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17)
온실(3)
김채민의 마법은 조용히 시작한다.
원래 식물이 자라는 데에 요란한 소리는 필요하지 않은 법이다.
이제야 동이 트기 시작하는 고요한 새벽. 하늘이 파랗게 밝아질 무렵에야 김채민은 양손을 활짝 펼쳤다.
“이 시간이 마력이 제일 맑아요.”
그간 내가 보았던 마력은 아침이라고 해서 특별히 달라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귀하신 마법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니 과연 그렇군요, 하고 맞장구쳐 주었다. 아니, 실제로 다를 수도 있잖아? 사람 기분이란 건 꽤 중요한 변수이다.
“그렇게 조용히 안 있어도 되는데.”
김채민은 방긋 웃었다.
“왠지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저한테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워서요. 옆에서 누가 꽹과리를 쳐도 잘 해요.”
왠지 경험담처럼 들렸다.
그렇게 말하며 김채민은 손을 움직였다.
그간 김채민이 보여 준 마법과는 다르다. 손안에서 장미를 피워 내던 건 조용해도 눈을 뗄 수 없는 화려함이 있었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치고 있는 마법은 한없이 고요하며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러나 변화는 있었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움직임이었다. 낡은 화분에 자라고 있던 이름 모를 식물의 막 돋아난 작은 잎부터, 채 흙에 덮이지 않았던 잔뿌리까지.
그 별거 아닌 몸짓은 조금씩 커졌다. 내 손보다도 큰 이파리가 부채질하는 것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다가 방향을 돌린다. 김채민을 향해.
마침내 집 안의 모든 식물이 김채민이 무슨 태양이라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 머리를 들었다.
그건 마치 경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겨우 식물의 움직임을 조종하는 마법이라면 김채민이 그토록 뜸을 들이지는 않았을 테다.
아니나 다를까 김채민의 손이 멈췄다. 마법이 본격적으로 발동되었다. 김채민은 마치 금색 안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작 김채민의 마법은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뒤늦게 김채민의 영역, 외딴 통나무집 바닥에 굴러다니는 게 먼지가 아니라 흙임을 깨달았다.
“이건 사실 제 할아버지 마법이에요.”
김채민의 마력이 닿자 흙 알갱이가 사금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고유 마법이라고 해야 하나?”
김채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유 마법? 다른 사람 걸 쓸 수 있는 겁니까?”
“다른 사람이라니! 제 할아버지라니까요?”
높은 확률로 마법의 속성은 유전된다. 고유 마법도 가족이라면 완전히 같진 않더라도 같은 궤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김채민은 속성이 같다. 같은 고유 마법이 아니더라도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만든 마법을 제한 없이 쓸 수 있을 거다. 마법사로서는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이점이기는 했다.
“물론 할아버지 마법을 똑같이 할 수 있는 건 아니고요.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저는 너무 공격적이라서요.”
“할아버지 속을 많이 썩였나 봅니다?”
“할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손녀였거든요?!”
“손녀가 하나뿐이셨던 건 아니고요?”
김채민은 마법을 유지하긴 했지만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런 거 아니라고요! 억울하네.”
김채민은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어쨌든 할아버지와 똑같이는 못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해요. 이러나저러나 대마법사의 마법인걸요.”
김채민은 펼친 두 손을 모았다. 짝. 가벼운 손뼉 소리가 났다.
“들꽃이 너를 위해 춤추는 땅.”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추어 미리 마력을 입혀 놓은 흙 알갱이가 돛이 되었다. 돛 말고는 설명할 말이 없었다. 돛, 혹은… 글쎄. 안테나?
마력이 흙 알갱이를 기점 삼아 들불처럼 커졌다. 일순 숨이 막힐 정도로 마력이 증폭되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부드러운 금빛으로 빛난다. 마치 봄의 햇살을 이 작은 방에 가둔 것처럼. 밝고, 따스하다. 마법을 발동하기 전만 해도 바닥에 깔려 있던 김채민의 마력은 사라졌다. 적어도 내 눈에는 한 점의 마력도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마력을 일으켜 날 선 공간을 만드는 건 쉽다. 홍석영도 남을 협박할 때 자주 쓴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김채민의 마법은 이 공간의 속성 자체를 바꾸었다. 마력을 직접 볼 수 있는 나는 이게 얼마나 대단한 마법인지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이 공간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김채민을 보며 솔직하게 물었다.
“김 선생님 마법보다 더 대단한 거 아닙니까?”
“…우 선생님은 제 마법 본 적 있어요?”
김채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말을 내뱉고 나서야 실수를 깨달았다.
