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1)
지하 5층(4)
이틀 뒤.
“…….”
“…….”
“…내 얼굴에 뭐 묻었니?”
“아뇨.”
평화롭다.
수련원에서 있었던 일이 거짓말 같다.
사실 거짓말 아닐까? 이 모든 게 내 뇌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꿈일 가능성은 없는 걸까?
“그럼 여기서 뭐 하고 있니?”
“그냥 있는데요.”
아니. 뭐 하고 있냐니까.
똑 떨어지는 단발머리 여자애는 운동장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내 얼굴을 한참을 빤히 바라보던 여자애는 그것도 지겨워졌는지 고개를 숙여 흙바닥을 보았다. 개미가 지나가고 있다.
…뭔데?
“개미 보고 있어?”
“아뇨.”
“…그럼?”
“그냥 있어요.”
뭐냐고, 진짜….
수련원에서도 그랬다. 이미선은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걸진 않았다.
홍석영이 나에 대해 이미선에게 말한 걸까? 방주에 대해서 떠들어 대던 걸 보면 이미선도 이쪽에 어떻게든 관련이 있어 보였다. 방주와 관련된 보고서에서 이미선의 이름은 본 기억이 없는데. 내가 놓쳤나?
설마 신원도 불확실한 놈이 조카를 구했다고 싫어하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이미선은 수련원을 더 털어 보겠다고 했고, 홍석영은 나와 김채민을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지금이다.
평화로운… 갈대밭과 단발머리 여자애.
“…알겠어?”
파라솔에 앉은 김채민이 어린 마법사 두 명을 가르치는 소리.
“마력을 단순한 힘으로 여기면 안 돼. 특히 우리 마법사들에게는. 어떤 의미로는 산소만큼이나 중요해.”
직원 한 명 늘었다고 이 학교 같지도 않은 학교에도 드디어 시간표라는 게 생겼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학교가 문을 연 지 두 달이 넘었는데 그동안 시간표도 없었다는 게?
내가 부모였으면 여기에 애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발머리의 부모는 내가 아니었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불쌍한 단발머리는 이 학교에서 미쳐 가고 있었다.
“이승연은 어쩌고 너 혼자 이러고 있어?”
결국 단발머리한테 다시 말을 붙였다. 평소에는 이승연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애인데, 오늘은 어쩐지 혼자 있다.
할 일도 없고, 마법사들 말고도 다른 아이들과도 슬슬 친해지긴 해야 했다.
날씨가 무더워지면서 아이들의 옷도 바뀌었다. 긴팔이었던 교복과 체육복도 반팔이 되었다. 본래 체육복에는 명찰이 없지만, 단발머리는 체육복 소매에 명찰을 달고 있었다.
순순진.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특이한 이름.
기억에 없는 걸 보니 일찍 죽거나 관둔 아이들 중 하나인 것 같다. 홍석영이 수업할 때 보니 실력이 나쁘지는 않던데….
“작전이라서요.”
말이 좀 짧은 게 문제다.
나는 이승연을 보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홍석영과 뒹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오현욱과 둘이서 싸우고 있다. 그 아저씨는 애들만 두고 어디로 갔대.
“작전?”
“우리 둘이선 오현욱 못 이겨서요.”
순순진은 여전히 개미를 보며 말했다.
오현욱은 보장된 인재이다. 다른 유명한 헌터들이 그렇듯 오현욱 또한 어릴 때부터 그 재능이 두드러졌다. 십 년 뒤에는 돼지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살이 찔 거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마른 체구와 날렵한 움직임….
지금 기준으로는 박서현보다도 오현욱이 시범고에서 더 눈에 띈다.
그에 반해 나머지는?
유혜은은 힐러니까 논외라 치면….
냉정하게 말하면 싹수가 없고, 솔직히 말하면 그냥 고만고만하다.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순순진은 잘 갈고닦으면 분명 빛을 볼 만한 재능이다.
작은 체구를 살려 상대의 사각을 파고드는 솜씨는 아직 거칠다. 하지만 잘 다듬기만 하면 인간형 몬스터를 상대할 때에는 잘 쓸 수 있을 것이다.
명동 던전의 미노타우로스처럼 덩치가 큰 놈들은 상대하는 방법이 어렵진 않다. 일단 아무렇게나 공격을 날려도 먹히니까.
