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21)
진흙 던전(2)
‘이 검을 얻은 던전?’
미간 사이에 잔뜩 주름이 잡힌 여성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왜, 들어가면 너도 뭐 하나 주워 올 것 같냐?’
‘…….’
‘아서라. 내가 나오면서 문을 닫기도 했고, 뭣보다 거긴….’
턱을 톡톡 두드리던 여자는 픽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진짜 개더러워.’
* * *
쏴아아….
한 치 앞을 보기가 힘들 정도로 많은 비였다. 폭우라는 단어로는 이 비를 설명하기 어렵다. 다른 단어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질 정도다.
크게 소용없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하는 마음으로 챙겨 온 우비는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 되었다. 이래 봬도 꽤 비싼 물건이었다. 예티의 가죽으로 만든 우비도 이만한 비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비 때문에 바닥은 이미 진흙투성이다. 걸을 때마다 무릎까지 발이 푹푹 빠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물속을 헤엄쳐서 발목을 물어뜯는 몬스터는 없다는 점이다. 그랬더라면 던전 공략 난이도는 가파르게 상승했을 것이다.
“…! ……!!”
내 목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데 남이 내는 소리라고 다르진 않다. 신경을 곤두세워 봤자 폭포처럼 아래로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린다.
그런 빗줄기 속에서도 어떻게 하늘을 올려 보면 별이 가득한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기이한 광경이다. 맑은 하늘. 비구름조차 없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
홍석영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따라오라는 간단한 수신호를 보내자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오기 전 설명을 해 두긴 했지만 나도 이 던전은 처음 들어와 본다. 부디 누나가 날 놀린다고 생략한 사실이 없기를.
쏴아아… 쏴아아….
“…….”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받으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물에 흠뻑 젖어 달라붙는 옷이 이동을 방해한다.
철벅거리는 물은 무릎 높이에서 더 올라가지 않았다. 이만한 비라면 무릎이 뭔가, 턱 끝까지 물이 차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디론가 물이 빠지는 구멍이 있다거나, 아니면….
던전은 한정된 공간이다. 게이트가 열리지 않는 이상 던전 안의 몬스터는 이곳에 갇혀 있다. 식물이나 아이템 같은 걸 채취해서 던전 밖으로 나가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몬스터로 분류된 생명체가 던전 브레이크 없이 던전을 나갈 수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겉보기엔 식물처럼 보이는 것이라도 인간을 공격하는 몬스터라면 나갈 수 없다.
호프에게서 던전의 정체를 듣지 못한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러한 메커니즘을 일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옛날이라면 갑작스럽게 폭우가 내리는 던전 환경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던전이 외계 생명체를 보호하려는 우주선 비스름한 것임을 안 이상 뻔하다.
던전 안의 환경은 탑승객을 위해 맞춰져 있다. 던전을 떠나면 죽는 몬스터는 나가게 할 수 없지만 일부 부품이 나가는 건 아무 상관 없다. 환경 조성용 식물이 외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죽어 간다고 해도, 탑승객만이라도 안에 계속 있다면 그것으로 용도는 다 한 거 아니겠는가.
이 비도, 물 높이가 무릎 언저리로 맞춰진 채 더 낮아지지도 더 높아지지도 않는 것도 전부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누나에게서 들은 이 던전의 몬스터라면…. 음.
질척거리는 진흙을 헤치고 겨우 동굴 입구를 찾는 데 성공했다.
다행히 지대가 조금 높은 곳에 있어서 오래 걸리진 않았다. 입구도 진흙에 완전히 막혀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폭우에 넘실거리는 빗물이 좁은 동굴 입구로 쏟아지고 있기는 했다.
입구는… 대충 내 허리 높이 정도. 크지 않다.
“…….”
홍석영에게 바로 저기라고 수신호를 보낸 다음, 챙겨 온 형광봉을 꺾어 동굴 안쪽으로 던졌다.