“미안합니다. 김 선생님을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김채민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할아버지 마법이 대단한 건 사실이니까요. 이런 마법 어디서 구경 못 할 거예요.”
“서현 학생 마법과 비슷해 보이는데요.”
“…서현이랑 저 말고는 못 볼 거예요!”
박서현의 그림자 마법도 이 마법처럼 공간을 분리하여 속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박서현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는 잘 붙어 있는지 슬쩍 걱정되었다. 이래저래 바빠서 애들한테는 영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어차피 곧 다시 본다. 그때 확인해도 충분하겠지.
다행히 김채민은 내 사과를 받아 주었다.
“아, 그래도 조금 자존심 상하는데. 딱 기다려요. 다음번엔 제 고유 마법도 제대로 보여 줄게요.”
김채민은 우아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김채민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금빛 새싹이 움텄다가 장미꽃을 피우고 스러졌다. 환영이었다.
김채민은 부서지는 장미를 보며 설명했다.
“할아버지의 마법은 식물을 키우는 데 최적화된 마법이에요. 제 마법과는 상성이 좋아서 요걸 쓰고 마법을 쓰면 위력이 증폭돼요.”
“증폭? 얼마나요?”
“컨디션 좋으면 두 배까지도?”
“그거 사기 아닙니까?!”
“그쵸?”
김채민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어도 진짜 대단한 마법이에요. 할아버지는 주로 던전에서 뭐 키울 때 쓰셨어요. 할아버지가 쓰시면 즉석에서 포션을 만들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전 그 정도는 안 돼요.”
“하지만 흉내는 낼 수 있다고 했잖습니까.”
“네. 그러니까 제가 저걸 키우는 데 성공했죠.”
김채민은 테이블 위의 온실을 가리켰다. 김채민의 마법 속에서 마력초는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정말 식물이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김채민의 마법에 자극받은 것에 불과했지만.
“결국 마력이 문제예요.”
“…마력이요?”
“네.”
김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내부와 바깥의 마력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르거든요. 농도나 마력이 가진 속성 같은 거요. 그걸 얼추 맞출 수 있다면….”
“누구나 마력초를 키울 수 있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였다.
다행히 김채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도 제가 없으면 안 돼요.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말에 안심했다가 다시 불안해졌다. 그 불길한 설명은 뭐야.
“아니,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지.
“준비물이 뭔지 말해 줄까요?”
“김 선생님 말고요?”
“그럼요. 엄청 많아요.”
김채민은 마력초가 있는 온실 바닥을 가리켰다.
“이 코딱지만 한 온실만 해도 몇 억짜리일까요?”
“…얼만데요?”
김채민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열 자리 숫자를 불렀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온실을 보았다.
기껏해야 가로 50cm. 책상에 올라가고도 남는 크기다. 저게 그만한 돈을 먹었다고?
그렇다고 김채민이 없는 소리를 했을 것 같진 않았다.
김채민의 허락을 구해 조심스럽게 온실을 살폈다.
특이 사항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온실 바닥은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철판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실선처럼 가느다란 선이 새겨진 게 보였다.
“바닥에… 룬입니까?”
“네. 앞뒤로 뺵빽하게. 우 선생님이 알려 준 룬도 있고, 할아버지가 만든 룬도 있어요. 집에서 쓰는 게 있거든요. 그걸 조합하느라 애 좀 먹었죠.”
섬세하게 새겨진 룬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워낙 얇게 새겨진 탓도 있었지만, 그 얇은 홈 위로 하얀 가루를 뿌려 다시 메웠기 때문이다. 바닥 위에는 닦아 내지 못한 가루가 남아 있었다.
“온실 바닥은 은으로 만들었어요. 알죠? 두더지 광산에서 나오는 거요.”
두더지 광산이라는 귀여운 별명과는 달리 S급의 악명 높은 던전이다. 내부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금속이 발견되어서 높은 위험도에도 불구하고 들어가는 헌터가 많았다.
두더지 광산의 가장 밑바닥에서 나오는 은광석은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이 있다.
김채민은 온실을 만든 재료를 하나씩 읊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쟁이의 물레 바늘로 룬을 새겼고요. 여기, 이 가루 보여요? 이건 인어 비늘을 빻은 거예요.”
하나같이 기겁할 만한 재료다.
나는 반쯤 질린 얼굴로 온실을 보았다. 김채민이 얼마라고 했더라?
“이걸 만드는 데에 그것밖에 안 들었다고요?”
“사실 훨씬 덜 들었어요.”
김채민은 내 얼굴을 보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제가 모아 둔 재료들이 있었거든요. 실제로 든 돈은 거의 없긴 해요. 온실 유리 보여요? 이건 어쩔 수 없이 샀지만.”