진짜 까다로운 쪽은 인간형 몬스터다. 김채민을 죽였던 세이렌처럼 특수 기믹까지 가지고 있으면 난이도가 미쳐 버린다.
바로 그런 놈을 상대할 때야말로 순순진 같은 헌터가 필요하다.
“저기, 선생님.”
“어?”
“쟤네 좀 그만 보시면 안 될까요….”
“쟤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순진을 보았다. 잠깐 나를 올려다보았던 순순진은 슬그머니 다시 눈을 피했다.
흠.
순순진의 발 옆에는 길이가 짧은 목검이 있다.
흐음.
공터 끝에서 싸우던 이승연과 오현욱이 조금씩 이쪽과 가까워졌다.
그런 거구만.
“누구 생각이야?”
“…승연이가, 한번 이렇게 해 보자고 해서.”
“내가 보기에도 이게 더 잘 먹힐걸.”
“…그래요?”
“타이밍 봐줄까?”
“아뇨.”
순순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제가 해야 의미가 있어요.”
“기특한데.”
수많은 성인 헌터들이 배웠으면 하는 자세다.
곧 순순진이 기다리는 타이밍이 왔다. 순순진도 알았다. 순순진은 슬그머니 손을 움직여 목검을 잡았다.
이걸 보면 얘도 괜찮다니까…. 보는 눈이 있어.
순순진은 슬그머니 나를 보았다.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는 얼굴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 시대 고등학생들은 다 저런 건가.
순순진은 목검을 잡고 앉은 자세에서 그대로 튀어 나갔다. 이승연이 열심히 이쪽으로 밀어 낸 오현욱의 목이 목표물이다.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가벼운 몸놀림. 순식간에 오현욱의 뒤를 잡는 날렵함까지.
하지만 오현욱도 가만히 당하지 않았다.
순순진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이승연을 공격하려던 자세에서 허리를 뒤틀었다.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상체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벌려 중심을 잡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현욱의 머리가 있었던 자리를 순순진의 검이 지나갔고, 허리가 있던 자리에는 이승연의 검이 지나갔다.
“미친, 순순진!”
오현욱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그대로 공중제비를 돌아 거리를 벌렸다.
“방심하면 안 되지.”
순순진은 아깝다는 얼굴로 검을 거두었다.
“반칙이야!”
“반칙이라니?”
이승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 말씀 기억 안 나? 던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야.”
“와. 진짜 어이없네.”
“꼬우면 너도 다른 애랑 붙든지.”
“와….”
오현욱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이승연과 순순진을 노려보았다.
그때.
새까만 SUV 한 대가 시범고 공터로 진입했다.
김채민의 샛노란 스포츠카와 다른 의미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김채민처럼 과격하게 공터로 들어오진 않았지만 SUV는 부드럽게 공터를 한 바퀴 돌아서 방향을 바꾸더니 우리 앞에 섰다.
정확히는 대치 중인 이승연과 오현욱, 순순진 앞에.
운전석에서 처음 보는 남자가 내렸다. 무장을 하고 있다. 아이들을 뒤로 보내며 용건이 뭐냐고 물으려던 찰나, 남자는 몸을 돌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달칵.
머리카락을 하나로 대충 묶고, 수련원에서 봤던 것처럼 까만 정장 차림을 한 여자가 익숙하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렸다. 이번에는 껌을 씹고 있지 않다. 이승연이 먼저 여자를 알아보았다.
“고모!”
“잘하고 있니, 막둥아?”
이승연은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친구들이 있는 데서 막둥이란 호칭은 부끄러울 만하지.
“막둥이를 막둥이라고 안 부르면 어쩌니?”
물론 이미선은 이승연의 말을 들은 척하지도 않았다. 대신 흐뭇한 얼굴로 순순진을 보았다.
“순진이, 너 그새 실력이 더 늘었다?”
“그, 그래요? 연습 많이 했어요….”
순순진은 몸을 배배 꼬며 대답했다.
…뭐 잘못 먹었어? 왜 저래?
“역시 홍 헌터님한테 맡기길 잘했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렴. 어우, 우리 막둥이도 널 반만이라도 닮으면 좋을 텐데.”
“아, 고모!”
“애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더니 조금만 힘들어도 하기 싫다고 포기해서…. 남자애가 됐으면 끈기가 있어야지.”
