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16)
온실(2)
김채민에게는 조금 너무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생전 김채민은 대마법사이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마법적, 학문적 업적을 쌓지는 못했다. 조부에 이어 부친, 손녀까지 대마법사를 배출한 전통 있는 마법 가문의 혈통은 김채민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김채민 자체는 뛰어난 마법사였다. 거기에 이견은 없다. 게다가 대마법사치고는 던전 공략도 자주 했고, 명동 던전이 터졌을 때처럼 던전 브레이크 뒤처리에도 종종 참여했다.
마법이 화려하고 예뻤던 것도 있어서 김채민은 제법 인기가 많은 마법사였다고 알고 있다. 가끔 인터넷에 떠도는 ‘그때 그 시절 헌터’ 같은 제목의 글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하지만 그런 명성과 인기에 비해 김채민이 이룬 것은 없었다.
가끔 나이 든 헌터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아쉬운 목소리로 김채민을 찾곤 했다.
‘아, 김채민. 걔가 오래 살았으면 한국 마법계 분위기가 바뀔 수 있었을걸.’
‘학회와 사이도 안 좋았지. 이것저것 하려던 찰나에 어이없이 죽어 가지고. 아쉽게 됐지.’
김채민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는지 자체는 의문이었지만.
아무리 대마법사라고는 해도 고유 마법 하나 잘 쓴다고 다른 마법사들의 인정을 받기는 힘들다. 오히려 나이 든 꼬장꼬장한 마법사들은 반대로 무시하기도 했다.
마법의 마 자도 모르는 놈이 희귀한 마법 하나 쓸 줄 안다고 유세나 떤다고.
노아 미셀이 아무리 어린 나이에 대마법사가 되었다고 해도 그것뿐이었다면 마법 학회의 지지를 얻지 못했을 거다. 미셀이 천재라고 불렸던 건 미셀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업적 때문이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김채민은 무언가를 이루기 전,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해야 한다. 세이렌을 잡던 중 허무하게 죽지 않았더라면 노아 미셀과 비견될 만한 무언가를 해냈을 수도 있다.
그래. 마력초의 재배 방법을 알아냈다거나.
그때도 자신의 영역에 꼭꼭 숨겨 둔 마력초가 있었을 수도 있지. 김채민이 죽은 뒤 그녀의 영역은 유족의 의사에 따라 폭파되었다. 그 안에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는 가족을 포함해서 아무도 알지 못한다.
나는 푸르게 빛나는 꽃과 김채민을 번갈아 보았다.
마력초는 알다시피 던전 안에서만 자라는 꽃이다.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던전 밖으로 나오면 길어 봤자 삼 개월 안에 툭 건들면 바스러질 정도로 바짝 말라 시들어 버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생명력이 강하고 키우기가 어렵지 않다는 거다. 일단 던전 안에서 마력초가 발견되고, 마력초를 씹어 먹는 몬스터만 정리하고 나면 마력초는 잡초처럼 자란다.
그렇다고 모든 던전에서 잘 자라는 건 아니다. 씨앗을 가져다가 다른 던전에 심어 본 적도 있지만 처음 자란 던전이 아니면 싹도 나지 않았다.
그래. 그런 마력초다.
눈앞에 있는 마력초가 던전에서 꺼낸 지 일 개월쯤 된 놈이었다면 김채민이 저렇게 뿌듯한 얼굴로 마력초를 보여 주지 않았겠지.
가만히 김채민을 보았다.
“…….”
김채민이 지금 몇 살이더라?
단순히 편리한 마법 셔, 대마법사에서 평가를 상향 조정해야 할까. 박서현이나 최진우를 가르치는 데에 이만한 사람도 없었지.
그동안 대마법사라는 명성을 너무 무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저기.”
“…….”
아니다. 너무 급하게 결론을 내는 것도 안 좋다.
마법사라고 해서 연구 실적을 속이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자존심 높은 마법사이기 때문에 온갖 사기가 난무한다.
홍석영이 애들 선생으로 데려온 마법사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세상 돌아가는 건 모르는 일이지.