동굴 안쪽은 경사져 있다. 형광봉은 흘러내리는 빗물과 진흙을 타고 아래로 미끄러졌다. 가방에서 형광봉 하나를 더 꺼내 발밑을 비추며 조심스럽게 동굴로 진입했다. 각성자의 튼튼한 몸은 동굴에서 미끄러졌다고 어디가 박살 나진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은가.
입구에서 조금 들어오자 빗소리가 멀어졌다. 홍석영은 머리를 털었다.
“비가 무슨…. 관절에 안 좋은 던전이군.”
“은퇴하세요.”
“…….”
“뭐요.”
홍석영은 고개를 저었다.
저 아저씨 정도 되는 인간이 약한 소리를 하면 그건 기만이다. 받아 주면 안 된다.
“할 것만 하고 얼른 나갑시다.”
“음…. 공략은 정말 안 해도 되나?”
“하면 좋긴 한데, 상태 어떤지 둘러보고 나온댔는데 공략까지 하면 좀. 하루 만에 나온다고 했으니까 시간 엄수해야죠.”
홍석영은 찝찝한 얼굴로 동굴 벽을 살폈다. 긁힌 자국이 있다. 날카로운, 발톱 따위에 긁힌 것 같은 자국.
“내가 들어가서 공략 안 된 던전은 없는데.”
“앞으로 많이 생길 텐데요.”
“…많이?”
당장 몽생미셸도 공략에 실패했다. 아니, 지금 시점에서도 공략하지 않고 그냥 나온 던전도 있을 텐데 왜 자꾸 시답잖게 농담이나 지껄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쪽은 신경이 자꾸 곤두서서….
혀를 찼다.
“그래도 이건 기록에 안 남잖습니까. 들키지만 않으면 됩니다.”
“자네 공무원이었다며? 그래도 되는 건가?”
홍석영은 눈이 빗물이 들어갔는지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물었다.
“들키지 않으면 된다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대단한 비리 공무원처럼 들린다. 그건 아닌데…. 이게 다 복잡한 이유가 있다.
…아니, 이러면 진짜 비리 공무원의 처량한 변명처럼 들리잖아. 진짜 그런 게 아니라고.
관리청에 대해 조금 설명해 줘도 되겠지. 헌터고처럼 이번에는 관리청도 안정된 기반에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발톱 자국을 따라 동굴 안쪽으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관리청은 국가 기관이기는 한데, 설립 과정이 많이… 난잡했습니다.”
홍석영은 슬쩍 내 얼굴을 보고선 그 이유를 짐작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깊게 묻지 않았다.
대부분의 말썽은 명동에서의 일과 연결된다. 홍석영은 그걸 알 만큼 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능관리청인데 선생님 직급이 본부장이었던 것도 그래서고요. 직급을 비롯해 내부도 다소… 엉망이었습니다.”
이건 내가 정리하고 싶어도 정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설립 초반에 정치적인 문제가 같이 얽힌 것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고착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어차피 다른 기관과 독립적으로 굴러가다 보니 크게 문제 되는 일도 없어서 아무도 손보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건 그대로 두되, 내부 직원들의 업무를 구분하는 걸로 정돈했다. 직급은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그동안 공략팀이 직접 공략 지원품 신청서도 쓰고, 제출하고, 인가받고, 결제까지 다 한 걸 보고 기함을 토했다.
헌터들은 높은 자존심만큼이나 약한 소리 하기 좋아하는 귀찮고 모순된 존재들이다.
원래라면 공략이 끝난 뒤 남는 지원품은 모두 반납해야 한다. 제지하는 이가 없으니 지원품은 넉넉하다 못해 넘쳐 났고, 모두 헌터들의 개인 주머니로 꼴깍 들어가 버렸다.
그래. 유지은, 심지어 누나마저도 그랬다. 내가 그걸 알았을 때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는지 아는가? 난 다른 사람들 모두가 그딴 짓을 하더라도 누나만큼은 그런 일에 가담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심지어 아버지마저 알면서 눈감아 주고 있었다.