김채민은 손끝으로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건 불어나는 모래로 만들었어요. 이거 구하느라고 고생했어요.”
“…설마 화분도?”
나는 마력초가 심어진 화분을 가리켰다.
“아뇨. 그건 마트에서 사 온 천 원짜리 토분.”
“…….”
“그래도 물은 우르드의 샘물만 줘요.”
그나마 여태 말해 준 재료 중 제일 구하기 쉬운 것이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온실을 보았다.
어마어마한 재료에 잠깐 넋이 나갔지만 차라리 잘되었다. 하나같이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제아무리 노아 미셀이라 하더라도 그걸 대량으로 구하기는 힘들다.
“제가 내내 마법을 사용할 순 없으니까 비슷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온실을 만든 거거든요.”
“온실 밖에서는 못 자라는 거죠?”
“네.”
김채민은 온실 안 화분의 빈자리에 작은 씨앗을 하나 심고 물을 듬뿍 주었다. 저것도 우르드의 샘물이라고 했지.
“이제 일주일 기다리면 싹이 날 거예요!”
“음…. 온실만 있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마법은 왜 쓴 겁니까?”
“씨앗을 활성화하려면 제 마법이 필요하거든요.”
노아 미셀이 이걸 알게 되어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다는 확신이 생겼다. 노아 미셀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자신과 다른 속성의 고유 마법을 흉내 낼 순 없으니까.
잠깐 고민이 되었다.
그런 만큼 괜히 긁어 부스럼이 아닐지 하는.
하지만 결국 확인은 해야만 했다.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제로가 아닌 이상 모든 일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김 선생님.”
세상에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은 없다.
“마력초 말고 다른 것도 키워 봤습니까?”
“아뇨…. 시간이 없어서요. 마력초가 성장하는 걸 확인했으니 다른 것도 하나씩 해 볼 생각이긴 해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해 주시고요.”
“당연하죠.”
“그리고….”
김채민은 내가 거듭 말하는 당부에 자존심 상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어지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의 마법이 식물이 아닌 몬스터에게도 통하는지 알아봐 주시죠.”
헌터 양성 고등학교
2021년 12월 15일.
헌터 양성 고등학교 개교.
“이런 어정쩡한 시기에요?”
모두가 생각은 했지만 차마 아무도 말하지 못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은 건 한태경이었다.
“아니, 그렇잖아요. 보통 이런 건 3월에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꼭 3월이 아니더라도…. 12월은 이제 학기 끝날 때잖아요.”
고등학생 동생을 두고 있는 자다운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동생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고등학생 조카를 두고 있는 이미선은 마른기침만 터뜨렸다.
없는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한태경은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학교가 아니니까 어쩔 수 없나….”
아픈 곳만 찌르는군.
“제대로 된 학교가 아니라니!”
이미선이 발끈했다.
“이제 제대로 학교 인가도 받았다고요! 보세요, 시범이라는 단어를 뺐잖아요.”
“기왕 빼는 거 양성도 빼지 그랬습니까? 사이비 단체처럼 보이는데.”
“헌터 고등학교도 솔직히 좀….”
가만히 있던 김채민도 한마디 보탰다.
“헌터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마법도 넣어야.”
그런 문제였나?
이미선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렇게 투덜거릴 거면 괜찮은 이름 없냐고 물어볼 때 의견을 냈어야죠.”
“냈잖습니까!”
“애들 다니는 학교에 장난치지 마세요!”
“전 체이시 이름으로 장난치지 않습니다.”
한태경은 정색했다.
미친 소리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예상 가능한 영역이었다.
“됐고요.”
이번엔 이미선이 질색했다.
“…우 선생님은 할 말 없죠?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하세요. 앞으로는 안 들을 거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선은 조금 안도한 기색이었다.
내가 가만히 있는 이유는 아직도 헌터 양성 고등학교와 헌터 아카데미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명칭인지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내 눈에는 그게 그거였다. 그나마 아카데미보다는 고등학교라고 불리는 게 교육 기관 느낌이 나지 않나 싶은 마음이었다.
아카데미는 좀…. 그러니까, 사설 학원같이 들리지 않는가. 돈만 받아먹으면 아무에게나 졸업장을 쥐여 줄 것 같다고.
아버지한테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정식으로 인가받긴 했으니까 다들 그렇게 알아요. 시간표는 확인했죠?”
학교 이름에서 시범이 떨어지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시간표였다.
