볍게 가족, 특히 아들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것이다.
이 주제로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미선의 복잡한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본래의 주제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왜 헨리 레만을 잡으러 가는 미국행이 안 된다고 하는 거냐고.
“홍 헌터님이 움직이면 시선이 너무 몰려서 그럽니까?”
“네?”
“미국 가는 걸 반대하는 거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헌터에게는 그에 걸맞은 유명세가 있다. 홍석영의 일거수일투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널렸다.
“홍 헌터님 때문에 일이 늘었다면서요. 단순히 일이 는다는 이유만으로 안 된다고 하면 곤란합니다.”
“제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알아요?!”
“홍 헌터님이 안 된다면 저라도 갔다 올게요.”
호프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녀석의 말에 의하면 헨리 레만은 노아 미셀보다 한참 약한 고만고만한 인간 수준이라고 했다.
헨리 레만을 지금 당장 처리할 수 있다면 좋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방주가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살펴볼 필요성은 있었다. 갬블이 데려간 아이들도 무사한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고.
사실 이런 비밀스러운 임무를 맡아 본 적은 없지만… 세상 살면서 어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겠나. 지금까지 밝혀진 방주에 대한 정보를 보건대, 가만히 방주가 손안에 굴러 들어오길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얻고 싶은 게 있다면 움직여야지. 그게 정보든 무엇이든 간에.
게다가 협회 사무국 특수활동부라면 이런 공작에 능한 이들이지 않나. 이미선이 설마 나 혼자 가라고 하겠어.
“그건 더 안 돼요.”
그러나 이미선은 더욱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안 된다고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다.
“헨리 레만에 대해서는 저한테 맡겨 주세요. 호프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부터 파악한 다음 처리할게요.”
다시 가슴이 답답해지며 짜증이 울컥 솟았다.
“그러니까….”
“평범한 범죄자가 아니에요. 호프의 말이 사실이라면 남미 암시장과 얽힌 범죄 조직을 운영하는 놈이잖아요. 그런 놈을 아무 생각 없이 건드리면, 건드렸다가 만에 하나 놓치기라도 하면 재앙이에요.”
“…….”
“그리고 저희만 놈을 쫓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미선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놈이 어떤 분야에 손을 대고 있는지 보세요. 헌터의 시신도 시신이지만 마약에 불법 무기에…. 갬블이 얼버무리긴 했지만, 도굴품과 장물도 취급하고 있을 거예요.”
“…….”
“단순히 괴짜 대마법사의 부하가 아니라, 국제 범죄자라고요. 미국 연방수사국이나 국가안보국은 물론이고 남미 국가들도 놈을 쫓고 있어요. 저희 이능 협회는 물론이고, 인터폴에서도 수배를 걸었을걸요?”
“음.”
“수사권이 엄청 복잡하게 얽혀 있을 거라고요.”
“그거, 이 헌터님이 어떻게 안 됩니까? 여긴 홍 헌터님이 계시잖아요.”
대부분의 복잡한 일은 홍석영의 이름을 대면 해결되는 편이었다.
이번이라고 해서 다를까.
“아. 그렇죠. 홍 헌터님이 나서면 절차가 조금 더 간단해지기는 하겠죠.”
“네. 그러니까.”
“하지만 그건 홍 헌터님만이에요. 우 선생님은 안 돼요.”
이미선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저기… 이건 제가 잘못하기도 했는데요.”
“네?”
“사실 잘못이라기보다는… 인도적이었다고 해야 하나. 홍 헌터님도 딱히 그럴 성격도 아니고, 우 선생님의 동기가 워낙 명확해서 다소 눈감아 주고 있었기도 한데.”
이미선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 선생님, 본인이 방주에서 탈출했다는 사실을 너무 잊고 있는 거 아니에요?”
“…….”
“우 선생님의 신분요. 그거 우리 쪽에서 만들어 줬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계시죠?”
“…….”
“해외로 나가게 할 순 없어요. 당연히 허가도 안 떨어질 거고요.”
문득 이곳이 관리청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이미선은 건조하게 웃으며 아버지가 하는 말을 얌전히 따르는 여자가 아니다. 아버지나 내가 한 말의 세부 계획을 세워 보고서를 들고 오는 직원들도 없다.
지금의 나는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 아니라, 반대로 명령을 들어야 하는 처지다.
그래…. 처음부터 홍석영이 대뜸 나에게 시범고 교사가 되라며 근로 계약서를 내밀어서 나도 착각하고 있었다. 처음 수사실에서 이런저런 추궁을 받았을 때만 해도 경계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 근로 계약서가 너무 충격적이라 모든 감정이 다 날아가 버렸다.
“…우 선생님?”
“아뇨. 생각해 보니 이 헌터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미선은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의 말을 정정하진 않았다.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건 이미선이 아니다. 나지.
“제가 마음이 너무 조급했습니다. 방주가….”
“아.”
“방주가, 그. 알잖습니까. 마음이 급해져서요.”
“그럴 수 있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놈이 나타나니까, 그게. 노아 미셀도 노아 미셀이지만, 대마법사는 당장 건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아뇨, 무슨 말인지 알아요. 저도 우 선생님 입장이었으면 조급해졌을 거예요.”
홍석영이 거기서 그 타이밍에 근로 계약서를 들이밀었던 것도 다 계산된 일이었을까?
적당히 내 경계가 풀어져서 실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과거로 온 뒤로 보았던 홍석영이라면 제법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아버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치밀한 인간이었던 모양이니.
“그리고 그게 아니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정말 안 돼요. 안 그래도 시범고 때문에 말이 많아서.”
“시범고요?”
“홍 헌터님이 나라 지원을 받아 개인 길드 만들려고 하는 거 아니냐는….”
아.
어떻게… 하나도 바뀌는 게 없지. 다른 건 이렇게 많이 바뀌었는데, 이런 사소한 일도 덩달아 바뀌면 좋잖아.
이십 년 전에도 아버지가 겪었던 일이 고스란히 내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걸 보면서도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숨 쉬는 것뿐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