사정을 아는 지금이야 누나가 왜 그랬는지는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최대한 준비하고 싶었겠지.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포션이 죽은 사람을 살려 내는 기적의 샘물은 아니지만, 죽을 뻔한 목숨을 살려 줄 때는 있었다.
…그러니까 말해 주면 좋았잖아. 그럼 나도 눈치껏 모른 척해 줬을 거라고.
“거기에 더해서 외부적으로도… 일이 많았거든요. 던전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터치할 수 없으니까 관리청에 압박이 많이 들어와서.”
“대충 알 것 같네. 그건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거든.”
“마력 측정기 덕분에 던전 브레이크를 예방할 수 있게 되면서 상황이 더 안 좋아졌습니다. 헌터들에게 제약이 많이 생겼거든요. 게이트가 안전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그 주변에서 진을 치고 진입을 방해하는 민간인들도 제법 생겼고.”
한태경이 그런 놈들과 싸우다가 법정에 자주 갔었다.
이렇게만 말하면 한태경을 옹호하는 것 같지만 그건 아니다. 한태경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도 규모를 키우는 데 재능이 있었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헌터를 홀대할 수도 없잖습니까? 그래서 대놓고 저지르지만 않으면 넘어가 주는 겁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들키지 않으면 된다, 이거죠.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거해서.”
“…그 말을 들으면 사설 군대를 만드는 거 아니냐는 말에 반박을 못 하겠는데.”
“반쯤은 사실이죠.”
“나머지 반은 거짓이라는 말이겠지?”
“나머지 반은 누, 유지은의 사설 군대였거든요.”
홍석영은 마침내 산타클로스의 정체에 대해 깨달은 다섯 살 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조금 달래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래도 범죄는 안 봐줬습니다.”
“그건 당연히 그래야지.”
“그냥 던전 공략에 관해서… 아, 공략 방해하는 짓거리도 안 봐줬고요.”
“퍽 위안이 되는군.”
“적당히 지원품 타 가는 건 저도 모른 척 넘어가 줬다고요.”
헌터란 것들이 적당히, 를 몰라서 문제였지.
홍석영은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진짠데.
내가 얼마나 열심히 관리청을 정리했는데 이럼 억울하다고.
“이번에 관리청을 만든다면 꼭 초반부터 제대로 만들길 바랍니다.”
“음….”
홍석영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었다. 다행히 동굴은 입구만 작았지,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졌다. 경사도 서서히 완만해졌다.
“그러면 아예 자네가 만들지 그런가?”
“제가요?”
나는 무슨 미친 소리를 하고 있냐는 눈으로 홍석영을 보았다.
“내가 관리청을 세웠다곤 하지만…. 난 나를 잘 알아. 학교도 이 헌터 도움으로 겨우 세웠는데. 미래의 내가 그걸 잘 굴렸다면 내 능력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 때문일 거야.”
“…이 헌터님이 많이 도와주셨죠.”
“그거 봐.”
홍석영은 푸스스 웃었다.
“지금은 상황이 훨씬 좋다며? 안정된 상황에서 관리청을 만들 수 있다면 첫 단추부터 잘 끼울 수 있잖아.”
“…잊고 계신 모양인데, 저 지금 범죄자 신세입니다만.”
“싫다는 말은 안 하네?”
어찌 되었든 홍석영과 관련된 이상 관리청에서 일하게 될 내 미래는 아주 손쉽게 그려졌다.
내가 앞장서서 관리청을 책임지고 싶지는 않지만, 홍석영의 말대로 기초부터 탄탄히 다질 기회를 차 버리고 싶진 않다.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다니까.”
“…주제를 그쪽으로 트는 데 재능이 있으시군요.”
“보통 내 나이쯤 되면 얻을 수 있는 잔재주지.”
“말 안 하면 안 될까요?”
“안 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자네가 내 아들이 되면….”
쿠르릉!
그러나 홍석영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똑바로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동굴이 흔들렸다.
오