그래. 드디어 이 학교에도 체계라는 것이 생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헌터 아카데미 초창기가 체계라고는 쥐뿔도 없는 시기였다는 사실은 질리도록 들어서 알고 있다. 아버지 옆에서 주워들은 것도 있었고, 당시 헌터 아카데미 재학생이었던 유지은… 누나는 졸업한 뒤에야 나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말하곤 했다.
아니, 그렇게 고생했으면서도 나한테는 헌터 아카데미 안 갔다고 짜증 낸 거야?
‘야, 그거랑 그건 다르지. 네가 거기 입학할 나이가 됐을 때는 좋아졌다고.’
누나의 말이 귓가에 들린다….
헌터 양성 고등학교, 이젠 시범고라고 줄일 수 없는 헌터고를 둘러싼 상황은 옛날보다 훨씬 낫다. 여전히 홍석영이 나랏돈으로 사설 군대를 창설한다니 어쩌니 하는 말은 들렸지만, 아카데미는 명동 이후로 모든 여론이 적대적이었다.
반면 헌터고는… 놀라울 정도로 관심을 받지 않았다. 마냥 호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적의를 받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미선은 나라에서 나오는 모든 지원금을 받지 않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멍청한 국회의원들….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정작 간섭하고 싶을 때 간섭할 핑계가 없을 텐데. 예나 지금이나 먼 미래를 그릴 줄 모르는 인간들이다. 임기가 있어서 그런가. 뭐, 이 시기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헌터를 양성하겠다는 교육 기관이 허황된 꿈으로 들릴 법도 하다.
“오전은 일반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기초 과목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던전 공략에 대해서 가르친다. 몬스터나 던전 구조에 대해서 익히고 실전도 거르지 않는다. 방과 후에도 훈련을 계속할지는 아이들의 자율에 맡긴다고 했지만, 걔들 성격에 빠질 것 같진 않았다. 불행한 교사의 무보수 노동을 기반으로 한 커리큘럼이다.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나는 동생을 데리러 가야 하거든. 우이록을 데려온 뒤로 우이록의 존재에 가장 만족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방학에도 학교는 개방하는 걸로 했어요. 나중에 바꿀 수는 있지만… 원하는 애들은 기숙사에 남아 있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요.”
“집에 갈 애가 있을까요.”
“우리 동생이라면 가고 싶어 할지도?”
이미선 헌터, 이미선 이사장이 말하는 내용은 투박하더라도 아카데미의 교육 과정과 유사했다. 더 다듬어야 하는 내용이 보이긴 하지만 지금은 학생 수도 적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학생 수라고 하니까….
“그런데요.”
“네, 우 선생님.”
“내년 신입생은 어떻게 됩니까?”
회의실에 옹기종기 앉아있던 이들이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반쯤 의자에 누운 채 휴대폰으로 고양이 사진이나 보던 한태경도 정신을 차렸다.
“본인의 의사가 있으니 유지은 학생이 신입생으로 들어오는 건 알겠습니다. 그 외에는요? 현재 학생들은….”
나는 상석에 앉아 있는 홍석영을 보았다. 아닌 척 뻔뻔하게 앉아 있지만 이미선이 말할 때 존 거 다 봤다.
이래서 헌터도 공부를 해야 하는 거다.
성적이 어쩌고, 대학이 저쩌고 하는 고리타분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사람이 제대로 인간답게 보이려면 상식 정도는 머리에 탑재하고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지금 있는 학생들은 홍 선생님이 데리고 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그렇지.”
“태우 학생이야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으니 2학년으로 편입시켰다지만…. 학교가 제대로 유지되려면 학생이 필요하다고요. 공개적으로 광고라도 해서 모집할 겁니까? 아니면 지금처럼 스카우트로?”
홍석영은 볼을 긁적였다.
“나한테 묻는 건가?”
“그럼요?”
“이 헌터도 있고….”
“교장 선생님이 방향을 정해 주시죠.”
“아니, 보통 이런 건 이사장이 권력을 휘두르고 선생들이 깨갱거리면서 따르는 거 아닌가? 드라마에선 다 그렇던데.”
“드라마대로 하면 돈도 안 되는 이런 학교 짓는 데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돈을 쏟아붓진 않았겠죠.”
“…….”
이미선은 홍석영을 보며 방긋 웃었다.
“네. 생각해 두신 방법이라도?”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렇게 웃을 때가 아니라고요. 어렵게 학교 만들었으니 존속은 해야 할 거 아니에요. 길드도 아니고 학교라서 억지로 입학시키지도 못할 텐데….”
그러나 이미선도 아직 홍석영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나는 홍석영이 뭐라고 할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을 듣고 싶은 건 아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웃음기 가득한 홍석영의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어떻게든 되겠지!”
* * *
“와! 선생님!”
“진짜 오랜만이에요….”