아낌없이 주는 마법사라고 생각했던 노아 미셀을 봐라.
“…뭐라고 말 좀 해 볼래요?”
김채민이 내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나도 생각을 멈추고 물었다.
“진짜입니까?”
“그럼 가짜겠어요?”
김채민은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
나는 다시 작은 온실 안의 마력초를 보았다. 생긴 것도 마력초였고, 주변에 날리고 있는 마력으로 봐도 마력초가 확실했다.
던전 안에서 보던 마력초보다는 키가 작다. 주위에는 싹을 틔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이파리가 있다.
“요 작은 애들은 싹 난 지 얼마 안 됐어요. 일주일 정도.”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본 김채민이 냉큼 설명했다.
“…던전 안에서 자랐습니까?”
“그랬으면 제가 우 선생님한테 보여 줬을까요?”
“혹시 모르잖아요.”
김채민은 얼굴을 구겼다.
방금은 기분 나쁠 만한 질문이긴 했다.
하지만 김채민의 입으로 대답을 꼭 들어야 했다. 김채민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네. 우 선생님이 왜 그런 걸 묻는지 제가 모르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럼?”
“던전 안이 아니라 던전 밖에서 자랐고요, 제가 키웠어요. 증명이 필요하면 싹 틔우는 거 보여 드릴 수 있어요. 일주일은 걸리지만.”
나는 곧바로 말했다.
“보여 주세요.”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요.”
김채민은 어깨를 으쓱이며 작게 웃었다. 다행히 기분 나빠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작은 새싹이 아니라 작은 온실 중앙에서 자라고 있는 마력초를 가리켰다.
“이건… 얼마나?”
하려던 말을 반쯤 잘라먹은 말이었지만 김채민은 잘 알아들었다.
“대충 십 개월 정도요.”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었다.
아니, 사실 무슨 대답이 나오든 내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을 테다.
김채민은… 그래. 유능한 마법사다. 김채민이 싸우는 모습을 내가 제대로 본 적은 없다지만, 그걸 모를 정도로 눈이 없진 않다. 미노타우로스 때 헌터들을 보조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셈 블룸을 잡을 때 썼던 원격 마법? 그걸 어중이떠중이 마법사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심지어 박서현이나 최진우를 가르치는 걸 보기만 해도 알게 된다. 생각보다 자기 마법은 물론, 기초 마법의 이론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마법사는 많지 않거든.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이렇게 저렇게 감으로 대충 하면 된다는 설명을 고수한다. 스승과 제자끼리 칼로 찔렀느니 마느니 하는 일이 많은 것도 다 이것 때문이다.
조부와 부친이 이루었던 업적을 물려받았든 어쨌든 간에, 그게 김채민이란 마법사의 유능함을 가리진 못했다. 본인의 속성에 능숙한 것은 물론이요, 응용 실력도 좋았다.
아마 이르게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았더라면 마법 이론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이론을 발표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런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김채민이 마력초 재배 방법을 알아냈을 수도 있지.
그런 천재가 대한민국 길바닥에 굴러다니다가 어이없이 픽 죽었을 수도 있지! 그렇지 않은가?
“제가 영역 정리한다고 했던 건 들었죠?”
김채민은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금방 신이 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좋게 생각하자. 좋게.
산드라 갬블과 같은 경우라고 생각하는 거지.
최소한 이제 김채민이 세이렌을 잡던 중 뭔 초짜 헌터를 구하다가 죽을 일은 없지 않은가. 과거가 바뀐 덕분에 미래도 바뀌었다.
이제 내가 사는 현실에서는 마력초가 던전 밖에서도 재배될 뿐이다.
“원래는 서현이랑 진우한테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 것 같아서 그거 가지러 간 거였거든요….”
“김 선생님 영역은 방주가 부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아직도 걔네가 왜 거길 부쉈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뭐, 귀한 게 많으니까 그걸 노렸나 싶고요.”