이미선은 보란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오현욱을 보았다.
“현욱이는 그새 키가 컸네? 막둥이는 아직도 땅에 붙어 다니는데…. 아까 보니까 너도 움직임이 더 좋아졌더라. 어때, 우리 길드에 들어올래? 누나가 잘해 준다니까.”
“누나는 무슨. 아줌마면서.”
“막둥아.”
“…응?”
“네가 그러니까 여자 친구가 없는 거야.”
이승연은 갑작스러운 고모의 공격에 입만 뻐끔거렸다.
“너 초등학교 때 기억 안 나? 그 여자애… 이름이 뭐였지? 연경이였나?”
“우왁! 그만! 고모, 그만요!!”
“네가 고모의 조언만 들었어도 걔한테 차일 일은 없었을 거야….”
“고모!!”
“우리 집안에 연애 못 한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네 아빠랑 엄마도 아주 토 나올 정도로 질리게 연애하다가 결혼한 거 알지? 핏줄 어디 안 간다는데 넌 왜 그 모양인지, 참.”
이승연은 입을 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고모 닮아서 그렇지, 뭐.”
“막둥아.”
“…왜요.”
“고모는 안 하는 거고, 넌 못 하는 거야.”
“못 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하더라.”
“…….”
“…….”
“막둥이 너, 당장 안 와?!”
이미선이 막내 조카를 아꼈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눈 앞에 펼쳐진 두 사람의 모습은 평범한 고모와 조카였다. 너무 평범해서 의아할 정도였다.
이미선이 이승연의 이름으로 벌인 자선 사업만 몇 개인데. 좀 더 애틋한 관계인 줄 알았더니….
아닌가? 사이가 좋아서 오히려 평범해 보이는 건가? 내가 고모가 있어 봤어야 알지.
…그래도 기분 나쁜 풍경은 아니었다. 이미선도 수련원에서의 툴툴대던 모습보다는 훨씬 인간적으로 보였고.
“어, 왔나?”
바깥의 소란을 들었는지 홍석영이 교무실용 컨테이너에서 나오며 알은체를 했다. 김채민도 어느새 슬그머니 근처로 다가왔다. 김채민의 뒤에 금붕어 똥처럼 박서현과 최진우가 붙어 있었다.
홍석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자, 점심시간이다! 승연이 고모가 점심 도시락을 가져왔으니까 다들 인사하고.”
“감사합니다!”
“우 선생과 이 선생은 얘기할 게 있으니 잠깐 들어와.”
* * *
이미선은 교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본론부터 얘기했다.
“송파구에 있는 그 던전은 제가 입찰했어요.”
입찰?
“명동 던전 이후로 던전 관리법이 바뀔 것 같아서 안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죠. 보상받아 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뒤늦게 이미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지금은 길드가 던전을 입찰해서 관리한다. 국가에서 돈 버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이미선의 말대로 명동 던전의 일이 정리되면 이 입찰 방식은 사라진다.
“그래도 다들 눈치 보고 있어서 돈을 많이 쓰진 않았어요. 이번에 열린 던전은 추정 등급도 낮고….”
“제대로 등급이 안 나왔어?”
“하필 전날에 명동 던전이 터졌잖아요. 미뤄진 채로 있더라고요.”
“아직 들어가 본 건 아니지?”
“네.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해 놨어요.”
“그럼 최대한 빨리 들어가는 걸로 하고….”
이미선은 팔짱을 끼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문제는 명동 던전인데.”
모두 조용해졌다.
명동 던전은 홍석영이 미노타우로스를 잡고 손수 닫았다. 김채민도 그 자리에 있었다.
“던전이 실패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우 선생. 정말 짐작 가는 게 없어?”
“없습니다. 저도 알면 진작 말했습니다.”
어제도 마력 시계를 탈탈 털었다. 쓸 만한 정보는 없었다.
하지만 워낙 방대하게 뻗어 있던 조직이다 보니 던전과 관련된 일도 저질렀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음…. 이미 닫은 던전을 어떻게 해 볼 방법은 없고. 송파구 던전부터 보고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여기, 이 송파구 던전은 지네가 기어 나온 그 방이동 던전이다.
혹시… 방주와 엮어서 던전을 일찍 닫아 버릴 방법은 없을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