“우리 안 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한 번을 안 와요.”
“진짜 너무하다.”
“그동안 우리 빼고 던전 공략하고 다녔다면서요!”
“너희는 첫 번째 던전 공략을 그렇게 망해 놓고선 아직도 던전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어?”
“…….”
“…….”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아이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기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여기에 겁을 먹으면 그 망나니 같은 헌터들을 부려 먹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충격받은 척하고 있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얼굴이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부디 낡고 지친 베테랑 헌터가 되어서도 이 순진함을 유지해 줬으면 좋겠다. 괴팍한 성격의 관리청 에이스나, 얼굴을 가린 음침한 마녀나, 알코올에 절인 돼지 새끼가 되는 대신.
“그러니까 더 들어가야죠.”
침묵을 꿰뚫고 문제의 새끼돼지가 입을 열었다.
출렁거리는 살 대신 깡마른 몸이 보인다. 훈련을 잠시 쉬고 친구들과 부대꼈던 게 인성의 안정에 도움이 되었는지 잔뜩 찌푸리고 다녔던 얼굴이 조금 펴진 게 보였다.
“던전에 안 들어가면 그렇게 훈련한 보람도 없고요.”
마녀 새싹도 한마디 보태 온다.
똘망똘망한 두 눈과 마주쳤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엔 반짝반짝 윤기가 흐른다. 윤이 나는 까만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고,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눈이 마주치자 잠깐 흔들린다 싶더니 다시 똑바로 보아 온다.
“전 억울한데요! 던전에 들어가 본 적 없다고요!”
훗날 골치 아픈 남동생을 얻게 될 미래의 에이스조차도.
손을 번쩍 들어 마구 흔든다. 가만히 있으면 일견 차갑게 보이는 인상이지만 표정 변화가 워낙 커서 그렇게 느낄 새가 없다. 세상 억울한 일을 다 겪은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가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웃는다. 그 얼굴에서 다른 이들을 비웃던 냉소는 한 톨도 찾아 볼 수 없다.
“…너희.”
그 말간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알고 있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 저 애들에게 나는 교장 선생님이 데려온 선생님에 불과하다.
계속 과거… 혹은 내가 알고 있는 그 미래가 바뀌었다고 했으면서도 누구보다도 미래에 연연하고 있는 것은 나였다. 홍석영조차도 아이들을 구하면서 과거가 바뀌었다며 고맙다고 말해 왔는데.
이젠 진짜 지워야 할 때다.
아니, 최소한 눈앞에 있는 이 아이들이 내가 아는 그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할 때다.
나는 픽 웃었다. 사실 외모만 보면 떠올리는 게 힘들다.
“키 컸냐?”
“아! 봐! 역시 선생님은 알아본댔잖아!”
유혜은이 호들갑을 떨며 오현욱의 어깨를 마구 쳤다. 오현욱은 인상을 잔뜩 쓰면서도 유혜은이 미는 대로 내 앞으로 왔다.
확실히 컸다.
“오현욱 엄청 컸어요!”
내가 오현욱을 처음 만났을 때도 키가 컸다. 처음에 오현욱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도 체구 때문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최소한 키는 그때만큼이나 크겠지. 나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미래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이 나이 때의 남자애들은 훅 크기 마련이다. 나도 딱 고등학교 때 많이 컸으니까.
“그렇네. 몇이냐?”
“…175요.”
“많이 크긴 했네. 어색하진 않고? 거리감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
“적응 못 할 정도는 아니에요.”
“적응 못 하면 헌터 실격이지.”
오현욱은 곧잘 내 말에 잘 대답했다. 처음에 내 말을 무시하던 놈을 떠올리면 감개무량하다.
유혜은은 그런 오현욱을 향해 치를 떨며 외쳤다.
“배신이야!”
“네가 작은 걸 나보고 어쩌라고!”
“나 안 작거든?!”
“언니 나보다 작잖아!”
“아직 안 작아!!”
유혜은도 작은 키는 아니지만…. 이야기가 키로 넘어가자 순순진은 티 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기만자들이….”
정작 여기서 제일 키에 연연하지 않는 건 순순진일 테지만.
유혜은이 순순진에게 절절매는 소리와 아이들 웃음소리가 요란하게 운동장을 채웠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애들이 있어야 활기가 넘친다니까. 우중충한 어른들끼리 있어 봤자 일 얘기만 한다.
최소한 이 애들과 있을 때는 방주고 뭐고 재미없는 일을 머리에서 지워 버릴 수 있다. 아버지나 유지은이 바쁜 일정 속에서도 왜 그렇게 자주 아카데미에 나갔는지 이제야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