김채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기른 식물들은 이것저것 좋은 게 많아서요. 애완용으로도 좋고, 방범용으로도 좋고. 뭐,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라요.”
…식물을 설명하는 단어로 있어서는 안 될 단어가 들린 것 같은데.
하지만 김채민의 말대로 지금 당장은 중요하지 않았다.
김채민은 흘러내린 머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꼬며 말했다.
“그때 짜증 나서 확 엎어 버렸거든요. 누가 내 영역에서 그 지랄, 큼, 그 난리 친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침입자들을 처리하고 영역을 닫고 난 뒤로는 저도 안 가 봤어요. 그래서 저도 제 영역 오랜만에 가긴 했어요. 옛날 영역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요. 그런데 거기서 발견한 거예요….”
“마력초를?”
“네.”
김채민이 홍석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시범고에 온 것이 봄이었다. 십 개월이라면…. 김채민이 방주를 쫓기 시작한 게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 전에 홍석영의 요청으로 일을 도왔을 수는 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에 마력초를 발견해서 연구하고 있었던 겁니까?”
“네! 그전에 제가 학회 요청으로 마력초 씨앗을 연구하고 있었거든요?”
“학회 요청이요?”
“아무래도 식물에 관해서는 저 이상으로 많이 알고 있는 마법사가 드물어서요.”
김채민은 딱히 자만하는 것도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정할 순 없었다.
“마력초 재배에 대해서 연구해 줄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이거 학회에 말한 건 아니죠?”
“에이, 제가 그러겠어요! 그 늙은이들한테 뺏길 순 없죠!”
김채민은 우스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때도 대충 시늉만 내다가 실패했다고 둘러댈 생각이었어요. 진짜 성공할 생각은 없었거든요?”
“잠깐. 그럼 이거 던전 안에서 가져온 게 아닙니까?”
“아뇨. 아니에요.”
김채민은 온실의 뚜껑을 열었다. 유리 안쪽을 떠다니던 꽃가루 같은 마력이 김채민의 통나무집을 반딧불이처럼 날아다녔다.
“전 마력초 씨앗을 가지고 있었고, 얘가 알아서 큰 거예요.”
“…….”
“그래서 어떤 환경 조건에서 얘가 자랄 수 있었는지 알아냈고요.”
김채민은 나를 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어때요. 인류의 위대한 발견이라고 할 만하죠?”
* * *
“인류의 위대한 발견자, 대마법사 김채민 님.”
“그렇게 그만 불러요!”
“불법 침입자를 그냥 날려 버리는 정도는 불안하니 확실하게 죽이는 방향으로….”
“우 선생님, 그렇게 안 봤는데 살벌한 소리 잘 하네요?”
“이건 바….”
어이없어하는 김채민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음.”
김채민은 아직… 모르지?
원격으로 호프를 붙잡고 있는 등 각종 편리한 마법을 지원해 주었다마는 정작 그때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나도 얘길 안 해 줬고, 홍석영도 해 주지 않았다. 이미선이 말해 줬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들은 적이 없다.
아니, 하지만 전화로 이야기할 만한 내용은 아니잖아. 그동안 얼굴도 안 보인 김채민의 잘못이지.
“나중에 홍 선생님한테 들으세요.”
“…뭔데요?”
“홍 선생님한테 들으라니까요.”
나를 노려보던 김채민은 전략을 바꾸어 어쩐지 불쌍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그에 넘어갈 마음은 없다. 나는 그런 김채민을 보지 못한 척 온실 안의 마력초를 재차 들여다보았다.
대단한 발견이다. 던전 밖에서도 마력초의 재배가 가능하다면 무엇이, 얼마나 바뀔지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떠오르는 것들이 수십 가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포션 만드는 데에도 마력초가 든다. 마력 측정기에도 필요하다.
하지만.
비록 식물이라고는 해도 던전 안에서만 자라던 것이 바깥에서도 버젓이 자라고 있다. 삼 개월이 지나서도.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고 절대, 홍 선생님 허락 없이 다른 곳에서 말하지 마세요.”
노아 미셀이 알면 안 된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